김부식, <묘청의 난> 토벌대장이 되다
〇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 의외의 과거?
- 일제에게 굽히지 않기 위해 세수마저도 선채로 했다는 단재 신채호 선생, 독립 운동가이자 사학자였던 단재 신채호 선생은 ‘조선역사상일천년래제일대사건’으로 고려 묘청의 난 서경천도 운동을 꼽는데 “묘청 등이 이겼다면 조선사가 독립적·진취적 방면으로 진전했을 것”이라고 말했는데 누군가에 의해 실패로 끝난 <묘청의 난>
- 1135년(인종 13년) 서경에서 난이 일어났는데 주동자는 승려 묘청으로 그는 관리들을 잡아 가두고 군사를 모아 개경으로 진군하려 하였다. <묘청의 난>이 일어난 것으로 난을 진압하기 위해 토벌대가 출병되고 그 선봉에 선 사람은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
- 단재 신채호가 주장하는 것이 의미상으로는 조선역사상 일천년 내에 가장 큰 사건이라는 뜻으로 한국사 단골 시험문제 묘청의 난 & 삼국사기의 저자로 유명한 김부식, 의외로 김부식이 묘청의 난을 제압했다니~!
- 예상을 깨는 김부식의 외모(外貌)
삼국사기의 저자로 창백한 지식인의 느낌이지만 “김부식은 풍만한 얼굴과 석대한 체구에 얼굴이 검고 눈이 튀어나왔다.” <고려도경> 외모만 보면 역사학자라기보다는 무장(武將)의 느낌~ 또한 <고려도경>에는 모습뿐만 아니라 인물평도 같이 실려 있는데 “김부식은··· 널리 배우고 아는 것이 많아 글을 잘 짓고 고금의 일을 잘 알아 학사들이 믿고 따랐다” 고 기록하는데 김부식은 동료들의 신임을 받고 1135년 묘청의 난을 진압하면서 고려정치의 핵심 세력으로 부상
〇 김부식 VS 묘청, 엇갈린 평가
- 묘청에 대한 호감은 단재 신채호 선생의 평가가 결정적!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을 묘청은 자주 VS 김부식은 사대라는 이분법적 모습으로 다루다 보니 생긴 결과로 <조선사연구초>에서 조선역사상 일천년내 제일 대사건이라는 제목으로 ‘묘청의 난’을 평가하고 또한 묘청 VS 김부식을 금나라 정벌 VS 금나라 조공의 주장에서 비롯된 것, <고려사절요>에서는 묘청을 요승으로 기록하는데 실패한 반란의 수괴를 좋게 평가할 리 없어서인지(?)
- 묘청은 어떤 인물?
묘청은 본인이 지은 법명으로 묘청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은데 묘청 서경 승이라고만 기록돼 있어 외모·출생·과거행적은 알 수 없음, 다만 “천문관원 백수한이··· 묘청을 스승이라
불렀다.” & “음양가의 비술(秘術)을 들먹이며 뭇사람을 현혹했는데···” <고려사 열전 묘청> 이를 보면 당시 유행하던 도참·예언 등의 활동을 한 승려로 추측할 뿐, 또한 “정지상 · 김안 등이 말하기를 묘청의 말은 성인(聖人)의 교훈이며 나라를 이롭게 하니···” <고려사 열전 묘청> 그렇다 보니 인종도 묘청에 대해서 알게 되고 관심을 갖게 되는 것
- 정지상은 고려의 대표적 문인으로 그의 시 <송인(送人)>“우헐장제초색다(雨歇長堤草色多, 비개인 긴 언덕에 풀빛 푸른데” “송군남포동비가(送君南浦動悲歌, 남포로 님 보내는 구슬픈 소리” “대동강수하시진(大同江水何時盡, 대동강 물이야 언제 마르리” “별루년년첨록파(別淚年年添綠波, 해마다 이별의 눈물 적시는 것을” 이별의 정한을 읊은 시 중 단연 압권인 <송인> 야사에 따르면 다섯 살 때 물에 떠있는 오리를 보고 시를 쓴 정지상 “어느 누가 흰 붓을 가지고 강물에 을(乙)자를 썼는고” 천재 문인 정지상이 성인(聖人)으로 인정한 묘청(?) 당대의 비범한 인물임에는 확실
- 묘청이 난을 일으킨 이유?
묘청의 난은 왕위를 노리는 일반적인 정변과 달랐다! 묘청이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킨 다음에 임금의 자리를 비워놓고 개경에 있는 왕을 서경으로 모셔 오려한 묘청의 목표 ① 서경 천도 ② 칭제(稱帝) 건원(建元) ③ 금나라 정벌이었으나 이 세 가지를 개경의 보수 세력이 반대를 한다는 판단으로 결국 서경(평양)에서 반란을 일으킨 것, 또한 당시의 분위기는 “개경(개성)은 왕업의 기운이 다했으니 서경으로 천도!”가 대세였던 것
〇 묘청의 난, 왜 일어났나?
- 묘청의 서경천도론의 계기는 1126년 이자겸의 난으로 개경의 궁궐까지 불타버린 상황에서 풍수도참사상이 풍미하던 시절에 수도 개경의 대안으로 서경천도론이 부상한 것!
- 하지만 수도 이전(移轉)은 사회 · 경제 · 정치 등 다방면으로 고려해야 하는 문제로 단순히 풍수지리 요건만으로 수도를 옮긴다는 건 무리 VS 수도를 옮기는데 풍수지리 요건도 중요하다!
- 현대에도 무시할 수 없는 풍수지리, 사회가 혼란할수록 예언들이 난무할 수 있다지만 대신들 조자 풍수를 이유로 서경 천도를 주장하는 건 선동(?)
- 하지만 궁궐이 불타버린 상황에서 앞으로의 문제를 논하는 자리에서 서경천도에 대하여 대부분 찬성하는 자가 많았으나 반대의 편에 섰던 인물이 바로 김부식
〇 고려의 국도 풍수론
- 묘청이 서경천도를 주장한 이유?
서경이란 지역은 풍수에서 제왕(帝王)의 기운이 서려있는 명당 지역이라는 것으로 이는 이때 처음 나온 논리가 아니고 왕건이 자신의 유훈으로 남긴 <훈요십조> 제5조에서 “산천의 신비력에 의해 통일의 대업을 이룩하였다. 서경의 수덕(水德)은 순조로워 지맥(地脈)에 근본이 되니 백일(百日)이 지나도록 머물러 국가의 안녕을 이루도록 하라.” 태조의 유훈을 받들어 대대로 서경을 중요시 했던 것
- 이런 점에서 묘청이 “저희들이 보기에 서경 임원역의 지세는 음양가들이 말하는 대화세(大華勢)에 해당합니다.” & “서경 임원 역에 궁궐을 세워 그곳으로 거처를 옮기신다면 천하를 아우를 수 있어···” <고려사 열전 묘청>
- 풍수는 산과 물의 형세가 가장 중요하게 작용을 하는데 서경(평양)의 지세는 ① 넓고 평탄한 지형 ② 대동강과 보통강이 감싸 흐르는 형상으로 물길이 좋은 득수국(得水局) 형상으로 수덕(水德)이 순조로운 지형으로 인식이고 이에 반(反)해 개경의 풍수적 특징 ① 산세가 오밀조밀한 지형 ② 바람이 가둬지는 장풍국(藏風局) 형상으로 서경과 달리 물길이 순조롭지 못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던 것
- 수덕(水德)을 강조한 이유?
당시에는 왕조가 교체되는 것을 <오행상생설>로 우주만물의 변화가 목화토금수의 오행으로 순환하는 것으로 봤는데 신라는 금덕(金德)→ 따라서 다음 왕조는 수덕(水德)으로 궁예가 “연호를 수덕만세로 정하노라!” 또한 왕건 역시 수덕이 좋은 서경을 주목한 것이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는 것
- 고려시대는 풍수마저 특별해 지금과 다른데 <고려 국도 풍수>는 불교와 풍수지리 사상을 결합해 수도를 선정하는 등 정책운영의 기조로 삶는데 이것은 태조 왕건의 유훈이라는 정치적 상징으로 작용한 것으로 이런 점을 정확하게 이해한다면 고려 사회를 좀 더 다각적으로 보는데 큰 도움이 될 것, 따라서 고려시대의 풍수는 통치이념으로 현대적 관점에서 바라봐서는 안 될 것으로 여러 모로 설득력 있게 느껴지는 서경천도론
- 김부식은 서경천도를 왜 반대했나?
묘청이 “서경 임원에 궁궐을 세워 그곳으로 거처를 옮기신다면 천하를 아우를 수 있어··· 금나라가 스스로 항복해 올 것이며 36국이 모두 신하가 되어 굴복할 것입니다.” <고려사 열전 묘청> 묘청의 주장에 현실성이 없다고 주장하는 김부식에 대하여 다시 반박에 나서는 묘청의 주장 ① 이자겸의 난으로 불타버린 개경의 궁궐 ② 금나라에 사대를 해야 하는 현실로 고구려의 옛 수도 서경으로 천도를 주장, 이에 김부식은 묘청 · 정지상 · 백수한 등 천도를 주장한 핵심세력은 모두 서경과 연관되어 서경천도의 음모론을 제기한다.
- 여기에다 서경 찬성론자들의 회의록이 등장하는데 “서도로 옮겨가 그 곳을 상경으로 삼는다면 중흥공신이 될 것이니 우리 한 몸이 부귀하게 될 뿐만 아니라 자손도 무궁한 복을 누릴 것이다.” 서경천도 뒤에는 권력 장악의 음모가!? 피차일반으로 서경천도를 반대하는 사람들 모두는 개경세력으로 서경천도 반대주장 뒤에는 기득권 상실의 우려가!?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서경천도의 팽팽한 의견대립
- 묘청 측 주장에 따라 1129년 서경 임원역에 대화궁을 완공하고 새로운 정책을 추가 제안하는데 ① 칭제건원, 군주를 황제라 칭하고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 ② 금나라 정벌, “최봉심은 ‘나라에서 나에게 장사 1,000명만 준다면 금나라에 들어가 그 군주를 사로잡아 바칠 수 있다’ 고 하였다” <고려사절요 인종9년(1131년)>
〇 묘청 VS 김부식, 서경천도 · 칭제건원 · 금국정벌
- 칭제건원은 곧 고려의 독립과 자주성을 표현하는 것으로 충분히 설득력 있는 주장인 듯, 하지만 김부식의 경우 금나라에게 공격의 빌미를 주지말자는 의미는 지레 겁먹고 포기하는 것은 아닐까? 라는 <류근 시인의 생각>
- <이익주 교수의 분석> 이는 고려만의 문제가 아니라 당시 국제정세와 함께 살펴봐야 하는데 10~11세기 200여 년 동안 고려·거란·송의 세 나라가 힘의 균형을 유지해 왔는데 12세기가 되면서 여진의 급성장으로 1115년 금나라를 건국하면서 1125년에는 거란을 멸망시키고 송나라를 공격하여 수도 개봉을 함락시키는데 이때 송(宋)의 고종은 남쪽으로 피신해 1127년 남송을 건국하는 격변이 일어난다.
- 당시 우연하게 송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됐던 김부식 “김부식 등이 송의 명주까지 갔다가 마침 금의 군대가 변주에 들어가 길이 막혀 들어가지 못하고 돌아왔다.” <고려사절요 인종 5년(1127년 5월)> 8개월을 지체하면서 거란과 북송의 멸망을 직접 목격한 김부식은 금나라의 엄청난 힘을 직접 체험한 것
- 김부식의 주장이 여론의 지지를 받지 못한 이유?·
당시 고려인들은 여진족의 강세를 인정할 수 없었던 것으로 불과 한 세대 전만 하더라도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섬기겠다고 약속한 여진족이 이제는 관계를 역전하여 형제관계 · 군신관계를 요구해 온 것이어서 고려인들은 감정적인 반응을 보이게 되는 것이고 이에 앞장선 사람이 여진 정벌의 주역 윤관의 아들인 윤언이, 동북9성 반환을 조건으로 자손 대대로 고려를 섬기겠다고 약속했던 여진족
- 남송과 연합해 금나라 정벌 가능성?
여진족의 급성장에 대하여 고려뿐만 아니라 주변의 송 · 거란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로 여진(금) 정벌을 위해 고려에 협조를 요청한 송, 하지만 고려는 송의 패배를 예감하고 완곡히 거절 “왕사가 적을 제압하기를 기다려서 조금이나마 힘을 보태고자 합니다.” <고려사 세가 인종 4년(1126년 7월)> 하는 식으로 거절한다.
- 서경천도론의 대세에 따라 처음엔 상황을 지켜봐야 했던 김부식, 당시 인종은 묘청 측의 주장에 따라 서경 임원 역에 대화궁을 짓고 자주 행차하는데 칭제건원은 왕권강화의 상징으로 이를 지켜보던 인종의 측근 신하인 김부식은 금국 정벌만은 안 된다고 주장했던 것
- 금국정벌론은 묘청 측의 구호일 뿐(?) 실질적으로는 이뤄질 수 없는 일로 민심을 수습하기에는 적합할 줄 모르나 현실적으로는 타당성이 부족, 당시 금국정벌론에 반대하는 세력은 사대주의자(?)
-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사대주의는 근대에 와서 생긴 말로 <사대주의>는 주체성 없이 강대국에 의존해 그 존립을 유지하려는 것으로 조선을 평가하면서 만들어진 말로 고려시대의 사대는 현실적인 외교정책으로 인정받은 것
〇 서경천도, 불길한 조짐들
- 1132년(인종 10년) 서경 행차 길에 오른 인종이 금암 역에 이르자 갑작스레 몰아친 비바람으로 모두가 혼란에 빠지게 되고 급기야 길을 잃은 인종 “시중들이 왕의 행방을 잃어버리자 궁인 중에는 통곡하는 자도 있었다. 저녁이 되자 진눈깨비가 내리고 추위가 더욱 심하여 사람과 말과 낙타가 많이 죽었다.” <고려사 열전 묘청>
- 기록에 의하면 인종이 대화궁에 행차했을 때 서경의 중흥사 탑에 화재가 발생하면서 대화궁 주변으로 30여 차례 벼락이 친 상황 “어떤 사람이 ‘주상의 서경행차는 재앙을 없애기 위함이었는데 왜 이런 큰 재앙이 생긴거요?’라고 일렀다,” & “묘청이 ‘주상께서 만약 개경에 계셨다면 더 큰 재앙을 만났을거요!’라고 강변했다.” <고려사 열전 묘청>
- 기대되는 묘청의 어록 제2탄 “내가 일찍이 이날 비바람이 불 것을 알고 우사와 풍백에게 임금께서 행차하실 것이니 비바람을 일으키지 말라고 응낙을 받았는데 이처럼 식언을 하다니 매우 가증스럽구나! 라고 말했다.”<고려사 열전 묘청>
〇 고려에 이런 일이? 대동강 <신룡의 침> 사건
- 이렇게 서경천도론이 수세에 몰리면서 인종은 개경의 궁궐 수리를 지시하고 서경천도론의 지지가 하락하면서 위기감을 느낀 묘청, 이때 고려 사회를 발칵 뒤집는 또 다른 사건이 발생하는데 대동강에 정체 모를 오색 띠가 출현하여 묘청 측의 주장은 “신령한 용이 침을 토한 것!”이라며 하늘의 뜻을 받들어 금(金)을 제압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나선다.
- 기록을 바탕으로 한 <신룡의 침>사건 재구성 ① 떡 속에 기름을 채워 넣는다. ② 기름을 채운 떡을 물속에 담근다. ③ 기름이 물위로 떠오른다. ④ 기름이 햇빛에 반사되어 오색 띠로 빛난다. .
- 충격! 상서로운 오색 띠가 알고 보니 조작인 것 “묘청과 백수한이 몰래 커다란 떡을 만들어 빈속에다 구멍을 뚫고 참기름을 넣은 다음에 대동강에 가라앉혀 두니 기름이 점점 새어 나와 수면에 떠올랐는데 멀리서 보면 오색으로 빛나는 것 같았다. 이를 두고 신룡(神龍)이 침을 토해 오색구름을 만들었으니 상서로운 징조라고 말하면서···” <고려사 열전 묘청> 계속된 천재지변으로 궁지에 몰린 묘청의 불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묘청의 자작극!
- 김부식 측에서 “자맥질을 잘하는 자를 시켜 물밑에 있던 큰 떡을 찾아내고는 그것이 속임수인지 알았다.” <고려사 열전 묘청> 위기를 모면하려다 자기의 무덤을 판 묘청, 교과서에는 실을 수 없는 귀중한 사건
〇 토벌대장 김부식, 질투심이 부른 과잉 진압?
- 앞으로 묘청의 운명은?
대신들은 묘청의 참수를 주장! 그 동안 묘청 측에 있던 인종도 서경 행차 거부를 선언하자 묘청의 최후 선택은 반란!
- 1135년(인종13년)토벌대장 김부식은 긴급회의를 소집하고 왕명도 받지 않은 채 개경에 있던 묘청파 정지상 · 김안 · 백수한 등을 참수시켜버리고, 반면 서경의 묘청 세력은 형세가 불리해지자 내분이 일어나고 묘청은 같은 편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 반란이 갑자기 일어났기 때문에 반란 사실을 몰랐던 개경에 있던 묘청파가 당하게 되는데 서경에 있던 친구로부터 반란이 일어났다는 서신을 받은 백수한은 이를 믿지 못하고 오히려 왕에게 편지 내용을 보고하면서 부랴부랴 대책을 세우고 묘청의 난 토벌대장에 임명된 김부식, 여기서 문제는 묘청 일파들 사이에서도 난을 일으킨다는 정보공유 없이 묘청이 급하게 일으킨 반란이라는 것
- 김부식이 토벌대장이 되자마자 묘청 파 정지상을 처형시킨 건 과잉진압?
그래서 정지상을 향한 김부식의 사적인 복수라는 설도 있는 것으로 당대 문장으로 우위를 다투던 정지상과 김부식, 야사의 기록에 의하면 “사찰에 범어가 그치자 하늘빛이 유리처럼 맑다.” <정지상 작> 옆에 있던 김부식이 감탄하며 마지막 잣구는 내가 맞추겠다며 시를 양보하라고 권했으나 거절당한 김부식, 묘청의 난을 구실로 정지상을 먼저 제거했다는 설이 전해지기도···
- 시인뿐만 아니라 예술인은 끊임없이 질투하는 존재, 그러나 그것은 절대적인 것에 대한 질투이지 상대적인 질투는 아닌 것으로 김부식이 질투심에 눈이 멀어 정지상을 죽였다는 설은 다분히 정치적인 해석이라는 <류근 시인의 생각>
- 하지만 기록에는 “김부식이 평소 정지상과 함께 문장으로 명성이 비등하여 불만을 품고 있던 차에 묘청과 내응하였다는 핑계로 그를 죽였다.” <고려사 열전 묘청> 살리에르가 질투에 눈이 멀어 모차르트를 죽였듯이 고려판 아마데우스?
- 왜 이런 야사가?
김부식과 정지상은 라이벌 관계! 상대적으로 정지상에게 호의적이었던 여론이 만들어낸 이야기(?) 김부식의 진압이 타당하지 않았다는 민심의 반영(?) 김부식이 난의 확산을 막기 위해 사전에 진압하려 한 것인 결정일 수도 있겠으나 왕명도 없이 천재 시인을 죽인 것은 아쉬운 일(?)
〇 묘청의 난, 최후
- 묘청의 난, 결말은?
함께 반란을 일으킨 조광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맞는 묘청, 서경에서 난을 일으키고 왕의 응답을 기대한 묘청파, 하지만 인종은 이를 변심하고 토벌대를 보내자 내부가 분열 “서경 사람들이 묘청·유참 등의 머리를 벤 뒤 윤첨 등으로 하여금 그 머리를 바치게 하고 용서를 빌었다.” & “이에 세 사람의 머리를 큰 거리에 매달고 윤첨을 하옥시키니 조광은 형벌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판단하고 다시 항거했다.” <고려사 열전 묘청>
- 이후 1년 여 만에 김부식이 어렵게 난을 진압 “개선하여 돌아오니 김부식에게 훌륭한 집을 한 채 하사하였다.” <고려사 열전 김부식>
- 묘청의 난 진압 후 <삼국사기>를 편찬하는데 1135년에 묘청의 난이 일어나고 1145년에 완성된 <삼국사기>는 삼국시대의 정사로 왕명을 받아 김부식이 편찬을 주도하는데, 삼국사기의 편찬은 고려판 역사 바로 세우기에서 시작한 것으로 역사서 편찬을 맡을 정도로 왕의 총애를 받은 김부식, 만일 묘청의 난이 성공했다면 <삼국사기>는 묘청 <삼국유사>는 일연으로 두 스님이 삼국의 역사를 기록했을 수도···
- 김부식이 사대주의자라는 평가에 대한 생각은?
묘청의 주장대로 했다면 더 큰 혼란이 야기됐을 듯~ 그래서 김부식을 사대주의자라기보다는 비현실적 이상주의에 휘말리지 않는 유가적 합리주의자 혹은 현실적 실리주의자라는 평가를 해야 하지 않는가? 하는 <류근 시인의 생각> VS 해석하기 나름으로 금나라에게 숙이고 들어간 건 사대주의, 하지만 무모한 전쟁 반대는 현실적 판단으로 유교적 도덕정치를 강조한 이상주의자 등 다양한 측면에서 평가할 수 있을 듯
- 신채호 선생의 묘청의 난 평가, 그 진실은?
신채호 선생의 <조선사연구초>를 다 읽은 사람은 많지 않을 듯, 신채호 선생이 가장 아깝게 생각한 인물은 묘청이 아닌 윤관의 아들 윤언이로 윤언이는 서경천도에는 반대했고 칭제건원은 찬성했는데 이것이 탁견이었다는 것, 그런데 “묘청의 행동이 광망(狂妄)하여 그 동당 정지상 등을 속이어 사지에 빠지게 하고 윤언이 같은 자주적 생각을 하는 인재를 잃는 것이 안타깝다! 그러면서 조선은 사대주의 나라가 됐고 결국 망국의 비운까지 맞았다.” <조선사연구초> 따라서 신채호 선생이 묘청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는 것은 책의 일부분만 보고 내린 대중들의 오해
- 자주 VS 사대, 두 세력의 경쟁을 통해서 건강한 정치로 발전해야 하는 것인데 묘청의 서경 천도운동의 실패로 고려의 자주성이 모두 소멸된 것은 아닐까? 한 세력의 몰락으로 남은 세력이 득세하면서 사회의 건강성을 잃고 결국 무신정변을 초래하고 김부식과 같은 문벌귀족세력이 경쟁세력을 제거하면서 결국 자신의 생명도 단축한 셈은 아닐까(?)
- 묘청의 난이 갖는 역사적 의미?
지금껏 묘청의 난을 개경파 VS 서경파의 분열로만 인식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사실은 당시 국제정세 또한 중요한 것이 묘청의 난이 일어나가 직전 북송이 멸망하고 남송이 형성되는 과정의 현장에 있었던 김부식이라는 인물이 국제정세의 변화를 제대로 읽었기 때문에 고려의 더 큰 혼란을 막을 수 있었다는 <신병주 교수의 분석>
- <묘청의 난>은 10여 년 전에 일어난 <이자겸의 난>과 비슷한 성격을 가지는데 12세기 지배층의 내부 분열이 가속화되면서 정작 민생은 뒷전에 몰리는 치명적인 문제를 갖게 되는 것으로 이것이 묘청의 난 35년 후 무신정변의 철퇴를 맞는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는 <이익주 교수의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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