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열단 김상옥 - 일제의 심장에 폭탄을 던지다.
〇 1923년 1월 12일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사건
- 1923년 1월 12일 20시 10분, 경성 종로의 한 복판에서 터진 폭탄! 사건이 발생한 곳은 일제강점기 악의 중심지 종로경찰서였다 “술을 먹고··· 무심히 종로경찰서 앞을 지나갈 때 돌연히 탕! 하는 요란한 소리가 나며 무슨 돌조각 같은 것이 날아와 우리의 발목을 칩디다. 그때 정신을 잃었습니다.··· 누가 무엇을 던진 건지 도저히 알 수가 없습니다. 참말 우리의 신수가 사나웠습니다.” <동아일보 1923년 1월 14일 목격자 홍인순> 폭발사고로 건물의 일부가 파괴되고 행인 7명이 중경상을 입었으나 경찰 측의 피해는 없다는 보도
- 종로경찰서에 특별수사대를 설치하고 유력 용의자로 무장 항일단체 소속 김상옥을 지목 “마치 계엄령이 내려진 듯 거리거리 골목골목에 수색대가 줄 매듯 하고 밤 8시만 되면 종로통에는 인적이 절(絶)하게 되얏슴니다. 족음만 수상한 자이면 하로 저녁 4 · 5차씩 몸떠름을 당하얏슴니다.” <개벽 1923년 2월호>
〇 독립운동 탄압의 심장, 종로경찰서
- 폭탄 투척, 왜 종로경찰서일까? <신주백, 연세대 HK연구 교수>
당시 경성에는 중구 · 동대문 · 서대문 · 종로 4군데의 경찰서가 있었는데 종로경찰서는 강압통치의 핵심으로 한용운 · 안창호 등 독립운동가의 탄압으로 악명이 높았던 곳
- 조선총독부 소속 고등경찰관 미와 와사부로는 <드라마 야인시대>에서도 악질 형사로 등장했던 인물로 악질 고문형사의 대명사, 미와 와사부로(三輪和三郞)가 종로경찰서 특별 수사대장으로 임명되면서 독립투사들을 일망타진하겠다는 의도를 보인 것
- 종로경찰서 폭파사건이 주목을 받는 이유는 1919. 3. 1.운동으로 전국에 울려 퍼진 대한독립 만세! 는 일본을 깜짝 놀라게 했던 것, 기본적으로 일제는 무단통치로 압력을 가하면 통치가 잘 될 것으로 믿었으나 그게 아니었던 것으로 무단통치에서 소위 문화통치로 탈바꿈하지만 이는 기만정치로 1918년 751개 5,400명의 경찰이 1920년에는 2,716개 18,400명으로 증가되면서 항일민족운동에 대한 감시와 탄압이 더욱 강화된 것으로 말이 문화통치이지 고문문화가 꽃피던 시절에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사건이 벌어진 것
- <신주백 교수가 본 1920년대 초 독립운동> 일제 경찰력 증가의 배경에는 헌병출신을 대규모로 채용하면서 일제의 군대를 동원한 탄압으로 좌절된 3·1운동, 일제의 대규모 군사작전으로 만주지역 무장독립운동은 약화되고 국제 외교전을 통한 독립운동 좌절 등으로 독립의 염원에도 불구하고 절망감에 빠졌던 조선 민족에게 다시 한 번 독립 염원의 불씨를 지핀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의거
- 그래서 일본은 이 사건을 축소하고자 경찰 측 피해는 없다고 발표했으나 “일본 경찰과 매일신보 사원 장희용 등 100여 명이 죽거나 다쳤다.” <한살임(조소앙) 김상옥 전, 1924년> 뿐만 아니라 폭파 사건은 1월 12일 이었으나 1월 14일자 동아일보에 게제된 것만 보아도 조작하려는 의도가 보이는 것
〇 종로경찰서 투탄 의거, 김상옥 의사는 누구?
- 당시 김상옥 의사의 나이는 34세로 사진을 통해서도 느껴지는 당당한 기개, 가난한 가정 형편 속에 14세 때부터 대장간 일을 시작하여 소년 노동자에서 청년 기업가(영덕 철물점)로 성장하여 수십 명의 직원을 고용할 정도로 사업이 번창하는데 3·1운동을 겪으면서 삶의 방향이 바뀌어 독립운동가의 길을 선택한 것으로 김상옥의 스타일을 보면 어느 날 갑자기 북악산에 태극기를 게양하는 기지와 재치 그리고 담력을 동시에 볼 수 있는 것
-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범인을 찾는데 혈안이 된 일본 경찰은 확실한 증인 · 물증이 부족한 상황이어서 독립운동가 모두를 용의 선상에 올리는데 김상옥으로 좁힐 수 있는 수사의 결정적 단서는 폭탄으로 의열단을 지목하고 탐문 수사를 벌이는데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의거는 조선 독립의 불씨가 살아있다는 증거
- 의열단은 어떤 단체?
의(義) 열(烈), 맹렬하게 정의를 위해 싸우는 단체라는 뜻의 의열단은 1919년 11월 만주 길림에서 약산 김원봉을 단장으로 조직된 항일 무장 독립운동 단체, 우리가 흔히 아는 이상룡의 서로군정서 · 김좌진의 북로군정서 ·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은 부대 개념의 무장독립군이고 의열단은 부대 개념이 아닌 비밀 결사 형태의 무장 독립 단체
- 폭탄 투척 사건, 이번이 처음?
수차례 있었지만 열악한 폭탄의 성능으로 실패를 거듭하는 폭탄 투척 사건, 창단 이래 폭탄을 이용한 의거를 추진해 온 의열단이었기에 수사의 대상으로 좁혀지게 된 것, 국내에서 기존의 독립 운동에 한계를 느낀 김상옥은 비밀 결사 무장 방식의 의열단 조직의 도움이 있었기에 투척 의거가 가능했던 것
- 종로경찰서 폭탄의 실체?
프랑스제 F1 수류탄으로 추정, 당시 러시아 내전에서 볼세비키의 적군에 패배한 백군 세력들이 몽골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의열단은 몽골에서 제조기술자와 교섭해 폭탄을 입수한 것으로 폭탄의 위력은 반경 10m 이내에 있는 사람에게 치명상을 입힐 수 있는 수준
〇 의열단과 폭탄
- 의열단은 왜 폭탄을 사용했을까?
의열단의 행동강령을 보면 ‘7가살(可殺)’ ‘5파괴(破壞)’가 나오는데 7가살은 조선총독이하 고관 · 군부수뇌 · 대만 총독 · 매국적 · 친일파 거두 · 적탐(밀정) · 반민족적 토호열신이고 5파괴는 조선총독부 · 동양척식회사 · 매일신문사 · 각 경찰서 · 기타 왜적 중요기관으로 정확한 목표의 암살 · 파괴를 위해 폭탄을 사용한 것
- 반민족적 인사들에겐 독립운동 자금을 징수하는 정도이고 실제로 반민족적 인사를 처단한 경우는 없어서 응징 일변도의 행동에서 벗어나 바람직한 성과를 얻고자 했던 의열단, 무차별적 테러가 아니라 일제 심장부를 겨냥한 계획적 의거였지만 일제의 삼엄한 감시망이 존재했던 것
- 폭탄의 국내 반입은 어떻게?
다른 물건으로 위장해 폭탄을 반입하거나 국내에서 자체 제작했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정보전으로 일제의 검문검색을 피하기 위해 고급 정보가 필요했기 때문에 일본 기관 내부의 협조자인 밀정을 심어 정보를 입수했던 것, 하지만 독립운동가로 위장한 일제의 밀정도 많았을 것
- 의열단 대규모 폭탄 거사 실패
1923년 3월 국내 잠입을 시도하던 의열단원이 대거 체포되고 의열단원 숙소에서 폭탄 36개 권총 등이 발견되고 김시현 · 유석현 · 황옥 등 의열단 18명이 줄줄이 체포되는데 이들의 공격 목표는 조선총독부 · 동양척식주식회사 · 매일신보사 · 사이토 총독 등
- 의열단 폭탄 거사 실패 원인, 일제의 밀정?
의열단원 황옥이 주목되는데 황옥은 경기도 경찰부 고등계 경부로 밝혀지고 재판장에 나온 황옥의 진술 “저는 일본 경찰 관리로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성공하면 경시까지 시켜줄 거라 굳게 믿고 시킨 대로 밀정을 한 것뿐입니다.” <1923년 8월 경성지방법원, 황옥>
- 스스로 일제의 밀정이라고 고백한 황옥, 눈물까지 글썽이며 억울함을 호소하지만 일각에선 친일파로 위장한 의열단원이라는 주장을 하는데 황옥이 의열단의 폭탄 반입에 적극 협조하고 사건 발각 후 의열단원을 도주시키려 해 논란의 중심에 선 것
〇 일제의 밀정 VS 위장친일파, 황옥의 진실
- 폭탄은 국내 반입까지는 성공했던 상황이어서 만약 거사가 실행됐다면 일제에 큰 타격을 주어 역사의 큰 물줄기가 바뀔 수도 있었던 상황
- 과연 황옥의 정체는?
경기도 경찰부 고등계 경부였던 황옥, 김상옥 의사는 의열단 참여 전에 국내에서 암살단을 조직해 활동했었는데 1920년 8월 일본의 예비검속 정보를 황옥이 사전에 김상옥에게 알려준 사실이 있다.
- 당시 황옥에 대한 일본 경찰의 입장?
경기도 경찰부 경무국장 · 경찰부장 · 고등경찰과장 등의 사표가 제출될 만큼 충격적 사건(?) 일제의 밀정이 맞다면 성공한 공작으로 오히려 포상해야 되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격려금을 받은 경기도 경찰부, 한편에서는 사표 한편에서는 격려금, 경기도 경찰부장 시로가미는 ‘황옥의 밀정 활동을 인정’ 하지만 일본 경찰도 황옥의 행동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한 듯하다는 <신주백 교수의 분석>
- 위장 친일파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의 존재?
조직적으로 투입돼 위장 친일파로 활동한 독립운동가의 사례는 없고 만약 황옥이 위장 친일파였다면 독립운동사에서 특이한 사례,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김원봉이 10여년 후에 의열단의 역사를 정리할 때 황옥의 폭탄 반입 사건을 기록하면서 황옥을 의열단으로 인정하는데 결정적인 것은 황옥 스스로 일제의 밀정이라고 진술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독립 운동가로 인정받기 어려운 것이라는 <신주백 교수의 분석>
- 소위 독립 운동을 하던 어려운 시기에 이런 인물도 있었다는 것이 우리가 주목해야 될 일이지만 한편으로 생각하면 한 인간의 심리적 고뇌로 어찌할 줄 몰라 갈팡질팡하는 그런 모습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드는 부분
〇 <영화 밀정> 송강호 · 공유 · 한지민 주연
- 영화 못지않게 드라마틱한 황옥의 생애와 의열단 활동을 모티브로 한 영화 <밀정> 송강호가 황옥의 역할이고 공유와 한지민은 의열단원 역할
- 공유의 질문, 의열단원은 무술이나 총격술을 어떻게 배웠나요?
당시 체계적 훈련을 받을 수 없는 상황으로 김상옥 의사의 경우도 상하이 사격 연습장에서 사격연습을 하고 국내에서는 북한산에서 사격 연습을 했는데 가장 일반적인 방법은 자신의 방에서 스스로 신체단련을 하여 열악한 환경 속에서 불굴의 의지로 독립 운동을 펼쳤던 것
- 이혜영 감독의 질문, 만약 공유씨가 실제로 의열단원이었다면 적인지 동지인지 알 수 없는 황옥과 같은 인물과 끝까지 거사를 할 수 있었을까?
서로를 의심하고 동기로 완벽하게 받아들일 수 없는 관계 속에서도 같은 조선인의 피가 흐르는 사람들 간에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언가가 있지 않았을까? (당시 의열단원으로서는) 어쩔 수 없이 선택해야 하는 상황으로 어떻게든 그 폭탄을 경성으로 들여야 되기 때문에 설사 내가 그 사람을 믿었다가 배신을 당한다고 해도 위험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 이라는 공유의 대답
- 최재성 선생의 질문, 송강호씨 만약 황옥과 같은 입장이었다면 어떤 선택을 했을지?
그 혼란한 시대에 조국을 생각하고 민족을 생각하는 방법들이 다 달랐던 것 같아요, 쉽게 말씀드릴 수 없지만 최소한 우리 민족에게 해를 끼치는 인물이 되진 않았을 듯
- 당시 여성 독립운동가의 활약은?
남자현(1872~1933) 1925년 사이토 총독 암살 시도 & 권기옥(1901~1988) 한국 최초의 여성비행사로 1943년 대한민국 애국부인회 조직 & 윤희순(1860~1935) 한국 최초의 여성 의병 지도자로 1926년 조선독립단학교 설립 등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웠던 수많은 여성 독립운동가들
〇 김상옥 의사의 최후
- 1923년 1월 22일 새벽, 1,000여 명의 일제 군경들에 의해 포위된 효제동 김상옥의 은신처, 일제의 군경에 맞서 혈전을 벌인 김상옥 의사는 세 시간이 넘도록 총격전을 벌이다 마지막 남은 한 발을 자신에게 겨누고 열흘간의 독립전쟁이 막을 내린다.
- 김상옥 의사의 무기는 두 자루의 권총뿐으로 세 시간을 버티며 동대문 경찰서 고등계 주임 등 일본 군경 16명을 사살하는데 오랜 시간 버틸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사격술이 뛰어났기 때문이라고 한다.
- 어떻게 은신처가 발각된 걸까?
결정적인 것은 이웃 조선인 형사 조용수가 김상옥 의사의 주변을 주시하고 포위망을 좁혀가다 은신처를 포착하게 되는데 끝까지 결연함을 잃지 않았던 김상옥 의사 “나 이불 좀 주시오! 이불을 주면 그것을 쓰고 탄환을 좀 피해 몇 명 더 쏘아 죽이고 죽을 터이니···” <동아일보 기사> 하지만 겁에 질려 이불을 주지 않은 옆집 주인, 결국 김상옥은 끝까지 싸우다 자결을 택한다.
- 의열단이라는 것은 목숨을 내놓는 것으로 일제에 맞서 스스로 냉철한 판단 아래 자결로 생을 마감한 독립운동가는 김상옥 의사가 유일한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마지막 선택 자결, 만약 현장에서 체포되었다면 자신의 목숨을 일제에 내어주는 셈이어서 의열 투쟁에 맞는 삶을 마감하면서 향기 나는 삶을 선택한 김상옥 의사
- 흔히들 친일파를 거론하며 그 시대는 다 그랬다고들 얘기하는데 다 그렇지 않았다는 것으로 독립운동에 목숨을 바친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음을 기억해야 할 것!
- 한국 근대사의 특징은 비 노블레스들의 오블리주다. <비(非) Noblesse Oblige!> 이정은, <김상옥 평전> 일제강점기 사회적 책임을 다한 특권층 · 지도층은 극소수이지만 김구 · 안창호 · 유관순 · 윤봉길 · 김상옥 등 오히려 수많은 민초들이 사회적 책임을 다했던 시대로 그 희생을 토대로 오늘이 주어졌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
- 세계사적으로도 당시는 제국주의 시대로 많은 식민지 국가가 있었으나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치열했던 한국의 독립운동사, 비록 아픈 역사였지만 자랑스러운 우리의 독립운동사로 선조들의 독립운동 정신을 이어받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고 역할인 것
'K-his(한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승려 김윤후, 세계 최강 몽골군을 두 번 무찌르다. (0) | 2016.09.26 |
---|---|
몽골과 화친 그 후, 다시 항전을 꾀하다 (0) | 2016.09.19 |
전쟁의 서막, 몽고 사신 저고여 살해되다 (0) | 2016.08.22 |
특명, 최충헌을 암살하라 (0) | 2016.08.16 |
민란의 시대 -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나? (0) | 2016.08.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