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란의 시대 -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나?
〇 우리 역사상 최초 노비의 난
- 1198년 우리 역사상 최초의 신분해방운동이 일어났는데 바로 천민 중의 천민인 노비 만적(萬積)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신분의 벽을 뛰어 넘으려는 민초들의 반란
- 고려 무신정권시대의 또 다른 명칭인 민란의 시대, 1170년~1270년의 100여 년간 이어진 무신정권 시대에 75건의 민란이 발생하고 우리 역사상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은 <만적의 난> “경인년(1170년)과 계사년(1173년)이래로 높은 관직도 천예에서 많이 나왔으니··· 장상(將相)에 어찌 타고난 씨가 있겠는가? 우리들이라고 어찌 뼈 빠지게 일만 하면서 채찍 아래서 고통만 당하겠는가?” <고려사 열전 최충헌> 천민 해방을 외친 노비 만적의 난으로 고려 최하층민 노비들의 반란이 시작된 것이다.
- 노비 중의 공노비(公奴婢)는 왕실·관청에 예속되고 사노비(私奴婢)는 개인에게 예속되면서 외거노비는 주인과 떨어져 생활하면서 별도 호적을 갖기도 하고 솔거노비는 주인과 같이 살거나 주인 집 근처에 거주하며 천민 중 가장 종속적인 삶을 산 사노비 만적
- 만적(萬積)의 주장 중에 주목이 되는 대목 “각자 자신의 주인을 죽이고 천적(賤籍)을 불태워 삼한에서 천민을 없애면···” <고려사 열전 최충헌> 자신들이 직접 권력을 잡아 노비에서 해방하는 것이 아니고 고려에서 천민신분을 모두 없애자는 것이 노비 만적의 핵심 주장, 이것 때문에 노비 만적의 난이 최초의 신분해방운동이라는 평가를 받게 되는 것
- 왕후장상의 씨가 어찌 따로 있겠는가! 는 만적의 독창적인 구호는 아니었고 <중국 진나라 말기(기원전 209년) 농민 진승과 오장이 일으킨 <진승과 오장의 난>에서 “왕후장상(王侯將相) 영유종호(寧有種乎) 왕후장상에 어찌 씨가 따로 있겠는가!” 이후 백성들 사이에서 널리 퍼진 일종의 유행어
〇 노비 만적(萬積)은 누구?
- <KBS 드라마 무인시대> 에서는 최충헌의 사노비로 나오는 만적, 하지만 <고려사>에는 만적을 사동(私僮)으로만 기록되어 있고 최충헌의 사노비라는 분명한 기록은 없음, 다만 만적의 난이 <고려사 열전 최충헌>편에 수록되어 있어 최충헌의 사노비로 해석하는 것인데 그 관계가 분명하지는 않음
- <이익주 교수의 분석> 이름까지 남다른 만적(萬積), 당시 노비들의 이름은 부르는 호칭을 음차해서 썼는데 예를 들어 난을 함께 모의한 미조이(味助伊) · 소삼(小三) · 효삼(孝三) 등으로 썼는데 다른 노비에 비해 이름에서 풍기는 분위기가 다른 만적! 범상치 않은 인물이라는 것이 난을 일으키는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거사 당일 쓸 표식을 나눠주면서 갑인일에 흥국사에 모여 난을 일으키기로 결의 “안과 밖에서 서로 호응하여 최충헌 등을 먼저 죽이고 각기 그 주인을 쳐서 죽이고 천인의 문적(文籍)을 불살라버리면··· 공경(公卿) 장상(將相)이 모두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고려사절요 신종 원년(1198년)>
〇 노비 만적의 난. 왜 ‘정(丁)’자인가?
- “누런 빛깔의 종이 수천 장을 오려서 정(丁)자를 만들어 표지로 삼고···” <고려사절요 신종 원년(1198년)> 정(丁)자 표식을 통해 같은 편임을 확인하는데 이를 보면 만적은 뭔가 조직화할 수 있는 인물로 평범한 인물이 아님을 알 수 있는 것
- 정(丁)자를 표식으로 삼은 이유?
기록에는 나와 있지 않으나 가장 알기 쉬운 한자는 정(丁)자로 글을 모르는 노비들도 쉽게 알 수 있게 고무래 모양의 정(丁)자를 표식으로 삼았을 것이라는 <이익주 교수의 분석>
- 노비들의 반란, 성공 가능성은?
무신정권기 무신들의 사병으로 동원된 노비들은 무신들이 난을 일으켜 출세하는 것을 보고 천민인 자신들도 난을 통해 신분상승이 가능하다는 판단을 했을 것이라는 <신병주 교수의 분석>
- 당시 짐승보다 못한 취급을 받았던 노비들은 매매 · 상속 · 증여의 대상 “노비를 재물로 논하며 거리낌 없이 매매하고 혹은 소나 말과 이를 바꾸기도 하는데 1필의 말에 노비 2~3명을 지급하고도 오히려 값을 치르기에 부족하니 소와 말이 사람 목숨보다 더욱 중요···” <고려사지 형법 노비>
- 노비 신분을 벋어날 수 있는 방법?
거의 불가능한 것으로 고려시대뿐만 아니라 모든 시대에 양인과 천민의 구분은 아주 엄격해서 마치 사람과 사람이 아닌 존재를 구분할 정도로 큰 차이가 있는 것, 조선시대에는 전쟁에서 공을 세운 노비의 면천(免賤)을 주장하는 류성룡도 엄청난 반대에 부딪히는데 하물며 고려시대에는 더욱 불가능했을 것
〇 노비 <평량 사건>의 전말
- 고려 사회를 충격에 빠뜨린 사건은 1188년 여름 견주에서 개경으로 가기위해 길을 떠난 왕원지 가족은 정체 모를 일당의 습격을 받으면서 무참히 살해되는데 범인으로 알려진 인물은 견주의 벼슬아치 평량, 그는 왜 왕원지 가족을 살해한 것일까?
- 왕원지가 가지고 있던 평량 아내의 노비문서, 평량 아내의 주인은 살해된 왕원지이고 더 놀라운 사실은 평량 역시 노비 출신이라는 것 “평량은 평장사 김영관의 가노로 견주에서 살면서 농사를 착실히 지어 부자가 되자 권세가에게 뇌물을 바쳐 천인의 신분을 면하고 산원동정 벼슬까지 얻었다.” 그런데 때마침 “평량의 아내는 왕원지 가문의 노비인데 왕원지는 집이 가난하여 가족을 이끌고 여종에게 가서 의탁하고 있었다.” & “평량이 왕원지에게 후하게 대접하고는 개경으로 돌아가라고 권하고···” <고려사 세가 명종 18년(1188년)>
- 평량이 노비출신이라는 과거를 알고 있고 아내의 노비문서를 갖고 있는 왕원지만 없어진다면 “처의 오빠 되는 인무·인비 등과 함께 길목을 지키다가 왕원지 가족을 살해하고··· 주인이 없어졌으니 완전히 양민이 되었다고 좋아했다.” <고려사 세가 명종 18년(1188년)> 노비라는 신분에서 벗어나기 위해 왕원지 가족을 살해한 평량, 그리고 살인을 부른 고려 사회 신분의 굴레!
- 평량 사건이 세상에 알려진 계기?
기록에는 “평량은 아들 예규에게 대정 벼슬을 얻어 주고 인무(처남)를 명경학유 박우석의 딸에게 장가들여 주니···” <고려사 세가 명종 18년> 이러한 소문이 나돌면서 공분을 쌓고 결국 어사대에 체포된 평량 “평량은 유배 보내고··· 인무·인비·예규 등은 모두 도망가 숨었다.” <고려사 세가 명종 18년>
- 사람을 죽였는데 유배형?
<이익주 교수의 분석>은 당시 왕원지 가족을 죽인 자는 도망간 처남들로 판단한 듯하고 평량은 돈을 주고 신분과 관직을 산 것에 대해 처벌을 받은 듯하지만 <평량 사건>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1188년 당시 무신정권 집권자는 이의민으로 그의 아버지는 소금장수이고 어머니는 노비로 천민 출신이 최고의 권력자가 된 것으로 우리도 힘만 있으면 출세할 수 있다는 사회적 분위기가 서서히 무르익고 있었고 그 상징적 사건이 만적의 난
〇 민란의 시대, 농민들의 삶
- 무신시대 초기 민란의 성격?
대부분은 농민들의 민란으로 농민들이 난을 일으킨 이유 ① 지배층·권세가에게 토지를 빼앗겼을 때 ② 과중한 세금 등으로 살기 힘든 경우인데 1170년 무신정변 후 30년 동안 집중적으로 발생
- 당시 농민들의 삶을 엿볼 수 있는 농민들의 생활, 고려 농민 1인의 평균 소유 농지는 1결로 대략 학교 운동장 넓이인데 쌀 18석을 생산할 수 있는 토지, 4인 가족의 1년 식비는 9석이고 세금은 조세 2석 · 공물을 쌀로 환산하면 3석 · 종자곡 1석 농기구등 필요경비가 3석으로 당시 고려 농민은 농사를 지어도 근근이 살아가는 형편으로 가뭄이나 홍수 등 자연재해로 농사를 망치면 더욱 비참한 삶을 살았을 것
〇 망이 · 망소이의 난
- <KBS 드라마 무인시대> 1176년 공주 명학소에서 민란이 발생하는데 난의 주동자는 망이와 망소이, 이들은 순식간에 공주지역을 점령하고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3천여 명의 토벌대가 파견되지만 망이 · 망소이의 반란군에게 참패한 토벌대
- 망이 · 망소이, 그들은 왜 난을 일으켰나?
1176년 정중부 집권기에 발생한 <망이 · 망소이의 난> 이때부터 민란이 시작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망이 · 망소이가 형제라는 기록은 없고 둘 다 명학소 사람이고 함께 민란을 일으켰기 때문에 형제일 가능성은 있는 것
- <이익주 교수의 분석> 망이 · 망소이의 난이 소(所)에서 일어난 민란이라는 점에서 주목이 되는데 조상의 출신지를 나타내는 본관은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본관지역의 등급에 따라 사회적 지위가 달라지는 것으로 고려시대 지방제도의 특징적인 모습
- 모든 군현이 같은 등급에 있지 않고 크게 세 등급으로 나뉘는데 가장 높은 등급의 주현은 지방관이 파견된 지역, 그 아래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고 옆 주현의 간접 통치를 받는 속현이 있고 더 아래에 향·소·부곡이 있는데 여기에 사는 사람들을 잡척(雜尺)이라 칭하며 이들의 의무 ① 타 지역민과 같이 조세(租稅) · 공부(貢賦) · 역역(力役) 등을 부담 ② 국유지 경작 의무가 추가 ③ 아니면 지방 특산물 생산 · 납부의무 부담 등으로 군현 지역보다 더 많은 일을 하고 천대까지 받은 향·소·부곡민들, 그래서 고려시대에는 본관을 알면 신분과 직업을 알 수 있는 것으로 모든 공문서에는 본관을 표시하게 돼있는 것
- 향·소·부곡은 우리가 알고 있는 천민 집단이 아니라는 것으로 양인과 천민의 구분 기준은 국역(國役) 부담여부로 향·소·부곡민도 국역을 지기 때문에 신분상으로는 양인이지만 좀 더 힘든 일을 담당, 특히 소(所)는 국가가 필요로 하는 수공업품·광산물 등 특수물품 생산지로 고려자기는 자기소에서 생산했을 것
- 마을 이름만으로는 무엇을 생산하는지 알 수 없는 공주 명학소 “유성현 동쪽 10리에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충청도 공주속 명학소> 이를 추정하면 현재의 대전광역시 탄방동으로 명학소는 숯을 생산하는 탄소(炭所)였을 것으로 추정
- 특히 무신시대에는 무신 지방관들의 수탈과 횡포가 더욱 심했던 것으로 고려 말 나주의 거평 부곡으로 유배됐던 정도전은 일반 군현 농민보다 훨씬 힘들게 생활했을 것으로 정도전이 거평 부곡민의 참상을 목격하고 새로운 나라를 세워야 한다는 결심을 했을 수도 있다는 <신병주 교수의 분석>
- 고려시대에는 원칙적으로 이사를 금지하는데 이사가 가능한 경우 ① 인근 주현의 사람과 혼인한 경우 ② 관리·군인이 되어 개경에서 근무하는 경우, 그래서 향·소·부곡민의 삶을 개선할 수 있는 방법은 속현·주현으로 거주지역이 승격하는 것으로 거주지역의 승격은 곧 신분의 상승을 의미하는 것
- 공주 명학소의 망이 · 망소이의 난을 해결하기 위한 고려 조정의 대책 “공주 명학소를 충순현으로 승격시킨 다음 내원승 양수탁을 현령으로 내시 김윤실을 현위로 임명해 그 고을 백성을 달래게 했다.“ <고려사 세가 명종 6년(1176년)> 명학소가 충순현으로 승격되자 소강 상태에 접어든 망이 · 망소이의 난, 이것은 난의 목적을 보여주는 대목
〇 공주 명학소민들은 왜 난을 일으켰나?
- <망이 · 망소이의 난> 1차 봉기 승리의 비결?
고려 조정은 서경 조위총의 난 진압에 주력하여 상대적으로 공주에 정예병을 파견하기에는 무리였고 보다 중요한 것은 망이 · 망소이의 난이 명학소에서 일어났지만 난이 진행되면서 주변 지역민들까지 대거 참여했다는 것
- 망이 · 망소이 세력이 사용한 무기와 전술?
1차 승리의 비결 ① 공동 노동에서 비롯된 뛰어난 조직력 ② 무기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철소(鐵所) 활용 가능성으로 고려 최대 철의 생산지 다인철소는 공주의 인근 충주에 위치 ③ 다양한 농기구를 무기로 사용했을 가능성, 민란군의 대명사 죽창은 재료 구하기도 쉽고 만들기도 쉬워 흔히 사용을 했고 방어를 위한 방패로는 대로 만든 광주리를 사용했던 것, 또한 낫자루를 길게 하여 전투용으로 사용하여 찌르는 무기 죽창과 당기는 무기 낫을 함께 사용해 공격력을 극대화시킨 것
- <망이 · 망소이의 난>의 결과?
공주 명학소가 충순현으로 승격된 후 1177년 항복한 망이 · 망소이, 하지만 진압군이 내려와 농민 가족들을 체포해 가자 “싸우다가 죽을지언정 끝까지 항복하지 않을 것이며 반드시 개경까지 쳐들어가고 말 것이다.” <고려사 세가 명종 7년(1177년)>
- <망이 · 망소이의 난>의 최종 결과는?
실패로 끝나는데 화해조치로 시간을 벌며 진압을 준비한 고려 조정, 진압군의 대대적인 토벌에 무너지고 마는 농민군, 1년 6개월 이상 지속된 망이·망소이의 난이 결국 실패로 끝나고 충순현은 다시 명학소로 강등
- 하지만 1년 6개월 동안 그 지역민이 보여준 호응이 주변에 영향을 미쳐 민란의 시대를 열어가는 단초가 되는 것으로 전라도·경상도 지역에서 계속 민란이 일어나고 망이·망소이의 난이 끝나고 21년 후 만적의 난을 통해 신분해방운동으로 진화한다.
- 노비의 해방을 외친 만적의 난 결과는?
<KBS 드라마 무인시대> 1198년 5월 거사 당일, 기대보다 적게 모인 노비들 “약속한 기일에 모두 모였으나 수백 명도 되지 않았으므로 일이 성공하지 못할까 염려하여 다시 무오일에 보제사에서 모이기로 약속하고···” <고려사절요 신종 원년(11978년)> 하지만 만적과 노비들의 반란 계획을 알게 된 최충헌은 군사를 동원해 만적을 비롯한 노비들을 체포하여 강물에 수장(水葬)시킬 것을 지시 “마침내 만적 등 100여 명을··· 강에 던져버렸다.” <고려사 열전 최충헌>
〇 만적의 난, 결말
- 만적의 난이 발각된 이유?
내부 배신자 노비 순정의 밀고로 발각 “고변한 공으로 한충유를 합문지후로 임명하였으며 순정에게는 은 80냥을 내려주고 면천시켜서 양인으로 삼았다.” <고려사 열전 최충헌>
- 노비들을 산채로 수장(水葬)시킨 이유?
야사에 따르면 조선 건국 초 남아있던 고려의 왕씨 세력 “왕씨가 망하자 여러 왕씨를 섬으로 추방하였더니··· 뱃사람들이 배를 뚫고··· 왕씨를 바닷 속에 빠뜨려 죽인 뒤에···” <연려실기술>
- 고려시대 사형 방법은 ① 참형(斬刑) ② 교형(絞刑) 두 가지 밖에 없었고 사형이 집행되면 되돌릴 수 없어서 3단계를 거쳐서 진행하는데 ① 지방관이 사형 결정 ② 지방관의 상급 관리가 다시 검토 ③ 왕에게 보고한 뒤 사형 집행, 이런 절차를 거치도록 되어 있는데 이 경우는 정상적인 절차 없이 강물에 수장한 것은 노비들의 반란에 대한 비공식적인 방법으로 처형되어진 것으로 보인다는 <이익주 교수의 분석>
〇 민란의 시대가 남긴 것
- 민란은 언제나 실패한다(?) 그 만큼 지독한 기득권과 권력의 힘으로 망이 · 망소이의 난이나 만적의 신분 해방 운동이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역사적 의미를 남긴 민란들, 고려시대 향·소·부곡의 수가 900여 개에서 조선 초에 100여 개로 줄어들고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소멸되는데 이의 계기는 망이 · 망소이의 봉기라 해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는 <이익주 교수의 분석> 조선의 지방제도 정착에는 고려 무신시대 민란이 바탕이 되었던 것
- 만적(萬積)을 보면서 영웅의 조건은 과연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하는데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노비라는 신분에 안주하지 않고 그 틀을 깨려 한 만적, 신분해방을 외치며 새로운 시대를 꿈꾼 만적 역시 역사의 영웅이 아닐까?
- 무신시대가 민란의 시대가 된 이유는 정치의 부재 때문으로 정중부 · 이의민 · 최충헌 무인시대는 그들만의 권력싸움으로 집권자가 바뀌어도 달라지지 않는 백성들의 어려운 현실, 고려시대 민란이 일어난 가장 큰 이유는 무신권력가들이 정치를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할 일
- <대한민국 헌법 제11조>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 · 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 · 경제적 · 사회적 · 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 지금 우리는 이것을 상식으로 알고 있지만 처음부터 당연한 권리는 아니었던 것으로 망이 · 망소이가 꿈꿨던 신분차별 없는 세상은 수많은 만적 · 망이 · 망소이 등이 노력한 결과가 지금의 헌법이 있게 된 것으로 헌법 가치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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