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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려 김윤후, 세계 최강 몽골군을 두 번 무찌르다.

mkpark2022 2016. 9. 26. 21:40

 

 

 

 

승려 김윤후, 세계 최강 몽골군을 두 번 무찌르다.

 

 


개요

- 1231년 몽골의 1차 침입으로 고려는 자주성 · 귀주성에서는 승리를 하지만 수도 개경이 포위당하자 몽골과 강화협정 다루가치를 설치할 것 막대한 공물 등을 약정하고 몽골군이 돌아가자 당시의 실권자 최우는 강화 천도를 단행하는데 1232년의 강화천도는 몽골에 대한 항전의 의미

- 그래서 몽골의 2차 침입이 있고 12321216, 당시 몽골군의 총사령관 사르탁이 처인성 전투에서 전사를 하게 되자 몽골군은 철군을 단행한다.

- 몽골의 총사령관을 사살하며 큰 승리를 거둔 처인성 전투, 그리고 2년 뒤인 70일간의 결사항전 끝에 위기에 놓인 고려를 구한 충주성 전투! 승리의 배후에는 승려 김윤후가 있었다.

 

처인성 전투의 영웅, 승려 김윤후

- 조헌은 의병운동의 본보기로 고려의 영웅 둘을 꼽는데 원충갑(1250~1321) 고려 후기 무신으로 충렬왕 때 원나라 반란군 합단을 격퇴하고 원주성을 방어함 김윤후, 고려와 몽골 전쟁의 판세를 뒤바꾼 인물

조헌(1544~1592) 임진왜란 때 의병장,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청주를 탈환하고 금산 전투에서 700여 명의 의병들과 함께 전사

- 1232년 몽골군은 2차 침입을 하여 개경을 지나 용인 처인성에 이르는데 처인성에는 백현원 출신의 승려가 정규군도 없이 부곡민들과 승병들을 규합하여 전투를 준비하여 세계 최강의 몽골군 총사령관 사르탁과 맞서 싸우고 있는 상황이었고 총사령관 사르탁이 전사하자 몽골군은 결국 철수를 단행한다.

- 사르탁의 입장에서는 얕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 처인성은 현재 경기도 용인시 남사면 이곡리에 있는 둘레가 400m의 낮은 토성으로 처인성에 주둔한 사람들은 정규군도 아닌 주로 부곡민과 승병들

- 사르탁의 죽음에 얽힌 흥미로운 일화?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 원나라 원수 사르탁이 어사잡단 설신(薛愼)을 잡아두고 강을 건너 남하하고자 하였다, 설신이 사르탁에게 우리나라에 이국(異國) 대관으로 남쪽 강을 건너는 자는 불길하다고 전해 오는 말이 있다고 하였다, 사르탁이 듣지 않았고 한양성을 함락시킨 다음 처인성에 갔다가 날아온 화살에 맞아 죽었다.

- 그래서 몽골군은 철수하면서 설신의 지혜에 탄복하고 그를 강화도로 돌려보내주는데 설신이 한 말은 몽골군의 남하를 막으려는 임기응변으로 추측(?)

- 몽골군 총사령관 사르탁의 목숨을 앗아간 화살의 정체는?

방아쇠가 달린 활, 쇠뇌는 고려시대 주무기로 사용되면서 고려시대 말까지 활과 쇠뇌 제작 및 관리를 하는 궁노도감이 있었고 대몽 항쟁기에도 쇠뇌를 사용했을 것으로 추측

- 그러면 사르탁을 쏜 무기는 쇠뇌?

활은 시위를 당기고 조준하는데 큰 힘이 필요하여 생각보다 어렵고 쇠뇌는 걸면 되므로 쇠뇌의 장점 손가락 힘만으로 사격 가능 그래서 집중이 잘되어 활 보다는 정확도가 높다는 것

- 그러나 고려 조정에서 관리하는 특수한 무기라는 것 때문에 처인성 전투에서 쇠뇌를 사용했을 가능성은 낮은데 처인성은 정규군이 아닌 부곡민이나 승병이었기 때문에 쇠뇌 보급이 어려웠을 것

 

몽골군 사령관 사르탁을 사살한 무기?

- 그러면 사르탁을 살상한 무기는 ?

활의 장점은 재장전속도가 빠르고 무게가 가벼워 이동이 쉬운 점, 하지만 활은 시위를 할 때 귀 뒤쪽까지 당겨야 하기 때문에 근력과 훈련이 필요한 무기이고 쇠뇌는 특별한 훈련이 없이도 사용할 수 있는 장점, 또한 쇠뇌보다 사거리가 짧은 활로 성 밖에 있는 장수를 조준사격 하는 것은 어려웠을 것

- 그러면 사르탁의 살상 무기는 쇠뇌 혹은 활(?) 전황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기록이 부족하여 정확히 알 수 없는 안타까움이 있지만 옛말에 <이의전의(以疑傳疑)>라는 말이 있는데 의심스러운 것은 확실한 증거가 없는 한 의심스러운 대로 전하라는 것

- <이익주 교수의 생각>은 확실하지 않은 것을 억지로 추측하여 전하기보다는 알 수 없는 것은 알 수 없는 대로 전하는 것이 옳다는 것이고 단지 사르탁이 화살에 맞아 전사한 것은 확실하지만 어떤 무기에 맞았는지는 알 수 없다는 것

- 리우올림픽에서 양궁 전 종목 금메달에 빛나는 우리 선수들, 물론 물려받은 재능도 있겠지만 엄청난 훈련의 결과로 선발전에서만 무려 4천 발의 활을 쏘았다는 국가대표 선수들

 

사르탁은 누가 사살했나?

- 고려사에 기록된 사르탁 죽음 사르탁이 처인성을 공격하자 성안으로 피난 와있던 한 승려가 그를 활로 쏘아 죽였다.” <고려사 세가 고종 19> & “몽골 원수 사르탁이 와서 성을 공격하자 김윤후가 그를 활로 쏘아 죽였다,” <고려사열전 김윤후>

- 그런데 엇갈린 진술이 등장하는데 사르탁을 죽인 공로로 김윤후에게 상장군 벼슬을 내린 고려 조정, 그때 김윤후가 말하기를 김윤후는 전투할 때 나는 활이나 화살을 가지고 있지 않았는데 어찌 함부로 무거운 상을 받겠는가? 끝까지 사양하였다.” <고려사 열전 김윤후>

- 김윤후가 쏘아 죽였다 VS 김윤후는 활과 화살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익주 교수의 분석>은 사르탁은 유시(流矢)에 맞아 전사했을 확률이 높다는 것 <원사(元史) 고려전>에는 사르탁이 고려를 정토하던 중 처인성에서 유시(流矢)에 맞아 죽었다.” 고 기록하여 전투 중에 우연히 날아온 화살에 맞았다는 것

- 결국 김윤후는 정3품 상장군직을 거부하고 대신 정6품 섭낭장직을 받는데 대몽 항쟁의 영웅을 만들고 싶었던 고려 조정, 하지만 예상치 못했던 김윤후의 반응

 

처인성 전투 승전, 그 후

- 사르탁을 쏜 것이 김윤후가 아닐지라도 대단한 인물임이 확실한 것이 정규군도 없이 피난민들과 힘을 합쳐 세계 최강 몽골군과 맞서 싸워 이겼기 때문으로 급조된 민병대세계 최강 군대와 싸워 이긴 격

- 고려 조정에서도 처인성 승전에 대한 포상책으로 처인 부곡을 주현으로 승격시키는데 고려시대 지방행정체계 지방관이 파견된 주현 지방관이 없는 속현 하급행정구역으로 향··부곡의 세 등급으로 나뉘는데 지역위상까지 파격적으로 높인 처인성 전투는 천대 받던 양인들이 몽골과 싸워 이뤄낸 성과

 

처인성 전투, 승리의 이면

- 처인성 전투의 승리를 누구보다도 기뻐하는 자가 있었으니 당시 무신정권 집권자 최우, 몽골의 2차 침입 원인은 최우의 강화 천도, 하지만 뜻밖의 처인성에서 대승을 거두자 최우도 강화 천도를 반대하던 자들에게 정당성을 주장할 수 있게 되자 김윤후에게 최고위직을 재수하려 했던 것

- 고려 조정은 몽골과의 전쟁을 시작하기 불과 30여 년 전인 1190년대에 <망이·망소이 난> <만적의 난> 전국적으로 신분해방운동이 일어나던 시기로 고려 조정의 숙제는 민란 수습외세 침략에 대한 대응, 그러나 몽골 침략 이후에도 고려 내부의 계급 갈등은 사라지지 않는 것

- 하지만 강화천도 이후에도 호사스러운 생활을 누린 지배층, 당시 상황을 말해주는 <이규보>의 시 가지런한 많은 집들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겠는데 옥루 높은 곳에 비단 장막 올려져 있네, 틀림없이 잔치 열려 붉은 비단 찬란할 걸세 막 바라보기를 멈추니 오직 들리는 건 바람결의 느슨한 풍악소리, 멀리서 생각하건데 기녀들이 옷소매 치켜 올려 팔을 내놓고 애교 띈 얼굴로 술잔 받쳐 들고 가느다란 눈길 흘리네, 햇발 기울어도 사람들 흩어지지 않을 걸세!” 이런 시가 전시(戰時)에 쓰인 시라니 말이 되는 것인가? 전시에 고통 받는 백성들을 외면한 고려 지배층

- 대몽항쟁 기간에도 중앙지배층 권익확보가 우선이고 지방민 차별은 심화되어 심지어 서북쪽 백성들은 몽골군을 반기는 백성들도 있을 정도이고 끝까지 항전하는 백성들과는 달리 투항 또는 몽골의 앞잡이가 되는 경우도 있던 상황

 

몽골의 앞잡이 홍복원

- 어느 시대이건 전쟁이 길어지면 반역 · 변절자가 있기 마련이지만 1233년 서경에서 일어난 <홍복원 · 필현보의 난> 반란군은 조정에서 보낸 선유사를 죽이고 성을 빼앗아 몽골에 귀부한다.

선유사 : 고려 조정이 서경의 민심을 염려, 회유하기 위해 파견한 관리

- 최우는 가병 3천 명을 보내 반란군 토벌을 명하고 서경을 진압한 토벌대장 민희, 결국 필현보는 사로잡혀 개경으로 압송되고 홍복원은 몽골로 달아나면서 반란에 가담했던 인물은 모두 강력하게 처벌 홍복원이 원나라로 달아나자 그 아비 홍대순과 처자 · 동생 홍백수를 체포하고··· 나머지 서경 백성들은 모조리 바닷섬으로 이주시키니 서경은 허허벌판처럼 텅 비어버렸다.” <고려사열전 홍복원>

-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고려 조정의 이해할 수 없는 조치 최우가 그(홍복원)의 환심을 사려고 홍대순에게 대장군 벼슬을 주고···” <고려사열전 홍복원>

- 홍복원은 누구?

홍복원의 아버지 홍대순은 고려와 몽골이 형제맹약을 맺을 당시 몽골에 투항하면서 고려 침공 시 몽골을 안내하여 고려에 들어오게 되는 친몽세력, 홍복원도 서경반란 이후 몽골에서 관직을 받고 세력가로 성장하는데 놀랍게도 몽골의 원사(元史)홍복원 열전이 있다

- 고려에서는 언제든지 또 다시 공격해 올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홍복원을 이용하여 몽골과 외교 통로로 만들려 했던 고려의 속셈, 그래서 그 가족에게 관직을 제수하지만 홍복원은 끝내 고려에 협조하지 않는다.

- 고려시대 홍복원은 일제강점기 이완용과 같은 인물로 1232년 몽골의 2차 침입 때 몽골의 길잡이가 되어 침공하고 2~6차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몽골의 고려 침입에 앞장선다.

 

끝나지 않는 몽골의 침략

- 1235년 몽골의 3차 침략은 5년 동안 지속된 대규모 침략으로 피해가 막심하여 귀중한 문화재가 다수 파괴되는데 대표적으로 당시 경주의 랜드 마크인 신라시대의 <황룡사지 9층 목탑>이 소실된다.

- 또한, 이때 대몽항쟁의 상징으로 <팔만대장경>을 주조하는데 거란의 침입 때 만든 <초조대장경>1232년 몽골의 2차 침입 때 소실되고 1236년 몽골의 3차 침입 중 대장도감을 설치하여 <팔만대장경>을 간행할 즈음에 변수가 발생하는데 1241년 우구데이 칸이 사망하고 몽골군이 철수하면서 몽골의3차 침입이 종료된다.

- 한편 몽골은 왕위계승 문제로 5년간 내분에 휩싸이고 1246년 몽골의 구육 칸이 즉위하면서 1247몽골의 4차 침입이 시작되지만 1248년 구육 칸의 사망으로 몽골군이 철수하면서 몽골의 4차 침입도 종료된다.

- 실제로 몽골 칸의 죽음은 세계 곳곳에 평화를 불러오는데 우구데이 칸 집권기에 징기즈칸의 손자 바투는 헝가리를 공격 중이었는데 1241년 우구데이 칸이 갑작스런 죽음으로 몽골군이 철수하면서 몽골군의 침공을 모면한 서유럽

 

몽골의 5차 침입

- 12537, 몽골이 다시 침공을 해오는데 집권자인 최우가 죽은 후에도 고려가 개경으로 환도하지 않은 것을 빌미로 삼고 침공하는데 몽골군의 지휘관은 징기즈칸의 조카 예쿠

- 몽골의 5차 침입 전황?

이전과 달라진 몽골의 군사력은 금나라와의 전쟁으로 사다리차 운제 · 발석차와 같은 () 공격용 무기를 사용하고 요즘의 수류탄과 비슷한 발화무기까지 사용하며 거란 · 여진 등 정복국가들의 군사까지 총동원하여 막강한 연합 정예병으로 구성

- 5차까지 몽골의 침입 경로를 보면 대부분 경상도를 향해 남하하는데 이유는?

<이익주 교수의 분석> 당시 몽골의 예상은 남송과 고려와 일본의 해상 동맹 연합을 우려하여 한반도와 일본을 묶어서 하나의 목표로 공격했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일본으로 건널 수 있는 경상도의 해안 쪽으로 진격했을 것이라는 분석

- 경상도를 향해가는 길목에 위치한 요충지 충주, 몽골군 예쿠 부대 역시 춘천 · 원주를 거쳐 10월에는 충주를 침공에 성공

 

충주성 전투, 김윤후의 재등장

- 충주성 전투의 지휘관은 처인성 전투의 영웅 김윤후, 몽골군에 맞서 분전하는 충주성의 백성들, 하지만 성이 포위되면서 70여 일이 지나자 식량이 떨어지고 백성들은 동요하기 시작하자 결국 김윤후는 특단의 조치를 취하는데··· 처인성 전투 이후 21년 만에 다시 등장하는 김윤후

- 두 달 넘게 성안에서 항전한 충주 백성들은 체력적 · 정신적 한계를 느끼고 있는 상황에서 몽골군이 충주성을 포위한 다음 날 몽골 지배층의 내분으로 급히 몽골로 돌아간 예쿠를 대신해 몽골군 지휘권을 행사한 인물은 홍복원!

- 당시 고려 백성의 절반은 노비로 추정되는데 김윤후의 특단의 조치는 노비문서를 불사르는 것 김윤후가 군사들에게 만약 힘을 다해 싸워준다면 귀천을 불문하고 모두 관직을 줄 것이니 너희들은 나를 믿으라.” <고려사열전 김윤후> 그러자 전투의지가 대폭 상승 김윤후가 백성들을 설득한 뒤 관노문서를 불살라버리고 노획한 말과 소를 나누어 주었다, 이에 사람들이 모두 죽음을 무릅쓰고 적에게로 돌진하니 몽골군은 조금씩 기세가 꺾여 더 이상 남쪽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고려사열전 김윤후> 싸워야 할 이유를 찾은 충주 백성들은 몽골군의 남진을 막는데 성공한다.

- 처인성 전투에서는 적장 사르탁을 사살하여 몽골군의 사기를 저하시키고 충주성 전투에서는 노비문서를 불태워 백성들의 사기를 증진시키는 것으로 김윤후의 리더십이 돋보인 충주성 전투 승리의 의의 몽골군의 경상도 진입 차단 충주성과 다인철소의 연속 승리로 몽골군의 철수 계기를 만든 것, 당시 김윤후는 높은 관직에 있었던 것이 아니고 정6품의 낭장으로 충주산성 방어를 위해 파견된 임시관직 방호별감으로 최강 몽골군대를 상대로 두 번이나 무찌른 김윤후

 

충주성 전투 승전, 그 후

- 계급사회 고려에서 일개 장수가 노예해방을 약속할 수 있나?

“(충주성 전투에) 공이 있는 사람은 관노·백정에 이르기까지 모두 관직과 작위를 차등 있게 내려 주었다.” <고려사열전 김윤후> 임진왜란 때 류성룡이 주장한 <면천법>과 비슷하고 조선시대에는 거친 반대에 부딪혀 시행이 어려웠던 <면천법>이었지만 이런 점에서 보면 조선보다 고려가 개방적이었다는 것

- 고려는 몽골과의 외교를 할 때도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고 물러가면 또 그것을 가지고 협상을 하는 등 융통성 있는 외교 · 개방적인 신분제 운용의 실용적인 사회였다고 볼 수 있는 것

- 전투 승리 후 국원경으로 승격된 충주, 몽골과의 전투 승리로 지역이 승격된 사례는 총4건으로 그 중 2건이 김윤후가 지휘한 전투로 처인부곡=처인현, 충주목=국원경으로 승격

- 김윤후에 대한 포상은?

감문위 섭상장군 동북면 병마사 추밀원부사 수사공 우복야까지 승진하는데 그 이후의 기록은 보이지 않음, 추밀원부사는 왕명출납과 궁궐의 경호 및 군기를 담당했던 추밀원의 벼슬이고 수사공 우복야는 정2품의 고위관직으로 지금의 장관급

 

역사에서 잊혀진 김윤후

- 그런데 김윤후가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은?

<신병주 교수의 분석>은 김윤후가 제대로 평가받기 어려운 시대가 이어진 것으로 몽골에 저항했던 김윤후의 업적이 긍정적으로 평가받기 어려웠던 원 간섭기, 그리고 조선시대에는 승려가 대우받지 못하던 시기였다는 것, 하지만 임진왜란 당시 조헌의 의병모집 격문에 등장한 김윤후는 조선시대에도 대몽항쟁으로 회자된 것은 확실

- <역사바로세우기>김윤후처럼 잘 알려지지 않은 역사 속 인물을 발굴해 내는 것이고 또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같이 싸웠던 처인성과 충주성의 백성들도 잊지 말아야 할 일이지만 몽골의 앞잡이가 된 홍복원도 기억해야 할 일!

- 김윤후라는 이름은 단순히 두 번의 승리 때문에 기억되는 것이 아니라 두 번의 승리가 부곡민 · 관노 등이 함께 했던 민초들의 항쟁이었기 때문으로 대몽항쟁 30년의 원동력을 두고 평가하기를 다른 나라들은 모두 군인들이 싸웠는데 고려는 국민 모두가 나와서 싸웠다!라고 평가하며 조선시대 의병의 뿌리에는 고려 민초들의 대몽항쟁이 있었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