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신들 그들만의 리그 - 칼로 흥한 자 칼로 망한다!
〇 무신정권의 일인자, 이의방의 위기
- <KBS 드라마 무인시대> 명종 4년 9월, 난이 일어났다. “서경 유수 조위총이 군사를 일으켜 정중부 · 이의방을 치려고 도모하였으며··· 동계 ·북계 양계의 여러 성에 격문을 보내어 사람을 불러 모았다.” <고려사 세가 명종 4년 9월>
- 이의방은 난을 진압하기 위해 토벌군을 보내지만 반란군에 의해 크게 패하고 노한 이의방은 반란군 진압을 위해 직접 나서지만 예상치 못한 복병인 혹독한 추위에 견디지 못하고 결국 군대를 철수한 이의방은 집권한지 불과 4년 만에 최대의 위기를 맞는다.
- 무신정권에서 가장 먼저 실권을 잡은 이의방은 정변의 동지인 이고까지 제거하면서 일인자가 되고 정변 이후 의종을 폐위시키고 시해한 이의방은 왕보다 더한 권력을 휘두른다.
- 조선의 추위에 임진왜란 당시 큰 피해를 입은 일본군, 세계사적으로도 19세기 나폴레옹이 러시아 원정을 갔을 때도 러시아의 혹독한 추위 때문에 결국 실패하고 마는 경우가 있지만 이들은 해외 원정의 사례이고 국내 원정에서 추위에 철수했다는 것은 그 만큼 준비 없는 출정은 아니지 않았는가(?)
- 조위총이 난을 일으킨 이유?
<김보당의 난>이 실패로 끝났는데 무신정권의 의종 시해를 명분으로 서경에서 난을 일으킨 것으로 북계·동계 백성들의 중앙 정부에 대한 반감을 이용하여 절령 이북 40여 개 성이 호응하면서 크게 번져나가는데 이의방은 최고 권력자는 되었지만 지지기반이 약했다는 반증
※ 김보당의 난 : 명종 3년 8월, 문신 김보당이 정중부와 이의방을 토벌하고 의종을 다시 세우고자 일으킨 반란
- 권력을 잡은 이의방의 행보?
권력을 잡았으면 무엇보다도 국정 정상화에 전념해야 했지만 사리사욕을 채우기에 급급했던 이의방의 만행 ① 의종을 죽이고 애첩을 취함 ② 태후의 여동생을 위협해 정을 통함 ③ 맏딸을 태자비로 들여 국정을 마음대로 처리 “이의방이 자기 딸을 태자비로 들이면서 더욱 권세를 제 멋대로 부려 조정을 혼탁하게 만드는 틈에 모든 사람들의 분노를 샀다.” <고려사 열전 이의방> 나라의 기강마저 무너뜨린 이의방의 만행
- 수습되지 않은 조위총의 난, 이의방의 해결책은?
서경을 재공격하기 위해 준비한 이의방은 각 사찰의 승군을 포함하여 군대를 재편성해서 다시 반란군의 토벌을 계획한다.
〇 이의방의 죽음과 정권 교체
- <KBS 드라마 무인시대> 명종 4년 12월, 정중부의 아들 정균은 승려 종참과 더불어 이의방을 제거할 계획을 세우는데 때마침 토벌군 훈련장을 찾은 이의방이 방심한 틈을 노려 이의방을 제거하는데 성공, 한때 무신정변으로 최고의 자리에 올랐던 이의방은 정균의 배신으로 모든 것을 잃게 되면서 난은 진압하지도 못하고 목숨을 잃는다.
- 이의방의 죽음으로 최고의 자리에 오른 정중부, 드라마에서는 정균이 직접 이의방을 찌르는 것으로 나오지만 <고려사>에는 “정중부의 아들 정균이 승려 종참을 꾀어 이의방을 뒤따르다가 틈을 타서 그를 살해하게 한 후···” <고려사 열전 정중부> 정균과 명종을 연결시켰던 승려 종참은 정치 참여형 승려
- 무신정변의 동지였던 이의방과 정중부 같은 무신이지만 큰 차이가 있었던 것으로 이고와 이의방은 정 8품의 산원이지만 정중부는 종3품의 대장군으로 현재의 장군과 위관급 장교의 차이, 실력으로 전면에 나섰던 이고와 이의방, 하지만 하급 무신의 집권에 반감을 품은 고위급 무신들, 정중부가 이의방을 제거한 배경에는 무신정변에 참여했던 고위급 무신들의 합의가 있었을 것이라는 <이익주 교수의 분석>
- 계속되는 조위총의 난?
1년 뒤인 명종 6년에 조위총은 잡혀서 처형되지만 동북면에서는 난(亂)이 계속되고 조위총의 난이 막바지가 되는 무렵인 명종 6년 1월에는 공주에서 <망이·망소이의 난>이 발생하는데 문제는 집권무신 사이의 권력다툼이나 또는 반대하는 문신들의 저항이 아닌 일반 백성들의 저항을 불러일으킨 국정혼란, 정중부도 이 사실을 알았지만 대책을 마련하지 못하는데 무력으로 탈취한 권력이 빚어낸 혼란
〇 정중부 정권의 실정(失政)
- 실권(實權)을 장악한 정중부의 행보?
일반적으로 다른 무신정변의 주역에 비해 비교적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는 정중부, 하지만 기록에는 “정중부는 본래 탐욕스러워 끊임없이 재물을 탐했다.” <고려사 열전 정중부> 일반적인 이미지와는 상반된 정중부의 모습, 심지어는 정3품 관료의 땅마저 빼앗으려한 정중부는 70세가 넘도록 권력을 놓지 않으려한다
- 신라시대부터의 관례는 정년은 없지만 70세가 되면 관직에서 물러나는 <치사(致仕)>는 나이가 많아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나는 것으로 정중부를 따르는 간신배가 70세가 넘도록 관직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을 전하는데 왕으로부터 궤장을 하사 받으라는 것
- <궤장(几杖)>은 왕이 70세 이상의 연로한 대신들에게 하사한 안석(安席)과 지팡이로 관직을 유지할 수 있는 명분이 되었던 궤장은 신라 김유신도 하사 받은 기록이 있고 고려시대에도 이어진 전통으로 강감찬 장군도 하사받았고 조선시대에는 세종대왕으로부터 궤장(几杖)을 하사 받은 황희는 노쇠하다고 벼슬을 극구 사양하지만 앉아만 있으면 된다고 하여 하사받는다.
- 정중부가 궤장을 하사받았던 방법?
“정중부가 기뻐하며 예관에게 넌지시 말해 옛날 한나라의 공광의 전례에 따라 궤장을 하사받았다.” <고려사 열전 정중부> 이의방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정중부 “국사는 모조리 그의 손에 의해 처결되었고 때로 중방에 앉아서 형벌의 판결을 내렸으며 백관들은 그의 집을 찾아가 하례를 올렸다.” <고려사 열전 정중부>
〇 정중부 집권을 위협하는 익명의 방(榜)
- 각 군부대를 들썩이게 한 익명의 방(榜) 내용은?
과격한 내용을 담고 있는 방(榜)의 내용 “시중 정중부와 그의 아들 승선 정균과 사위인 복야 송유인이 권력을 제멋대로 휘두르며 방자한데 남적이 일어난 것은 그 근원이 여기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만약 군사를 내어 가서 토벌하려면 반드시 먼저 이들을 제거한 후에야 가능할 것이다.” 정중부 정권을 비판하는 내용의 방, 그것도 일반 저자거리가 아닌 궁내에 방이 붙여진 것을 보면 군부의 상당수도 정중부 정권에 돌아선 듯하고 군부출신이 군부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는 건 매우 심각한 일
- 정중부 정권을 비판하는 방(榜)이 나붙은 이유?
“명종 6년 정중부가 병으로 퇴직을 상신하자 각 영(領)의 군사들이 다음과 같은 익명의 방을 붙였다.” <고려사 열전 정중부> 익명의 방에 아무 대응이 없는 정중부 정권, 심지어 이 소식을 들은 정중부 아들 정균 “정균이 이 말을 듣고 겁이 난 나머지 해직을 상신하고 여러 날 동안 출근하지 않았다.” <고려사 열전 정중부> 출범 이후 최대의 위기에 직면한 정중부 정권
- 방(榜)을 붙인 사람은 누구?
방(榜)은 남적(망이·망소이 난)의 원인으로 정중부를 지적한 것이고 정중부를 긴장하게 한 익명의 방으로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서 오히려 관직을 놓지 않으려는 정중부는 2년 후에야 은퇴를 하는데 그 것도 은퇴 후에도 권력을 장악하는 장치를 마련한다.
- 주인의 권세를 믿고 노비까지도 법을 어기는데 자색 비단 옥을 입고 다니는 정중부의 노비, 고려에서 자색은 가장 높은 신분의 색으로 고위관료의 관복색이었고 정중부의 노비는 어사대에 잡혀갔으나 겨우 도망쳐 나오고 겨우 다시 잡아들였으나 정중부가 쫓아가 어사대 까지 죽이겠다고 난동을 피우고 정중부의 아들 정균이 말리는 사건이 발생한다.
- 정중부의 아들 정균 또한 만만치 않은 것이 “광덕리에 옛 태후의 별궁이 있었으나 정균이 사저로 삼겠다고 요청했다. 태후가 명을 내려 값을 받지 않고 그에게 주자 정균이 새로 거창하게 집을 짓는 공사를 시작했다. <고려사 열전 정중부> 또한 명종을 당황하게 하는데 공주에게 장가들려고 한 정균으로 근심이 깊어지는 명종
- 태자비가 되는 것과 부마가 되는 것은 엄청난 차이로 고려의 족내혼, 국왕의 족내혼은 뜸해졌지만 공주의 혼인은 태조 이래 족내혼으로만 이뤄졌는데 정균과 공주가 결혼하면 고려 왕실 최초 족외혼이 되는 것으로 고려 왕실의 공분을 일으킨 사건
- 정중부의 사위인 송유인도 문제인 것이 원래 송나라 장사꾼의 처가에 장가들었던 송유인 “송유인은 본처를 섬으로 쫓아버린 후 정중부의 딸을 처로 삼았다.” & “송유인이 수덕궁을 달라고 요구해 자기 처소로 삼았는데 부귀와 사치가 왕실 못지않았다.” <고려사 열전 송유인> 낱낱이 드러나는 정중부 정권의 실체와 <정중부의 난>이라 할 만한 무신정변
〇 혜성처럼 등장한 경대승
- <KBS 드라마 무인시대> 명종 9년 9월, 정중부의 아들 정균은 믿었던 동료에게 배신당하면서 목숨을 잃는데 그 배후에는 청년 장군 경대승이 있었고 경대승은 궁궐안의 정균 세력을 모조리 제거한다.
- 변란의 소식을 듣고 민가로 몸을 피한 정중부, 한편 경대승은 명종에게 정중부와 송유인 부자를 체포해야 한다고 청하는데 “경대승이 왕에게 금군을 출동시켜 정중부와 송유인의 부자를 체포해야 한다고 말했다.” <고려사 열전 경대승> 결국 정중부는 금군에 체포되어 참수 당하는데 동지였던 이의방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한지 5년으로 정중부는 자신을 최고의 권력으로 올려준 그 칼 아래 생을 마감하면서 권력의 무상함을 느끼게 한다.
- 갑자기 등장하는 경대승은 누구?
무신정변 당시 17세의 어린 나이 관계로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던 경대승 “경대승은 청주사람으로 부친 경진은 중서시랑평장사를 지냈다.” <고려사 열전 경대승> 중서시랑평장사는 고려시대 중서문하성의 정2품의 관직으로 고위 관료의 아들이었던 경대승, 무신정변 2년 전인 “나이 열다섯에 음서로 교위(校尉)에 임명되었고 여러 차례 승진해 장군이 되었다.” <고려사 열전 경대승>
- 경대승이 권력의 핵심에 접근할 수 있었던 이유?
기록에 의하면 “왕이 경대승과 견룡 차약송 등을 시켜 타구(격구)놀이를 하게 한 후 차등을 두어 능견을 내려주었다.” <고려사 명종 4년 5월> 격구는 말을 타고 공을 치던 경기로 페르시아에서 시작되어 중국과 한반도로 전해져 고구려·신라에 이어 고려 무신 출세의 조건이었던 경기로 어린 나이에 왕 앞에서 격구를 했다는 것은 경대승이 왕 가까이에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기록으로 당시 왕의 주변 인물들은 실세 정중부의 측근 세력
- 격구 시범의 정치적 의미?
왕과 집권 세력에게는 새로운 무신을 발굴하는 자리이자 세력을 과시할 수 있는 기회이며 참가하는 무신은 왕에게 기량과 자질을 선보일 기회, 사실은 경대승을 추천한 정중부도 “(왕이) 처음에 격구로 인하여 정중부를 가까이 하였는데···” <고려사절요 의종 24년> 고려시대 무신들의 출세에 도움이 되었던 격구는 말과 함께하는 스포츠로 사람과 말이 집단 전투 훈련을 할 수 있는 수단, 또한 말 위에서 무기를 휘둘러 마상(馬上) 무예 기량향상에 효과적이었던 격구
〇 경대승의 불안한 정권 교체
- 경대승이 정중부를 제거한 이유?
기록에는 경대승이 정중부를 제거한 명분은 복고(復古) “(경대승은) 항상 무인들의 불법한 일에 분개하였는데 개연히 복고에 뜻이 있어··· ” <고려사절요 명종 13년 7월>
- 복고를 외친 경대승에 대한 다른 무신들의 반응?
정중부를 제거한 경대승에 대해 반감을 품은 무신들, 그리고 무신들의 반발에 긴장한 경대승 “경대승이 겁이 나 결사대 백 수십 명을 모아 자기 집에 두고 변란에 대비해 훈련시키며 이를 도방(都房)이라 불렀다.” <고려사 열전 경대승>
- 경대승은 복고를 표방하면서 무신정변을 일으킨 자기 앞 세대의 무신들을 제거하려고 하지만 아직 권력을 쥐고 있는 무신정변의 공신들 때문에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던 경대승의 복고, 또한 권력을 잡은 무신정변의 불참 경대승에 대해 무신정변 참여 무신들의 불만이 고조 - 경대승의 복고 노력?
이전 다른 무신들과는 다른 면모를 가진 경대승에 대해 희망을 가진 문신들 “경대승이 임금을 시해한 자가 아직 살아있는데 어찌 하례를 받겠는가? 라고 하니” <고려사 열전 경대승> 의종 시해 무신정변의 주역들에 대해 부정적 입장을 표명한 경대승
- 경대승의 위협에 대한 이의민의 반응?
권력의 실세였기 때문에 경대승을 두려워한 이의민은 경대승의 공격에 대비 “이의민은 더욱 두려워하여 마을의 거리에 큰 문을 세워 밤에 경계하면서 여문(閭門)이라 이름하니···” <고려사절요 명종 10년 1월> 개경의 다른 무신들 사이에도 퍼진 여문을 보면 무신들 간에 지속된 긴장감을 볼 수 있는 것
- 또한 이의민이 도망치게 되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명종 11년에 지방의 병마사로 나가있던 이의민은 잘못된 오보를 받게 되는데 개경에서 왕이 경대승을 처벌했다는 근거없는 오보가 올라온 것, 그런데 이의민은 이를 확인하지도 않고 내가 먼저 경대승을 죽이려 했는데 누가 그 일을 했단 말인가? 하고 기뻐하자 이 소식이 경대승에게 들어가고 경대승이 알았다는 사실을 다시 이의민이 알게 되어 “이의민이 돌아와서 두렵고 불안한 나머지 병을 핑계로 낙향해버렸다.” <고려사 열전 이의민>
- 여기서 유념해야 할 것은 이 시기가 경대승이 모든 권력을 장악하지 못했다는 것으로 경대승 정권은 실력 있는 무신들의 연립 형태로 유지되고 있었다는 사실, 게다가 이의민은 무신정변에 직접 참여해서 의종을 시해한 사람이고 어떤 의미에서는 무신정변을 일으킨 무신들을 대표적으로 상징하는 인물로 <이익주 교수의 분석>은 경대승이 이의민을 제거할 경우 무신정변 참여 무신들을 숙청하는 것으로 비춰질 수 있다는 의미, 따라서 경대승이 이의민을 제거하지 못한 건 무신정변 참여 무신들의 반발을 의식했기 때문
- 실질적으로도 복고를 표방은 했으나 복고의 움직임은 전혀 보이지 않는 경대승은 사병 집단인 <도방>을 중심으로 개인의 권력만 키운다. “개경의 강도떼들이 마구 설치며 자신들을 경대승의 도방이라 일컬었다, 해당 관청에서 체포해 옥에 가두면 경대승이 그 때마다 석방하니···” <고려사 열전 경대승> 이의방 · 정중부 등 이전의 무신들과 마찬가지로 권력을 남용한 경대승
- 26세에 무신정권 최고 책임자가 된 경대승은 국가를 경영할만한 능력이 부족한 상태에서 너무 일찍 권력을 잡은 것이 아닌가? 오히려 힘은 있지만 리더로서의 철학이 부족했던 것은 아닌지·· 복고를 표방하며 이전 무신과는 다른 면모 때문에 당대 고려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은 것으로 <고려사 열전>에 무신집권기 권력자 중 유일하게 반역 열전에 포함되지 않은 경대승, 이것은 그 시대에도 경대승을 어느 정도 차별화했음을 볼 수 있는 것
〇 경대승의 죽음과 이의민의 귀환
- <KBS 드라마 무인시대> 명종 13년 경대승은 묘한 꿈을 꾸는데 꿈에서 정중부를 만난 경대승은 그 악몽으로 인해 병을 얻게 되고 시름시름 앓다가 죽게 되고 경대승의 죽음으로 찾아온 권력의 공백기, 얼마 후 경대승의 빈자리에 무신정변의 또 다른 주인공인 이의민이 등장한다.
- 나이 서른에 허무하게 세상을 떠난 경대승 “경대승이 갑자기 정중부가 칼을 잡고 큰 소리로 꾸짖는 꿈을 꾸었다. 그로 인해 병을 얻어서 죽으니··· ” <고려사 열전 경대승> 경대승에게 심리적 부담으로 남은 정중부의 영향력을 볼 수 있는 대목
- 경대승의 자리를 차지한 이의민, 이유는?
이의민을 부른 것은 명종으로 무신정변에 의해 옹립된 왕이고 어떤 의미에서는 무신정권의 수혜자이면서 공범의 성격, 드러나지는 않지만 무신정권의 권력자 교체에도 영향력을 미친 명종, 경대승이 복고를 외칠 때 명종도 결코 달갑지 않은 것은 자신도 복고의 대상에 포함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으로 경대승이 죽자 자신을 보호해 줄 새로운 실력자로 이의민을 선택한 것
- 무신정권의 실세가 바뀌는 동안에도 계속 왕위를 유지한 명종의 정치력은 1170~1197년 까지 무려 28년간을 재위하는데 우리 역사에서 왕권이 없이 가장 오래 재위한 왕 “왕은 타고난 자질이 나약한데 여러 차례 변고를 겪어 문득 놀라고 두려워하였으며··· 군국기무는 모두 무신들에게 견제되니 목소리와 얼굴 빛 조차도 감히 자기 마음대로 하지 못하였다.” <고려사절요 명종 10년 6월> 왕권 유지를 위해 무신정권과 적절히 타협했던 명종
〇 무신들의 권력 다툼이 남긴 것
- 무신들의 권력 다툼이 백성들에게 미친 영향?
백성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것이 국가의 책무인데 무신들의 권력 다툼으로 혼탁해진 국정, 국가가 제 역할을 하지 않아 피폐해진 백성들의 삶으로 민란이 끊이지 않았던 것은 아무도 백성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으로 고려시대 민란이 가장 많이 발생했던 무신 집권기
- 혼란스러웠던 무신정권의 역사적 의미?
역사에 대한 성찰 없이 권력을 공삼아 무신들만의 격구경기를 벌인 시대라는 느낌을 받게 하는 것 & 고려라는 배가 침몰하는 동안 키는 잡지 않고 선장실 탈취 싸움만 벌인 무신들의 현장 & 나라의 미래보다 권력탈취에만 관심을 쏟은 무신들
- 그래서 이 시기를 무신들의 상호간의 권력 투쟁으로만 볼 수도 있는데 다른 한 쪽에서는 민란이 발생하면서 이를 통해 사회를 바꾸고자 했던 백성들, 사회의 아랫바닥에서부터 에너지가 분출됐던 시기로 무신정권의 초기에는 역사적으로 퇴보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이후의 진행 과정을 보면 신흥사대부들이 새로운 고려 후기 사회를 만드는 출발점이 된다는 의미로 역사의 발전이란 후퇴기를 극복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이뤄지는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하는 사건이라는 <이익주 교수의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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