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운명을 바꾸다 <제3편> 삼별초, 또 하나의 고려를 세우다
〇 개요
- 1270년 삼별초의 항쟁이 시작된다! 역사에 가려진 삼별초 항쟁의 참모습, 1270년 몽골군을 이끌고 고려로 돌아온 원종은 무신정권을 무너뜨리고 개경환도를 결정한다.
- 하지만 삼별초는 이 결정에 반대해 명령을 거부하고 “삼별초가 다른 마음을 품고 명령을 거부하면서 부고(府庫)를 함부로 개방했다.” <고려사세가 원종 11년>
- 원종은 사람을 보내 삼별초를 해산시키려 하고 명단까지 요구하자 위기를 느낀 삼별초는 일제히 봉기한다. “장군 배중손 등이 삼별초를 지위해 반란을 일으키고···” <고려사 세가 원종 11년> 승화후 왕온을 협박해 왕으로 삼고 관부(官府)를 설치하여 고려에 또 하나의 정부가 탄생한 것이다.
〇 우리가 알고 있는 삼별초?
- 삼별초의 항쟁보다 <삼별초의 난>이 더 익숙한 삼별초는 반란을 일으켰다는 이미지가 강하고 왜 난을 일으켰느냐? 는 몽골에 항전하기 위해 난을 일으킨 것으로 대몽항쟁의 아이콘! 요즈음의 교과서에도 근거지를 강화도 → 진도 → 제주도로 옮겨가면서 끝까지 몽골에 항전한 삼별초에 대해 긍정적으로 기록
- 삼별초란?
무신정권 집권자 최우가 치안유지를 위해 야별초를 설치한 것을 시작으로 규모가 커지면서 좌별초와 우별초로 나뉘고 몽골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도망 온 사람들의 집단인 신의군으로 구성(좌별초 · 우별초 · 신의군)
- 삼별초의 초(抄)는 무슨 뜻?
가려 뽑는다는 뜻의 초, 그래서 별초는 특별히 뽑은 부대라는 의미로 오늘 날의 특수부대인 삼별초의 실체는?
삼별초가 만들어진 과정을 보면 “도성 안에 도둑이 많으므로 최우가 용사(勇士)를 모아 도적의 횡포를 막도록 하고··· 이들을 야별초라 불렀다.” <고려사절요 원종 11년> 이 도둑은 고려의 백성으로 수많은 민란이 일어난 최씨 무신 정권기에 백성들을 진압하기 위해 만든 특수부대 삼별초는 무신정권 핵심부대로 많은 녹봉과 빠른 출세로 특권을 누렸던 것으로 국가 안보가 아니라 사적(私的)인 무신정권 유지가 최우선인 조직체로 출발한다.
〇 강화도에서 봉기한 삼별초
- 원종이 삼별초를 혁파한 이유?
고려와 몽골이 강화를 맺으면서 피할 수 없게 된 삼별초 혁파, 몽골의 입장에서는 무신정권 핵심군사력인 삼별초가 부담스러웠을 것, 더욱이 몽골과의 강화를 반대했던 무신정권, 삼별초의 혁파는 원종와 몽골과의 이해관계가 일치한 점으로 그런 과정 속에서 조직 유지를 위해 개경환도에 반대한 삼별초의 봉기는 순수한 항몽 의식보다는 조직을 지키기 위한 의도가 더 강하게 보인다(?)
- 삼별초가 봉기하는 과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원종은 무신정권에 의해 폐위당한 후 몽골의 도움으로 복위하게 되면서 귀국 후 무신정권에게 개경환도를 명하고 이에 반발한 삼별초 “왕이··· 삼별초를 폐지한 후 그 명단을 가져오게 하자··· 삼별초는 명단이 몽골에 알려질까 두려워 반역할 마음을 더욱 품게 되었다.“ <고려사열전 배중손> 몽골의 보복이 두려워 강하게 반발한 것으로 생존을 위해 봉기한 삼별초의 사정이 있었던 것
〇 진도로 간 삼별초
- 1270년 6월 3일, 새로운 근거지로 떠나는 삼별초는 봉기 이틀 후 강화도를 떠나 남쪽으로 향한다. “배를 모아 재물과 자녀를 싣고 남쪽으로 내려가는데··· 무려 천여 척이나 되었다.” <고려사절요 원종 11년> 진도를 새로운 근거지로 둘레 13Km 면적 8.5Km²의 용장성을 거점으로 삼고 이곳에 기반시설을 확충해 새 정부가 머무를 터전을 만들고 든든한 근거지를 확보한 삼별초는 본격적으로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한다.
- 삼별초의 새로운 거점이 된 진도 용장성은 여의도 면적의 약 3배 규모로 삼별초군이 몇 명이나 될까? 자료를 분석해 보면 고려군 선(船) 1척당 35명가량이 탑승하는데 당시는 삼별초뿐만 아니라 많은 화물까지 실었을 것으로 추정하여 정원의 절반인 1만 5천여 명이 탑승했을 것으로 추정
- 배중손이 거병한 날은 1270년 6월 1일 그리고 출발한 날이 6월 3일로 이틀 만에 출발할 수 있었던 것은 아무리 별초이지만 사전의 준비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라는 <이익주 교수의 분석>
- 사실은 <해도재천(海島再遷)>의 주장이 십여 년 전부터 주장되어 왔는데 1260년 고려와 몽골의 강화가 이루어지고 고려태자가 몽골로 가던 때부터 거론된 해도재천은 몽골과의 강화에 반대한 세력이 10년 동안 계획하고 준비했기 때문에 이틀 만에 출발이 가능했던 것
※ 해도재천 : 무신정권이 대몽항전을 계속하기 위해 강화도에서 다른 섬으로 수도를 옮기려 한 계획
- 원래 해도재천의 후보지는 제주도였으나 정통 고려 정부 표방을 위해 본토에도 영향력을 행사해야 했고 제주도는 육지와 너무 멀어 가까운 진도를 근거지로 선택한 것
- 삼별초가 굳이 진도를 근거지로 삼은 이유?
진도의 이점 ① 크고 육지와 가까운 곳에 위치 ② 좁은 해협의 빠른 물살 때문에 접근이 어려움 ③ 남해와 서해를 연결하는 요충지라는 점, 삼별초가 6월 3일 출발하여 본진이 8월 19일 도착하는데 두 달 동안 여러 가지를 모색한 것으로 제주도로 가게 되면 안전하기는 하지만 육지에서 항전 지휘가 어려워진다는 점과 진도는 위험하지만 육지에서의 항전지휘가 용이하다는 점 등 새로운 근거지에 대해 심사숙고하여 진도를 선택한 것으로 더 적극적으로 몽골에 항전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는 <이익주 교수의 분석>
〇 삼별초군(진도정부) VS 연합군(개경정부), 해상전투의 전황
- 인천 영흥도에서 삼별초군을 따라잡은 연합군, 하지만 전투는 벌이지 않는데 “영흥도에 정박해 있는 적선(삼별초)을 발견하고 (고려 지휘관)김방경이 공격하려 했으나 (몽골 지휘관)송만호가 겁을 내어 만류하는 사이···” <고려사열전 김방경> 이렇게 우왕좌왕하는 사이 삼별초는 영흥도를 빠져나가 진도에 도착
- 이후 연합군은 본격적인 진도 공격을 단행하는데 삼견원(해남)에 진을 치고 삼별초군과 전투 중인 연합군(개경정부·몽골군) “여러 날을 서로 겨루었지만 승패를 가리기가 어려웠다.” <고려사열전 김방경>
- 삼별초가 연합군과 대등하게 전투할 수 있었던 이유?
의외의 무기(?)를 잘 활용한 삼별초군의 괴수 그림 “적(삼별초)은 약탈해온 함선에 모두 괴수를 그려 넣어 온 바다를 뒤엎은 함선들의 그림자가 물에 비치면 마치 날아오르는 것처럼 움직여 그 기세를 당해낼 수가 없었다.” <고려사열전 김방경>
- 심리전을 활용한 삼별초, 당시 몽골군은 진도까지 온 원정군으로 낯선 환경에 두려움이 있는 원정군에게 함선의 괴수 그림은 몽골군에게 심리적 압박을 줬을 것으로 현실에서는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죽고 사는 전장(戰場)에서는 큰 효과를 발휘하는 심리전 “적(삼별초)은 모두 배에 올라 깃발을 잔뜩 벌여두고 징과 북을 요란하게 쳐댔으며··· (몽골 지휘관)아카이가 겁을 낸 나머지 배에서 내리더니··· 나주로 퇴각해 진을 치려했다.” <고려사열전 김방경>
- 현대전에서도 활용된 예술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이 독일군을 속이기 위해 만든 특수부대 <고스트 아미(Ghost Army)>에는 화가·디자이너·엔지니어 등이 소속되어 있었고 이들은 최전방에서 가짜 전차를 만들고 대군이 지나간 흔적을 만드는 등 독일군을 교란시키는 임무를 수행했던 것
- 전쟁에서 깃발의 용도는?
군대에서 지휘신호 도구인 깃발 · 북 · 징, 깃발의 색은 방향을 뜻하여 좌청룡(청색)은 좌측, 우백호(백색)은 우측, 남주작(적색)은 남쪽, 북현무(검정)은 북쪽으로 부대이동으로 하는 등 중앙의 황룡(황색)의 지휘로 약속된 신호에 따라 북을 치면 전진 · 후퇴하는 전통군대의 필수 장비인 깃발, 심지어는 조선 후기에는 깃발을 창으로 사용하는 기창무예가 발달되기도 한다.
〇 승승장구 삼별초군, 삼별초 항쟁과 백성들의 반응
- 몽골과 고려의 전쟁 역사를 살펴보면 삼별초와의 전투를 처음으로 해전(海戰)을 경험한 몽골군 <이익주 교수의 분석>은 당시 몽골군은 고려에서의 해전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겁을 먹고 삼별초와 제대로 싸울 수 없었던 것으로 해상전투에서 승리 후 기선을 제압한 삼별초는 진도에 안착을 하고 1270년 8~9월 육지 공략을 시작하여 나주와 전주까지 점령하면서 진도를 거점으로 한반도 남부지역인 전라도 일대를 석권했다고 볼 수 있는 것
- 개경정부 VS 진도정부, 백성들의 선택은?
삼별초 항쟁에 호응한 신분이 낮은 백성들 “군(群) · 불령(不逞) · 강량(强梁)의 무리들이 까마귀 떼같이 강화도에 모여들어 배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갔다.” <이승휴, 동안거사집> 고려 조정에 불만을 가진 세력들이 삼별초에 호응
- 사실은 배중손이 강화도에서 처음 봉기했을 때 “장군 배중손 등이 난을 일으키고 사람을 시켜··· 나라를 돕고자 하는 자는 모두 격구장으로 모이라 하니··· 국인이 많이 모였다.” <고려사절요 원종 11년>
- 이때 배중손이 공문서(노비문서·토지문서)를 불태우는 일이 있었는데 1253년 김윤후가 충주성 전투에서 노비문서를 불태웠듯이 신분해방을 약속하고 대몽항전을 독려하자 신분이 낮은 사람들의 상당수가 삼별초에 호응하고 실제로 삼별초가 봉기한 후 “관노들이 다루가치(몽골관리)와 고려 관직에 있는 자들을 죽이고 진도로 가서 항복하려 하였는데···” <고려사절요 원종 12년> 고려 말에도 이성계와 정도전의 혁명 세력들이 토지문서를 불태우며 일반 백성들의 합류를 독려했던 것
- 저항하는 백성들을 진압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삼별초가 대몽항전에서 백성들과 손잡게 되는 현상이 된 것, 하지만 모든 백성이 삼별초의 봉기를 지지한 것은 아니고 삼별초에 호응하기 위해 난을 일으킨 밀성군(밀양) 사람들은 이웃 청도까지 진출하여 청도 지방관을 살해하는 일을 벌이는데 “청도군 사람들이 거짓으로 투항하는 체하고 술을 취하도록 마시게 한 후 모두 섬멸해버렸다.” <고려사 세가 원종 12년> 삼별초 지지에 대한 의견이 서로 달랐던 밀성 · 청도 백성들
- 주목해야 할 일은 밀성 · 청도는 경상도 지역으로 진도와는 멀리 떨어진 지역인데 이 지역에서도 삼별초에 대한 지지여부를 놓고 서로 의견이 엇갈린 것으로 경상도 지역까지 세력을 확장한 삼별초의 위세가 컸다는 것
- 대몽항전에 대한 백성들의 입장이 갈린 이유?
억압 · 수탈로 다양한 입장을 보일 수밖에 없었던 고려 백성들, 몽골과 고려의 28년 전쟁사를 보면 군인뿐만 아니라 국민 모두가 싸운 전쟁으로 전쟁참여자로서 전쟁에 대한 각자의 입장이 있었던 백성들은 강화 VS 항전으로 자신의 생각에 따라 입장을 선택한 백성들, 때마침 항전을 주장하여 새로운 정부를 만든 삼별초가 항전에 찬성하는 백성들에게는 구심점이 되는 것으로 삼별초를 단순히 지지한 것이 아니라 삼별초를 통해 자신의 항몽 의지를 드러낸 것이라는 <이익주 교수의 분석>
〇 몽골의 삼별초 회유 시도
- 세력을 넓혀간 삼별초, 개경정부와 몽골의 대응?
개경정부를 통해 진도정부에 사신을 보낸 몽골 “(몽골)황제의 조서를 가지고 가서 삼별초를 설득하게 했다, 이 조서가 내려간 뒤에 스스로 반성해 본국에 복귀하면 이전의 잘못한 일체를 용서할 것이다.” <고려사 세가 원종 11년>
- 몽골의 회유에 대한 삼별초의 반응?
몽골의 회유를 받아들이지 않은 삼별초 “(삼별초)가 이 조서는 우리에게 보낸 것이 아니므로 받을 수 없다, 우리 조정에서 보낸 국서에 대해서만 따르겠노라고 답했다.” <고려사 세가 원종 12년> 그래서 1271년 2월 진도정부에 직접 사신을 파견한 몽골
- 직접 사신을 보낸 몽골, 삼별초의 대응은?
몽골군 지휘관 힌두와 협상에 나선 배중손의 요구 ① 전라도를 삼별초 진도정부에 할양 ② 몽골군의 철수로 몽골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어려운 조건
- 배중손 협상의 조건에 대한 몽골의 반응?
몽골의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조건으로 고려와의 강화를 얼마나 어렵게 성사시켰는지 28년 동안의 전쟁 끝에 겨우 성사된 고려와 몽골의 강화상태에서 개경정부를 버리고 진도정부와 협상을 하는 건 몽골로서는 또 다른 전쟁을 감수해야 하는 상황, 그래서 배중손의 요구는 전통적인 고려의 외교전술로 시간을 벌어 삼별초 세력을 확장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라는 <이익주 교수의 분석>
〇 삼별초, 일본에 외교문서를 보내다!
- 삼별초가 일본에 외교문서를 보낸 정황, 삼별초 진도정부가 1271년 일본에 보낸 외교문서를 보고 일본 측 실무자가 의문점을 정리한 <고려첩장불심조조(高麗牒狀不審條條)> 무려 12가지나 되는 의문점으로 고려 수도는 개경으로 알고 있는데 수도를 강화에서 진도로 옮겼다고 하고 지난 문서에서는 몽골의 연호를 썼는데 이번에는 쓰지 않고 몽골을 비하하는 표현이나 짐승의 가죽 <위취(韋毳)>라고 표현하며 몽골풍속을 오랑캐 풍속이라고 표현하는 등 전에 고려가 보낸 문서와 너무 다르다는 것으로 개경과 진도 두 개의 고려정부가 있는 것을 몰랐던 일본
- 진도정부가 일본에 문서를 보낸 이유?
지금 남아있는 <고려첩장불심조조>는 일본 측의 문서로 진도정부가 보낸 외교문서는 남아있지 않아서 일본 측 문서만으로 문서내용을 유추해 보면 진도정부는 일본에 항몽 연합전선 구축을 제안했을 것이라는 <이익주 교수의 분석>
- 이는 일본의 다른 기록에도 나타나는 정황으로 일본 가마쿠라 시대의 관리였던 요다 쓰네나가의 일기 <길속기(吉續記)>에는 몽골의 일본 공격에 대한 대책 등이 실려 있다. “몽골군이 일본군을 문책하러 갈 수도 있으니(침략할 수도 있으니) 지금 몽골군과 싸우는 우리들에게 식량과 군사를 우리에게 보내주기 바란다.” <길속기> 삼별초의 제안
〇 삼별초의 항몽 연합전선 시도
- 연합전선에 대한 일본의 반응은?
일본의 반응에 대한 기록은 없고 <고려첩장불심조조>에서 보듯이 진도정부의 외교문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일본, 당시 일본 막부(幕府)의 기본 입장은 외교보다는 군사적 대응에 치중했던 것으로 <최태성 교사의 생각>은 고려가 28년 동안 항전한 것이 결과적으로 몽골의 일본 침공을 늦춰준 것
- 삼별초가 일본과 항몽 연합전선 구축에 성공했다면?
그것이야말로 몽골에게는 최악의 시나리오로 28년 만에 고려와 강화한 몽골, 그 일부가 다시 진도정부를 세우고 일본과 손잡고 온다면 몽골은 삼별초 + 일본 + 남송과의 새로운 전쟁을 시작해야 하는 상황으로 그것도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해전(海戰)을 해야 하는 것 때문에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삼별초의 동향을 주시하고 경계했던 것
- 그 예가 원종이 아들(훗날 충렬왕)과 쿠빌라이 딸의 청혼 때 의외로 쿠빌라이는 냉담한 반응을 보이고 심지어 나에게는 딸이 없다는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고려 원종의 청혼을 거절하는데 이는 개경정부와 진도정부의 대립상황에서 쿠빌라이까지 정세가 어떻게 될 줄 모를 정도로 강한 위세를 떨치고 있었던 삼별초 진도정부
〇 삼별초 진도정부의 몰락
- 1271년 5월 개경정부와 몽골연합군은 진도 총공격에 나서고 삼별초는 진도의 관문인 벽파진에 병력을 집결시키고 삼별초 병력이 벽파진에 집중된 사이 연합군은 둘로 나뉘어 진도 용장성을 기습공격하고 삼별초군은 크게 패한다. “김방경 등이 3군을 거느리고 진도를 공격해 적을 대파하고 가짜 왕 승화후 왕온을 죽였다.” <고려사 세가 원종 12년> 그리고 간신히 살아남은 일부 삼별초군은 제주도로 향한다.
- 삼별초의 패배원인은 방심으로 그 사이 몽골군과의 여러 차례 전투에서 승리해 자신감을 얻은 삼별초는 전라도와 경상도까지 세력을 넓히고 승승장구 하고 있었는데 치밀하게 대규모 작전을 준비한 연합군은 고려군의 대거참여로 수군(水軍)이 보강되면서 고려 수군(水軍)과 몽골의 기병(騎兵)이 합세해 진도를 공격하는 것을 삼별초가 방어하지 못한 것
〇 제주도로 간 삼별초
- 진도정부 붕괴 후 삼별초의 행방?
진도를 탈출한 삼별초 지휘관 김통정과 일부 삼별초군은 <해도재천>의 원래 목적지인 제주도로 피하고 제주도 도착 후에는 군사행동보다는 조직을 복원하는데 집중한 삼별초
- 제주특별자치도에 있는 고려시대 성곽 <항파두성(缸坡頭城)>은 현재는 토성인 외성 일부분만 남아있는데 <항파두성(애월읍)>을 거점으로 다시 항전을 준비한 삼별초, 이곳은 유적지만 남아있는 것이 아니라 아직까지 삼별초 관련 설화가 전해오기도 하는데 대표적으로 김통정에 대한 설화가 많이 있고 또한 제주도에서 제일 심한 욕은 "몽골 놈의 XX!"
- 제주도가 당시 몽골에게 수탈당한 것이 있었나?
1273년 제주도에서 연합군에게 완전히 패배한 삼별초, 그 이후 몽골이 탐라총괄부 직할 기구를 두어 한동안 지배를 하고 또한 <목호(牧胡)>라고 해서 제주도 말 목장에 파견된 몽골관리를 시켜 말을 빼앗아 가는데 고려의 반원운동이 성공한 다음에도 20년이 지난 1374년 공민왕 사망 때까지 계속된 몽골의 제주도 수탈이 계속된다.
- 삼별초 제주도 항전활동은 위축되지 않았을까?
그렇지 않고 1년 간 내부 정비 후 다시 육지를 공략한 삼별초는 전라도와 경상도 남해안 일대를 장악하는데 이 지역이 문제가 되는 것은 조운로(漕運路)가 있던 곳으로 개경정부의 조운로를 차단한 삼별초 “삼별초가 전라도에서 공납하는 쌀 800석을 약탈했다.” <고려사 세가 원종 13년>
※ 조운로 : 조세로 거둔 현물을 바다와 강등을 이용해 중앙으로 운송하던 경로
- 그래서 다시 한 번 회유를 하려는 몽골, 하지만 몽골의 회유에 끝까지 응하지 않는 삼별초로 피할 수 없는 전투, 삼별초 VS 개경정부·몽골은 일본원정에 앞서 삼별초를 진압하려 한 몽골은 세 개의 지점에서 협공하며 삼별초를 진압한 연합군
〇 삼별초의 최후
- “김통정이 잔당 70여 명을 이끌고 산속으로 도망쳤다가··· 목을 매 자결하니 탐라가 드디어 평정되었다.” <고려사 열전 배중손> 원종 14년인 1273년 4월 28일 삼별초 진압 작전은 공식적으로 종료된다.
- 대몽항전의 구심점이 된 삼별초, 하지만 순수하지만은 않았던 최초의 봉기의도 <최태성 교사의 생각>은 삼별초는 무신정권을 지키기 위해 탄생한 조직이지만 백성들과 함께 대몽 항전을 이끌어간 점은 의의가 있다는 것이고 대몽항전에 뜻을 보탠 백성들이야말로 진정한 영웅이 아니겠는가?
- <이익주 교수의 생각>은 삼별초의 항쟁은 삼별초만의 항쟁이 아닌 고려 백성들의 항몽에 초점을 맞춰 평가해야 하고 또 한 가지는 평가가 단순하지 않다는 것으로 외세에 대해서 싸운다는 그 자체만을 높이 평가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으로 여기에는 그동안 고려가 28년간 싸웠고 강화를 통해서 왕조를 유지하고자 했던 그 노력과 함께 종합적으로 삼별초를 중심으로 한 항몽도 새롭게 평가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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