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his(한국사)

특명, 최충헌을 암살하라

mkpark2022 2016. 8. 16. 22:05

 

 


 

특명, 최충헌을 암살하라

 

 

끊임없이 이어졌던 최충헌의 암살 시도

- <KBS 드라마 무인시대> 1211년 고려 희종 7, 왕을 알현하기 위해 입궁한 최충헌 중관(中官)들이 최충헌의 사병들에게 왕의 분부로 술과 음식을 내려준다고··· 곁채 깊숙이 끌고 들어갔는데···” <고려사 열전 최충헌> 이때 갑자기 10여 명의 무사들이 공격하고 최충헌은 희종에게 황급히 도움을 청하지만 희종의 외면에 다급해진 최충헌은 장지문 사이로 몸을 숨기면서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다.

- 누가 최충헌을 암살하려 한 것일까?

사실은 최충헌의 암살 시도는 한두 번이 아니라는 것, 동생 최충수를 죽이고 최고 권력자가 됐지만 이미 수차례 벌어졌던 최충헌의 암살시도 신종 원년 5 사노 <만적의 난> “사노 만적 등 여섯 명이··· 먼저 최충헌 등을 죽인 후 각자 자기 주인들을 때려죽이고 노비문서를 불태워버리자” <고려사 열전 최충헌> 신종 28황주목사 김준거 등의 반란 모의 김준거가 몰래 내통해 모의한 후··· 용맹한자를 거느리고 개경으로··· <고려사 열전 최충헌> 신종 77장군 이광실 등의 반란 모의 ”30여 명의 사람들이··· 최충헌의 암살을 모의하다가 일이 발각되어··· 이광실이 주모자라고 실토했다.“ <고려사 열전 최충헌 희종 54청교역리 등의 반란 모의 청교역(개성)역리 세 사람이 최충헌 부자를 암살하려고 승려들을 불러모았다.“ <고려사 열전 최충헌>

- 대표적인 것만 4으로 계층불문하고 최충헌을 암살하려는 것, 그러나 모든 암살 시도는 실패로 끝나고 최충헌은 자기를 반대하는 사람을 차례로 제거하면서 권력을 공고히 해 나간다.

- 암살모의의 주동자뿐만 아닌 조금이라도 연루된 사람친속들까지 예외 없이 강력한 처벌을 하는데 박진재는 자신의 문객들로 관직에 오른 사람이 적음을 한스럽게 생각하고 늘 불평불만을 품고 있다가 술이 취하기만 하면 최충헌의 나쁜 점을 입에 올리곤 했다.“ <고려사 열전 최충헌> 이에 조카 박진재의 다리 힘줄을 끊는 형벌을 내리고 백령진(백령도)으로 유배시킨 외삼촌 최충헌, 절대 권력자의 비결은 추진력 · 결단력에 냉혹함까지 겸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교정도감과 도방

- 교정도감이 만들어진 계기는 청교역리 사건 최충헌은··· 성문을 폐쇄하고 가담자들을 대대적으로 수색했다.” <고려사 열전 최충헌> 교정도감은 청교역리 사건 이후에도 최충헌 반발 세력을 색출 · 처벌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 원래 도감은 임시기구인데 교정도감은 상설기구가 되면서 향후 최씨 무신정권의 확정기구로 정착하고 임시수사 기관이 아닌 상설 권력기관으로 전락하면서 왕이 아닌 최충헌을 위해 국가기관을 설치하는 시대, 현대에 들어서도 구 소련시절 국민의 활동을 감시 · 통제하던 비밀경찰 KGB의 역할이 있었는데 교정도감을 통해 반대파를 숙청할 공식적인 권력을 확보한 셈

- 교정도감이 처음에는 정보기관으로 시작하고 교정도감의 우두머리 교정별감은 최충헌이 오래 겸하면서 최충헌이 국가권력을 장악하게 되자 모든 명령은 반드시 도감(都監)을 통해 나오게 했으며···” <고려사 지 제사도감색 교정도감> 462년간 세습된 최씨 가문의 권력은 교정별감 직을 대대로 독점한 최충헌의 자손들에게 세습 (도감은 관청, 별감은 도감의 장()

- 최충헌은 이미 자신을 보호할 사병집단을 거느리고 있지 않았나?

도방은 고려시대 무신정권의 사병집단으로 창안자는 경대승이었으나 경대승 사후에 폐지되었으나 최충헌이 부활시키면서 도방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은 힘! 최충헌은··· 여섯 번()으로 나누어 각자 맡은 날에 자기 집에 숙직하게 하고 이를 도방이라 불렀다. 출입할 때에는 모든 번()이 호위하게 하였는데 마치 전쟁에 나가는 것처럼 삼엄히 무장했다.”<고려사 열전 최충헌>

 

최충헌 암살 시도, 사건의 주모자?

- 기록에는 돌연 승려와 속인 10여 명이 무기를 지니고 덮쳐서··· 종자 몇 사람을 공격했다. 최충헌이 변고를 알아차리고 황급히 왕에게 구원해달라고 요청했으나 왕은 대꾸도 없이 문을 닫은 채 들어주지 않았다.” <고려사 열전 최충헌>

- 최충헌과 희종의 관계는?

희종은 20세에 태자에 책봉되고 24세에 즉위하게 되는데 여러 가지 면에서 아버지 신종과는 차이가 있는 것이 20의 젊은 나이 태자로서 왕이 되기 위한 준비된 왕 무신정권이 옹립한 명종 · 신종과는 달리 아버지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음, 이런 점에서 희종은 나름대로 자기 왕권의 정당성에 대하여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고 최충헌과도 대립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왕이라는 것

- 그러나 희종의 즉위에도 최충헌이 상당한 영향을 미치는데 신종은 즉위하자마자 (등창)이 깊어져 태자에게 양위할 뜻을 밝히는데 최충헌이 문병 온 자리에서 진행된 신종 · 희종 양위, 그래서 최충헌에게 우호적이었던 희종 역시 즉위 직후 최충헌을 파격 승진시키고 보다 더 한 것은 은문상국(恩門相國)이라 칭하는데 이는 은혜로운 나의 재상! 이라는 뜻

- 최충헌의 암살 시도는 성공했을까?

사라진 최충헌을 집요하게 추적하는 최충헌의 암살자 들! “최충헌이··· 숨자 어떤 승려가 세 차례나 뒤졌으나 끝내 잡지 못했다.” <고려사 열전 최충헌> 간신히 생사의 고비를 넘긴 최충헌, 한편 급보를 받고 궁 밖에서 집결한 최충헌의 사병들은 최충헌의 생사를 몰라 섣불리 공격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으나 노영의라는 사람이··· 지붕위에 올라가서 우리의 공()께서는 무사하다고 고함을 지르자···” <고려사 열전 최충헌> 최충헌이 살아있음을 확인하고 궁궐로 진격한 사병들은 최충헌을 구해낸다.

- 그리고 암살 시도 사건의 주모자를 색출하기 위한 국문이 시작되고 상장군 정방보 등을 시켜 환관을 잡아··· 이들을 국문하니 곧 내시랑중 왕준명이 주모자가 되고···” <고려사절요 희종 712> 최충헌 암살 시도 사건의 배후는 바로 희종!

- 희종은 왜 최충헌을 암살하려 했나?

이 무렵이 되면 최충헌의 권력이 지나치게 커져 왕권을 위협하던 시기 최충헌의 권세가 임금과 다툴 정도가 되고 위세가 온 나라에 떨치게 되자 자기의 비위에 거슬리는 사람이 있으면 즉시 처형해버렸기 때문에 다들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못했다.” <고려사 열전 최충헌> 점점 강해지는 최충헌의 권력에 대한 희종의 반감이 암살 시도 사건의 원인일 것이라는 <이익주 교수의 분석>

- 실제로도 나랏일을 논의 하는 장소는 최충헌의 집 최충헌이 사저에 머문 채 문·무관의 인사를 결정하여 왕에게 아뢰면 왕은 머리를 끄덕이고···” & “최충헌은 궁궐에 출입할 때 평복을 입고 일산(日傘)을 썼으며···” <고려사 열전 최충헌> 왕에 대한 예의는 전혀 갖추지 않았던 것

- 또한 최충헌에 대한 괴소문이 나라 안에 퍼지는데 웅장하고 화려한 별당을 지은 최충헌 사내아이와 계집아이를 몰래 붙잡아 오색 옷을 입혀서 네 모퉁이에 묻어 토목공사의 해로운 기운을 물리친다는 유언비어가 떠돌자···” <고려사 열전 최충헌> 사람들이 아이를 숨기거나 도망을 가는데 이는 최충헌에 대한 당시 민심을 알 수 있는 사건

- 우리의 상식대로라면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할 가능성이 높은데 축적한 재산으로 관리들을 불러 잔치를 열거나 국고에 내놓기도 하여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정치적 제스처를 취했던 것 최충헌이··· ·은과 보배를 왕부(王府)에 헌납하여 나라의 재정을 돕고자 하는데 어떤가?” 하고 묻자 바른 말을 잘하는 최충헌의 문객 중의 한 사람이 그러자 노연우가 그럴 것이 없이 그냥 두어 필요한 일에 쓰시고 더는 백성들로부터 가렴주구하지 않는 편이 낫겠습니다.” <고려사 열전 최충헌> 차라리 내놓지 말고 빼앗지를 말라는 충고, 한편 부정부패를 일삼았지만 이미지 관리는 철저했던 최충헌

 

희종의 절대 권력, 최충헌 암살을 서두르게 한 사건?

- 희종의 왕권을 위협한 명종의 맏아들 왕숙(王璹)의 개경 귀환! 왕숙은 1173년 태자에 책봉됐지만 1197년 명종 폐위와 함께 강화도로 유배를 간 것, 하지만 121012월 개경으로 돌아오는데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명종의 맏아들 왕숙은 왕위계승 후보왕숙의 귀환은 희종의 왕권을 위협하는 것

- 왕숙은 어떻게 개경으로 돌아올 수 있었을까?

희종의 최충헌 암살 시도 사건 1년 전에 갑자기 개경에 등장한 왕숙 왕숙을 수사공·상주국·한남공으로 책봉하고···” <고려사 세가 희종 71> 이는 명종의 맏아들 왕숙이 왕족으로 복권되는 것을 의미

- 최충헌은 명종이 죽었을 때 맏아들이 문상도 못하게 하는데 최충헌이 불가하다고 굳게 고집하니··· (왕숙이 명종의)장례에 참여하지 못하였다.” <고려사절요 신종 5년 윤십이월> 그런데 갑자기 왕숙을 개경으로 불러들이고 왕족으로 복권시킨 최충헌, 이는 최충헌이 희종의 왕권을 위협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최충헌과 희종 사이에 눈에 보이지 않는 암투가 계속되고 있었던 것이고 최충헌 암살 시도는 희종이 먼저 선수를 친 것으로 볼 수 있다<이익주 교수의 분석>

 

최충헌, 희종을 살려주다

- 기록에는 최충헌이··· 왕을 폐하여 강화현으로 옮겼다가 조금 후에 자란도(영종도)로 옮기고 태자 지()를 인주로 내쫓으며 덕양후 서를 교동현으로 내쫓고 시녕후 위를 백령현으로 내쫓았다.” <고려사절요 희종 712> 무신정권에게 유일하게 맞선 왕, 희종은 한순간에 몰락하고 만다.

- 최충헌 암살 시도 사건 이후 희종을 살해하겠다는 부하를 말린 최충헌, 최충헌은 맨손으로 의종의 척추를 꺾어 살해한 이의민의 사태를 반면교사로 삼고 임금을 죽인 신하라는 비난은 받고 싶지 않았던 것 최충헌이 말하기를 이와 같이 하면 나라가 장차 어찌 되겠느냐? 뒷세상의 구실이 될까 두렵다 하였다.” <고려사절요 희종 712>

- 하지만 수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는 최충헌, 심지어 내가 너그러운 사람이 아니었던들 왕의 부자가 지금 목숨을 보존할 수 있었겠는가?” <고려사 열전 최충헌> 희종의 폐위 후 더욱 강력한 권력을 거머쥔 최충헌

 

최충헌, 명종의 맏아들을 왕으로 세우다

- 희종 폐위 후 즉위한 강종은 즉위 당시 60로 최충헌에게는 덜 위협적인 존재로 고려 최고령으로 즉위한 강종은 조선시대까지 비교해도 최고령으로 태조 이성계가 58세에 즉위

- 희종을 쫓아내고 다음 왕을 세우려 했을 때 왕숙은 왕위 계승자로서 명종의 맏아들이라는 명분이 있는 인물로 강종 즉위와 동시에 강종의 19살 된 아들을 태자로 책봉하고 훗날, 강종의 아들을 왕으로 세우겠다는 최충헌과 강종 사이의 타협이 있었을 것이라는 <이익주 교수의 분석> 실제로 강종의 아들 고종은 고려 최장기 46년간 재위한 왕이 되고 최충헌 집권기 명종, 신종 · 희종 폐위, 강종, 고종까지 다섯 명의 왕이 교체된다.

 

거란, 고려를 침공하다

- 1216년 거란군이 고려를 침략하지만 고려는 거란군을 막을 방도가 없는데 이유인 즉 단오에 최충헌이 백정동의 궁궐에서 그네놀이를 열고 4품 이상의 문·무관에게 사흘 동안 잔치를 베풀어 주었다.” 급보를 전하였으나 황당한 일이 벌어져 최충헌은··· 변방에서 급보가 올라오면 그때마다 어찌 사소한 일로 역마를 귀찮게 하고 조정을 놀라게 하는가? 꾸짖으며 보고한 사람을 죄다 유배 보냈다.” <고려사 열전 최충헌> 그래서 섣불리 보고도 하지 못한다는 것

- 더욱 심각한 문제는 거란과 대적할 수 있는 고려군이 없다는 것, 능력 있는 병사들은 모두 최충헌의 사병 소속 최충헌은 자기 집에서 전투 연습을 검열했는데 문의 섬돌이 가팔라 말이 올라가지 못하자 사람으로 말 모습을 하게하고서 진격하고 후퇴하며 서로 싸우게 하였다. 또한 거란의 장군들이 금패(金牌)를 만들어 이것을 사로잡아 죽이게 한 다음 개가를 울리면서 귀환하게 꾸미기도 하고 기생들을 시켜 봉래산 선녀가 와서 축하하는 춤을 추게도 했다.” <고려사 열전 최충헌> 실제 전쟁에 나가 용맹하게 싸워야 할 무사들이 훈련놀이에 빠진 군사들

 

거란의 고려 침략, 최충헌의 대응은?

- 거란의 고려 침략, 당시 정황은?

13세기 초 동북아시아 국제 질서의 변화, 다음 세대의 주인공이 되는 몽골이 등장하면서 강성해지자 금나라 치하에 있던 거란족의 일부가 몽골군에게 쫓기는 상황에서 이 군사들이 고려에 들어오게 된 것으로 고려 측의 기록으로는 수만 명, 원나라의 기록으로는 9만 명의 대부대가 고려로 들어오게 된 것

- 거란은 고려를 침략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몽골에 쫓겨들어 온 것이어서 식량 등의 모든 것을 자급자족해야 하는 터라 고려를 약탈했던 거란군은 압록강을 건넌지 한 달 만에 지금의 평안북도 일대를 유린하면서 3년 동안이나 이어진 거란과의 전쟁

- 이러한 위기의 상황에서도 자신을 경호하는 사병집단 양성에 집착한 최충헌 용맹한 자들은 모두 최충헌 부대의 문객들인 반면 관군은 약골로 아무 쓸모가 없었다.” <고려사 열전 최충헌> 당시 최충헌의 사병들의 규모는 사열하면 그 부대의 길이가 2~3리로 약 1Km로 수만 명의 사병이 있을 것인데 창 자루에 은병을 서너 개씩 매달고서 나라사람들에게 과시하며 군사를 모집하였다.” & “문객들 가운데 관군으로 종군하겠다고 청하는 사람이 있으면 곧바로 먼 바다 섬으로 유배 보냈다.” <고려사 열전 최충헌> 사병의 대열에서 이탈하지 못하도록 관리하며 나라의 안위보다는 자신의 안위를 더 중히 여겼던 것

- 거란과의 전쟁 중에도 최충헌 암살 시도 사건이 발생하는데 흥왕사 · 홍원사 · 경복사 · 왕륜사 · 안양사 · 수리사 등에서 종군한 승려들이 최충헌을 죽이기로 모의한 후···” <고려사 열전 최충헌>

- 승려들은 왜 최충헌을 제거하려 했나?

기록에 따르면 자주 역사(役事)를 일으켜서 절들의 재산을 빼앗았으므로 승려들이 그를 원망하고 있던 차라 그의 집을 먼저 부숴버린 뒤, 최충헌의 집으로 향하였다.” <고려사 열전 최치원>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것 보다는 좀 더 뿌리 깊은 갈등은 고려의 불교계는 정치 권력과 밀착되어 있었고 무신란 이후에도 유지된 불교계와 문벌 귀족들의 관계

- 그러나 최충헌 집권 후 단행된 불교계 탄압 통치에 도움이 되는 사찰이외에는 남김없이 없애버림으로써··· 후대의 사람들이 불칙한 마음을 내지 못하게 하십시오.” <고려사 열전 최충헌 봉사 10> 그래서 불교계는 최충헌을 반대했고 공격에 이른 것

- 승려들은 최충헌 사병과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최충헌의 보복이 시작 최충헌의 군사들이 추격해 300여 명의 승려를 죽인 후···” <고려사 열전 최충헌> 이튿날 최충헌이 성문을 폐쇄하고 도망간 승려들을 대대적으로 수색하여 이들을 모두 죽였는데 시체에서 흘러내린 피가 내를 이루었다. 산처럼 쌓인 시체 때문에 사람들이 몇 달 동안이나 지나다니지 못했다.” <고려사 열전 최충헌>

- 또한 거란과의 전쟁에서 승전한 장수들을 경쟁자로 여겼던 최충헌, 조충은 최충헌의 측근으로 관직에 나아가 1218년 서북면 원수로 근무하면서 거란군을 대파하고 이듬해에 개선행사를 하려하는데 이를 취소한 최충헌 지난번에 거란과의 싸움에서 공을 세웠는데도 뇌물을 바치지 않아서 벼슬을 얻지 못했다고 탄식했다. 술자리에 있던 자가 밀고하자 최충헌이··· 그들을 체포하고 그 일당 일백 명과 함께 보정문 밖에서 참수했다.” <고려사 열전 최충헌>

- 고려 VS 거란, 전쟁의 결과는?

조충 부대가 개경으로부터 군대를 이끌고 위쪽으로 올라가면서 평양성 근처에 있는 강동성으로 몰아넣는데 성공하지만 때마침 거란군을 쫓아 내려온 몽골군이 동북쪽으로부터 또 다른 거란족을 쫓아내려와 강동성으로 몰아넣자 거란을 몰아내기 위해 몽골·동진과 연합한 고려는 진압은 하지만 고려의 입장에서는 거란도 적이지만 몽골과 동진은 더 큰 적으로 여우를 몰아내려다 호랑이를 들인 셈으로 이것이 고려에게는 더 어려운 문제에 직면하게 되는 출발점이 된다.

 

최충헌의 죽음

- <KBS 드라마 무인시대> 끝내 자신의 권력을 지켜낸 최충헌, 무신정권의 최장기인 23년간 최고 권력을 누린 최충헌 최충헌이 병이 나자··· 은밀하게 아들 우에게 이르기를 내가 장차 일어나지 못하게 되면··· 너는 다시 오지 말라.‘ <고려사절요 고종 69> 최충헌은 다른 무신정권의 집권자와는 달리 천수를 누리고 12199월 일흔 하나의 나이에 세상을 떠나는데 심지어 우아하게 세상을 떠난다 임자일에 달이 형혹성을 범하였다. 일관이 아뢰기를 귀인이 죽겠습니다. 하니···“<고려사절요 고종 69> 그러자 수십 명의 악공을 불러 하루 종일 연주를 하게 만들고 자정쯤 눈을 감게 된다. ”백관이 흰 옷을 입고 회장(會葬)하였으니··· 모두 왕의 상사(喪事)와 비슷하였다.“ <고려사절요 고종 69>

- 최충헌이 최우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말의 의미는?

병상에서 내가 위독하더라도 문병을 오지 말라는 얘기는 최충헌은 맏아들 최우를 후계자로 삼고 싶었지만 최충헌의 측근세력은 최우의 아우 최향을 다음 후계자로 지지하자 그들이 최우를 해칠 것을 우려해 자신의 병문안을 오지 못하게 했을 것이라는 <이익주 교수의 분석>

- 예상대로 최충헌의 사후 후계 자리를 놓고 형제간의 싸움이 벌어지는데 결국 맏아들 최우가 이름을 최이로 바꾸면서 최이가 최충헌의 대를 잇는 후계자가 된다.

- 왜 최충헌은 스스로 왕이 되려하지 않았나?

<신병주 교수의 분석>은 왕위를 욕심냈던 지난 무신 집권자들의 몰락을 보면서 반면교사로 삼은 최충헌, 결국 강한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방법으로 왕이 되는 대신 왕을 교체시키는 방법을 선택했을 것이라는 것


최충헌의 신분 세탁?

- 최충헌은 강종의 서녀를 셋 째 부인으로 삼고 둘째 아들 최향은 종실 수춘후의 딸과 결혼시키며 셋째 아들 최성은 희종의 딸 덕창궁주와 결혼시키는데 자신이 폐위시킨 왕의 딸과 자신의 자손을 혼인시킨다.

- <이익주 교수의 분석>은 고려의 실력자들이 왕실과의 혼인을 원했던 것은 고려 왕실의 신성성 때문으로 최충헌 집권 이전의 고려에서는 왕비가 낳은 공주는 모두 족내혼이었는데 물론 왕건의 두 딸이 경순왕과 결혼한 사례가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아직 제도가 정착되기 이전이고 제도가 정착된 이후는 최성과 덕창궁주의 혼인이 최초의 족외혼으로 고려 제28대 충혜왕에 이르기 까지도 유일한 족외혼 사례,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충헌 자신이 왕이 되지 않은 것은 고려 왕실의 신성성을 감히 침범할 수 없다는 판단을 했기 때문이라는 것

- 또한 <신병주 교수의 분석>은 최충헌이 왕이 되려 했다면 각계각층에서 엄청난 저항이 있었을 것으로 최충헌은 왕실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에 버금가는 권력을 가지는 방법을 선택했을 것이라는 것

- 다소 역설적이긴 하지만 최충헌이 오랜 기간 집권을 할 수 있었던 비결은 왕실의 권위를 이용해 막강한 힘을 손에 넣고 최씨 가문의 권력을 세습하는데 성공하여 우리 역사상 최초 · 유일하게 신하가 4대까지 권력을 세습하는 것이 가능했다는 <이익주 교수의 분석>

 

최충헌이 고려에 남긴 것

- 최충헌에 대한 역사의 평가?

지금 우리는 과연 어떻게 살 것인가? 를 고민하게 만드는 기록 최충헌은 미천한데서 몸을 일으켜 나라의 정사를 전권하였다. 재물을 탐하고 여색을 좋아하며 벼슬을 팔고 옥사를 흥정하였으며 심지어는 두 왕을 내쫓고 조신을 많이 죽이기까지 하여서 크나큰 악이 위로 하늘에까지 통하였는데도 목숨을 잘 보존하여 방안에서 죽었으니 천도를 알 수 없음이 이와 같은가 하였다.” <고려사절요 고종 69> 왜 하늘은 이런 사람을 그냥 두었나? 하늘도 무심하시지! 하는 역사적 평가

- 한편으로는 최충헌 개인이 아닌 최충헌 시대를 평가해 보는 시각도 필요한 것이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한 후 나라를 이끌어갈 문인들을 등용한 최충헌, 이전의 무신 집권자들과는 다른 행보로 최충헌 집권기에 등장한 문인들이 훗날 고려의 새로운 체제를 만드는 신진사대부로 성장하여 최충헌 시대에 대한 평가는 다를 것 같다는 <이익주 교수의 분석> 최충헌 개인에 대한 평가와 최충헌 시대에 대한 평가가 다를 수 있다는 것

- <신병주 교수의 분석>은 최충헌의 한계는 나라와 백성을 다스리기 위한 것이 아닌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한 정치를 한 것으로 왕정은 제도가 뒷받침되기 때문에 왕의 무능을 극복할 수도 있지만 독재는 최고 권력자의 자질이 국운을 좌우하게 되는 것

- 일반적으로는 저능한 지도자가 무능한 정권을 구축해서 나라를 망가뜨리는데 반대로 최충헌은 지능적 정치꾼이 무능한 왕권을 만들어 나라를 망가뜨리는 꼴이 아닌가? 하는 <류근 시인의 생각>

- 최충헌 집권기에 혼란에 빠진 공적 권력과 사적 권력의 개념, 관리들이 국가에 대해서 충성을 한다고 했을 때, 공적권력에 대한 충성은 국가적 대의를 위한 것이고 사적권력에 대한 충성은 대가를 바라고 개인을 위한 것이 되면서 충성이 갖는 의미가 흔들리는 것으로 나라를 위해 거란과 싸우는 것이 고려를 위한 것이냐? 최씨 정권을 위한 것이냐? 로 뒤섞이게 된다는 것, 최충헌으로 부터 시작된 권력의 사사화(私事化), 그런 점에서 최충헌이 훗날 고려에 남긴 부정적 영향은 결코 작지 않다<이익주 교수의 분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