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란의 고려 재침공
〇 강감찬, 왕에게 피난을 주장하다
- 1009년 강조가 정변을 일으켜 목종을 폐위하고 현종을 새로운 왕으로 세운다. 그리고 1년 후 거란의 성종은 신하로써 왕을 폐위한 강조의 죄를 묻겠다며 4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하여 통주의 전투에서 승리하여 강조를 죽이고 수도 개경까지 진격한다. 위기에 처한 고려··· 이때 강감찬이 나서는데···
- 강감찬은 누구?
우리 역사 속의 3대 영웅은 을지문덕 · 이순신 · 강감찬으로 3대 영웅의 하나로 비범하게 태어난 강감찬 “어떤 사신이 밤중에··· 큰 별이 인가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서 관리를 보내어 살펴보게 하였더니 마침 그 집의 부인이 사내아이를 낳았다. 이 사람이 바로 강감찬이었다.” <고려사 열전 강감찬> 그곳이 서울 관악구 봉천동의 낙성대
- 백성들을 괴롭히는 개미·모기·호랑이까지 물리치는 강감찬의 신묘한 능력의 설화가 전해지고 영웅이미지와 어울리지 않는 이야기도 전해지는데 아버지가 잔칫집에 가면서 강감찬이 못생겼으니 집에 있으라 했다는 설화는 <고려사>에도 기록 “체구가 작은데다 얼굴이 못생겼으며 의복은 더럽고 낡아서 보통사람보다 낫지 않았다.” <고려사 열전 강감찬>
- 주로 영웅의 훌륭한 면모와 업적을 기록한 <고려사 열전>이지만 강감찬의 인물에 대하여 진실을 감추지 않은 듯 하고 당시 백성들의 강감찬에 대한 사랑을 이웃집의 친근한 존재로 여겼다는 의미일 것
〇 강감찬은 왜 몽진을 주장했나?
- <드라마 천추태후> 1010년 거란의 2차 침입 당시 고려 조정은 몽진과 항복으로 조정이 설왕설래하지만 항복론이 대세, 하지만 강감찬은 몽진을 주장하는데 이는 전략적 선택, 중과부적으로 무려 40만 대군을 이끌고 온 거란의 성종을 우선 피하고 보자는 것 “오늘의 일은 그 죄가 강조에 있으니 걱정할 바가 아닙니다.” <고려사 열전 강감찬>
- 그 당시 강감찬은 지난 날 서희가 했던 것처럼 거란의 2차 침입 목적을 정확히 파악하는데, 거란의 2차 침입의 이유는 거란과 사대관계를 맺은 상황에서도 계속 송과 통교하고 있고 또 여진과도 통교하고 있는 것을 문제 삼은 것이어서 고려를 멸망시키고 싶은 의지까지는 갖고 있지 않았던 것, 게다가 거란의 침입 목적이 왕을 폐위시킨 강조를 처벌하겠다는 것인데 이미 처형이 됐으니 전쟁을 계속할 이유가 없는 것으로 협상이 가능하다고 본 것인데 다만 강조가 폐위시킨 왕 대신 즉위한 현종의 신변이 위험하여 왕을 대피시키는 것이 최우선으로 판단했던 것
- 현종은 왜 많은 신하들이 주장하는 항복론에 따르지 않고 홀로 몽진을 주장한 강감찬의 청을 받아들인 것일까? “이날 밤에 왕이 후비 및 이부시랑 채충순 등 금군(禁軍) 50여 인과 더불어 개경을 빠져 나갔다.” <고려사절요 현종 1년>
- 당시 강감찬은 얼마나 영향력이 있는 인물이었나?
몽진 이전에는 강감찬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고 성종 초 만 35세에 과거에 장원급제하는데 고려시대 과거급제자의 평균 연령이 23.7세인 것을 보면 늦은 시기에 과거에 급제하고 성종·목종 대에도 특별한 기록이 없는 것
- 정변으로 즉위하여 통치기반을 함께 구축할 새로운 인재를 찾아야 했던 현종 “강감찬은 어려서부터 공부를 좋아하고 뛰어난 지략이 많았다.” <고려사 열전 강감찬> 현종 즉위 후 예부시랑이 되고 과거시험을 주관하는 지공거를 맡으면서 새 정전(正殿)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인 인재선발을 주관하게 되는 것
〇 하공진, 거란에 화친을 청하다
- <드라마 천추태후>피난 중에 거란군 진영에 사신을 보낸 현종 “국왕께서는 진실로 와서 뵙기를 원하셨으나··· 강남으로 피난 가셨으므로···” <고려사 열전 하공진> 거란의 성종은 강남이 어디냐고 묻자 하공진은 너무 멀어 며칠이 걸릴지도 모른다는 대답에 수긍을 하고 돌아가는데 서희 못지않은 하공진의 외교술은 세치 혀로 40만 거란군을 돌아가게 만든 것
- 거란군이 퇴각한 가장 큰 이유는 “고려왕이 직접 알현하러 온다.” 는 것으로 친조(親朝)라고 표현하는데 하국의 왕이 상국의 왕에게 예를 갖추는 것으로 원래 그래야 되지만 실제 사대관계에서는 왕 대신 사신을 보내는 것, 그런데 하공진은 고려왕이 몸소 친조(親朝) 할 것을 약조한 것으로 거란의 성종은 이를 침략의 성과로 받아들이고 퇴각의 명분을 얻은 것이기도 하고 실제로 고려왕이 친조할 것이라 믿고 개경을 점령한지 열흘만인 1011년 1월 11일 퇴각한 거란군 “거란 진영으로 가서 회군을 요청하자 거란 임금이 허락한 후 하공진 등을 억류하였다.” <고려사 열전 하공진>
- 당시 거란군은 물러날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 전쟁 초반의 승리로 강조를 죽이는 성과를 얻었지만 무리한 남하로 전투력이 한계에 도달하고 오히려 공격력을 회복한 고려군의 후방 위협을 받고 있는 입장이어서 빨리 마무리를 하고 싶었던 것
- 외교는 상대의 입장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중요한 것으로 고려의 외교력은 탁월했던 듯, 서희의 뒤를 이은 하공진의 외교력과 명분을 만들어 주자 퇴각을 단행한 거란군, 당시 거란의 입장에서는 시기도 문제가 되는 것이 유목민족이 농경지대를 공격할 때는 일정한 패턴이 있는데 대체로 7월에 공격해서 봄이 오기 전인 1월에는 돌아가야 하는 시기가 됐던 것으로 퇴각하는 거란군을 배후에서 공격 “김숙흥과 중랑장 보량이 거란군 1만 여급을 베었다. 양규도 2천여 명의 목을 베고 고려 백성 3천여 명을 되찾았다.” <고려사 열전 양규>
〇 현종의 피난길
- 피난길에 오른 현종의 상황?
강감찬의 주장에 따라 당일 몽진한 현종은 개경을 떠나 최종 목적지는 나주로 피난길은 매우 고생스러운 길로 왕이 먹을 것 묵을 곳이 없어서 고초를 당했고 심지어는 지방 사람들로부터 공격을 당하기도 “밤중에 적도들이 다시 들이닥치자 시중하던 신하와 환관 및 궁녀들은 모두 달아나 숨고···” <고려사 열전 지채문>
- 여기에서 두 가지를 알 수 있는데 정변으로 왕이 된 현종이 권력 기반을 다지기도 전에 수도를 버리고 몽진하는 것, 따라서 왕의 권위가 제대로 서지 못한 상황이라는 것과 또 한 가지는 아무리 고려의 지방 세력을 통치하려 했어도 중앙정부의 통치력이 지방에 미치지 못한 시점이라는 것
- 현종은 천추태후의 조카로 왕위를 얻기까지 누구보다 다사다난했던 인물로 위기와 함께 성장한 현종, 피난길의 어려운 시기에 현종을 환대한 공주절도사 김은부 “왕이 파산역에 도착하였는데 역리들이 모두 달아나버려서 어주에 음식이 갖추어있지 않자 김은부가 음식을 올리며 아침저녁으로 정성껏 받들었다.” <고려사 열전 김은부>
〇 몽진 길, 현종의 혼인
- 나주에서 거란군의 퇴각 소식을 들은 현종은 여러 지역을 두루 살피며 개경으로 돌아가는데 특히 공주에서는 김은부의 집에서 다시 머무르고 몽진 길에 김은부의 첫째 딸을 부인으로 맞게 되는데 현종의 제3비인 원성왕후이고 훗날 김은부의 다른 두 딸도 왕비로 맞이하여 첫째 딸은 9대 덕종과 10대 정종의 어머니이고 둘째 딸인 원혜왕후는 11대 문종의 어머니로 이 시점이 중요한 것이 그간 족내혼을 이어온 고려왕실에서 본격적인 이성(異姓) 혼인시대를 현종이 연다는 것
- 현종이 김은부의 딸들과 혼인을 한 것은 고도의 정치적 행위로 호족들의 힘을 얻기 위한 태조 왕건의 혼인정책과 유사하여 현종도 김은부의 세 딸을 포함하여 13명의 왕비를 얻게 되는데 이들 대부분은 지방 세력가의 딸들 “왕이 말하기를 ‘짐의 병이 점차 위독해져서 곧 죽게 되면 태조의 후손은 오직 대량원군만이 남게 된다.” <고려사절요 목종 12년> 그러나 고려 왕실의 자손을 다시 번성케 한 현종
〇 산전수전(山戰水戰), 현종
- 여느 왕들과는 다르게 수많은 고초를 겪은 현종, 후에 현종은 말하기를 “내가 스스로 외람되게 왕위를 계승하여 어렵고 위태로운 상황을 두루 겪었으며 밤낮으로 부끄러움과 다투며 그 허물에서 벗어날 것을 생각하므로··· 그대들은 나의 부족한 것을 힘써 도와주고 또 면전에서만 순종함은 없도록 하라.” <고려사 세가 현종 2년> “난 산전수전 겪은 왕, 제대로 일하시오!”
- 전쟁 후에도 공신에게는 포상을 하고 도망자와 패자에게는 확실한 징계, 그런데 기록에는 강감찬의 행적이 나타나지 않는데 강감찬은 현종의 몽진을 끝까지 호송했을 가능성과 훗날 현종은 강감찬의 권유에 의해 몽진했던 것을 매우 높이 평가 “왕이 말하기를 당시 강공의 계책을 쓰지 않았더라면 온 나라가 모두 야만인이 되었을 것.” <고려사 열전 강감찬>
〇 인질로 끌려간 하공진
- 거란의 침입 당시 서희 · 강감찬만 기억할 것이 아니라 거란군 퇴각에 큰 공을 세운 하공진은 거란에 인질로 잡혀간 후 어떻게 되었나?
“거란 임금은 하공진을 연경에 살게 한 후에 양가의 딸을 배필로 삼아주었다.” <고려사 열전 하공진> 하지만 고려로 돌아가기 위한 준비를 철저히 하고 있던 하공진 “하공진은 좋은 말을 많이 사서 고려로 가는 길에 차례로 배치해두었는데 어떤 자가 그 계획을 보고하였다.” <고려사 열전 하공진>
- 그래서 하공진에 대한 국문이 시작되고 여기에서 하공진은 본심을 드러내는데 “저는 우리나라를 감히 배반할 수 없습니다. 죄는 만 번 죽어도 마땅하나 살아서 대국을 섬기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고려사 열전 하공진> 역사에서 크게 주목받지 못했던 하공진을 다시 보게 되는 것
- 하공진의 최후는?
거란의 성종도 감동을 하고 “거란 임금이 의롭게 여기고 그를 풀어주면서 절개를 바꿔 충성을 다할 것을 설득하였으나 하공진의 말투가 더욱 강경하고 불손해지니 마침내 그를 죽이고 앞 다투어 심장과 간을 꺼내 먹었다.” <고려사 열전 하공진> 그 만큼 거란 성종의 분노가 컸다는 의미일 것(?)
〇 거란 성종의 분노
- 전쟁이 끝난 후 하공진의 약조대로 친조(親朝)를 요구한 거란의 성종, 하지만 현종은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나서지 않는데, 애시 당초 현종의 친조는 지키기 어려운 약조로 왕이 사로잡힐 경우 다음 상황을 예측할 수 없는 것이어서···
- 그래서 친조 약조는 거란군을 퇴각시키기 위한 전략이었을 뿐이고 실제로 친조 할 생각은 아니었던 것, 심지어 2차 침입 후 고려는 거란과의 약속을 깨고 또 다시 송과의 교류를 시작하는데 어떤 상황에서도 거란에게 종속되는 것을 거부한 고려
- 결국 거란의 성종은 강동6주의 탈환을 목적으로 재침략하는데 아이러니하게 강동6주를 놓고 거란 VS 고려의 전쟁에서 거란은 계속 패하게 되고 강동6주를 방어벽 삼아 군사력을 강화한 고려는 1015년 4월에는 거란의 사신을 억류시키기까지 하고 1016년 12월에는 송(宋)의 연호를 다시 사용하게 된다.
- 조선이 고려의 실리외교를 본받았더라면 하는 것으로 건국 초 조선의 전략은 강대국과의 사대를 통한 실리외교였지만 문제는 강대국이었던 명나라가 힘을 잃은 후에도 사대를 고집한 것
〇 거란의 재침공
- 1018년 12월 거란의 제3차 고려 침공, 거란군의 전력은 소배압이 이끄는 10만 대군으로 소배압은 2차 침공 당시의 거란 장수 소손녕의 형으로 거란의 성종을 따라 개경을 함락시킨 경험이 있는 자
- 이에 맞서서 그간 달라진 고려군은 20만 8천 명을 상원수 강감찬이 이끌고 출정하는데 과거 거란군 침입 경로에 강력한 방어군을 배치하고 첫 전투를 흥화진으로 예상하고 준비하여 강감찬의 고려군은 대승!
- 승리의 비결은?
가죽과 밧줄을 이용한 전술 “큰 동아줄을 소가죽에 꿰어서 성 동쪽의 큰 냇물을 막고 그들을 기다렸다가 적들이 오자 막아놓았던 물줄기를 터놓고 복병을 돌격시켜 크게 패배시켰다.” <고려사 열전 강감찬> 병법(兵法)에서는 적군이 강을 건너고 있을 때 수공(水攻)을 가하면 물 때문에 군대가 갈라져 각개격파가 용이
- 강감찬 장군은 모든 상황을 예측했던 것일까?
오랜 시간 철저히 전쟁에 대비한 것으로 강감찬 장군은 미리 삼교천에 1만 2천여 군사를 매복시켜 거란군의 흥화진 우회를 미리 대비한 것으로 밝혀져 다양한 경우의 전투상황에 대비하고 촘촘한 수비벽을 세운 것
- 기록상 수공(水攻)의 원조는 흥화진 전투, 일반적으로 물을 이용한 공격하면 을지문덕의 살수대첩을 꼽지만 을지문덕이 살수대첩을 펼쳤다는 근거는 미약하고 이는 일제강점기 신채호의 <조선상고사> 기록으로 후대에 작성된 것으로 역사적 승리에는 비범한 전술이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으로 만들어진 기록일 가능성이 높지만 흥화진 전투의 기록은 당대의 기록
- 흥화진 전투에서 삼교천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개경으로 진격하는 거란군은 강감찬이 지키는 성(城)을 피해 진격 “정월 신유 소배압이 신은현에 이르렀는데 개경과의 거리가 1백리였다.” <고려사 세가 현종 10년> 하지만 고려의 청야전술로 궁지에 몰린 거란군
〇 강감찬의 귀주대첩
- 거란군은 끝내 개경 진입에 실패하고 개경 근처인 “금교역에 이르렀는데 우리가 보낸 군사 1백여 명이 밤을 틈타 엄습하여 죽였다.” <고려사 세가 현종 10년> 퇴각하는 거란군을 쫓아 전투를 벌인 강감찬 장군은 귀주에서 거란군과 일전을 벌이는데 귀주성은 남·서·북쪽은 모두 경사면이고 동쪽만 평지와 연결된 지역으로 이곳에서 거란 기병에 맞선 고려군, 평지전투는 거란군에 유리할 수도 있으나 때마침 불어오는 강력한 바람! 한겨울에 돌연 남풍이 몰아쳤던 것
- 남풍이 고려군에 유리한 이유?
기록에 의하면 남풍은 거란군에게는 맞바람으로 활을 사용하는 기병위주인 거란군에게 불리한 상황으로 맞바람이 거란군에 불리한 이유 ① 활의 조준이 어려움 ② 바람소리 때문에 지휘관 명령을 듣기 어려움 ③ 바람의 저항으로 화살 공격력 약화를 초래한 것
- 게다가 남쪽에서 온 지원군이 귀주에 도착 “김종현이 군사를 인솔해 그 곳에 이르니 갑자기 비바람이 남쪽에서 불어와서 깃발이 북쪽을 가리켰다. 아군이 그 기세를 타고 용기백배하여 격렬히 공격하니 거란 군사들이 북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고려사 열전 강감찬>
- 바람의 방향 · 지원군의 도착시간까지 예견한 강감찬, 제갈공명도 적벽대전에서 화공을 할 때는 바람방향을 중요시했는데 전쟁을 이끄는 장수는 <천시지리인화(天時地利人和)>를 중시해야 한다고 하여 날씨의 변화는 바로 천시에 해당한다는 것, 거란의 3차 침입은 고려의 대승으로 끝나고 우리는 이 전쟁을 귀주대첩이라고 한다.
※ 천시지리인화 : 하늘이 주는 운(運)은 지리상의 이로움만 못하고 지리상의 이로움도 사람들 사이의 일치단결만 못하다는 뜻
- 강감찬의 귀주대첩은 고려의 완벽한 승리 “시체가 들을 덮었고 사로잡은 포로·노획한 말과 낙타·갑옷·병장기를 다 셀 수 없을 지경이었다. 살아서 돌아간 자가 겨우 수천 명이었으니··· 거란의 패배가 이토록 심한 적은 없었다.” <고려사 열전 강감찬>
- 분노한 거란의 성종은 “네가 적을 가볍게 보고 깊이 들어감으로써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으니 짐이 마땅히 너의 낯가죽을 벗겨낸 이후에 죽일 것이다.” <고려사 열전 강감찬> 결과적으로 보면 거란의 1차 침입 993년부터 3차 침입 1019년 까지 26년 간 계속된 고려 VS 거란 전쟁, 대규모 전투만 3차례로 계속 국지전이 이어졌던 것으로 오랜 전투가 귀주대첩의 승리로 전쟁이 종식되는 것으로 감동적인 것은 당시 강감찬 장군의 나이 72세
〇 귀주대첩 승리의 의미
- 1019년 2월 귀주대첩에서 대승을 거두고 금의환향한 강감찬 장군, 오랜 시간 지속되었던 고려 VS 거란 전쟁이 마침내 끝난 것이다 “왕은 친히 영파역까지 나와 영접하였다. 풍악을 준비하여 장군과 병사들을 위해 잔치를 열었고 금으로 만든 꽃 8가지를 몸소 강감찬의 머리에 꽂아주었다.” <고려사 열전 강감찬> & “오른 손에는 금으로 된 술잔을 왼손에는 강감찬의 손을 잡고 위로하고 찬탄하기를 그치지 않으니···” <고려사절요 현종 10년> 이후 강감찬은 현종을 도와 고려 100년 평화의 기틀을 다진다.
- 아울러 현종은 “도병마사에서 아뢰기를 ‘이제 전쟁터에서 거란을 막아 전공이 있는 자 9472인 에게는 각각 관계와 관직을 올려주십시오’ 현종은 이를 따랐다.” <고려사절요 현종 10년> & “전사자들에게 관직을 추증하고 그들의 집에 쌀과 보리를 차등 있게 하사하라고 명령하였다.” <고려사 세가 현종 10년> 확실한 전후 처리의 정리로 새로운 고려를 만들 준비를 해나가는 것
- 모든 신하들이 항복을 주장할 때 유일하게 항복대신 몽진을 주장했던 강감찬, 그리고 그의 전략을 믿고 따라준 현종의 리더십이 빛낸 역사, 조선 선조(宣祖)의 몽진과는 본질적으로 달랐던 고려 현종의 몽진은 전략적 선택으로 선조(宣祖)의 몽진이 자신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현종의 몽진은 전략적 선택, 그래서 인문학적 소양이 필요한 것으로 문제의 본질을 정확히 파악하고 걸맞은 대안을 이끌어 내는 능력이 필요한 것
- 전쟁은 승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이후가 중요한 것인데 고려-거란 전쟁이 남긴 과제는 어떻게 거란의 재침략을 막을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거란과 송 사이에서 고려의 주도권을 확보할 것인가? 이것이 중요한 것, 그래서 귀주대첩에서 승리 후 바로 거란과의 사대관계를 복원한 고려, 하지만 주도권을 쥔 고려는 송과도 자유롭게 교류할 수 있게 되는 것
- 이렇게 되면서 동북아시아의 균형추 역할을 하게 된 고려의 외교로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실현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고, 또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고려가 거란과 싸워서 이겼을 때 이를 지켜본 송(宋)은 고려에게 거란을 공격하자는 제안 <연려제요(聯麗制遼)>를 하지만 송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한 고려,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주도적이고 세련된 외교로 동북아 평화의 중심이 된 고려, 이런 상황을 고려가 만들어 가면서 주변 강대국에 휘둘리지 않고 스스로 황제국을 칭하며 위상을 확고히 한다.
※ 연려제요 : 거란을 제압하기 위해 고려와 연합한다는 송나라의 외교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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