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운명을 바꾸다 <제1편> 거북선
〇 개요
- 1592년 일본의 침략에 고전을 면치 못하는 조선, 그러나 전쟁의 판도를 바꾼 결정적 국면들이 있었으니 임진왜란의 비밀병기로 일본 수군의 간담을 서늘케 했던 최종 병기 거북선을 만나본다.
- 1592년 일본이 20만 대군을 이끌고 침략하자 고전을 면치 못한 조선은 명나라에 참전을 요청하고 명나라의 참전으로 동아시아로 확대된 전쟁을 일본은 분로쿠·게이초의 역<文祿慶長役>, 중국은 만력조선 역 그리고 조선은 임진왜란이라 부르는데 7년간의 전쟁에서 전세의 판도를 바꾼 결정적 국면이 있었으니···
- 1592년 4월 12일 여수 앞바다에 용의 머리를 한 배가 등장한다. “식후에 배를 타고 거북선의 지자포 · 현자포를 쏘았다.” <난중일기 1592년 4월 12일>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판옥선에 덮개를 한 형태의 거북선을 만들고 사격훈련까지 하며 실전준비를 마친 것이다. “신이 일찍이 섬 오랑캐들의 변을 염려하여 별도로 거북선(귀선)을 만들었사옵니다.” <이순신의 장계>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하루 전의 일이었다.
〇 우리가 아는 거북선
- 한국인이라면 거북선은 최고의 자부심으로 1953년 화폐에 등장하기 시작한 거북선은 총 10여 종의 화폐에 등장하여 화폐의 인기스타 거북선, 고 정주영 회장이 영국에서 투자를 받기 위해 들고 다녔다는 거북선 도안의 화폐
- 화폐마다 다른 거북선 모습, 진짜는?
<이상훈, 부경대학교 해양인문학연구소 전임교수> 화폐에 있는 거북선 도안은 정조(正祖) 때 이 충무공 전서에 나오는 책을 기본으로 한 것, 그런데 현재까지 거북선의 실물이 발견되지 않아 그림만을 대상으로 했기 때문, 돛이 2개 또는 1개 내부구조는 2층 또는 3층으로 논의가 계속되고 있는 거북선의 구조, 심지어는 거북선의 목이 들낙날락 움직인다? 잠수하는 거북선? 불을 뿜는 거북선? 등등 다양
- 거북선의 첫 등장은 언제?
귀선(龜船)의 등장은 임진왜란 180년 전인 태종(太宗) 13년의 기록에 등장 “임금이 임진나루를 지나다가 귀선(龜船)과 왜선이 서로 싸우는 상황을 구경하였다.” <태종실록 1413년 2월 5일> 고려 말 이후 왜구들이 수없이 침범하자 이를 퇴치하기 위해 여러 가지 선박들을 시험하고 실제로 일부는 왜선으로 가장해 모의전투를 시키기도 했는데 이를 태종이 직접 임진도에 나와 살펴보았던 기록일 거라는 <이상훈 교수의 분석>
- 또 다른 기록 “거북선은 많은 적과 충돌하여도 적들이 쉽사리 피해를 주지 못하니 반드시 이기는 좋은 계책이라 함이 옳을 것입니다.” <테종실록 1415년 7월 16일, 좌대언 탁신이 올린 군사대비책>
- 그런데 태종(太宗) 이후 찾아볼 수 없는 거북선 관련 기록, 그리고 약 180년 후 1592년에 불쑥 등장하는데 1413년 태종(太宗) 대의 거북선과 1592년 선조(宣祖) 대의 거북선의 명칭은 같지만 연관성 확인은 불가능하다는 <이상훈 교수의 분석>
- 전함의 종류와 수(數)까지 정한 <경국대전>에서 조차 찾아볼 수 없는 거북선, 이를 보면 태종 이후 거북선 제작이 중단되었다가 임진왜란을 대비하여 이순신 장군이 새로 준비한 듯하다는 <신병주 교수의 분석>
- <KBS 드라마 임진왜란> 1592년 5월 29일, 일본군이 진열하고 있는 사천 앞바다 “사천 선창을 바라보니··· 험준한 지형을 의지하여 무려 400여 명이나 되는 왜적들이 긴 뱀처럼 진을 치고 누각처럼 생긴 왜적의 배 12척이 바닷가에 줄지어 전박해 있었는데 진을 친 곳에 있는 왜적들은 우리를 내려다보면서 칼을 휘두르고···” <이순신 장계>
- 처음으로 출격하는 거북선, 거북선은 일본 함대의 중앙으로 맹렬하게 진격 “먼저 거북선에 명령하여 적선들 속으로 돌진해 들어가서 천자 · 지자 · 현자 · 황자총통 등 각종 대포를 쓰도록 하였습니다.” <이순신 장계> 그 뒤를 따라 판옥선이 공격에 합세한다. “왜선을 전부 부딪쳐 깨뜨리고 불살라 버렸으며··· 왜적들은 멀리서 바라보며 울부짖고 발을 동동 구르며 대성통곡을 했습니다.” <이순신 장계> 사천해전의 승리! 그 중심에 거북선이 있었다.
〇 거북선의 충격
- 거북선의 등장에 일본의 반응은?
거북선의 등장에 충격이 매우 컸던 듯 “큰 배중의 3척은 맹선(거북선)이며 철로 중요한 곳을 보호하여··· 방패에 이르기까지 모두 격파되고 말았다.” <도노오카 진자에몬의 고려선전기> 거북선의 첫인상을 거북인지 용인지 뭔지 모를··· 그것은 마치 샤치호코 같았다는 기록
※ 샤치호코 : 호랑이 머리 등에 가시가 돋친 상상의 물고기로 보통 일본 성곽 등의 용마루 양단에 장식
- 무작정 돌격해 온 거북선은 반격할 새도 없이 순식간에 일본군 배 12척을 모두 불태워버렸는데 거북선에는 조선군이 보이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거북선에 칼 · 송곳이 꽂혀있어 접근한 일본군은 피해가 컸고 사천해전 후 공포의 대상이 된 거북선
- 일본의 셰익스피어로 불리는 지카마스 몬자에몬의 작품 <본조 삼국지>에서 거북선을 복카이센이라 하고 생김새를 샤치호코에 비유하고 이를 퇴치하는 연극까지 만들었다 하고 거북선 때문에 일본 수군 전체가 큰 충격에 휩싸인 것
〇 거북선의 첫 출격
- 선제공격으로 가장 먼저 적진으로 돌격한 거북선의 특징은 판옥선 위에 덮개를 덮은 모양으로 설명이 되어있는데 판옥선이 우리의 주력 전선(戰船)이기는 하지만 적군으로부터 공격을 받기 때문에 거북선 덮개의 목적 ① 적군의 공격으로부터 아군을 보호 ② 송곳과 칼을 꽂아 적군의 접근을 차단하는 것으로 당대의 전쟁의 양상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백병전을 벌이는 것이 기본 양상으로 날카로운 덮개를 덮어 백병전을 방지한 획기적인 거북선
※ 백병전(白兵戰) : 양편이 가까운 거리에서 창·칼·총검 등을 가지고 맞붙어 싸우는 전투
- 일본의 군함과 달리 화포가 장착된 거북선, 재장전에 시간이 걸리는 약점은 있었지만 이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 <초탄명중>으로 첫발에 명중하지 않으면 위기가 왔을 수도 있고 포의 정확도를 높이기 위해 적선(敵船) 가까이 붙어야 하는 해전
- 백병전 + 조총사거리로 적에게 무방비로 노출되는 판옥선, 조선 수군의 전략은 ① 거북선 돌격으로 적의 진열을 무너뜨림 ② 뒤를 따라 판옥선이 공격에 가세하는 것, 그래서 거북선의 함장의 명칭은 귀선돌격장
- 승리한 사천해전에서 총상을 입은 이순신 장군 “적의 총알에 맞아 비록 죽을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으나 어깨를 깊이 상한데다··· 상처 구멍이 헐어서 진물이 흘러 밤낮없이 뽕나무 잿물과 바닷물로 씻고 있지만 아직 쾌차하지 못하여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난중일기, 류성룡에게 보내는 편지>
- 여기에서 <이상훈 교수의 돌발 분석>은 이순신 장군은 오른 손잡이라는 것! 활을 쏘기 위해 왼쪽 어깨가 앞으로 나갔기 때문에 왼쪽에 총탄을 맞은 것, 이순신 장군 동상에는 칼집이 오른 쪽에 있어 왼손잡이가 아니냐? 는 생각을 하지만 정확한 오른손잡이라는 것
- 그래서 이 상황이 이순신 장군은 거북선에 타지 않았다는 결정적 증거 <신병주 교수의 분석>은 해전 중 총상을 입은 이순신 장군은 덮개로 막힌 거북선이 아닌 판옥선에 승선했다는 증거라는 것
〇 거북선의 조력자
- 거북선에는 누가 탔나?
<이상훈 교수의 분석>은 당시 거북선 돌격대장은 급제 이기남이라는 기록을 보면 급제라는 호칭으로 봐서 무과시험에 합격은 했으나 정식 벼슬이 없었거나 백의종군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는 것
- 최초의 돌격대장 이기남은 누구?
안타깝게도 돌격대장은 이기남이라는 기록 외에 자세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으나 <신병주 교수의 분석>은 사천해전을 필두로 거북선이 출정했던 전투에 계속 참가했을 것으로 추정
- 거북선과 함께 기억해야 할 조력자는 활 쏘는 사수, 포 쏘는 포수, 노 젓는 격군 등, 특히 돌격선인 거북선은 빠르고 정확한 방향전환이 기본으로 격군의 노력이 승리로 연결되는 것으로 노비(격군)들의 기록까지 세세히 남긴 이순신 장군 “··· 본영 거북선의 지방병사 사노 김말손·정춘·흥양, 격군 사노 상좌, 절의 노비 귀세·말련··· 등은 총탄에 맞아 전사했습니다.” <이순신의 장계>
- 이순신 장군의 훌륭한 점은 신분에 관계없이 전투에 참여한 모든 사람을 전쟁의 주인공으로 여기고 이름을 기록했다는 것, 또한 자발적으로 임진왜란에 참여한 수군 의병 부호 또는 승려를 의병장으로 하여 복잡한 해안 지형을 잘 아는 지역민들이 직접 해전에 참여하여 방어 및 물자보급 등으로 수군을 도와 큰 활약을 했던 수군의병과 지역민들 “(피난민들의) 배를 시켜 먼 바다에 늘여 세워 후원하는 배처럼 보이게 해놓고 공(이순신)이 앞으로 나가 힘써 싸웠다.” <이 충무공 전서>
- 구전되는 강강술래의 유래로 이순신 장군이 여인들에게 남자 옷을 입혀 병사로 위장하여 옥매산(전남 해남)을 돌게 했다는 것, 또한 거북선의 총책임자 · 만든 기술자 · 위험을 무릎 쓴 돌격장 · 수군의병까지 잊지 말고 폭넓은 연구가 진행되어야 할 것
〇 녹둔도 전투와 이순신
- 이순신 장군은 어떻게 함장으로서의 자질을 갖출 수 있었나?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1587년 여진족이 두만강 하류의 녹둔도를 침략하는데 당시 녹둔도 둔전관인 이순신은 여진족과 전투를 벌이지만 “녹둔도에서 패전한 형편을 보건데 장수나 군사나 백성들이 모두 한결같이 풍비박산되고···” <선조실록 1587년 10월 19일>
- 패전의 책임으로 직위해제를 당한 이순신 장군은 백의종군하여 400여 명의 군사들과 함께 여진족 부락을 습격 “이순신이 순변사의 휘하에 종군하여 반로 우을기내를 꾀어내어 잡아서 드디어 죄를 사면 받았는데 이로부터 유명해졌다.” <선조수정실록 1587년 9월 1일>
- 이순신 장군 하면 무패의 사나이(?)로만 알고 있었는데 패배 · 백의종군 등 굴곡진 삶을 살았던 것, 당시 이순신 장군은 녹둔도 방어가 허술하여 “(이순신 장군이)수비 군사가 적은 것이 걱정되어 여러 차례 병사 이일에게 보고하고 군사를 증원해달라고 청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 “병사 이일이 공을 죽여 입을 막음으로써 자기 죄를 면하려고 공을 구속하여 형벌을 가하려고 하였다.” <이충무공 행록>
- 그래서 결국 백의종군하게 되는데 선조(宣祖)도 이때 까지는 이순신 장군의 입장을 이해하고 극형이 아닌 백의종군을 명하고 기회를 주자 다시 여진족 정벌에 공을 세워 명예를 회복하게 되는 것
※ 백의종군 : 벼슬이 없이 군대를 따라 싸움터로 나감
- 녹둔도 전투와 수군 지휘 능력의 관계?
지금은 러시아 영토인 녹둔도, 당시는 섬이었던 녹둔도에서 승리한 이순신 장군이 수군으로서의 능력을 발휘하게 된 계기가 되었을 것이라는 <최태성 교사의 생각>
※ 녹둔도 : 조선시대 두만강 하구에 있던 섬으로 현재는 퇴적작용으로 연해주에 붙어 육지가 되었고 1860년 베이징 조약으로 러시아 영토가 됨
- 사실은 1580년 7월 발포(전남 고흥)에 종4품의 수군만호(현 대령급)에 임명된 이순신 장군은 이곳에서 18개월간 재직하며 전라도의 지형과 수군 지휘체계를 익혔을 것
- 반전인 것은 임진왜란 당시 정3품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류성룡의 천거로 인한 파격적 승격으로 알고 있는데?
<신병주 교수의 분석>은 전라좌수사 직전의 관직이 종6품 정읍 현감으로 7계급 승진한 것 처럼 보이지만 과거 종4품 수군만호에 재직한 경력이 있어 류성룡의 낙하산은 오해이고 전라좌수사로 임명되기에 부족함이 없는 이력, 하지만 류성룡이 이순신에게 큰 영향을 준 것은 사실
〇 학익진과 거북선
- <드라마 임진왜란 1592> 1592년 7월 7일 “크고 작은 왜적의 배 70여 척이 오늘 오후 2시 경에 영등포 앞바다로부터 나와 거제 고성 땅 견내량으로 들어가 정박해 있습니다.” & “견내량의 지형이 협착하고 또 암초가 많아서 판옥선은 서로 부딪쳐서 싸우기가 어려워··· 한산도 바다 가운데로 끌어내어 모두 잡아버릴 계획을 세웠습니다.” & “멀리 판옥선 5~6척으로 하여금 선봉의 왜적들을 쫒아가게 하니··· 우리 배가 거짓으로 물러나는 척하여 돌아오니 왜적들은 뒤 쫒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 “바다 한가운데 이르렀을 때 다시 여러 장수에게 명령을 내려 학이 날개를 편 듯한 진형을 이루어 일제히 진격하라고 하니··· 그때 승리한 기세를 타고 몸을 솟구쳐 서로 앞 다투어 돌진해 들어가면서 화살과 총탄을 교대로 쏘아대니··· 적의 배를 불태우고 왜적을 사살하기를 한꺼번에 해치워버렸습니다.” <이순신의 장계>
- 거북선의 수(數)는?
전투에 사용된 거북선의 수는 2~5척으로 추정하지만 그 효과는 대단했던 것으로 현재 대한민국 곳곳에 복원된 거북선은 임진왜란 당시 보다 많을 듯하고 기록에 따르면 임진왜란 발발 당시 2척으로 시작해서 이후 5척까지의 기록이 존재하고 그 이상의 존재는 확인된 바 없다는 <이상훈 교수의 분석>
- 이유는 거북선이 모든 판옥선을 거북선으로 만들어야 할 만큼의 장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단점도 있었다는 것, 현대의 함선과는 달리 위성항법장치가 없는 거북선, 당시 해전은 수신호(깃발)나 소리(나팔·징) 등을 이용해 작전지시를 하였기 때문에 대장선이 보내는 신속한 신호 확인이 필수, 그래서 해상전법을 위해서는 다른 배들의 위치를 수시로 확인하며 이동해야 하는데 다른 배들과 공동작전을 펼치기에는 시야가 협소한 작전상의 제약이 있다는 것
- 또한 덮개로 덥힌 거북선은 단독 작전에 특화된 돌격선이어서 거북선의 단점 ① 좁은 시야 ② 화포 발사 후 환기문제 ③ 내부 조명 문제 등으로 작전에 필요한 돌격선의 수만큼만 거북선을 제작한 듯하다는 <이상훈 교수의 분석>
- <한산도 대첩>의 큰 의미 중의 하나는 왜군은 이미 평양성까지 점령하여 보급부대를 기다리는 시점에 한산대첩의 승리로 일본의 해상보급로가 차단 “이순신이 이 한 번의 싸움으로 드디어 적군의 한쪽 세력을 꺾였기 때문에 고니시 유키나가가 비록 평양을 점령했으나 형세가 외로워져서 감히 더 나아가지 못했다.” & “전라도·충청도·황해도·평안도 연해 지역 일대를 보전함으로써 군량을 보급시키고 조정의 호령이 전달되도록 하여 나라의 중흥을 이룰 수 있었으며···” <류성록, 징비록> 한산도 대첩을 높이 평가한 것
- 또한 근대 고종황제의 고문으로 왔던 헐버트 “한산도 대첩이야말로 도요토미의 조선 침략에 사형선고를 내린 것이다.” <헐버트(H. B. Hulbert)>로 극찬
〇 칠천량 전투, 거북선의 침몰
-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1597년 7월 15일 칠천량 해전, 일본의 선제공격에 고전하는 원균의 군대는 칠천량 전투에서 참패하고 이후 거북선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데 칠천량 전투는 거센 풍랑에 대비하여 배와 배를 연결했던 조선 수군은 일본군이 지른 불이 빠르게 옮겨 붙어 일시에 침몰하게 되어 피해가 컸던 것
- 거북선이 있었음에도 패배한 칠천량 전투, 거북선이 만능선인 이유는 이 배를 지휘하는 지휘관과 수많은 조력자가 있었기 때문으로 일본 수군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긴 거북선은 조선 후기 내내 제작이 되고 영조(英祖) 대에는 40여 척의 기록이 있고 순조(純祖) 대에도 18척의 기록이 존재
- 그런데 조선 후기의 거북선은 임진왜란 때의 거북선과는 조금 다른 듯, 임진왜란 당시의 거북선은 돌격선으로 특화된 실전용이었고 조선 후기의 거북선은 해상훈련이나 열병식 등에 사용되어 행사용으로 점점 화려해지면서 대형화 되고 오늘날 복원된 거북선은 조선 후기의 기록을 반영한 것으로 임진왜란 당시 전투에 쓰였던 거북선은 현재 복원된 거북선보다 작았을 것이라는 <이상훈 교수의 분석>
〇 거북선은 어디에?
- 거북선 발굴조사가 이뤄졌는데 1992년 8월 18일 한산면 앞바다에서 거북선의 황자총통 인양에 성공했다는 보도가 나오고 이 황자총통의 기록 “귀함(거북선)의 황자총통은 적선을 놀라게 하고 한발의 포를 쏘면 반드시 적의 배를 수장시킨다.” 는 글이 새겨져 있다고 하는데 문화재위원회는 황자총통을 국보 제274호로 지정하고 거북선의 흔적에 대한민국은 열광한다.
- 그런데, 4년 후인 1996년 6월 18일, 거북선 유물인 국보 제274호 황자총통이 거짓으로 밝혀져 충격을 던지는데 골동품상이 가진 가짜 황자총통을 바다에 빠뜨리고 발굴한 것처럼 조작한 것, 사실은 발굴 당시부터 의문점이 여러 각도에서 발견된 것은 사실 ① 방금 새긴 것처럼 선명한 글씨 ② 포에는 사용될 수 없는 아연이 검출된 것
- 하지만 거북선의 흔적을 찾았다는 기쁨에 제대로 검토하지 않았던 것, 그래서 국보지정을 취소하고 국보 제274호는 영구 결번시키기로 결정하여 우리의 해저 유물 발굴사에서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긴다.
- 오랜 시간 해저 탐사에 힘을 쏟은 해군의 <충무공 해전 유물 발굴단> 하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다가 1992년 8월 18일 한산도 부근에서 황자총통이 인양되고 분석이 제대로 이뤄지기 전에 세상에 알려진 총통의 존재, 정상적인 국보지정 절차에 따르기 전에 이미 국민의 축제가 돼버린 황자총통 인양의 해프닝 사건
- 희망적인 것은 2014년 11월 대부도에서 낙지잡이 어민이 12세기 고려시대 선박을 발견하는데 조선시대 거북선이야··· <이상훈 교수의 분석>은 임진왜란 중에 침몰된 300여 척의 일본 배 세키 부네와 이타케 부네 그리고 우리의 판옥선도 180여 척이 수장되었는데도 아무것도 발굴되지 않은 16~7세기 전함
- 고려시대 선박이 발견된 곳은 수심이 얕은 서해안, 하지만 남해안은 수심이 깊어 임진왜란 전함들이 깊은 곳에 묻혀 있는 듯하고 또 한 가지는 거북선의 수가 적어 발굴 가능성이 더욱 희박하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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