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신(文臣)의 씨를 말려라! 무신정변 3일
〇 고려 건국 이래 최대의 난(亂)
- 단 3일 만에 고려를 장악한 무신정변! 향후 100여 년간 지속된 무신들의 시대가 시작된다 <드라마 무인시대> 1170년 8월 30일 무신정변 첫째 날, 사치와 향락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은 고려 18대 왕 의종은 문신들과 어울려 날마다 즐기는 놀음판, 왕과 문신들을 호위하는 무신들의 불만은 쌓여만 가고··· 그 날도 의종은 연회를 위해 보현원으로 향하는데 어가보다 먼저 도착한 무신들은 병력을 장악하고 문신들을 살해한다.
- 1170년 9월 1일 무신정변 둘째 날, 정변을 막으려는 환관들의 모임, 그러나 밀고를 받은 무신들에 의해 환관은 살해되고 정변 3일 째 보현원에 억류돼 있던 의종은 폐위되면서 무신들은 의종의 동생을 19대 왕 명종으로 세우고 고려의 새로운 지배층이 되면서 향후 100여 년간 지속되는 무신정권이 시작된다. “이고 · 이의방 등이 사람을 시켜 길에서 외치기를 ‘모든 문신의 관을 쓴 자는 비록 서리일지라도 씨를 남기지 말게 하라’” <고려사절요 의종 24년(1170년)>
- 사흘 동안 진행된 무신정변은 고려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데 문벌귀족에서 무신으로 집권세력이 교체되는 정치적 변화와 더불어 사회적 변화가 시작이 되는데 마침 무신정변이 일어나는 1170년은 500년 고려 왕조의 중간이 되는 시기로 무신정변을 기점으로 고려의 전기와 후기의 분기점으로 보고 있는 것
〇 무신정변의 원인
- 교과서에 나오는 무신정변의 원인은 사치와 향락에 빠진 의종의 실정(失政) “불행하게도 아첨하고 경박한 무리가 좌우에 나열되어··· 정치에 부지런해야 할 시간과 정력을 주색에 돌렸으며 풍월을 읊는 것으로써 신하와의 정치에 대한 의논을 대신하였으니 점차 무인의 노여움이 쌓여 화가 장차에 이르렀던 것이다.” <고려사절요 의종 24년(1170년)>
- 얼마나 사치와 향락에 빠졌는지 “임금이 타는 배는··· 뱃놀이하기 위한 것이다. 무릇 3년이나 걸려서 완성한 것으로 배 50여 척에다 모두 채색 비단으로 만든 돛대를 달고··· 정자를 짓고 연복정이라 이름하고는 물이 얕아서 배를 띄울 수 없으므로 제방을 막고 호수를 만들었다. 그 땅이 흰모래로 되어 있고 물결이 세차서 비만 오면 무너지고 무너질 때마다 보수하니 백성들이 주야로 쉬지 못해 괴로워하였다”<고려사절요 의종 21년(1167년)>
- 심지어 사관도 기록에 지쳤던지 “가을 7월 을유일, 또 어제처럼 술판을 벌였다.” <고려사세가 의종 24년(1170년)> 얼마나 사치와 향락에 빠졌던지 조선의 10대 연산군과 고려의 18대 의종은 너무 닮은 듯, 연회를 위해 막대한 재정이 투입이 되어 왕실재정은 이미 고갈이 됐고 “왕이··· 소비하는 재물이 적지 않아 내탕고(內帑庫)가 텅 비게 되었다. 또 개인의 집을 많이 빼앗아 별궁으로 삼았으며 백성들의 재산을 강제로 빼앗아 환관을 시켜 관리하니” <고려사세가 의종 16년(1162년)> 국왕으로써 도저히 할 수 없는 일
〇 의종의 콤플렉스
- 의종의 아픈 과거?
인종의 장자로 7살에 태자로 책봉된 의종, 그러나 왕이 되는 과정이 순탄치 않은 것이 고려 왕실은 장자를 태자로 삼는 것이 원칙이어서 태자로 삼긴 했는데 “애초 의종이 원자일 적에··· 인종이 원자가 왕으로서의 책임을 다할 수 있을까 걱정했고 공예왕후도 둘째 아들을 사랑하여 그를 태자로 세우려 했지만” <고려사> 동생과 비교되어 의종에게는 상처가 될 만한 사건
- 1126년 <이자겸의 난>과 1135년 <묘청의 난>을 겪으며 다사다난한 삶을 산 인종, 인종은 외척과 문벌귀족으로 인한 혼란을 겪은 왕이기에 더욱 태자 책봉에 관한 고민이 깊었을 것으로 왕실의 권위를 다시 세우기에는 장자 의종의 자질이 부족하다고 판단한 듯, 그런 상황을 보면 조선의 태종이 대단한 것이 이미 14년간 세자의 자리에 있던 양녕을 폐위시키고 능력 있는 셋째 충녕을 왕으로 만들어 성군 세종대왕이 되는 것이지만 자질을 의심 받았으나 결국 왕이 되어 무신정변의 원인이 된 의종
〇 의종의 문 · 무신 차별
무신정변의 또 다른 원인은 무신과 문신의 차별 대우, 문신들과 주지육림 호화로운 연회를 즐긴 의종, 반면 연회장을 호위하며 갖은 고생을 하는 무신들, 게다가 무신정변이 일어나기 전 결정적인 사건 <오병수박희>는 고려 최고의 스포츠로 고구려 무용총에도 등장하는 수박도는 손 수(手) 때릴 박(搏), 즉 무기를 들지 않고 맨손으로 상대를 공격 · 제압하는 무예로 여기에 희(嬉)를 더하여 무예에서 파생된 일종의 스포츠 “수박을 잘했기에 의종의 총애를 받아··· 승진했다.” <고려사> “무신에게 명하여 오병수박희를 하라고 하였다. 이는 왕이 무신들의 불평을 알고 후하게 상품을 내림으로써 이들을 위로하고자 했던 것이다.” <고려사절요 의종 24년(1170년)>
- 오병수박희 당일 종3품의 대장군 이소응 “한 사람과 맞잡고 치다가 이소응이 이기지 못하고 달아났다. 그런데 문신 한뢰가 갑자기 앞으로 나가더니 이소응의 뺨을 때렸다.” & “정중부가 소리를 높여 한뢰를 꾸짖기를 ‘이소응이 비록 무신이나 벼슬이 3품인데 어찌 모욕을 이다지 심하게 주느냐.” <고려사절요 의종 24년(1170년)> 이소응은 종3품의 대장군이나 뺨을 때린 한뢰는 종5품의 기거주로 하극상 중의 하극상 “왕이 여러 신하와 더불어 손뼉을 치며 크게 웃었다.” <고려사절요 의종 24년(1170)>
〇 정변의 주역, 하급 무신
- <오병수박희> 당일, 무신들이 정변을 일으킨 정황은?
우발적인 사건 같지만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된 거사로 보이는데 의종이 궁궐 밖으로 행차한 특수상황으로 이때는 친위군이 왕을 보호하게 되는데 정변의 핵심 인물인 이의방과 이고가 친위군의 지휘관이어서 정변을 제압할 방법이 없는 것으로 무신들의 공격 대상은 문신들이지만 의종도 억류된 상황이어서 신변을 보장할 수 없는 사건
- 무신정변의 주역은 왕의 측근인 친위군으로 흔히 무신정변의 주동자는 정중부로 알고 있지만 실제 주동자 역할을 한 인물은 이의방과 이고인데 이들은 친위군의 견룡군 지휘관으로 하급 무신인 정8품의 산원, 이는 지금의 대위급 정도인 것
- 하급 무신들이 정변을 일으킨 이유는?
비교적 안정적인 지위와 경제력을 누린 고위급 무신들, 하지만 생계유지조차 어려웠던 하급 무신들, 고려시대에는 <군인전>이라 해서 군역에 복무하는 대가로 국가에서 지급하는 토지가 있었는데 하급 무신들의 불만 ① 군인전을 지급받지 못하거나 부당하게 빼앗김 ② 국가의 각종 토목사업에 동원됨, 하급 무신 및 군졸들은 대가없는 고된 노동에 큰 불만을 가졌던 것
〇 이의방과 이고, 정중부를 포섭하다
- 이우방과 이고는 자신들만으로는 큰일을 도모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정변의 성공을 위해 고위급 무신을 포섭하여 전면에 세웠는데 정변 발생 4개월 전 종3품 대장군 정중부를 찾아간다. “이의방과 이고가 뒤따라가 은밀히 정중부에게 말하기를 오늘 날 문신들은 득의양양하여 취하도록 마시며 배부르도록 먹고 있는데 무신들은 모두 굶주리고 피곤하니 이 어찌 참을 수 있소!”<고려사절요 의종 24년(1170년)>
- 사실은 정중부를 찾아가기 전에 찾아간 사람이 한 사람 더 있는데 우학유는 대대로 무신 가문이었던 종3품의 대장군 “우학유는 이렇게 거절했다. 나의 선고께서 항시 나더러···문관을 없애는 건 썩은 나무토막을 부러뜨리는 것처럼 쉬우나 문관이 해를 당하면 그 재앙이 우리에게 즉시 들이닥칠 것이니 마땅히 조심해야 한다고 경계하였소!··· 죽는다 해도 공들의 말을 따르지 못하겠소.” <고려사 열전 우학유>
- 이의방과 이고가 포섭한 정중부는 어떤 인물?
정중부는 황해도 해주 출신으로 의종의 특별한 신임을 받았는데 “처음에 격구로 인하여 정중부를 가까이 하였는데 대간의 간언을 하여도 듣지 않았고···” <고려사절요 의종 24년(1170년)> & “어사대가 왕의 지시에 따라 수창궁의 북쪽 문을 폐쇄하고 소인배들의 출입을 금지했으나 정중부는 제 멋대로 문을 열고 출입했다. 어사대에서 법사에 회부해 문초하도록 건의 했으나 왕은 듣지 않았다.” <고려사 열전 정중부>
- 의종이 총애한 정중부, 왜 정변에 참여했을까?
다른 고위급 무신들과 정중부의 차이점, 대부분의 무신은 지위를 세습 받았으나 지방출신인 정중부는 자신의 힘으로 종3품의 대장군까지 오른 입지적인 인물로 어떤 의미에서 정중부는 권력에 욕심을 가지고 정치적 야망을 품었을 수도 있다는 <이익주 교수의 분석>
- 게다가 정중부가 문신들에게 앙심을 품게 된 사건(?)
사건의 개요를 알아보기 전에 먼저 정중부의 외모에 관한 기록 “정중부는 용모가 웅장하고 뛰어나며 눈동자가 네모나고 이마가 넓었다. 살결이 희고 수염이 아름다웠으며 신장이 7척이나 되어 그를 바라보는 것이 두려울 정도였다.” <고려사열전 정중부> “내시 김돈중이··· 그만 촛불로 정중부의 수염을 태웠다 정중부가 김돈중을 때리고 욕을 보이니··· 이를 아버지에게 이르는데···” 김돈중의 아버지는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 “김돈중의 아버지 김부식이 화를 내고 왕에게 정중부를 처벌하자고 아뢰었다.” <고려사열전 정중부>
- 무신정변에 적절한 인물을 포섭한 이의방과 이고 <이익주 교수의 분석>은 고급 무신들의 불만과 군졸들의 고통을 두루 알았을 이의방과 이고는 직위 고하를 막론하고 모두를 정변에 가담시키는 중간 다리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분석
〇 정변 첫째 날, 무자비한 살육전
- 오랜 기간 치밀하게 준비한 무신정변, 정변 첫날부터 기세를 잡은 무신들 “어가가 보현원 근처에 당도하자 이고와 이의방이 먼저 가서 왕의 명령이라 둘러대며 순검군을 집합시켰다. 왕이 막 문에 들어서고 신하들이 물러나는 순간 이고 등이 문에서 직접 임종식과 이복기를 살해했다.” <고려사 열전 정중부>
- 무신들의 다음 목표는 무신 이소응의 뺨을 때린 문신 한뢰(?) “한뢰는 친한 환관의 도움으로 어상(御床) 아래로 숨어 들어갔다.” & “정중부가 말하기를 화의 근원인 한뢰가 아직도 주상의 곁에 있으니 내보내어 베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 “한뢰가 왕의 옷을 잡고 나오지 않았다 이고가 칼을 빼 위협하니 그제야 나왔는데 즉시 죽여 버렸다.” <고려사절요 의종 24년 1170년)>
- 문신들을 제거하기 위해 정변을 일으킨 무신들, 특수한 상황이긴 하지만 왕 앞에서 칼을 휘두른 죄는 처벌 받아야 하지 않을까?
그렇지 않아도 “지유 김석재가 이의방에게 말하기를 이고가 감히 어전에서 칼을 뺀단 말인가? 하였다, 이의방이 눈을 부릅뜨고 꾸짖으니 김석재가 다시 말하지 못하였다.” <고려사절요 의종 24년(1170년)> 무신정변 첫 날 희생된 문신의 수는 개경의 궁궐에서만 50여 명 - 정변이 일어나자 정중부의 수염을 태웠던 김돈중이 도망치자 이의방과 이고는 김돈중이 태자에게 정변을 알리고 태자가 군대를 동원해 개경을 방어하면 정변이 실패로 돌아갈 수도 있는 상황이어서 김돈중의 행방을 찾는다. “걸음 빠른 자를 보내어··· 승선(김돈중)의 소재를 물으니 답하기를 ‘어가를 호종하느라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고 하였다. 정중부·이의방 등이 기뻐하며··· 순검군을 거느리고 밤에 태자궁에 다다라··· 태자는 진도현으로 추방하였으며 태손(太孫)은 죽였다.” <고려사절요 의종 24년(1170년)> 김돈중의 비겁함이 무신정변을 막을 마지막 기회를 날린 것
〇 의종의 무신 회유
- <KBS 드라마 무인시대> 1170년 8월 30일, 보현원에 억류되어 있던 의종은 갑자기 정변 세력에게 칼을 하사한다. “왕이··· 여러 장수에게 칼을 하사하니 무신들은 더욱 교만·횡포하였다. 왕이 두려워 정중부를 불러 난동을 종식할 계책을 의논하니 정중부가 네네! 하기만 하고 대답하지 않았다” <고려사절요 의종 24년(1170년)> 이후 무신정변의 핵심 세력을 파격적으로 승진시킨 의종
- 과연 의종의 속내는?
의종은 무신들을 회유할 수 있다고 판단한 듯, 과거 의종의 신임과 지원을 받은 정중부, 즉위 초부터 왕권강화를 위해 친위군을 양성한 의종이 후원한 대표적 무신이 정중부, 따라서 의종은 자신이 양성한 무신들을 회유해 무신정변이라는 위기를 수습하려 하는데 무신정변의 목적은 왕조 교체가 아니라 문신들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의종을 해할 의도는 없었을 것
〇 고려의 환관과 내시
- <KBS 드라마 무인시대> 정변 다음 날인 1170년 9월 1일, 개경 궁궐에서 일어난 뜻밖의 사건으로 환관 양광취가 무신들에게 반격을 시도한다, 하지만 누군가의 밀고로 사전에 발각된 양광취의 계획 “음모가 누설되어 정중부 등이 임금의 행차를 따르는 내시 10여 명과 환관 10여 명을 탐색해서 살해했다.” <고려사절요 의종 24년(1170년)>
- 왜 문신이 아닌 환관이 반격을 시도했을까?
우선 환관과 내시의 용어 정리가 필요한데 환관은 궁궐 안에서 일하는 거세한 남성으로 이들을 일반적으로 내시라고 하는데 고려시대에는 내시와 환관이 다른 의미로 환관은 같은 의미이지만 내시는 거세한 남성 환관이 아닌 왕의 총애를 받는 유능한 문신 관료로 국왕측근에서 시중을 들던 문벌귀족 자제 또는 과거에 급제한 젊은 관료들의 엘리트 코스
〇 환관에게 권력을 준 의종
- 의종은 왕권 강화를 위해 친위세력뿐만 아니라 환관의 권력도 키우는데 의종의 측근정치는 환관 · 친위군 등 최측근을 정치세력으로 만들어 왕권을 강화하려 한다.
- 우리 역사에서 환관이 권력을 가지는 경우는 거의 없고 중국의 왕조 멸망의 원인은 환관의 횡포가 흔한데 <십상시>는 중국 후한 말 영제 때 권력을 잡고 조정을 장악한 환관 10여 명을 지칭
- 우리 역사에는 의종 시대만 유일하게 권세를 누린 환관들 “듣는 이가 모두 탄식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권세가 환관에게 있다니 하였다” <고려사절요 의종 24년(1170년)> & “내시들은 환관들과 밀접히 지내면서 서로 의형제를 맺었으며 백성들의 재물을 탈취해 임금에게 아첨하는 짓을 일삼았다” <고려사세가 의종 23년(1169년)> 이때 대표적인 인물이 정함 “환관 정함의 집은··· 모두 200여 칸에다 우뚝 솟은 누각을 찬란하게 채색해 왕궁과 흡사하니···” <고려사 열전 정함>
〇 문신들을 향한 의종의 반감?
- 의종은 왜 환관들에게 권력을 줬을까?
아버지 인종 대에 외척 <이자겸의 난>과 문벌귀족 <묘청의 난>으로 흔들린 왕실의 권위! 따라서 이 사건들을 지켜봤던 의종은 외척과 문벌 귀족에 대한 반감이 컸던 것, 선대왕들과는 달리 비교적 한미(寒微)한 가문에서 왕비를 맞이한 의종이 한미한 가문과 혼인한 것은 외척과 문벌 귀족을 배척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을 것
- 의종의 의도가 상징적으로 드러나는 대표적 사건, 무신정변 발발 2년 전인 1168년 의종이 서경에 행차하는데 이때 의종은 <묘청의 난>으로 오랜 기간 서경에 행차하지 못했는데 “장차 낡은 것을 고쳐 새롭게 하여··· 9조의 신령(新令)을 반포 하도다” <고려사절요 의종 22년 (1168년)>
- 의종의 신령 ① 음양의 이치를 존중하고 따른다. ② 불사를 숭배하고 중히 여긴다. ③ 승려에게 존경을 바친다. ④ 도교를 따르고 숭상한다. 등으로 의종의 신령은 유교를 배척하고 불교 · 도교 · 음양사상을 중시하는데 의종이 신령을 반포한 것은 유학자 문신들에 대한 반감을 나타낸 것
〇 의종의 비정상적 왕권강화
- 문신들 중 일부 측근을 선택해 권력을 키워준 의종은 의도적으로 즉위 초부터 문벌 귀족과 유학자 관료를 배척하면서 전략적으로 환관 · 내시 · 친위군을 정치적 측근 세력으로 양성함으로서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왕권을 강화하해 나간다
- 측근 세력들은 왕에게 아첨하면서 자신의 권력을 유지해 나가는 측근정치가 나타나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환관 정함으로 정함은 의종 유모의 남편으로 환관 정함에게 7품 문반직 벼슬을 내리고자 한 의종
- 제도적으로 고려시대 환관은 7품 문반직에 오를 수 없어 7년 간 계속된 대간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함에게 문반직을 하사하며 측근들의 권력을 강화하는데 집착한 의종 “경들이 고신에 서명하지 않으니 이는 실로 신하로서 임금을 사랑하는 도리가 아니다. 만약 서명하지 않는다면 너희들을 모두 죽여 젓을 담을 것이다. 하니···” <고려사절요 의종 12년>
- 왕에 대한 독재적 상황에서 강력하게 비판하는 <대간>을 무시한 의종의 전횡으로 고려 정치 시스템 붕괴로 대간의 힘을 약화시키면서 왕권강화에는 성공하지만 국가체제를 망가뜨리는 상황을 초래한 것
- 의종은 24년 재위기간 내내 대간을 탄압·협박하는데 대간 중에서 뜻있는 문신들은 관직을 버리거나 침묵하는 상황이 발생하고 결국 아첨하는 무리만 곁에 두게 된 의종 “신하들이 성덕을 칭찬하기를 태평세월에 글을 좋아하는 임금(太平好文之主)이라 하였다, 고 쓰게 하였다” <고려사절요 의종 24년(1170년)> 정치에서 소외된 뜻있는 문신들의 의종에 대한 불만이 무신사회에도 쌓여가고 있었던 것
- 어떤 왕조이건 인재양성은 국가발전에 반드시 필요하고 이는 검증된 시스템을 통한 체계적 인재양성이어야 되지만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측근세력을 키웠기에 부정부패를 불러온 것
〇 무신정권의 서막
- <KBS 드라마 무인시대> 정변 셋째 날인 1170년 9월 2일, 무신들은 의종을 강제로 폐위시키면서 “을묘일에 왕을 거제현으로 추방했다.” & 이어서 “이 날 정중부·이의방·이고 등은 군사를 거느리고 왕의 동생인 익양공 왕호를 맞아다가 왕위에 앉혔다.” <고려사절요 의종 24년(1170년)> 무신들에 의해 새로운 왕으로 추대된 19대 명종, 그러나 실질적인 권한은 모두 무신들에게 있었다.
- 무자비한 살육전이 행해진 3일 간의 무신정변, 희생된 문신의 수(數)는?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3일 간 희생된 문신은 140~150여 명으로 추정 “호종하던 문신과 대소 신효·환관들 모두가 죽임을 당하였는데 시체가 산처럼 쌓였다.” <고려사절요 의종 24년(1170년)> 상황이 이렇다 보니 문·무신 가릴 것 없이 공포에 떨었던 무자비한 살육
- 정변을 함께 하자는 이의방과 이고의 청을 거절한 우학유는 죽음을 면하기 위해 이의방의 누이와 혼인을 하게 되고 처참한 살육으로 정사(政事)를 돌볼 문신들이 부족한 상황으로 명종은 이름뿐인 왕이고 실질적인 권력은 무신들이 장악
- 권력의 중심은 <중방>으로 최고위급 무신인 상장군과 대장군으로 구성된 회의기관, 이전까지는 문신들의 <도병마사>가 최고의 회의기관이었으나 무신정변 이후 <중방>은 막강한 권력기구로 성장하고 정변을 일으킨 무신들은 <중방>을 중심으로 연합 정권 구성
- 이의방의 반대 세력 숙청
논공행상으로 내분이 벌어진 무신들, 결국 반대 세력 숙청에 나선 이의방은 무신정변의 동지였던 이고까지 살해한다. 사실은 이고가 먼저 반격 “이고는··· 불량배들을 법문사 승려 수혜의 방으로 불러 모아··· 각자 칼을 소매 속에 품고서··· 난을 일으키려 했다.” & “이의방이 평소 이고가 자신을 윽박지르는 것에 원한을 품었으므로··· 이고 등이 궁문 밖 당도하기를 기다렸다가 그가 오자마자 쇠몽둥이로 쳐 죽였다.”<고려사 열전 이의방>
〇 반(反)무신란, <김보당의 난>
- <KBS 드라마 무인시대> 1173년 8월, 동북면병마사 김보당이 군사를 일으킨다. “김보당이 정중부와 이의방을 토멸하고 다시 전왕(前王)을 세우고자··· 전왕을 모시고 경주에 나왔다.” <고려사절요 명종 3년(1173년)>폐위된 왕을 복위시키려는 것
- 그러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군사를 보낸 이의방, 겨우 한 달 만에 진압된 <김보당의 난> “9월 안북도호부에서 김보당 등을 잡아 서울로 보내니 이의방이 영은관에서 그들을 심문하고 저자에서 죽였다”& “김보당이 죽음에 임박하여 거짓말하기를 무릇 문신 중에 함께 모의하지 않은 이가 누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고려사절요 명종 3년(1173년)>
- 1173년 <김보당의 난>은 문신들이 일으킨 대표적인 반(反)무신란, 이의 의미는 김보당은 무신정변 당시 협조했던 인물이라는 점에서 주목이 되는데 김보당은 무신정권을 바라보며 더 이상 희망이 없다는 생각을 했던 것, 또한 무신들의 혼란스러운 정국 속에서 김보당 역시 권력을 잡고 싶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이익주 교수의 분석>
- 어쨌든 <김보당의 난>을 계기로 다시 한 번 무신과 문신의 대립이 표면으로 나타난 것 “안북도호부에서 김보당 등을 체포해 보내니 이의방이 큰 거리에서 그를 처형한 후 모든 문신을 다 살해했다.” <고려사 세가 명종 3년 (1173년)> 김보당이 남긴 마지막 말을 빌미로 남은 문신들마저 학살하고 오히려 무신들의 권력 독점 계기가 된 <김보당의 난> 김보당의 마지막 말은 무신정권에 반발하는 세력이 많음을 알린 것
- 폐위된 의종을 복위시키려 했던 <김보당의 난>으로 또 다시 반대 세력이 의종 복위를 명분삼아 반란을 일으킬 것을 염려한 무신들, 결국 김보당의 난은 의종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결정적 사건이 된다. “이의민은 곤원사의 북쪽 연못가로 의종을 끌어내어 술 몇 잔을 올리고는 그의 척추를 꺾어버렸는데 손놀림에 따라 지르는 비명을 들으며 낄낄 웃기까지 했다.” <고려사 열전 이의민> 47세의 젊은 나이에 끔찍하고 초라한 최후를 맞이한 의종 - 고려의 1인자가 된 이의방
이의민에게 의종의 시해를 명령한 것이 바로 이의방 “3월 기축일, 이의방의 딸을 태자비로 삼았다.” <고려사 세가 명종 4년(1174년)> 명실상부 고려의 1인자가 된 태자의 장인
〇 무신정변의 의미
- 정중부가 아닌 하급 무신 이의방이 고려의 1인자가 된 건 무신정변의 성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 무신정변은 세 가지로 압축하여 볼 수 있는데 ① 무신정변을 아주 가까이에서 보면 의종의 측근 중 무신과 기타 세력의 대립 ② 좀 멀리에서 보면 전체 무신과 전체 문신의 대립 ③ 더 멀리서 보면 하급 무신들은 중하층 지배층인 지방 향리 출신으로 그들이 무신정변을 통해 권력의 정점에 다다른 것
- 무신정변은 하층인 무신이 상층의 문신을 타도하고 권력을 잡은 것, 이런 점에서 무신정변은 권력과 계층 상하 이동의 가능성을 열어준 사건으로 무신으로 진입한 지방 향리 층이 고려 후기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게 된다.
- 무신정변은 폭력과 살육으로 권력을 잡았다는 한계점을 갖고 있지만 문벌 귀족에게 집중되었던 권력을 분산시켜 다양한 계층의 의식이 성장할 수 있는 배경을 만들고 권력이동의 가능성을 열어 역동적인 사회로 변모시킨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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