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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임당

mkpark2022 2016. 6. 8. 22:16

 

 



신사임당

 

 

오만 원 권 화폐의 인물, 신사임당

- 여성계 오만 원 권 신사임당 안 돼 반발 확산!’ & ‘현모양처 신사임당 화폐인물은 국가 망신!’ 반대 목소리 나와··· 신사임당이 우리의 화폐인물로 등장하기에는 그 과정이 쉽지 않았다

- 오랜 시간 이상적인 여성상으로 주목받은 신사임당, 일제강점기에는 아들을 전쟁터로 보내는 군국의 어머니상으로 왜곡되고 1960~1970년대에는 전통을 계승한 한국의 여성상으로 조명되고 지금의 우리는 그녀를 현모양처로 기억하는데, 현모(賢母)는 과거에 9번 장원급제한 대학자 율곡 이이의 어머니라서, 양처(良妻)? 신사임당과 남편 사이는 어땠는가? 잘 알려지지 않은 아내로서의 신사임당 참모습?

- 오만 원 권과 오천 원 권에 나란히 화폐인물로 선정된 어머니 신사임당과 아들 율곡 이이, 이런 일은 쉽지 않은 것으로 화폐 속의 모자는 많이 닮았다는 얘기를 하는데 이것은 이종상 화백 한 사람의 작품이기 때문

- 화폐 인물 선정 과정에서 신사임당이 논란이 된 이유?

신사임당이라는 인물 자체에 대한 반대한 것이 아니라 신사임당이 선정된 이유에 대하여 논란이 됐던 것으로 개인의 정체성을 중요시하는 21세기에 단지 현모양처란 이유만으로 선정하는 것에 대한 반대인 것

- 사임당의 생애 <이숙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

사임당이 살아온 생애를 보면 여성의 활동이 제한받던 조선시대에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했고 화가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보여 온 신사임당은 수동적인 현모양처의 여성이라고는 볼 수 없는 것, 어쨌거나 신사임당이 화폐의 인물로 등장한 것은 여전히 한국 여성을 대표하는 인물로 여겨졌기 때문

 

신사임당은 누구?

- 신사임당의 본명은? 인선(仁善)으로 신사임당은 당호(堂號)이고 기생 외에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조선시대 여성들, 특별하게 이름이 알려진 경우는 장희빈은 장옥정 · 명성왕후는 민자영 · 허난설헌은 허초희 등등

- 신사임당의 대표작?

<초충도(草蟲圖) 8곡병> 으로 오천 원 권에 이미 들어간 신사임당의 초충도, 그래서 오만 원 권에는 신사임당의 그림이 아닌 동() 시대를 살다간 어몽룡의 <월매도>와 이정의 <풍죽도>가 삽입된 것

- 딱히 떠오르지 않는 조선시대의 여성화가, 그 만큼 여성의 예술 활동이 쉽지 않았던 것에 대한 반증으로 화가로 활동한 신사임당은 특별한 경우이고 조선시대 나라에서 원했던 이상적인 여성상?

- 조선시대 나라에서 원하는 여성상을 담은 한권의 책 <내훈(內訓)>은 성종의 어머니 인수대비가 부녀자의 훈육을 위하여 편찬한 책으로 국을 건더기 째 들이마시지 말고··· 주인이 보는 앞에서 국그릇에 간을 맞추지 말며···” <내훈> 내훈은 주로 주인을 배려하는 마음에서 나온 내용들로 여성이 지녀야 할 네 가지의 으뜸은 덕() 밝고 고요하고 다소곳하며 절개를 지키고 바르게 처신하고 행동하며 부끄러움을 느끼며 움직이고 움직이지 않아도 법도가 있는 것이 여성의 덕()” <내훈>

- 나머지 세 가지 행실은?

여성의 4부덕(婦德) 부언(婦言), 옳고 바르게 하는 것 부용(婦容), 깨끗하고 단정한 용모 부공(婦功), 성실한 일솜씨로 열심히 일하되 자랑하지 않는 것

- 여성으로서 좇아야 할 세 가지 도()?

삼종지도(三從之道)로 친정에서는 아버지를 따르고 시집에 가서는 남편을 따르고 남편이 죽으면 아들의 뜻을 따르는 것으로 여성은 감히 자기 마음대로 행동을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조선시대 여성들의 삶

- 인수대비가 여성들에게 엄격한 규범을 요구한 이유?

15세기 말 성리학 이념강화에 힘쓰게 되는 성종(成宗), 이에 맞춰 유교적 여성상을 강조하기 위한 조선의 왕실은 조선시대 여성들에게 요구된 것 꽃놀이 가지 않기 재혼하지 않기 알아도 모르는 듯 나서지 않기 있어도 없는 듯 자기 주장하지 않기 등으로 여성에게 억압적인 삶을 요구한 조선시대

- 실제 조선 여성들의 삶은?

실제로는 규범에 따르지 않는 여성도 많았는데, 규제 · 금지를 넘나들면서 나름대로 자기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일솜씨가 없는 걸 자랑으로 여기는 여성도 있었음 사대부의 아내들··· 매양 봄과 가을에 친히··· 산으로 때지어 올라가고 있습니다.” <세종실록 1431625> 이념과 현실에는 차이가 있었던 조선시대 여성들의 삶, 대표적 인물로 어우동은 조선 성종(成宗)때 방탕한 생활로 사회적 지탄을 받은 여성으로 삼종지도의 문란이라는 죄명으로 성종(成宗)은 어우동을 처형시키고 조선 후기로 갈수록 여성들의 활동이 제한

 

신사임당 화가로 우뚝 서다

-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신사임당은 예술 활동을?

어려서부터 예술적 재능을 보인 신사임당은 안견의 산수화를 스승삼아 그림공부를 열중하는데 딸만 다섯을 둔 사임당의 부모는 둘째 딸의 재능을 인정하고 지켜봐 주며 꺾지 않고 19세의 나이에 혼인 후에도 작품 활동을 이어가면서 마침내 사임당의 그림은 규방을 넘어 당대의 문인들에게 널리 알려지면서 그 시대를 대표하는 화가로 인정을 받게 되는 것이다.

- 율곡의 어머니로 알려진 신사임당, 율곡 때문에 유명해진 것이 아니라 율곡이 유명해지기 전에 이미 화가로 이름을 떨친 신사임당, 당시 어숙권이라는 사람은 율곡 이이의 스승이며 수필집 <패관잡기>의 저자인데 동양 신씨가 있는데··· 평하는 사람들이 안견 다음 간다하였다” <패관잡기> “(어머님이)산수도를 그리셨는데 신묘하였고 또 포도를 그리셨으니 세상에서 견줄 이가 없었다.” <율곡의 선비행장>

- 신사임당은 어떻게 그림을 배웠을까?

신사임당이 스승이 있었다는 기록은 없고 당시에는 여성이 전문적으로 그림을 배우기 어려웠던 환경이어서 스스로 터득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

- 당시 신사임당 작품의 인기는?

신사임당 작품의 모사품까지도 인기였고 숙종(肅宗)은 신사임당 작품을 보고 감상을 하는데 부인이 그려낸 것이 어찌 그리 묘하온고··· 그 그림 모사하여 대궐 안에 병풍 쳤네.” 이 정도였으면 당시 화가로서 상당한 명성을 얻고 있었던 것

- 규방에서 작품 활동을 했던 신사임당, 당대 문인들이 작품을 볼 수 있었던 이유?

남편 이원수의 5촌 당숙들(이기·이행)은 영의정·좌의정을 하는 당대 최고의 권력가였는데 특히 당대를 대표하는 학자였던 이행정치적·학문적 동지들이 신사임당 작품에 평을 남긴 것으로 시가(媤家) 친척 이행을 통해서 신사임당의 작품이 문인들에게 알려진 것, 또한 이원수도 부인의 재능에 대하여 자랑스러워했기 때문에 신사임당의 작품을 널리 알리는데 남편이 도움을 주었을 가능성도 있는 것

- 뿐만 아니라 신사임당이 화가로 성장한 배경에는 아버지 신명화의 영향도 컸을 것으로 당대 비교적 개방적이었던 신사임당의 아버지 신명화

 

신사임당의 부모는 어떤 인물

- 신사임당의 아버지 신명화(1476~1522)는 중종(中宗) 때 인물로 기묘사화의 장본인인 조광조와 친분이 있는 사람으로 기묘사화로 몰락한 조광조에 비해 관직에 나가지 않아 화를 피한 신명화

기묘사화 : 1519년 조광조의 개혁정책에 불만을 품은 훈구세력이 조광조 세력을 제거

- 다섯 딸 중 둘째 딸인 신사임당을 특히 아낀 신명화 (신명화)가 여러 딸을 두었는데 다른 딸들이 비록 집을 떠나 시집을 가더라도 그리워하지 않았는데 그대의 처(신사임당)만은 내 곁에서 떠나보내고 싶지 않다.” <율곡의 선비행장>

- 사임당 부모의 열린 사고방식, 아버지 신명화를 따라 한양으로 시집을 간 어머니 용인 이씨, 홀로 남은 어머니를 위해 떨어져 지낸 부부는 각자의 부모를 모시기 위해 강릉과 한양을 오가며 지내는 세월을 보내는데, 어머니와 함께 강릉에서 성장한 신사임당 자매들은 여성으로서 자기의 뜻을 펼치기에 유리한 환경이 아니었나(?)

- 신사임당 부모가 떨어져 지낼 수 있었던 이유?

고려시대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은 남자가 결혼한 뒤 일정기간 처가에서 사는 혼인풍습으로 조선 전기까지 지속된 남귀여가혼의 풍습으로 혼인 후 친정에서 살았던 신사임당, 그래서 율곡 이이의 탄생지도 오죽헌이고 율곡 이이와 비슷한 시대의 인물 류성룡(1542~1607)도 흔히들 안동 화회마을 출생으로 알고 있지만 경북 의성 외가에서 출생

- 여성은 결혼하면 남편의 집에 살아야 하는 것으로 고정적인 사고를 가지지만 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특정시대의 풍속이 마치 더 오래 전에 생긴 전통처럼 여겨져 내려온 것도 있다는 우리 전통에 대하여 새롭게 생각해 봐야 할 부분도 있다는 점

 

신사임당과 남편

- 신사임당의 남편 이원수는 어떤 인물?

율곡의 기록 아버지 성품이 활달하여 작은 일에 얽매이지 않아··· 집안 살림을 돌보지 않으셔서 살림이 넉넉하지 못하였는데 그래도 어머님이 살림을 규모 있게 하셨다.” <율곡의 선비행장> 남편의 뒷바라지를 하며 7남매의 아이를 키워낸 신사임당

- 신명화가 이원수를 사윗감으로 고른 이유?

자료에 의하면 유복했던 신사임당의 강릉 친정, 노비가 119명 전답(田畓)154천 제곱미터로 경제적으로 풍부한 생활을 해서 가정 형편 때문에 약간 기우는 남편에게 시집을 보냈다는 것은 성립되지 않는 것

- <선비행장>에서 율곡이 살림이 넉넉하지 않았다고 기록한 이유?

살림이 어려워진 것은 한양으로 이주한 이후로 신사임당 사망 10여 년 전에 한양으로 이주하게 되는데, 이 당시가 어려웠다는 것으로 율곡의 외가에서 종로에 수진방 집을 율곡 몫으로 마련해 주고 이 집에 모든 식구가 들어가서 사는 것

- 신명화는 신사임당의 자유로운 작품 활동을 위해 이원수를 사윗감으로 선택한 심모원려(深謀遠慮)가 있지 않았나? 하는 설도 있는 것이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이원수,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홀어머니 밑에서 관직진출도 쉽지 않았던 터로 집안은 명문가였지만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기울어진 가세

심모원려(深謀遠慮) : 깊은 꾀와 먼 장래를 내다보는 생각

- 1940년대 제작된 <신사임당>에는 남편의 학업을 도운 일화로 학업을 위해 떨어져 지내던 남편이 못 견디고 돌아오자 설득해서 되돌려 보내는 장면이 나오는데··· 작가의 꾸며진 이야기로 남편의 학업을 도운 일화는 1927년 이능화의 <조선여속고>에 수록되어 있으나 그 마저도 신사임당의 사후 약 400여 년이 지난 뒤에 나온 이야기 이공(이원수)학업이 허술하면 신씨가 이를 보태어 잘못을 깨닫게 그것을 바로 잡았으니 참으로 어진 아내였다.” <조선여속고, 1927>

- 20세기에 나온 신사임당의 일화는 이전에는 없었던 이야기이지만 현모양처가 요구되는 시대적 상황에 따라 신사임당이 재해석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라는 <이숙인 교수의 분석>

- 신사임당 부부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는 숙종 때 정래주가 쓴 <동계만록>에는 18세기 신사임당에 대한 이미지를 보여주는 기록으로 당시 신사임당은 독립적이고 똑똑한 이미지 인 반면 이에 비해 저평가된 이원수, 남편보다 10년 먼저인 1551년 사망한 신사임당, 이원수도 바로 재혼하게 되는데 성격이 거칠었던 것으로 전해지는 후처 권씨는 시어머니와의 갈등으로 인해 절에 들어가기도 한 율곡 이이

- 사임당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거의 없고 남아있는 것은 그림과 율곡 이이가 쓴 어머니에 대한 선비행장사실에 근접한 사료이지만 아들의 기록이란 점에서 한계이고 그 이후 신사임당에 대한 후대의 이미지는 뛰어난 화가 · 훌륭한 아들을 키운 어머니라는 두 가지 요소가 결합해서 만들어진 것

- 신사임당 부부 사이에 관한 기록?

나쁜 것 같지는 않은 것이 아버님께서 어쩌다 실수를 하시면 (어머님이) 옳은 도리로 말씀드려 고치게 하셨고···” <율곡의 선비행장> 사실 좋은 말이기는 하지만 아내가 남편의 일거수일투족을 관리했다는 생각이 드는 대목으로 엄모엄처의 이미지

- 하지만 신사임당을 기가 센 여자로만 볼 수 없는 것집안 살림을 할 때 모든 일을 혼자 마음대로 처리하지 않고 반드시 시어머니께 말씀 드린 뒤에 하셨다.” & “시어머니 앞에서는 계집종을 꾸짖는 일도 없었다.” <율곡의 선비행장> 이를 보면 신사임당에게는 전형적인 유교적 여성의 모습이 있는 것

- 결국 신사임당이야말로 학문적 소양 뛰어난 그림 실력 분명한 자기주장 등을 보면 유교적 여성과는 거리가 먼 여성상

 

어머니로 강조되는 신사임당

- 신사임당 사후 100여 년이 지난 17세기에 다시 주목받은 신사임당, 1659년 당대의 최고 유학자 송시열은 신사임당의 작품을 주목한다. “과연 그 율곡 선생을 낳으심이 당연하다.” <사임당화란발> 사임당을 율곡 이이의 어머니로 더 높이 평가한 송시열, 이런 송시열의 시각은 제자들에게 전해지고 그들은 신사임당을 작품에서 화가로서의 재능보다 어머니로서의 자질을 찾았던 것이고 화가가 아닌 어머니로 강조되는 신사임당, 이후 사람들의 기억 속에 위대한 어머니로 자리 잡는다.

- 송시열이 신사임당을 주목한 이유?

신사임당을 주목했다기보다는 율곡 이이를 강조하는 과정에서 신사임당을 주목한 것으로 조선 후기 정치·사상계를 장악한 서인 노론, 중심인물이 송시열이고 서인의 사상적 원류가 율곡 이이가 되는 것으로 율곡 이이를 드높이기 위해 신사임당을 활용한 것

- 서인 노론의 주장은 신사임당의 재능은 하늘이 내려 준 것이고 율곡을 낳은 것도 하늘의 뜻이라 하여 결과적으로 보면 신사임당의 모습이 화가로서의 자질이 아닌 율곡의 어머니로서의 모습만 강조되는 것

- 화가 신사임당에 대한 서인 노론의 입장?

대표작이 바뀐 신사임당, 당대에는 산수도로 명성을 떨치지만 송시열은 산수도를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산수도보다 초충도를 주목한 노론 세력들, 이 시기가 되면 유교화가 가속화되는 시기로 당시의 유교적 관점에서 보면 자연을 그린 산수도는 여성에게 부적합하다고 판단하고 부인이 규방에서 취미삼아 그리기엔 초충도가 적합하여 이에 맞추다 보니 사임당의 대표작이 초충도로 바뀌는 것

- 역시 여성이 그림을 그리는 것을 부정적으로 본 노론세력들은 시경(詩經)<초충>이라는 시가 있는데 이는 여성의 덕목을 칭송한 시로 사임당이 초충도를 그린 것은 시경의 정신을 잇고자 한 것이라고 짜 맞춘 것으로 너무 이데올로기화 되는 것, 성리학에서 중요시 했던 시경, 따라서 초충도로 성리학의 개념에 맞는다고 풀이한 것

- 신사임당이 시경(詩經) 초충의 내용을 그렸을 가능성?

시경의 초충과 일치한다고 보기에는 어려운 신사임당의 초충도제목만 같고 내용은 다른 것으로 성리학적 이념에 맞추기 위해 대표작까지 바뀐 신사임당, 아들 율곡이 훌륭한 인물이 된 것은 어머니로서 기쁜 일이긴 하겠지만 아들을 드높이기 위해 어머니의 정체성까지 바꾸는 것은 안타까운 일로 율곡이 없으면 신사임당도 없다는 뜻(?)

 

시대에 따라 바뀌는 신사임당 상()

- 17세기 고착화된 신사임당의 어머니 이미지, 그 이전에는 화가로서의 이미지였지만 또 다시 이미지가 바뀌는 것이 1900년대로 을사늑약을 체결하면서 당시 불었던 애국계몽운동은 교육을 통한 국권회복운동으로 교육이란 틀에서 새롭게 조명된 신사임당은 아들을 훌륭하게 교육시킨 어머니 상과 남편을 일깨우는 신사임당의 모습으로 여성상이 정립되는 것

국권회복운동 : 1905~1910년에 전개된 국권회복을 위한 실력 양성 운동

- 또한 1940년대에는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면서 국가총동원법을 반포하고 자식을 전쟁터에 내보내는 정서를 유도하기 위해 정점에 신사임당을 내세우며 일제에 의해 군국의 어머니로 왜곡·변질된 신사임당은 총후부인으로 등장하게 되는 것

국가총동원법 : 일제가 중일전쟁 이후 태평양전쟁까지 한반도 내에서 인적·물적 자원을 마음대로 수탈할 목적으로 만든 법 & 총후부인 : 전쟁 상황에서 후방의 관리와 노동력을 제공하는 여성

- 이 무렵에 나온 <연극 신사임당>1944년 제3회 국민연극경연대회 참가작으로 사임당의 말과 행동이 반도 전체 부녀자들의 폐부를 찢어··· 보다 나은 모성이 되어 씩씩한 자손을 이 나라에 바쳤으면 좋겠다.” <연극 신사임당 창작 의도 중()> 일제가 신사임당의 이미지를 악용한 것

- 광복 이후 신사임당의 이미지?

군국의 어머니라는 이미지는 벗지만 일제강점기나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훼손된 민족정체성 회복의 상징이 된 신사임당, 1960년대 이후에는 현모양처’ & ‘산업역군의 어머니로 강조되면서 한국을 대표하는 여성상이기도 하지만 21세기 진취적 여성상을 신사임당에게서 찾기도 하는 것

 

신사임당의 자녀교육

- 신사임당의 자녀교육은 어땠을까?

과거에 9번 장원급제한 율곡 이이, 신사임당이 직접 가르쳤다는 기록은 없고 율곡의 선비행장에는 자녀들에게 학식과 도덕으로 모범을 보였던 것으로 기록되어 평소 그림과 학문에 열중한 신사임당을 자연스럽게 자녀들이 롤모델 삼았을 것

- 율곡을 제외한 자녀들은?

43녀 중 세 명이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데 화가로 이름을 날린 장녀 매창도 사임당 못지 않는 실력을 보였다고 하고 막내아들 이우도 시·서화 삼절로 이름을 낳기도··· 율곡도 자신보다 낫다고 극찬한 막내 동생의 재능, 신사임당의 학문적 소양을 이어받은 율곡 이이와 예술적 재능을 이어받은 맏딸 매창과 막내아들 이우로 이어지고 반면 신사임당의 장남 이선은 율곡 이이도 상당히 안타까워했던 인물

신사임당의 맏딸 매창과 기생 매창은 동명이인

- 자녀들을 과잉보호하는 캥거루맘 · 헬리콥터맘에게 시사하는 바가 큰 것으로 자녀들에게 몸소 모범을 보였던 신사임당처럼 강요가 아닌 자발적으로 배우게 하는 것이 진정한 교육

- 신사임당 본연의 모습?

신사임당은 시대의 제약을 뛰어 넘은 재능을 펼친 당당한 여성 & 신사임당은 시대가 요구하는 어머니상이었다. 신사임당 본연의 모습을 복원시키는 것이 우리 시대의 역할 & 신사임당이 한국 여성을 대표하는 인물이 된 것은 시대적 한계를 넘어 예술로 자기 세계를 이뤄냈고 훌륭한 아들을 키워냈기에 가능했던 것 & 자식 이름에 가려졌던 신사임당의 본 모습, 오늘 날도 누구의 엄마 · 누구의 아내라는 호칭으로 덧씌워진 여성들, 여성들이 자신의 이름을 되찾을 수 있는 사회가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