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자겸의 난
〇 고려의 권세가 이자겸
- 고려사는 왕건 → 광종 → 성종으로 1부가 끝나고 문벌 귀족 사회의 모순에 들어갈 때 등장하는 이자겸, 그는 과연 누구 인가? 고려 왕실 족보는 슈퍼컴퓨터로도 그리지 못할 만큼 복잡하다는 것
- 이자겸(?~1126년)은 인주 이씨로 16대 왕 예종의 장인이며 17대 왕 인종의 외할아버지이자 장인, 그것도 두 딸을 인종에게 시집보내고 이 힘으로 왕을 몰아내기 위해 난을 일으킨 것으로 알려진 이자겸, 정말 왕이 되기 위해 난을 일으켰을까? 교과서에는 나오지 않는 <이자겸의 난>에 대한 진실!
〇 이자겸 외손자에게 기습당하다
- 1126년(인종 4년) 왕은 내시를 불러 은밀히 명을 전하는데 ‘이자겸과 척준경을 제거하라!’ 는 것으로 외할아버지이자 장인인 이자겸을 제거하라는 인종 “군사를 거느리고 궁궐에 들어가서 먼저 척준경의 동생 척준신과 척준경의 아들인 내시 척순 등을 죽인 후···” <고려사 열전 이자겸>
- 고려 17대 왕 인종이 이자겸을 선제공격한 것은 사실로 외손자에게 공격 받고 이자겸이 방어한 것을 역사에서는 <이자겸의 난>으로 기록 <이익주, 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보통 이자겸의 난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정확하게 그 내용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고 더욱이 이자겸을 방송에 올리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서 사학 전공자로서 의미 깊은 이자겸의 방송 데뷔(?)
- 이자겸은 어떤 인물인가?
본관은 인주 이씨로 인주는 지금의 인천, 인주 이씨는 고려 왕실과의 혼인을 통해 세력을 키워간 외척으로 이자겸의 외손자 ‘왕해’가 17대 왕 인종이 되는 것으로 80여 년간 왕비를 배출한 인주 이씨 가문, 왕의 외할아버지로 만족하지 않은 이자겸은 두 딸을 다시 인종(손자)에게 시집을 보내면서 삼겹 장인(?)으로 두 명의 이모와 결혼하게 된 인종
- 이자겸은 왜 무리하게 왕실과의 혼인을 또 추진했는가?
인종이 다른 가문의 딸과 혼인하게 되면 왕실에 인주 이씨 이외의 외척이 생기는 것이어서 이자겸이 자신의 세력 강화를 위해 외손자 인종에게 두 딸을 시집보낸 듯(?)하여 확실한 정략적 결혼(?)
- 17대 인종이 왕위에 오를 당시 나이가 14세로 일각에서는 인종이 아닌 16대 예종의 형제들을 후계자로 거론하기도 하는데, 자신의 어린 외손자를 왕위에 올리는데 성공한 이자겸, 어떤 점에선 인종은 외할아버지 이자겸의 지원으로 왕위에 오른 것이라 할 수 있고 그래서 1122년 인종 즉위 후 이자겸이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
〇 이자겸의 횡포
- 실제 이자겸의 권력이 얼마나 컸는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 “숭덕부를 설치하고 소속 관료들을 두었으며 그 처소를 의친궁이라 하였다.” <고려사 열전 이자겸> 본인의 집을 궁이라 칭하며 막강한 권력을 누린 이자겸 “스스로 국공에 올라 왕태자와 동등한 예우를 받았으며 그의 생일을 인수절이라 부르고···” <고려사 열전 이자겸> 인종과 이자겸의 관계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군신 VS 가족의 문제로 왕의 신하가 아닌 왕의 외할아버지로서 국정에 관여하는 형태를 보이게 되는 것
- 고려는 호족의 시대에서 문벌 귀족의 사회로 진입을 하면서 대를 이어 세력을 키워가는 고려 전기 문벌 귀족, 그 중에서 최고의 권력을 가진 인주 이씨로 이들과 대적할 수 있는 건 오직 왕실 뿐! “뇌물이 공공연하게 오가고 사방에서 선물이 모여들어 늘 수 만근의 고기가 썩어났다.” <고려사 열전 이자겸>
- 이런 권력의 부패로 고통 받은 고려 백성들 “(이자겸) 아들들이 다투어 지은 저택은 거리마다 이어졌으며···” & “남의 토지를 강탈하고 종들을 풀어 백성들의 수레와 말을 빼앗아 자기의 물건을 실어 나르니” <고려사 열전 이자겸> 이자겸 뿐만 아니라 일가친척까지 권력남용 “이자겸의 모친은 성품이 탐욕스러워 상인으로부터 물건을 강제로 사들이면서 때로는 전혀 값을 지불하지도 않았으며 또 노비를 시켜 횡포를 부리게 했으니···” & “(이자겸 모친)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상인들이 서로 축하할 정도였다.” <고려사 열전 이자겸>
〇 이자겸의 야욕이 남아있는 미스터리한 거북이?!
-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법천리에 위치한 법천사, 거북이 등에 임금 왕(王)자를 표시했다는데··· 거북이 등에 선명하게 새겨진 임금 왕자가 남아있는데 왕실이 아닌 사찰에 누가 이런 짓을? 왕자를 품은 부도는 고려 지광국사(984~1067년)의 행적을 담은 부도탑 비로 지광국사는 이자겸과 인척관계
- 왜 거북이 등에 왕(王)자를 새겼나요? <박광식, 원주역사박물관 학예연구사>
일반적으로 거북이 귀부(비석의 받침돌)에는 불교를 상징하는 만(卍)자를 표시하는데 이 탑비에는 특이하게 왕(王)자가 새겨져 있으며 이씨가 왕이 된다는 설을 믿었던 인주 이씨, 이자겸이 왕이 되고자하는 소망을 새겨 넣었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〇 이자겸 왕위를 탐내다?
- 국보 제59호 법천사 지광국사현묘탑비! 그 위에 새겨진 왕(王)자의 진실은?
실제로 보니 기이한 느낌으로 이자겸이 노골적으로 왕이 되겠다는 야욕(?) 귀부에 쓰여있는
왕자 때문에 논란이 되고 있는 인주 이씨와의 관계, 이 비석은 1085년에 세워졌는데 인주이씨가 외척으로 있던 시기와는 일치하지만 이자겸의 전성기와는 약 40여 년의 차이로 지광국사현묘탑비의 왕(王)자와 이자겸은 직접 관련이 없어 보인다는 <이익주 교수의 분석>
- 야심에 대한 이야기가 왜 절과 연관이 있나?
고려시대의 절은 단순히 불공을 드리는 장소가 아니라 ① 절에 경제력이 집중돼 있는 공간,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절을 세우고 절에 재산을 모아주는 경향이 있었고 ② 승병을 통해 군사력을 키울 수 있는 공간으로 정치·종교·가문이 한데 어울려 있는 갈등 구조
- 당시에 이미 유행하고 있던 십팔자(八字)왕위(王位)의 도참설이 유행하면서 이를 믿고 인종을 독살하려한 이자겸 “이자겸은··· 반역을 도모하려고 떡 속에 독을 넣어 왕에게 올렸다.” & “또 독약을 보내 왕비를 시켜 왕에게 바치게 하였으나 왕비가 사발을 들다 거짓으로 넘어진 척하고 독약 사발을 엎질러버렸다.” <고려사 열전 이자겸>
〇 이자겸의 권력
- 이자겸이 받은 벼슬을 보면 알 수 있는데 인종 즉위 후 받은 작위 동덕추성좌리 현모안사 양절익명공신 수태사 중서령 영문하상서도성사 판이병부 서경유수사 조선국공 식읍8천호 식실봉2천호 총 54자!
- 고려시대 관직명은 길다?
겸직이 많은 고려시대 관직, 자동적인 겸직이 아닌 한 사람에게 여러 개의 관직이 동시에 주어지기 때문에 그 겸직까지 모두 쓰다 보니 길어진 것인 반면 조선시대에는 자동적으로 겸하는 관직이 많아 겸직을 쓰지 않지만 고려시대에는 겸직까지 모두 표기한 것, 조선시대에도 긴 관직을 제수 받은 기록이 있는데 대표적으로 계유정난 때 수양대군이 단종(端宗)으로 부터 긴 관직을 제수 받는데 영의정부사 영경연 서운관사 판이병조사로 17자!
- 또한 고려 관직명이 긴 이유는 공신호·관직·겸직·식읍까지 포함했기 때문이고 이자겸의 관직명에서 핵심은 판이병부사로 이부와 병부의 최고 책임자인 판사라는 것인데 이부판사는 문신 관료에 대한 인사권과 병부판사는 무신 관료에 대한 인사권을 가지게 되어 모든 문무관리를 임명하는 권력자가 되는 것
- 인종과 이자겸의 갈등관계가 가장 심화된 대표적 사례 “이자겸이 (신하를) 송나라에 보내 표문을 올리고 토산물을 바치며 스스로를 지군국사라 칭했다.” & “또 지군국사가 되려고 왕에게 요청해 자신의 집에 와서 책봉하게 했으며 시간까지 강제로 정했다. 그 일이 이루어지지는 않았으나 그 후로는 왕은 이자겸을 몹시 싫어하게 되었다.” <고려사 열전 이자겸>
- 14세에 즉위한 인종이 18세가 된 1126년에 신하들을 불러 이자겸 제거의 묘책을 묻고 “왕이 평장사 이수와 전평강사 김인존에게 보내어 계교를 물으니 그(이자겸)의 무리가 조정에 가득해 경솔히 움직일 수 없으니 시기를 기다리도록 하십시오.” <고려사절요 인종4년>
〇 이자겸의 난
- 열여덟 살 인종의 선택은?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은 인종은 군사를 일으켜 이자겸을 공격하고 인종의 선제공격이 <이자겸의 난>의 발단이 되는 것
- 이자겸과 척준경의 역공
인종의 군대가 척준경의 동생과 아들을 살해하자 이자겸과 척준경은 군사를 동원해 반격에 나서는데 이자겸의 아들 의장이 이끄는 현화사 승려와 합세해 궁궐을 포위하여 공격을 하려다 오히려 역공을 당한 인종
- 가족들의 죽음에 분노한 척준경은 궁궐에 방화 후 공격하자 간신히 살아남은 인종은 신하 10여 명과 도피하고 신변에 위협을 느낀 인종이 이자겸에게 선위 의사를 표명하게 된다.
〇 이자겸 왕위를 거절하다!
- <고려사>의 기록 “왕은 해를 당할까 두려워 글을 지어 이자겸에게 선위할 것을 청하니···” & “(문신)이수가 ‘주상께서 비록 조서를 내리더라도 이공(이자겸)이 어찌 감히 그 같은 일을 하겠습니까?’ 하고 고함을 쳤다” <고려사 열전 이자겸> 그러자 이자겸은 앗차! 하고 조서를 인종에게 돌려주면서 “신은 두 마음을 품지 않았사오니 깊이 양찰하소서!” 하면서 눈물을 흘렸다는 기록
- 이자겸은 다 잡은 왕위를 왜 거절했을까?
위협을 느낀 인종이 오히려 왕위를 내어줬으나 왕의 선위를 거절하는 이자겸, 이런 것을 보면 이자겸이 왕위를 탐했다는 주장은 의심해 볼만 하고 <이자겸의 난>은 실체가 없는 사건이 아닐까? 하는 <신병주 교수의 분석>
- 왕위라는 것은 스스로 가지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인정과 명분이 중요한 것으로 조선의 태조 이성계도 권력을 거의 잡은 상황에서도 공양왕의 선위요청을 일단은 거절을 하고 보는데 당시의 이자겸에게는 태조 이성계 만큼의 지지 세력이 없었던 듯
- 나라의 질서를 바로 잡기 위해 새 나라를 꿈꿨던 이성계와 부정부패를 일삼으며 권력을 누렸던 이자겸과는 다른 경우이고 이자겸이 왕위를 받지는 않았지만 인종의 왕권은 약화되고 1126년에는 이자겸의 사저에 거처하게 된 인종 “왕이 서원에 거처하게 된 이후로 이자겸 일당들에게 둘러싸여 나라 일을 스스로 듣고 결단하지 못하게 되었고 행동거지와 음식도 자유롭지 못하였다.” & “왕이 한번은 홀로 북쪽 담에 가서 하늘을 우러러 한참이나 통곡한 일도 있었다.” <고려사 열전 이자겸>
〇 제 3의 인물 척준경
- 이자겸 제거를 위해 척준경 측을 먼저 공격한 인종, 척준경은 어떤 인물?
“척준경은 곡주(황해북도 곡산군) 사람으로··· 집이 가난하여 공부를 못한지라 무뢰배들과 교류했다.” <고려사 열전 척준경> 1107년 윤관이 여진을 정벌할 때 큰 공을 세운 척준경 “윤관이··· 눈물을 흘리면서 척준경의 손을 잡고 이제부터 내가 너를 아들 같이 여길 것이니 너는 나를 아버지 같이 여기도록 하라고 당부하며···” <고려사 열전 척준경> 전투에서 공을 인정받아 고속승진하게 된 척준경
- 이자겸의 아들과 척준경의 딸이 혼인하여 사돈관계로 정치적 행보를 같이 한 두 사람, 조선시대에는 부자 · 형제사이에 정치적 행보를 같이 하지만 고려시대에는 사돈 간의 정치세력 규합이 많은 것이 특징으로 고려 이자겸과 척준경은 신라 김춘추와 김유신 처럼 이들은 고려판 왕실과 무신의 만남!
〇 이자겸 VS 척준경, 갈등이 시작되다!
- 1126년 이자겸의 아들 이지언의 종과 척준경의 종 사이에 벌어진 다툼 “너의 주인은 저위(군주가 조회하는 곳)에 활을 쏘고 궁궐을 불태웠으니 그 죄는 죽어 마땅하다. 너 또한 마땅히 관노로 적몰되어야 마땅한데···” <고려사 열전 이자겸> 척준경을 비난한 이지언의 종, 소식을 듣고 분노한 척준경은 이자겸에게 등을 돌린다.
- <고려사>의 기록에는 종의 싸움이 비화한 것으로 기록돼 있지만 당시의 분위기가 척준경에게 모든 책임을 돌린 것으로 되어 두 사람의 갈등이 심했다는 것이 종의 다툼을 통해 드러난 것
- 사실은 이 무렵 즈음에서 인종의 역할로 이자겸과 척준경의 갈등을 이용하는데 두 사람 사이에 틈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몰래 척준경에게 사람을 보내 과거에 아들과 동생을 죽인 것에 대하여 사과를 하면서 척준경을 포섭해 이자겸 제거 계획을 세운 인종
- 18세 청년 인종은 척준경에게 은밀히 편지를 보내는데 “오늘 숭덕부(이자겸)의 군사가 무기를 가지고 대궐 북쪽에 이르러 장차 침문으로 들어올 듯하니 태조가 창업한 뒤 역대 선왕이 서로 계승하여 과인에게 까지 이르렀는데 만일 왕조가 다른 성으로 바뀌게 된다면··· 다만 짐의 죄만이 아니라 실로 보필하는 대신도 매우 수치스러운 바이니···” <고려사절요 인종 4년> 나를 못 지키면 너도 부끄러운 존재라고 괴로워하던 척준경에게 명분을 준 인종
- 인종의 편지대로 이자겸의 인종 공격 시도는 사실일까?
기록상으로는 이자겸의 인종 공격에 대한 사실 여부를 알 수 없으며 인종의 말만 가지고 이런 일이 있었다고 되어 있는 것인데 그렇다면 인종의 의도를 의심해 볼만 하다는 <이익주 교수의 분석>
- 어쩌면 인종이 거짓 편지를 써서 척준경을 자기편으로 끌여 들였을 수도··· 결국 척준경은 인종의 편에 서게 되고 편지를 받고서 인종을 지키기 위해 군사를 일으킨 척준경 “척준경이 왕을 모시고 나오는데 이자겸의 무리가 활로 척준경을 쏘았다.” & “척준경이 칼을 빼어 들고 한번 호통하니 감히 움직이는 자가 없었다.” <고려사절요 인종 4년> 척준경의 배신으로 패배를 직감한 이자겸 “척준경이··· 이자겸을 부르니 이자겸이 소복을 입고 왔다.” <고려사절요 인종 4년>
- 이자겸과 척준경의 내분을 이용해 척준경을 해결사로 활용한 인종, 발단은 집안 종들의 싸움으로 시작된 이자겸과 척준경의 갈등, 우연적인 요소가 역사를 바꿔놓기도 하는 것으로 우연적 요소(종의 싸움) + 필연적 요소(문벌 귀족사회의 모순)가 합쳐진 역사로 서양에서는 다윈의 <종의 기원>이 역사를 바꿨다는데 고려에서는 종의 싸움이 고려사를 바꾼 것
〇 이자겸의 몰락
- 이자겸은 어떻게 되나?
이자겸과 그 휘하 세력들은 모두 유배를 가게 되고 특히 인종의 비였던 두 딸은 폐비가 되고 1126년 5월 전남 영광으로 유배된 이자겸은 그해 12월 숨을 거두게 된다.
- 이자겸과 영광 굴비의 관계?
유배지 영광에서 생선을 맛있게 먹은 이자겸, 굽힐 굴(屈) 아닐 비(非)! 비록 귀양 온 몸이지만 뜻을 굽히지 않겠다는 뜻으로 생선 이름을 지어줬다고 하는데 굴비에 대한 이야기가 기록으로 전하지는 않지만 이자겸의 유배지가 영광인 것은 사실, 또한 “조기·넙치·오징어·조개·맛조개·낙지·굴···”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6권 전라도 영광군>
- 이자겸을 몰아낸 일등 공신 척준경은?
이자겸을 몰아내고 긴 관직명을 제수 받은 척준경, 그러나 곧 탄핵을 받기 시작하는데 정지상은 시적인 표현으로 탄핵 “오월지사는 일시지공이오 이월지사는 만세지죄이다.” <고려사 열전 척준경> 5월은 이자겸을 제거한 달이고 2월은 궁궐에 불을 지른 일
※ 정지상(?~1135년)고려 인종 때의 문신·시인으로 척준경이 이자겸을 제거한 공을 믿고 발호하므로 1127년 척준경을 탄핵함
- 결국 척준경은 처벌 “이에 엄타도로 유배 보냈다가 이듬 해 죄를 경감하여 다시 고향(곡주)로 옮겨 주었다.” <고려사 열전 척준경> 고려시대에는 고향으로 내쫒는 귀향은 무거운 형벌로 간주됐는데 이는 고향으로 돌아가 다시는 관직생활을 할 수 없다는 의미이고 이런 귀향이 조선시대 귀양의 근거가 되는 것
- 또한 인종은 “이자겸·척준경 일당과 그 자손들의 죄를 기록하여 담당 관청에 보관하도록 하였다.” <고려사 열전 척준경> 후대에 남기도록 한 것인데 역사는 승자의 기록임을 제대로 보여주는 <이자겸의 난>, 인종의 선제공격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이자겸의 난> 이라고 규정했던 것
- 이를 이자겸이 억울하다고 할 수 없는 이유는 엄청난 권력형 부정부패를 저질렀기 때문에 이자겸은 역사의 불명예를 감수할 수밖에 없는 것, 권력은 해와 같아서 가까이 가면 타서 죽고 멀어지면 얼어 죽는다는 말이 있는데 자명한 것은 썩은 해는 빛날 수 없는 것으로 결국 부패한 권력은 반드시 망한다는 교훈
- 고려시대 역사를 정리해 보면 태조~목종 때 까지는 호족의 시대, 현종~ 이후부터 시작하는 문벌귀족의 시대, 이자겸의 난 무렵이 고려 왕실과 대표적인 문벌 귀족의 대립이 나타나게 되는 것으로 이때부터 고려 사회가 지배층 내부의 분열이 거듭되면서 묘청의 난 · 무신의 난 등으로 새로운 시대로 전환되는 고려, <이자겸의 난>은 고려 전기 사회가 고비를 맞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고 할 수 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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