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앗긴 비둘기, 최충헌 정권의 시작을 알리다
〇 최충헌, 이의민을 제거하다
- 1170년 무신정변이 일어난 지 26년 후인 1196년 어느 날, 역사를 바꾸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비둘기를 강탈당한 최충헌의 동생 최충수
- 이에 분노하여 최충수는 이의민의 아들 집에 찾아가 전서구를 돌려달라고 하지만 오히려 수모를 당한 최충수는 이의민 세력 제거를 도모하고 군사를 일으켜 이의민을 급습
- 무방비 상태의 이의민 세력은 기습공격에 속수무책 당하면서 이의민은 최충헌의 손에 최후를 맞는데 62년 최씨 정권의 서막이 오른 것이다.
- 흥미진진한 고려 최고 권력자 교체의 도화선이 된 비둘기 사건, 최충헌은 이의민을 제거하고 4대 62년의 최씨 정권을 수립하면서 고려 역사상 가장 강력한 권력을 가졌던 인물로 최충헌이 최고 권력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가 시청 포인트!
〇 최충헌 VS 이의민
- 최충헌에게는 있는데 이의민에게는 없는 것?
최충헌은 무신 출신으로 상장군 최원호의 아들인데 반(反)해 이의민은 천민 출신으로 소금장수 아들로 출신 성분부터 다르고 최충헌은 아버지의 힘으로 음서로 관직에 진출하는데 이의민은 경주 출신의 불한당(不汗黨) “김자양이 그들을 잡아들여 고문하고 두 형은 고통에 옥사했으나 이의민만 견디어내었다.” <고려사 열전 이의민> 고문을 이겨낸 인고로 경군(京軍)이 된 이의민
- 이의민 제거 사건의 발단은 최충헌이 아닌 동생 최충수로 최충헌은 종4품의 섭장군이지만 동생 최충수는 종8품의 동부녹사 “공은 젊어서부터 남에게 얽매이지 않으면서 기상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났고 사람을 포용하는 도량이 있었다.” <최충헌 묘지명>
- 최충헌은 비교적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으나 “그의 동생 최충수는 시기심과 음험함이 있고 용맹함과 사나움이 있었다.” <고려사절요 명종 26년> 이의민과 비슷하게 무식하고 용감했다는 평가
- 의종의 척추를 꺾어 죽인 이의민은 13년간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면서 모든 사람이 이의민을 두려워하는 상대가 되는데 “이의민이 인사권을 제 멋대로 휘두르고 백성들의 거주지를 대거 점탈해 저택을 짓고 남의 토지를 약탈하는 등 온갖 탐학을 저지르니 온 나라가 두려움에 떨었다.” <고려사 열전 이의민>
- 또한 살인과 겁탈을 일삼았던 이의민의 아들 지영 · 지광 형제, 당시 사람들은 이 형제를 쌍도자(雙刀者)라고 불렀는데 고려판 쌍칼!
- 이렇다 보니 이의민 같은 천민 출신 권력자에 대한 반감이 더해져서 그야말로 공공의 적이 된 이의민, 집권만 하면 똑같은 전횡을 보이는 무신권력자들 “(이의민 일가를) 죽이고 머리를 개경으로 보내니 안서의 백성들이 이제 걱정거리가 없어졌다며 기뻐했다.” <고려사 열전 이의민> 특히 이의민의 십(十)팔(八)자(子) 왕위의 도참설을 믿고 왕좌를 넘본 이의민이다 보니 그에 대한 비난이 더욱 컸던 것
- 비둘기로 시작된 최충헌 형제와 이의민의 갈등, 드라마에서는 비둘기를 전서구(傳書鳩)로 해석하는데 전서구는 편지를 보내는데 쓸 수 있게 훈련된 통신용 비둘기, 전서구는 권력을 바꿀 정도로 엄청난 존재일까?
〇 비둘기 한 마리가 정권을 바꾸다
- 경기도 고양시 일산서구의 한 마을에는 각양각색 500여 마리의 비둘기를 키우고 있는 한국 비둘기경주협회 회장인 <가와카미 아키히로> 키우는 비둘기는 모두 전서구로 비둘기를 영종도까지 차에 싣고 가 풀어주자 직선으로 45Km인 자기 집에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비둘기
- 비둘기는 어떻게 돌아올 수 있었을까?
비둘기는 동물들 중 귀소본능이 가장 뛰어난 동물로 비둘기 머리 속에 위치 추적기가 있는 셈으로 태양의 위치와 후각으로 집을 찾는다고 하는데 이는 장시간의 훈련이 필요하여 가까운 곳부터 점차 거리를 넓혀가며 500~1,000Km까지 훈련
- 비둘기 경주는 유럽 · 중국 등지에서 각광을 받는데 혈통 · 품종에 따라 천차만별로 비둘기 가격은 3천만 원짜리도 있으며 중국 사업가가 벨기에 경기용 비둘기를 31만 유로(약 4억원)에 구매한 실례도···
- 전서구처럼 귀한 새를 강탈당했다면 최충헌 형제처럼 군사를 일으킬 수도 있다는 것이 패널들의 공통된 생각,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고려사 정사에는 고려시대 전서구를 사용했다는 기록은 없고 고려시대 비둘기를 키웠다는 기록은 있음 “민간에서 비둘기와 매 기르는 것을 금지하였다. 관직에 있는 자들이 공무를 돌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려사 세가 고종 14년> “공민왕이 기르던 비둘기가 대궐에 있었는데 신우(우왕)가 항상 아끼고 사랑하였다.” <고려사 열전 이무방> 최충수의 비둘기는 전서구라고 보기보다는 관상용 비둘기였을 가능성이 크다는 <이익주 교수의 분석>
〇 최충헌의 <봉사 10조>
- 권력교체에 큰 영향을 미친 비둘기, 최충수에게는 중요한 가치를 지닌 것이었음은 분명하고 고려 최고의 실력자가 된 최충헌 형제 다음의 행보는?
이전의 무인 권력자들과 다른 행보를 보인 최충헌, 권력을 지키기에만 급급했던 그 동안의 이의방 · 정중부 · 이의민 등의 무인 권력자들, 하지만 최충헌은 명종에게 정치 개혁안 봉사 10조를 올린다.
- <봉사 10조> 제2조 필요 이상의 관원을 도태시킬 것 제3조 토지점유를 시정할 것 제8조 백관으로 하여금 사치를 금하고 검약을 숭상케 할 것 등으로 올바른 개혁안을 제시하며 문신으로써의 면모도 갖춘 최충헌
- 기존의 무신들은 권력은 잡았지만 비전을 제시하지 못했는데 기존의 무신과는 달리 개혁안을 통해 비전을 제시한 것, 하지만 최씨 정권에 대한 후대의 평가가 좋지 않은 것으로 보아 <봉사 10조>를 올리는 다른 의도가 있었을 것(?) 이의민 제거로 흉흉해진 민심을 달래기 위한 정치적 행위가 아니었을까(?)
- <이익주 교수의 분석>은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최충헌은 어떤 정치를 할 것인가 생각하고 대안을 제시한 인물로 독특한 모습을 보이는데 중앙의 권력을 장악하고 지방 사회를 안정시켜 민란을 진압하는 등 정치가의 모습을 보인다는 것, 실제로 봉사 10조가 성공을 거둔 것으로 보이는데 최충헌이 집권하고 다음 해에 봉사 10조를 제시 후 민란이 진정국면으로 접어드는 것으로 고려의 정치를 되살린 최충헌의 등장
- 또한 내시 50여 명을 궁에서 축출한 최충헌 “최충헌이 왕자로서 중이 된 소군 홍기 · 홍추 등이 궐내에 있으면서 정사에 간여한다 하여 사찰로 돌아가게 하였다.” <고려사절요 명종 26년>
〇 최충헌 형제, 왕을 갈아 치우다.
- <KBS 드라마 무인시대> 최고의 권력을 손에 쥔 최충헌 · 최충수 형제는 1197년 고려 제 19대 왕 명종의 폐위를 제안 · 결정하고 병력을 일으켜 궁궐을 장악하면서 명종의 측근 세력을 제거하고 결국 최충헌에 의해 비참하게 폐위된 명종, 무신정권의 격동 속에서 28년 간 왕위에 있었던 명종은 비참하게 폐위 당한다.
- 이의민 제거에 이어 명종을 폐위시킨 최충헌, 무신정변 이후 정중부 등에 의해 왕으로 옹립된 19대 왕 명종은 실제 권력은 없었지만 무신정변의 실권자들을 두루 거치면서 이의방 · 정중부 · 경대승 · 이의민까지 제거되는 격동 속에서 28년간 굳건히 왕위를 지키지만 5차 방어에 실패하고 결국 최충헌에게 무너진다. “당시 태자 왕숙은 내원의 복궁에 있었는데 최충헌의 사자가 와서 다그치자 태자비와 함께 궁궐 문을 걸어 나와 비를 맞으면서 역마를 타고 강화도로 쫓겨 갔다.” <고려사 열전 최충헌>
- 명종을 폐위시킨 이유?
기록에는 “지금의 임금은 왕위에 있은 지 28년이나 되어 늙은 데다 일에 염증을 내고 있습니다.” <고려사 열전 최충헌>
- 최충헌 형제가 명종을 폐위시킨 진짜 이유는?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고 명종 폐위를 시작으로 신종 · 희종 · 강종 · 고종까지 네 명의 왕을 옹립한 최충헌, 다른 무신들과는 달리 독자적인 정치가 가능하다고 판단한 최충헌은 왕도 갈아치울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을 것이라는 <신병주 교수의 분석>
- 명종의 폐위, 그 내막은?
최충헌이 집권했던 시기는 1170년 무신정변 이후 26년이 되는 시점으로 이즈음이 되면 무신정변의 주역들은 모두 제거되거나 은퇴해 자연스럽게 세대교체가 일어난 시점으로 최충헌은 새로운 세대를 대표하는 인물이라는 위상을 갖게 되는 것
- 또한 무신정권의 재정립을 위해서는 정통성 확립이 필요했지만 무신정권의 약점은 쿠데타를 통해서 권력을 장악한 것이어서 그 꼬리표를 떼어줄 인물이 바로 최충헌인 것, 왜냐하면 최충헌은 무신정변에 가담하지 않았기 때문에 무신정권의 재정립에 가장 적합한 인물로 부각될 수 있었던 것
〇 최충헌의 힘, 문객(門客)
- 반면(反面) 무신정변으로 왕위에 오른 명종, 최충헌이 명종을 폐위시킨 것은 무신정변의 흔적을 지워낸 것으로 이해될 수 있는데 최충헌이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던 이유 ① 시운(時運) ② 문객(門客)으로 끊임없이 최충헌을 지원하는 후원 세력
- 문객은 세력가의 집에 기거하면서 생활을 보장받고 주인에게 충성을 바치는 무리로 혈연적인 관계도 아니고 신분적인 예속민도 아니면서 사적인 주종관계로 문객이 무기를 들면 사병이 되고 글을 읽고 조언을 하면 참모가 되고 비서가 되는 존재로 무신정권기의 독특한 현상, 조선시대의 문객은 학문적 · 정치적 동지의 개념이지만 고려시대 문객은 사병의 느낌
- 최충헌 문객의 규모는?
고려시대 무신들은 가동 · 가노라고 불리는 사노비를 무장시켜 사병으로 양성하기도 하고 그 밖에 문객들이 무장을 하고 사병역할을 하기도 하는데 “최충헌은··· 따르는 문객도 거의 3천 명에 가까웠다.” <고려사 열전 최충헌> 3천 명이면 요즘의 연대 급 수준의 병력으로 문객을 거느리려면 막대한 재산이 필요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또한 문객들의 각종 비리를 최충헌이 비호했을 것이라는 주장이 좀 더 현실성이 있는 것
〇 최충헌 · 최충수 형제, 갈등의 시작
- 최충헌 형제가 명종의 폐위시키고 옹립시킨 왕은?
당시 형제가 왕으로 추대하는 인물이 서로 달랐는데 최충헌은 명종의 동생인 왕민 VS 최충수는 명종의 종친인 왕진, 고려시대에는 일반적으로 왕의 아들보다 동생을 후계자로 삼는 경향이 강해 최충헌의 생각이 보다 합리적인 것
- 최충수가 왕의 종친 왕진을 옹립하려 한 이유?
기록에는 “왕진의 계집종을 최충수가 사랑했던 까닭에 그를 세우고자 하였다.” <고려사 열전 최충헌> 실제는 금나라로부터 책봉 문제를 들어 최충수를 설득한 최충헌은 왕민을 왕위에 앉히면서 고려 제20대 왕 신종으로 즉위하고 당시 나이 53세
- 신종이 고령이기 때문에 최충헌 형제는 신종의 아들까지 고려하면서 신종을 통해 정통성을 확립하고 신종의 아들을 다음 왕으로 삼으려고 옹립했을 것이라고 해석된다는 <이익주 교수의 분석>
〇 최충수의 태자비 방출사건
- 한편, 고려의 태자비가 궁궐 밖으로 쫓겨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되는데 고려 조정을 발칵 뒤집은 태자비 폐위사건, 최충수가 자신의 딸을 태자비로 삼으려고 야욕을 드러낸 사건으로 최충헌은 최충수를 찾아가 혼인계획의 반대의사를 표현하면서 또 한 번의 갈등 국면을 맞는 최충헌 형제
- 태자비 방출사건의 전말은?
“최충수가 자기 딸을 태자비로 삼으려고 왕에게 강요했으나 왕은 불쾌해 했다.” & “최충수가 나인더러 주상께서 이미 태자비를 내보내시지 않았는가? 떠보니 나인이 그 말을 왕에게 알렸고 왕도 어쩔 수 없이 태자비를 내보냈다.” <고려사 열전 최충헌>
- 형 최충헌이 혼례를 반대했다는데?
가문이 한미(寒微)하여 함부로 왕실과 혼인했다가는 큰 코 다친다는 걱정 “과거 이의방이 자기 딸을 태자비로 삼았다가 결국 남의 손에 죽었는데 지금 그 패망한 전철을 밟는 것이 옳은 일이냐?” <고려사 열전 최충헌> 최충헌의 조언에 최충수는 딸 태자비 만들기에 포기선언!
〇 최충헌 VS 최충수, 형제의 난
- <KBS 드라마 무인시대> 최충수는 형의 강력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딸을 태자비 만들기에 재추진하면서 형제의 갈등이 다시 시작되고 결국 서로를 향해 서로 칼을 겨눈 최충헌 형제는 최충헌 부대의 맹공으로 최충수 부대는 참패하고 최충수는 겨우 몸을 피해 파주까지 도망을 치지만 결국 붙잡혀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 왕실과 혼인을 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사태의 본질은 혼인이 아니고 최충헌 · 최충수 형제의 권력다툼으로 혼인문제로 두 사람이 싸움을 벌였던 것인데 문제는 최충헌의 기세에 밀려 혼인을 포기하고 문객을 해산시키려 하자 “저희들이 공의 문객이 된 것은 공께서 세상을 덮을만한 기개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지금 도리어 이 처럼 겁을 내어 나약해지니 이는 저희들을 멸망시키는 것이니 한 번 싸워서 승패를 결정짓도록 해 주십시오” <고려사 열전 최충헌> 권력다툼은 최충수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문객들의 생명과 직결되었던 것으로 최충수도 쉽게 물러설 수 없었을 것이라는 <이익주 교수의 분석>
- 최충헌 역시 동생의 세력이 커지는데 탐탁지는 않았을 듯, 최충수가 태자의 장인이 되면 권력이 최충수 쪽에 집중될 것을 우려해 혼례를 반대한 것은 아닐까(?) 최충헌 입장에서는 당연히 그런 생각을 했을 것이지만 당시 최충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권력의 정당성과 안정성으로 불과 몇 년 전 자신의 딸을 태자비로 만든 이의방의 비참한 최후를 본 최충헌은 최충수에게 이의방의 전철을 밟지 않도록 설득하는데 이는 최충헌이 눈앞의 욕심보다는 정당성 · 안정성을 생각하며 다른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고 정치를 하려는 점이 다른 무신들과 달리 정치가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대목
- 동생 최충수를 제거하고 고려 일인자가 된 최충헌 “임금 보기를 마치 흙으로 만든 인형처럼 여기어 왕을 폐하고 세우는 것이 그의 손안에 있었다.” <동국통감 신종 7년> 이후 최충헌은 교정도감을 만들어서 정치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면서 4대 62년의 최씨 정권을 수립한다.
※ 교정도감 : 고려 후기 무신정권 최고의 권력기관
- <신병주 교수의 분석>은 최충헌이 처음에는 왕실과의 혼인을 반대했지만 훗날 자신도 왕실과 혼인관계를 맺는데 고려시대에는 왕실과의 혼인은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필수 코스? 훗날 강종의 서녀와 혼인을 한 최충헌, 또한 최충헌의 부인 임씨를 수성택주(綏成宅主)로 삼았는데 택주는 고려시대 왕녀에게만 붙일 수 있는 칭호로 최충헌 역시 전횡을 통해 최고 권력자의 입지를 굳힌 인물, 일반적으로 뭔가에 중독이 되면 손을 떨게 되는데 권력에 중독이 되면 영혼에 경련이 일어나는 것이어서 균형감각을 상실하는 것으로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하는 양상을 보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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