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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추태후, 위험한 사랑에 빠지다

mkpark2022 2016. 6. 1. 21:38

 

 

 

천추태후, 위험한 사랑에 빠지다!

 

 


천추태후는 누구?

- 고려 최초로 섭정(攝政)을 한 천추태후, 어린 나이에 여동생과 함께 경종의 비()가 된 천추태후는 왕실에서 유일하게 아들을 출산하지만 그 기쁨이 오래가지 않는 것은 2년 후인 981년 경종이 승하하고 18세의 나이에 과부가 된다.

- 원자가 아직 어려 친오빠 성종이 대신 즉위하고 그 후 아이와 떨어져 살며 외로운 날이 계속되던 어느 날, 운명처럼 다가온 사랑 김치양을 만나게 되는데 역사를 바꾼 천추태후와 김치양의 만남

- 교과서에는 거의 등장을 하지 않는 천추태후, 하지만 5대 경종의 후비 · 6대 성종의 여동생 · 7대 목종의 어머니 · 8대 현종의 이모가 되는 고려 5~8대 왕에 대하여 천추태후를 거치지 않고는 이야기 할 수 없는 인물 천추전에 거처하므로 세상에서 천추태후라 불렀다.” <고려사 열전 헌애왕태후 황보씨> 고려시대 태후는 조선시대 대비와 상응하는 용어로 왕후시절 호칭은 헌애왕후이고 대비시절 호칭은 천추태후

- 천추태후 아버지는 왕건의 아들이고 어머니도 왕건의 딸, 그런데 왜 황보 씨?

고려왕실의 특징 태조 왕건의 핏줄끼리 결혼하는 족내혼을 함 딸들은 왕씨 성을 피해 할머니 성을 따름, 그래서 황주호족 신정왕태후 황보씨의 손녀여서 헌애왕후 황보씨가 되는 것

 

고려판 주홍글씨? 천추태후와 김치양

- 천추태후에 대한 역사적 평가?

조선시대에 비난의 대상이 된 천추태후 지어미로서 음탕한 행동이 있거나 신하로서 반역하는 뜻이 있다면 반드시 죽여야 할 적이다.” & “황보씨가 김치양과 간통하고··· 어찌 태후의 호()를 가질 것인가?” <안정복의 동사강목>

- 음탕 · 문란···, 비난의 이유가 김치양과의 만남 때문?

기록에 의하면 김치양은 일찍이 거짓으로 중 행세를 하면서 천추궁에 출입하여···” <고려사 열전 김치양> 이를 보면 아마도 유부남은 아니었든 하고 김치양의 본관은 동주(황해도 서흥군)로 당시 동주의 큰 세력 김행파(태조 왕건의 장인)와 같은 집안사람으로 추정하고 또 다른 기록에 의하면 천추태후의 외족이기도 함

- 김치양에 대한 평가?

김치양은 성격이 간교하고··· 정력이 몹시 강했다.” <고려사 열전 김치양> 이들의 만남이 당시의 상황으로는 불륜이 아닌 것 같은데, 후대에 비난을 받는 이유는?

 

천추태후의 오빠 성종, 김치양을 쫒아내다?

- <드라마 천추태후> 고려 6대 왕 성종 때 궁궐에 도는 추한 소문, 알고 보니 소문의 주인공은 성종의 여동생 천추태후, 성종은 곧 바로 김치양을 잡아 처벌하고 성종이 장형으로 다스려 먼 곳으로 유배 보냈다.” <고려사 열전 김치양>

- 천추태후의 입장에서 보면 안 된 것이 어린 나이에 시집와서 18세에 과부가 되고 아들과도 자주 볼 수 없는 상황 성종이 즉위하자 목종을 궁궐에서 길렀다.” <고려사 세가 목종 총서> 그리고 경종이 승하 후 사가로 나가 살게 된 왕후들, 그나마 천추태후는 아들을 낳은 공을 인정받아 천추궁에서 살게 된 것

- 김치양의 신분에는 문제가 없었나?

문제가 있었던 것은 사실! 고려 왕실은 공주들에겐 족내혼을 더욱 엄격히 시행하여 고려 왕실 공주들의 혼인 54사례의 기록 중 47사례가 족내혼, 이를 보면 왕실혈통이 아닌 김치양은 천추태후의 배필로는 부적절한 것

- 사별(死別) 왕후도 재혼이 가능?

여성의 이혼 · 재혼이 조선시대에는 불가능했으나 고려는 조선보다 개방적인 사회로 이혼녀였던 수비 권씨는 충숙왕과 재혼하고 문덕왕후 유씨도 천추태후의 오빠 성종과 재혼을 한 것으로 여성의 이혼 · 재혼이 가능했던 고려시대, 영국 왕실에서는 이혼녀 심프슨 부인과 결혼하기 위해 왕위를 포기하는 사례의 윈저 공이 있는데···

- 고려라는 것을 고려(考慮)해야 하는 것이 여성의 이혼 · 재혼문제는 사회적 지위와 밀접한 관계로 고려시대 재산상속은 자녀균분상속이고 부모에 대한 봉양 · 제사도 서열 무관하게 자녀 모두의 의무였으나 조선 후기로 갈수록 장자상속이 고착화 되어 부모의 재산을 모두 가진 놀부와 흥부의 형제가 등장하는 것

- 또한 고려시대는 ·차남의 서열뿐만 아니라 아들·딸과의 차별도 없었던 것으로 시집갈 때 받은 친정재산을 계속 여성의 재산으로 인정하여 재산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이혼·재혼이 자유로웠던 것

 

헌정왕후, 숙부와 사랑에 빠지다?

- <드라마 천추태후> 고려를 뒤흔든 또 다른 위험한 사랑? 유학(儒學)을 바탕으로 국가체제 정비에 나선 성종, 그런데 천추태후와 마찬가지로 과부였던 경종의 비 현정왕후가 숙부 왕욱과 사랑에 빠진 것, 게다가 이미 임신까지 한 상황

- 선왕(先王)의 비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은 숙부 왕욱을 유배 보낸 성종, 그리고 아이를 낳은 후 세상을 떠난 헌정왕후는 천추태후와 자매관계로 함께 경종에게 시집갔던 인물이고 왕욱은 태조 왕건의 제5비 신성왕후 김씨의 아들로 당시 50! “안종(왕욱)이 왕후의 집근처에 살며 서로 왕래하던 중, 정을 통해 임신까지 했는데···” <고려사 열전 헌정왕후 황보씨> 성종의 입장에서는 두 여동생이면서 선왕(先王)의 비로 입장이 난처했을 듯···

- 헌정왕후와 왕욱의 사랑이 발각된 계기?

헌정왕후가 왕욱의 집에서 머무는데 집안사람이 마당에 땔감을 쌓아놓고 불을 지르니···” <고려사절요 성종 11> 불이야! 하고 외치는 바람에 결국 탄로가 난 둘의 관계

- 김춘추와 문희의 사랑과 헌정왕후와 왕욱의 유사한 사랑?

곡령에 올라 오줌을 누었더니 온 나라에 흘러 넘쳐 은빛 바다로 변하는 꿈을 꾸었다.” <고려사 열전 헌정왕후 황보씨> 신라 문희·보희 자매의 꿈과 유사한 오줌 꿈 설화, 헌정왕후와 왕욱의 사랑은 김춘추와 문희의 사랑을 재연한 것이고 성종에게 알리려 불을 질렀지만 결과가 달랐던 것

 

여동생들과의 갈등, 성종은 왜?

- 왕욱과 김치양이라는 두 여동생의 연인을 모두 유배 보내는데, 이들의 사랑은 어느 정도는 당시의 사회적으로 용인이 되는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성종의 과도한 처벌? 왕후 출신 여동생의 아들이 왕위를 위협할 우려를 했을까?

- 왕위 때문이라면 천추태후가 낳은 경종의 아들부터 제거했을 것이지만 잘 크고 있는 상황이고 심지어 990년에는 “(성종)이 교서를 내려 말하기를 왕송(훗날 목종)은 태조의 손자이며 나의 조카이다··· 예를 갖춰 책봉하여 개령군으로 삼는다.” <고려사 세가 성종 9> 당시 성종의 나이 31세로 후사를 볼 수 있음에도 조카를 후계자로 지명하는 것

- <이익주 교수의 제안> 여동생의 연인을 유배 보낸 성종의 특징을 살펴보면 성종은 왕욱을 사수현(사천)으로 유배 보내며 숙부께서 대의를 범했으니··· 라고 일렀다.” <고려사 열전 안종 왕욱> 성종이 말한 대의는 바로 유교의 대의일 것, 성종은 고려 초 국왕들 가운데 가장 열렬하게 유교를 국가의 통치 이념으로 삼은 유학군주! 그런데 유교국가에서 여성의 정절(貞節)은 중요한 덕목으로 유교 국가를 추구하는 성종에게 왕후였던 여동생들의 사랑은 용납하기 불가한 것, 특히 유교의 중요 덕목은 () · () · ()효자 · 절부(節婦)의 포상정책까지 실시하는데 집안 단속부터 되지 않은 셈

- 성종이 유교정치를 중시했던 이유?

“987년 개경과 서경의 팔관회를 정지시키라는 명을 내렸다.” <고려사 세가 성종 6> 이것은 고려 왕실과 호족들과의 역학 관계를 살펴 볼 필요가 있는 것이 태조 왕건의 호족포용정책으로 고려를 건국하고 4대 왕 광종 때 왕권강화를 위해 호족들을 대거 숙청하면서 5대 왕 경종 때는 그 반작용으로 호족들이 반발하면서 다시 호족세력이 강성해지자 6대 왕 성종은 제도의 정비를 통해 고려를 안정시키려 하는데, 이럴 때 유교에서 말하는 신하의 충성을 요구하는 유교의 군신관계 논리가 성종에게는 매력적으로 받아들여졌을 것, 그래서 성종은 스스로 <화풍(華風)>이라는 중국의 유교문물과 제도를 받아들이며 그런 제도의 밑바탕에 유교정치의 이념을 깔아 놓으면서 나라가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는 바탕을 만들고자 했던 것

 

천추태후에게 찾아 온 새로운 기회! 권력을 장악하다?

- <드라마 천추태후> 997년 오빠이자 왕인 성종이 승하하고 고려 제7대 왕으로 즉위한 천추태후의 아들 목종, 이미 성인이 된 아들이지만 목종 대신 섭정(攝政)을 시작한 천추태후, 그간 폐지되었던 팔관회와 연등회를 부활하고 그 동안 만날 수 없었던 한 남자를 궁으로 불러들이는데 다시 시작된 천추태후와 김치양의 관계

- 즉위 당시 18세인 목종, 천추태후가 섭정을 한 이유?

조선의 경우 16세에 즉위한 선조(宣祖)의 경우에는 20세 까지는 섭정을 하는 것이 맞지만 능력을 인정받아 17세부터 친정(親政)을 시작하는데, 불과 2년 남은 18세 목종 대신 섭정을 했다는 것은 천추태후의 강한 권력욕을 시사하는 것, 하지만 기록이 없어 속내는 알 수 없고 아들이 왕이 되자마자 섭정한 것을 보면 천추태후는 그 전부터 정치에 대한 욕심을 갖고 있지 않았을까(?)

- 즉위 후 천추태후에게 존호를 올린 목종 <응천계성정덕왕태후(應天啓聖靜德王太后)> 천명에 순응해 조용한 덕으로 성스러움을 이끈다는 뜻으로 천추태후의 정치적 야망이 담긴 고려 태후들 중 최장의 존호

 

사랑! VS 정치! 천추태후에게 김치양이란?

- 천추태후가 김치양을 다시 부른 이유?

사랑하기 때문 VS 사랑만은 아니다! 권력욕이 있는 천추태후란 인물을 고려해야 한다. 섭정 중인 천추태후에게 김치양은 정치적 파트너 VS 권력을 잡은 천추태후가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이 김치양이었을 것으로 치정과 정치를 동시에 해결!

- 여러 가지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으로 천추태후의 섭정시기에는 황주사람들이 대거 정계에 진출하는데 김치양은 황주와 가까운 등주 출신, 그리고 황주는 천추태후 황보씨의 연고지로 천추태후는 김치양을 통해 자신의 황주 세력을 확장시키려는 의도를 가졌을 것, 그래서 천추태후가 김치양을 관직에 임명하면서 승승장구 김치양을 합문통사사인에 제수하고 몇 년이 되지 않아 갑자기 우복야 겸 삼사사로 승진시켰다.” <고려사 열전 김치양> 조선의 정승, 오늘 날의 장관급으로 초고속 승진한 김치양

- 그리고 김치양은 자신의 측근들을 불러들이는데 모든 벼슬아치의 관직을 주고 뺏는 것이 모두 그의 손에서부터 나왔다.” <고려사절요 목종 6> 무소불위의 권력을 손에 쥔 김치양 집을 지었는데 삼백여 칸에 이르렀고 누각·정자·정원·연못이 지극히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고려사 열전 김치양> 조선 전기 정도전의 주도로 경복궁이 완성되었을 때가 755으로 가히 짐작할 수 있는 규모로 권력·금력·사랑까지 모두 얻은 김치양

- 김치양에 대한 천추태후의 아들, 목종의 반응은?

별로 좋지 않았던 듯 목종은 항상 김치양을 내쫒고자 하였으나 모후의 마음을 다치게 할까 두려워 감히 실행하지 못했다.” <고려사절요 목종 6>

 

 

천추태후의 속내가 드러난 사건 발생, 김치양의 아들을 출산

- 천추태후의 나이 마흔에 김치양의 아들을 순산하지만 왕실의 분위기는 어수선한데, 목종 재위 6년까지 후사가 없기 때문으로 목종을 둘러싼 수많은 괴소문이 돌자 천추태후는 소문을 듣고 늦은 밤 예고 없이 아들 목종의 처소를 찾아드는데 목종이 의문의 사내와 잠자리를 같이 한 것으로 드러나고 충격에 빠진 천추태후

- 실록에는 잠자리를 같이 한 기록은 없지만 목종이 용모가 뛰어나고 신체가 건강한 남자를 가까이 했다는 기록은 <고려사> <고려사절요>에 등장, 의문의 사내는 유행간·유충정으로 밝혀져 유충정은 본래 발해 사람으로 별다른 기능이 없으면서 목종의 대단한 총애를 받고 있었다.” & “유행간은 용모가 미려하여 목종이 특히 그를 사랑해 용양(龍陽)의 대상이었다.” & 일부 신하들 사이에서는 왕의 총애를 믿고 매우 오만하였으며 백관들도 턱과 낯빛으로 지시하였다. 왕의 측근 신하들은 그를 왕과 다름없이 보았다.” <고려사 열전 유행간>

- 충격! 목종의 후사 가능성이 없어 보여 천추태후는 출산하여 자신의 핏줄로 왕위를 잇겠다는 의도?? 천추태후의 둘째 출산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는 고려 왕실

 

치정 VS 정치, 천추태후의 출산에 숨은 진실

- 끝없이 이어지는 위험한 사랑 천추태후에게 스님 남친이! 헌정왕후에게 숙부 남친이!! 목종에게 남친이!!!

- 천추태후의 출산, 정치적 의도가 있다?

계획적 출산이다 VS 순수한 사랑이라는 것 <대보적경변상도>1006년 천추태후와 김치양의 발원으로 제작한 왕실과 백성의 안위를 빌고 자신들의 성공을 기원하는 글로 응천계성정덕 왕태후 황보씨와 김치양의 마음을 합쳐 발원하며 금자 대장경을 사성합니다.” 당시는 1006년으로 천추태후와 김치양의 아들은 겨우 4, 분명히 이들은 사랑하는 사이 VS 사랑이 아니다! <대보적경변상도>를 두 사람의 이름으로 발원한 것은 정치적 야망을 천명한 것이나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은 섭정을 하고 있는 권력자 천추태후라는 것

- 천추태후와 김치양의 아들, 왕위계승 자격이 있나?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천추태후의 둘째는 김치양의 아들로 김씨이므로 왕위계승자격이 없으나 고려라는 것을 고려(考慮)해야 하는 것이 고려시대에는 아들이 없을 때는 딸로 계보를 이어가는 것이 가능, 가까운 예로 태조 왕건의 선대에도 모계로 계보를 잇는데, 이 때 왕실에 태조 왕건의 부계혈통이 없다면 천추태후와 김치양의 아들도 왕위계승이 가능!

- 왕씨가 아닌데도?

<이익주 교수의 분석> 모계 계승으로 아마 왕씨 성을 따르게 했을 것, 사실은 천추태후가 왕건의 손녀로 원래 왕씨~

 

천추태후, 조카 대량원군 독살 시도

- 1003년 김치양의 아들을 낳은 천추태후는 헌정왕후의 아들이자 자신의 조카인 대량원군을 강제로 절에 보내고 궁녀를 시켜 술과 떡을 보내는데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챈 승려의 도움으로 숨게 되어 목숨을 건진 대량원군 술과 떡을 뜰에 버렸더니 까마귀와 참새가 먹고 바로 죽어 버렸다.” <고려사 열전 헌애왕태후 황보씨> 천추태후는 대량원군을 죽이려 했던 것일까?

- 천추태후의 여동생 헌정왕후와 숙부 왕욱의 아들 대량원군을 성종이 데려다 키우는데 12살이 되자 승려로 만들고 죽이려한 천추태후, 이유는? 그 당시 왕실의 계승권자의 상황을 살펴 볼 필요가 있는 것이 태조 왕건의 29명의 부인 중 정비는 6명으로 12명의 아들 중 ·····목종을 지나면서 서로 싸우다 죽기도 하고 후손이 번성하지 못하다가 급기야 목종 때 후사가 끊기고 대량원군이 유일한 계승자, 따라서 대량원군만 없으면 천추태후와 김치양의 아들이 왕위계승권자가 되는 상황

- 또한 천추태후의 입장에서 보면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대량원군의 아버지는 왕건의 아들 왕욱이지만 왕욱의 어머니는 신라 경순왕의 사촌 신성왕후 김씨로 대량원군의 할머니이니 멸망한 신라의 왕족으로 대량원군이 왕이 된다는 것은 신라계의 재집권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는 것

- 대량원군과 왕욱의 관계를 보면 헌정왕후와의 관계가 발각되어 사수현으로 유배 간 왕욱궁궐 내 보모의 손에서 키워진 대량원군, 하지만 어려서부터 아빠를 애타게 부르자 성종이 아이를 가엽게 여겨 사수현으로 보내 왕욱에게 돌려주었다.” <고려사 열전 안종 왕욱>

- 천추태후 VS 왕욱의 개인적인 문제라기보다는 배후에는 더 큰 정치세력이 존재, 아기 대량원군을 굳이 유배지로 오게 한 까닭은? 살아생전 왕욱이 아들에게 전했을 이야기를 상상해 볼 수 있는 것, 왕욱으로 대표되는 신라계의 지원을 받고 자랐을 대량원군, 반면에 황후 호족의 지원을 받은 천추태후라는 것을 보면 당시 정치의 흐름을 읽을 수 있는 것

- 천추태후의 입장에서 보면 고려의 전통을 중시하는 황주 호족 정치세력을 바탕으로 성장한 천추태후에게는 화풍(和風)을 따른 성종의 유교정치에 반감을 느꼈을 것이고 성종의 손에서 자란 자신의 아들 목종의 정치도 탐탁지 않았을 듯~ 그래서 전통에 기반을 둔 새로운 정치체제로 고려를 이끌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목종 대신 섭정을 하고 후사를 얻기 위해 김치양을 선택한 것일 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