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서막 - 몽고 사신 저고여 살해되다
〇 몽고 사신 저고여 살해 사건
- 1225년 음 1월 의문의 살인 사건이 발생하는데 압록강 너머에서 살해된 몽골 사신 저고여, 하지만 범인으로 추정할 수 있는 단서는 발견되지 않고 미궁 속에 빠진 사건, 경위를 조사하던 몽골은 고려를 의심하기 시작하고 결국 이 사건은 전쟁의 빌미가 되고 만다.
- 저고여가 고려에 사신으로 왔다는 기록 외에 다른 기록은 없고, 당시는 몽골제국의 건국자 징기스칸이 서서히 영토를 넓혀가는 시기로 자국 사신을 죽인 나라에 대해서는 끝까지 보복을 하는 원칙을 가지고 있었던 것만은 분명
〇 고려와 몽골의 첫 만남
- 고려와 몽골이 외교관계를 맺게 된 계기?
1216년 거란이 몽골에 쫓겨 고려를 침입하자 3년 만에 거란을 강동성에 몰아넣고 때마침 거란족 진압을 돕겠다며 고려 국경을 넘은 몽골은 고려에 강제적으로 연합을 제안하여 거란족을 진압하면서 고려와 몽골은 처음 만나게 된다.
- 당시 고려군 장수로 활약한 김취려와 조충은 몽골군 원수 카치윤과 형 · 동생 관계를 맺는다 “카치윤이 나이를 물었다. 김취려가 예순에 가깝소! 라고 하자 카치윤은 나는 아직 쉰이 못된데다가··· 그대가 바로 형이고 나는 동생이요.” <고려사 열전 김취려>
- 사실은 당시 김취려의 나이는 46세로 10살 가까이 나이를 속여 형이 된 김취려 “카치윤이 다시 김취려에게 조충의 나이를 묻자 김취려가 원수께서 나보다 나이가 많소! 라고 하니···” <고려사 열전 김취려> 이는 김취려의 개인적인 욕심보다는 기선제압을 위해 나이를 속였을 것 “김취려는 신장이 6척 5촌으로 크고 수염이 배 아래로 드리울 정도로 길었다.” <고려사 열전 김취려>
- 몽골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대한 고려의 반응은?
거란과의 전쟁 중에 몽골이 고려 국경을 넘어온 상황이라서 크게 당황한 고려 “몽골은 이적 중에서도 가장 흉악하고 일찍이 우호관계도 없었다. 그러므로 중외가 모두 놀라고 진실이 아닐 것으로 의심하였다.” <고려사절요 고종 5년 12월> 하지만 몽골의 제안을 고려는 거절할 수 없었던 것이 자칫하면 몽골과도 전쟁이 벌어질 수 있는 상황이라서 어쩔 수 없이 몽골과 함께 거란족을 진압하고 몽골은 형제맹약을 요구한 것
〇 형제맹약 고려와 몽골의 동상이몽
- 고려를 고구려와 같은 나라로 생각했던 몽골, 1260년 고려 태자가 쿠빌라이를 만난 적이 있는데 “황제의 동생(쿠빌라이)이 말하기를 고려는 만 리나 되는 나라이고 당태종이 친히 정벌하였으나 굴복시키지 못하였는데 지금 그 나라의 세자가 스스로 나에게 귀부해오니 이것은 하늘의 뜻이다.” <고려사절요 원종 원년 3월>
- 그 정도로 국제정세에 어두웠던 몽골이 패권국가가 되는 것이 가능했다는 것은 신기한 일이고 고려에 형제 맹약을 요구한 것은 고구려를 높이 평가했기 때문인 듯하여 국제적 위상이 대단했던 고구려
- 고려 외에 몽골과 형제 관계를 맺은 나라는?
몽골이 다른 나라와 형제 관계를 맺은 건 예전에 없던 일로 그 전까지는 다른 나라를 오로지 정복하고 멸망시키지만 최초로 고려와 형제 맹약을 맺는데 그 이유에 대해서는 밝혀지지 않고 고려를 강대국 고구려라 생각했거나 또는 당시 몽골의 주 정복 대상은 중앙아시아와 중동으로 동쪽의 고려와는 전쟁 대신 외교관계를 수립했을 것이라는 <이익주 교수의 분석>
- 형제맹약의 속사정?
이야기 속 의좋은 형제는 서로 돕는 형제, 그러나 몽골이 제안한 형제관계는 상납관계로 형제 맹약 후 고려에 사신을 보내 공물을 요구한다. “그들은 수달 가죽 1만 장, 고운 주단 3천 필, 가는 모시 2천 필, 솜 1만 근··· 등을 요구하였다.” <고려사 고종 8년 8월> 문제는 1221년 한 해 동안 4번이나 찾아와 고려의 공물을 빼앗아가는 몽골 사신
- 몽골이 고려에 무리한 공물을 요구한 이유?
동상이몽으로 형제관계에 대한 해석이 서로 달랐던 고려와 몽골, 1126년 금나라와 형제관계를 맺은 경험이 있는 고려는 당시 <칭신상표(稱臣上表)>로 신하라고 낮추고 표문을 올리는 것으로 관계를 맺었던 경험으로 고려가 생각한 형제맹약은 전통적 사대관계였지만 <투배(投拜)>라고 표현한 몽골은 항복하여 복종한다는 뜻으로 형제맹약을 복속관계로 고려에 정복자의 권리를 주장한 것
- 또한 극심했던 몽골 사신들의 횡포 “저고여 등은 명령을 전달하고 전(殿)을 내려가면서 제각기 품속에 넣었던 물건을 꺼내 왕 앞에 내던졌다.” & “저고여 등이 객관에서의 대접이 만족스럽지 않은 것에 노하여 활을 쏘기도 하고 몽둥이로 치기도 하였다.” <고려사 고종 8년 8월>
- 고려가 생각한 형제맹약은 예를 통한 조공으로 생각했는데 몽골은 힘을 앞세운 갈취를 앞세웠던 것 “그대(몽골 사신)가 도호부에 있을 때 한 사람을 직접 쏘았는데 생사를 알 수 없습니다.” <고려사절요 고종 8년 9월>
- 몽골의 무리한 요구에 대한 고려의 대응?
고려의 방식을 고수한 고려, 난동을 부린 사신은 나중에 죽임을 당하는 저고여 “최공 등이 달아나 문을 나와서 자물쇠를 걸어버리니 몽골의 사자 저고여가 나오지 못하였다.” <고려사절요 고종 8년 9월> 또한 공물 요구에 대해서도 “붓은 본래 노란 쥐의 털로 만든 것인데 노란 쥐는 우리나라에 있는 것이 아니어서 요구에 응할 수 없습니다.” <유승단, 동전서> 하고 끝까지 보내지 않고 그리고 1년에 한 번 10명 이내의 사신을 보내기로 했던 몽골이 더 많은 사신을 보내게 되자 몽골에 약속을 지킬 것을 요구한다.
- 또 중요한 사실은 몽골이 처음 형제관계를 맺을 때 고려 국왕이 직접 징기스칸을 찾아올 것을 요구한 몽골에 대하여 고려는 끝까지 전례가 없다는 이유로 친조(親朝)를 거부한다.
〇 저고여 살해사건의 범인?
- 몽골 사신 저고여를 죽인 범인은 누구?
몽골의 고려 침략 명분이 된 저고여 피살사건, 현장에 남아있던 비단은 고려에서 받아간 공물의 일부일 것으로 추정 “몽골 사신이 압록강을 건너면서 공식 예물인 수달가죽만 챙기고 나머지 비단 등의 물품은 모조리 들판에 버리고 갔다.” <고려사 고종 12년 정월> 공물유기로 고려에 불만을 드러낸 몽골 사신들
- 저고여 살해 사건의 첫 번째 유력한 용의자는 고려 “너희(고려)는 화살을 쏘아 저고여를 찾으러 간 사신을 쫓아내었다. 이는 너희들이 저고여를 살해했기 때문이었다.” <고려사 고종 18년 12월> 몽골측의 입장은 고려가 범인이 아니면 왜 그랬겠냐? 는 입장
- 그러나 고려 측에서는 진상조사단을 몽골 복장을 한 여진족인 줄 알았다는 것, 고려가 이런 해명을 내놓는 이유 “그전에 (여진족) 가불애가 상국(몽골)의 복색으로 변장을 하고 여러 차례 국경을 침범해 왔다.” <고려사 고종 18년 12월> 그러니 충분히 착각할 만하고 이쪽 압록강은 몽골사신이 다니는 길이 아니고 원래 몽골 사신은 동진 · 두만강 쪽을 거쳐서 다녔다는 국경수비대의 증언, 뿐만 아니라 사건이 일어난 압록강 너머는 국경 밖이라서 우리의 관할 구역이 아니라면서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는 고려의 해명
- 다른 용의자로 동진을 범인으로 지목한 고려, 갑자기 동진이 튀어나온 이유는?
이 무렵 동진은 몽골과 외교를 단절하고 대립하던 시기로 고려에도 국서를 보내 “동진국에서 사신을 보냈는데··· 몽골 징기스칸은 먼 외국에 오래 나가 있어 그 소재를 알 수 없으며··· 우호관계를 이미 끊었습니다.” <고려사 고종 18년 12월>
- 고려와 독자적인 외교 관계를 맺으려 한 동진, 하지만 진실을 확인하기 까지는 동진의 말을 믿지 않는 고려는 동진이 몽골인으로 위장해 저고여를 습격하고 몽골과 고려 사이를 이간질 한 것이라 주장
※ 동진 : 거란을 토벌하기 위해 금나라에서 파견한 포선만노가 금나라를 배신하고 새롭게 세운 나라로 동진은 금나라와 같은 여진족
- 세 번째 유력한 용의자는 몽골이라는 설로 몽골이 고려를 압박할 빌미를 찾기 위해 자작극을 벌였을 가능성도 있는 것으로 <통킹만 사건>은 1964년 통킹만에서 일어난 북베트남과 미군의 해상전투로 미군의 베트남전 개입을 정당화하기 위해 조작되었다는 논란이 있는데 국가 간에서는 흔히 있는 일, 최근 터키 쿠데타는 대통령의 권력 장악을 위한 자작극이라는 견해도 제시되고 있어 아무튼 범인을 특정할 증거는 없는 상황이지만 몽골은 고려를 범인으로 단정하고 저고여 피살 사건 이후 국교 단절
- 몽골의 의혹제기, 과연 합리적인가?
저고여 피살 지역은 여진족들이 여러 차례 침범했던 지역으로 동진은 몽골과의 외교 관계도 단절되고 고려 회유에도 실패하여 동진 조정에서 몽골과 고려 양국 사이를 이간하기 위해 벌인 일은 아닐까(?)
- 추리의 정석은 해당 사건으로 이득을 본 측은 어디인가?
저고여 살해 사건으로 가장 이득을 본 나라는 고려 ① 몽골과 외교가 단절되면서 무리한 조공에서 벗어남 ② 몽골 사신의 횡포에서도 해방 <신병주 교수의 추리>는 몽골 사신 중에서 횡포가 가장 심했던 저고여가 살해됨으로써 다른 사신들에게 본보기가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는 것
- 몽골 사신들이 경로를 바꾼 이유?
형제맹약 당시 동진은 몽골에 복속된 상태여서 몽골사신은 동진 · 두만강을 거쳐 고려에 입국했으나 1224년 동진과 몽골의 관계가 단절되면서 동진영토 경유가 불가하여 압록강을 통해 고려에 왕래했던 것
- 결국 범인을 찾을 수 없었던 약 800년 전의 저고여 피살사건, 우연한 사건이 정치적으로 이용됐을 가능성도 있고 좀 더 중요한 것은 이 사건이 그 후에 미치는 영향으로 범인보다 중요한 것은 사건 이후의 영향력을 분석하는 것으로 <이의전의(以疑傳疑)>는 의심스러운 것은 의심스러운 대로 전한다는 뜻
〇 몽골, 고려를 침략하다
- 저고여 피살 사건 6년 후인 1231년 음8월, 고려를 침공한 몽골은 저고여 피살 사건의 책임을 묻겠다는 명분으로 고려를 침공하고 순식간에 포위된 함신진은 몽골에 항복하지만 죽음으로 저항한 철주, 고려와 몽골의 기나긴 전쟁의 서막이 오른 것이다.
- 저고여 피살 사건 6년 후에야 몽골이 고려를 침공한 이유?
우리의 근대사에서도 흥선대원군 시절의 1871년의 신미양요는 미국의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빌미로 조선을 개항시키려고 무력침략을 한 사건으로 침략의 원인을 1866년 미국의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조선에 통상을 요구하다가 대동강에서 불에 탄 사건을 빌미로 삼는다.
- 몽골이 이 시점에 고려를 공격한 이유?
6년 전 고려와 형제관계를 맺던 시기와는 달라진 몽골의 상황, 몽골의 관심이 중앙아시아 · 동유럽 쪽에서 중국으로 전향되던 시기로 금나라를 공격하기 전에 금과 사대관계를 맺고 있는 고려를 제압할 필요를 느끼고 있었던 것, 그래서 6년 전 저고여 피살사건을 빌미로 고려를 공격했으나 이 사건이 아니었더라도 전쟁은 일어났을 것이라는 <이익주 교수의 분석>
- 몽골과 국교단절 이후 고려의 대비는?
고려는 저고여 피살 사건에 대하여 관여하지 않았다고 확신을 했기 때문에 몽골의 공격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
- 몽골의 공격에 대한 고려의 대응은?
8월 29일 몽골군이 철주를 함락시키자 9월 2일 고려는 3군을 편성하여 파병하며 나름대로 신속하게 대응하지만, 사실은 전쟁 초반 침략군이 몽골인지 여진인지도 확인할 수 없었던 고려는 적군이 몽골이라는 것을 알게 된 시점은 “몽골인 두 명이 공문을 휴대하고 평주로 찾아왔다. 공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아군은 투항해 온 자들을 살려주었다. 너희 나라가 항복하지 않으면 끝까지 돌아가지 않을 것이며 항복하면 동진으로 진격할 것이다.” <고려사 고종 18년 10월 초하루> & “평주에 수감되어 있던 몽골인 두 명을 개경으로 압송해 왔는데 신원을 확인한 후에야 그들이 정말 몽골군인임을 믿게 되었다.” <고려사 고종 18년 10월 임신일> 항복하라고 보낸 사신인데도 너 가짜지? 하며 잡아들인 것으로 적이 쳐들어 왔는데도 누군지 알 수 없는 상황
- 이 때의 문제가 됐던 것은 정보의 부재로 제대로 된 정보를 입수할 수 없었던 고려, 13세기 몽골은 중앙아시아를 거쳐 동유럽까지 진출한 상태였는데 세계정세를 고려에서는 알 수 없었고 금나라를 통해서 몽골의 정보를 얻었던 고려는 왜곡된 금나라의 정보로 몽골의 국력을 축소해서 듣게 된다.
- 결국 몽골의 기습으로 큰 피해를 입은 고려 국경 지역, 함신진은 몽골군에 포위당하자 항복하고, 반면 끝까지 항쟁하며 싸운 철주 “판관 이희적은 (철주)성안의 부녀자와 어린 아이들을 모아 창고 안에 넣어 불을 지르고 장정들을 거느리고 스스로 목을 베어 죽었다.” <고려사절요 고종 18년 9월>
- 기동력이 강했던 몽골의 기마부대는 여러 말을 갈아타면서 빠르게 이동하는데 황주에서 몽골군에게 기습당한 고려군, 이때 혜성처럼 나타난 지원군 초적(草賊), 초적은 무신정권의 수탈에 항거해 도적이 된 농민들로 몽골군이 침입하자 무신정권과 손잡고 몽골에 맞서 싸운 것 “마산(파주) 초적의 괴수 2인이 스스로 항복하고 최우에게 와서 말하기를 우리는 정예병 5천인으로 몽골군을 격퇴하는 것을 돕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고려사절요 고종 18년 9월> 고려군에 힘을 불어넣은 초적의 활약으로 평소에는 관군에게 쫓기던 자들이었으나 나라의 위기 앞에 하나가 된 관군과 초적
- 마산 초적들의 제의로 아이디어를 얻은 당시 무신정권 집권자 최우 “최우가 사람을 보내 광주 관악산의 초적이 주둔한 곳에 가서 적의 괴수 5인과 정예 50인을 회유하여··· 우군에 충당하였다.” <고려사절요 고종 18년 9월>
- 세계 최강 몽골군에 맞선 고려군?
당시 몽골군은 세 갈래로 나뉘어 고려를 공격해 오는데 선봉대는 빠른 속도로 충주까지 진격하고 몽골군의 선봉대를 충주에서 막은 고려군은 충주를 지켜내면서 안전해진 경상도 지역, 그리고 몽골군 원수 살리타이가 지휘한 주력부대는 서해안을 따라 남하하여 평주에서 전투를 벌이는데 이곳은 몽골 사신을 억류해 개경으로 압송했던 장소 “몽골군이 평주에서 자기들의 공문을 전달했던 자를 수감시켰다고 하여 평주를 완전히 멸살하려고 성안으로 돌입해 닭과 개마저도 씨가 말라 버렸다.” <고려사 고종 18년 11월> 유사시에 파견하는 출정군 조직인 <3군>은 안북성 전투에서 작전상 큰 실수를 하는데 성을 지키질 않고 성 밖에 나와 싸우다가 크게 패한 고려군
- 몽골군이 잔인한 전술을 펼친 이유?
당시 몽골군의 전형적인 전술은 상대에게 항복을 권하고 항복하지 않는 경우 철저하게 짓밟아 다른 지역에 잔인한 소문이 퍼져 항복하게 하는 전술로 요즘의 충격과 공포의 전략
- 불리해지는 고려의 전황?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 세계 최강의 몽골군을 상대로 하여 선전을 한 곳도 있었는데 내륙 노선을 따라 남하한 몽골 부대와 전투를 벌인 귀주는 몽골의 1차 침입 시 최대의 공방전이 벌어졌던 곳으로 1231년 9월~1232년 1월까지 4달간 끝까지 몽골군의 공격을 막아낸 곳
〇 고려 VS 몽골 1차 전쟁, 귀주성 전투
- 4달 째 몽골군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는 귀주성 고려군의 전술 분석, 약 2천여 명의 병력이 상주한 귀주성을 서북면병마사 박서와 인근 성 지휘관들이 집결하고 귀주성 사수에 큰 역할을 한 박서와 김경손 “김경손이 관아의 결사대 열두 명을 거느리고 성문을 열고 나가 힘껏 싸우니 몽골군이 퇴각했다.” <고려사 열전 김경손>
- 물론 김경손이 처음에는 여러 별초들과 같이 전장에 나갔는데 “김경손은 군사들에게 너희들은 목숨을 돌보지 말고 죽어도 물러나지 않아야 한다고 명령을 내렸다.” & “그러나 우별초들이 땅에 엎드린 채 명령에 불응하자 김경손은 그들을 성으로 돌려보낸 후 열두 용사와 함께 나가 싸웠다.” <고려사 열전 김경손>
- 의혹이 제기되는 것이 강력한 몽골군을 열두 명의 결사대만으로 대적이 가능?
<기각지세(掎角之勢)>는 달아나는 사슴을 잡을 때는 뿔만 잡지 말고 뒷발을 잡고 뿔을 잡으라는 뜻으로 군사를 둘로 나누어서 상대에 따라 공격전술을 다양화하는 것으로 성을 방어하는 것만이 아니라 적들이 성을 마음 놓고 공격할 수 없도록 다양한 방법으로 유격전을 벌였던 것
- 당시 귀주성 남문을 방어하고 있었던 김경손 “김경손이 검은 깃발을 들고 선봉에 선 기병 한 명을 쏘아서 즉사시키자 열두 명도 용기를 얻어 분전했다.” <고려사 열전 김경손> 적의 깃발을 쓰러뜨려 지휘체계에 큰 타격을 준 것으로 적들도 쉽게 대응할 수 없었던 김경손과 결사대
〇 귀주성 전투의 영웅들
- 몽골의 화공에 적극 대응했던 박서 “박서가 성벽에 구멍을 내고 쇳물을 쏟아 부어 누거를 불태웠고··· 땅이 함몰되어 몽골군 30여 인이 압사하였다.” & “몽골이 섶에다 사람의 기름을 적시어 잔뜩 쌓아놓고 거기다 불을 질러 성을 공격했는데···” <고려사 열전 박서>
- 끓는 기름에 물을 부으면 물이 기화되면서 열기가 퍼지는데 “박서가 물을 뿌리니 불이 더욱 세차게 타올랐다. 이에 진흙을 가져오게 하여 그것을 물에 섞어 던지니 비로소 불이 꺼졌다.” <고려사 열전 박서>
- 점성이 높은 진흙으로 산소를 차단하여 불이 꺼지게 한 것으로 고려군의 완벽한 대응으로 성곽 수비를 위한 대비를 철저히 한 박서의 강력한 의지와 철저한 준비로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귀주성
- 귀주성의 승리를 이끌었던 김경손 장군의 기록 “날아온 화살이 김경손의 팔뚝에 맞아 피가 철철 흘러내렸지만 북을 치며 사기를 북돋기를 멈추지 않았다.” & “포탄이 김경손의 머리 위를 지나 뒤에 있던 군졸들에게 명중해 전신이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부하들이 의자를 옮기자고 청하였으나 김경손은 안 된다 내가 움직이면 군사들의 마음이 모두 흔들릴 것이다. 태연한 얼굴빛으로 거절하며 끝내 옮기지 못하게 하였다.” <고려사 열전 김경손>
- 당대의 전쟁 영웅을 우리가 모르고 있었던 것 “몽골군이 퇴각하자 김경손이 대오를 정비하고 쌍소금을 불며 돌아오자 박서가 큰 절로 맞이하며 울었고 김경손도 마주 절하며 울었다.” <고려사 열전 김경손> 중과부적(衆寡不敵)이지만 최선을 다해 싸운 장수로써의 본분을 다한 그런 자들끼리만 교감할 수 있는 그 무언가가 있었을 것 같은 영웅 박서와 김경손
- 몽골의 1차 침입, 귀주성 전투의 결과는?
몽골의 1차 침입 때에는 끝까지 버텨낸 귀주성 “몽골은 이렇게 작은 성이 대군을 맞아 싸우는 걸 보니 하늘이 돕는 것이지 사람의 힘은 아니다 라고 혀를 내둘렀다.” <고려사 열전 김경손>
- 박서의 귀주성 전투에 대해서도 또 하나 재미있는 일화, 당시 귀주성을 공격했던 몽골 병사가 한 말 “몽골 장수 가운데 일흔에 가까운 사람이 있었는데 내가 성인이 되어 종군하면서 천하의 성에서 전투하는 모습을 두루 보았지만 이처럼 공격을 당하면서도 끝내 항복하지 않은 경우는 처음 보았다. 성 안에 있는 장수들은 훗날 반드시 모두 장군이나 재상이 될 것이다. 라고 감탄한 일이 있었다.” <고려사 열전 박서> 실제로 뒤에 박서는 문하평장사로 임명된다.
- 대제국 몽골이 세계를 제패한 13세기에 강력한 저항의 역사를 남기면서 고려의 자부심을 지켜준 것, 하지만 전쟁의 승리로 이어지지는 못했던 전투의 승리, 결정적으로 안북성 3군의 패배와 수도 개경이 포위되면서 고려의 치명적 약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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