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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왕후, 공민왕을 세우다

mkpark2022 2016. 11. 14. 19:50

 

 

 

 

기황후, 공민왕을 세우다

 

 



개요

- 고려의 마지막 등불이자 개혁군주로 알려진 공민왕, 그가 왕위에 오르는데 결정적인 역할··· <드라마 개국> 공민왕은 원나라에 온지 10년째인 1351년 겨울, 뜻밖의 소식을 듣게 되는데 공민왕의 조카 충정왕이 폐위됐다는 것

- 새로운 왕이 되어 금의환향하게 되는 공민왕, 그가 왕이 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여인이 있었으니 바로 고려의 공녀로 원나라에 끌려가 황후의 자리까지 오른 기황후였다.

- 교과서에는 기황후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고 보면 되고 드라마로 익숙한 기황후, 역사상 최초 원나라 황후가 된 고려 여인

- 당시 원나라는 세계 대제국으로 대제국의 왕비가 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 하지만 기왕후에 대한 평가는 고려에 고통을 준 악녀로 그다지 좋지 않고 원나라 사람들 사이에도 기왕후 책봉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가 높았던 것 기씨가 왕후가 된 후 재변이 자주 일어나고 하천이 범람하고 지진이 일어나고 도적이 번성했습니다. 음이 성하고 양이 쇠미한 현상입니다. 기씨를 황후에서 비()로 낮추어야 재변이 없을 것입니다.” <원사> 원나라가 망하고 명나라가 들어서면서 명나라 황족들 사이에서는 원이 기황후 때문에 망했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

 

기황후의 숨겨진 과거?

- 기왕후는 고려 공녀 출신?

공녀는 원 간섭기 공물로 바쳐진 10세 전후의 고려 여성으로 기황후도 10세 때 공녀로 원에 갔을 것으로 추정하는데 정확한 년도는 알 수 없으나 1333년 원나라 황궁에 들어갔다. “황후 기씨는 궁녀가 되어 차를 올리는 일을 맡아 순제를 섬겼다.” <원사 후비열전>

- 원나라에서 공녀를 요구한 이유?

공녀의 역사는 고려 원종 때 몽골군의 결혼상대로 고려 여인을 징발하는 것이 시작으로 강화가 이뤄진 다음에는 충렬왕 때 본격적으로 어린 여자 아이를 공녀로 차출하는데 귀천을 막론하고 심지어 왕족도 궁녀로 징발되면서 몽골에서도 신분에 따라 다른 대우를 받아 소수는 원나라 관료와 혼인하는 경우도 있으나 대부분 허드렛일을 하는 궁녀로 생활

- 고려 사회를 공포에 떨게 한 공녀 징발에 관한 기록 고려 사람들은 딸을 낳으면 바로 숨기고 비록 이웃이라도 볼 수 없게 한다. 딸을 숨긴 채 발각되면 그 이웃을 잡아가두고 친족을 구속해 채찍으로 때리고 딸들과 도성의 문에서 헤어질 때 가족들이 슬프게 울부짖으며 원통해 하고··· 그 중에는 우물에 몸을 던져 죽는 자도 있고 피눈물을 쏟고 실명하는 자도 있다.” <원사>

 

기황후, 원나라 황후가 된 비결?

- <원궁사>에는 기황후의 미모는 살구꽃 같은 얼굴 · 복숭아꽃 같은 두 뺨 · 버들가지처럼 날씬한 허리로 묘사하고 그림으로도 전해오는데 <불랑국헌마도권>은 교황이 원나라 순제에게 프랑스의 말()을 선물하자 이를 기념하기 위해 원나라 화가 주랑이 그린 그림에 등장

- 사실은 기황후는 외모보다는 능력으로 학식뿐만 아니라 다른 몽골 여인과는 다른 면이 있는데 기왕후는 일이 없으면 여효경(女孝經)과 사서(史書)를 읽으면서 역대 황후가운데 어진 사람을 모범으로 삼았다.” & “사방에서 바치는 공헌품 가운데 진미가 있으면 먼저 태묘에 보내 제사를 올린 뒤에야 그것을 먹었다.” & “수도 근처에 큰 기근이 들었다··· 기왕후는 금은과 곡식 및 비단을 내어··· 10만여 명의 장례를 치르도록 했다.” <원사 후비열전> 원나라 황실에서 현명하게 처신했던 기황후, 그것이 몽골 사람들에게는 갖추지 못한 유교적 미덕을 겸비한 여인이었던 것

- 일설에 의하면 당시 원나라 순제의 제 1황후 타나실리는 궁녀인 기씨를 순제가 너무 예뻐하자 기황후가··· 날마다 총애를 받았다. 타나실리 황후가 이를 질투하여 자주 매질하면서 욕을 보였다.” <원사> 궁에서의 생활이 순탄치 만은 않았음을 볼 수 있는 장면이지만 기황후의 결정적 한방은 아들을 낳은 것! 원나라 순제에게 첫 아들을 안긴 기황후는 1340년 원나라 제 2황후로 책봉된다.

- 이후 기황후는 경제적 기반 마련을 위해 자정원을 설립하고 자정원은 3개의 현에서 가둔 조세로 운영이 되는데 이를 바탕으로 고려인 출신 환관 등이 활동하면서 친 기황후 세력을 형성해 나간다.

- 원나라 말기 고위 관리들 사이에는 고려 여인과의 결혼이 유행하여 자연스럽게 기황후가 고려에서 온 공녀들을 이용해서 자기 권력을 유지하는 수단으로 삼게 되지만 1365년 권신 볼로테무르에게 유폐된 기황후 “(기황후가)미녀를 볼로테무르에게 자주 보내··· 비로소 환궁하였다.” <원사 후비열전>

 

기황후, 공민왕을 세우다

- 반원정책 · 개혁군주로 알려진 공민왕, 형인 충혜왕 이후 29대 왕이 될 뻔했으나 8살 조카인 충목왕이 즉위하고 4년 만에 병사(病死)하자 공민왕은 순서를 기다렸지만 30대 왕위는 12살 조카인 충정왕에게··· 그래서 3수 끝에 31대 왕이 된 공민왕, 장자승계원칙에 의해 충목왕 · 충정왕은 모두 형인 충혜왕의 아들들로 왕위계승서열에 따라 자연스럽게 왕이 된 공민왕! 기황후의 역할은?

- 원에서 10(1341~1351)간 숙위를 했던 공민왕, 원에서의 숙위는 고려의 차기 왕이 될 수 있는 보증수표였지만 그것이 지켜지지 않고 나이 어린 조카에게 이어진 왕위, 당시 원에서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기황후가 공민왕을 지지하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대목인 것

- 그런데 충정왕을 폐위하고 갑자기 기황후가 공민왕을 지지한 이유?

공식적으로는 원 황제 순제가 공민왕을 고려왕으로 옹립한 것인데 당시 원나라는 왜구 침략으로 골치가 아팠지만 충목왕 · 충정왕은 어렸기 때문에 제 역할을 못하자 방패막이 역할을 제대로 해 줄 능력 있는 고려왕이 필요했던 것

- 또한 중요한 것은 순제를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손 기황후의 동의가 있었을 것, 게다가 고려에는 어린 왕들의 즉위로 외척세력들이 득세하기 시작하고 특히 충정왕의 어머니 사촌인 윤시우가 권력과 이익을 독점하면서 고려에 있는 기황후 일족과도 이권다툼이 벌어지자 기황후는 공민왕을 통해 이를 해결하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라는 <이익주 교수의 분석>

 

조일신의 난, 왜 일어났나?

- <드라마 개국> 13529월 공민왕의 최측근 조일신이 난을 일으키는데 표적은 기씨 일족 제거 조일신은 기철 등을 죽이려 했는데 오직 기원만 살해당하고 나머지는 모두 도망갔다.” <고려사열전 조일신> 그리고 조일신은 남은 기씨 세력토벌에 공민왕이 나설 것을 요구하고 사건이 원나라에 까지 알려지자 결국 측근 조일신을 숙청한 공민왕, 난이 일어난 지 7일 만이었다.

- 조일신이 난을 일으킨 이유?

기황후 일족을 제거하기 위해 난을 일으킨 조일신, 이 사건은 지금까지도 석연치 않은 사건으로 조일신은 원나라 숙위시절부터 시종 공민왕의 의중을 가장 잘 아는 인물 <이익주 교수의 분석>최측근 조일신의 기황후 일족 제거 시도는 공민왕과 기왕후 사이의 갈등을 암시하는 것으로 공민왕은 기황후 후원으로 왕이 됐지만 공민왕 개인은 고려 개혁의지가 강했기 때문에 즉위하자마자 <일국갱시(一國更始) 온 나라와 함께 새롭게 출발하려고 하는 뜻이다.”> <고려사 세가 공민왕 원년(1352)>를 선언한다.

- 당시 고려 사회에서 가장 큰 문제는 기득권들의 토지 수탈로 토지를 빼앗기면서 떠돌아다니는 유망민이 급증하여 <국지부국(國之不國) “나라꼴이 아니다!”>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양민들 토지 수탈에 앞장선 부원세력 등 기황후의 일족들,

- 이런 것들을 개혁하려 하면 원나라에서 까지 폐정개혁에 방해 기황후 친척 기삼만이 불법을 자행하여 남의 토지를 빼앗았다··· 기삼만을 순군에 하옥하였는데 20여일 만에 죽었다.” <고려사 열전 기철> 이 사실을 알게 된 기황후는 오히려 폐정개혁을 실시하려 한 관리들을 처벌한다.

- 당시의 기씨 세력의 오만함을 보여주는 정황으로 기철 같은 경우에는 원나라가 직접 고려를 다스려야 한다<입성(立省)책동>을 벌이며 충혜왕 폐위에 일조한 기철(기황후 오빠) 또한 기철이 시를 지어 (공민)왕에게 하례하였으나 ()이라고 칭하지 않았다.” <고려사열전 기철> 또 다른 오빠인 기원은 공민왕이 원 황제의 생일 축하연에 같이 가는데 왕과 나란히 말을 타고 가면서 얘기를 하는 등 여동생 기황후의 권세만 믿고 공민왕 위에 군림하려 했던 것

- 최측근 조일신을 공민왕은 왜 숙청을?

<이익주 교수가 본 조일신의 난> 가능성은 조일신이 공민왕의 의중을 알아차리고 너무 빨리 시도한 것(?) 조일신이 섣불리 독자적으로 행동, 또 하나의 가능성은 합의를 하고 일을 시작했는데 예상보다 너무 강했던 기씨 세력, 기씨 친형제는 물론 고려 정계에 광범위하게 포진해 있던 친 기황후 세력까지 제대로 생각하지 못했을 가능성으로 난을 진행하다 보니 조일신이 성공하지 못할 것 같다는 판단을 했을 때 공민왕이 할 수 있는 일은 조일신을 죽이느냐! 내가 죽느냐! 의 문제였을 것

- 조일신의 난 이후 공민왕의 행보?

1353년 공민왕의 신년사 “(조일신의 난) 당시 여러 날 동안 계속 흐렸는데 조일신을 참수하고 나니 하늘에 해가 나고 운무가 개었다.” <고려사세가 공민왕 원년(1352)> 그리고 공민왕은 기황후와 그 가족들에게 위로를 표명하면서 그간의 개혁에 대한 중단조치를 선언하고 신년 첫 행보로 기황후 모친 방문을 결정한다.

- 상황은 더욱 기황후에게 유리해지게 되는데 13537기황후의 아들이 황태자에 책봉하게 되는 것, 그래서 공민왕은 기황후 친형제는 물론 영안왕대부인을 위해 잔치를 벌이는데 규모가 얼마나 크고 화려했던지 고기를 다투어 먹으면서 승부를 비교하여 오락거리로 삼았는데 많이 먹어서 먼저 다 먹는 자가 이기는 것으로 하였다.” & “()를 잘라 꽃으로 만든 것이 총 5,140이었고 다른 물건도 이만큼 들어갔다.” & “물가가 폭등하여··· 유밀과를 쓰는 것을 금지하였다.” <고려사열전 기철> 사회적인 영향까지 미친 것

 

공민왕의 반격

- <드라마 개국> 13565월 궁궐에서 잔치가 열리고 초대된 기황후 일족과 부원세력의 핵심 인물들, 그런데 이때 장사(壯士)매복시켜두었다가··· 기철은 대응하다 죽었고···” 기황후 세력을 일제히 제거한 공민왕, 이어서 쌍성 등지를 수복하게 하였다.” 그리고 부원세력의 근거지인 정동행중서성 이문소를 폐지하였다.” <고려사세가 공민왕 5(1356)> 이 모든 사항이 단 하루 만에 이뤄진 일로 공민왕의 반격이 시작된 것이다.

- 기씨 세력의 반란 모의설(?)?

기씨 세력 숙청은 철저히 공민왕의 작품으로 기씨 세력이 알았다면 연회에 참석하지 않았겠지만 전혀 의심 없이 연회에 참석을 했고 공민왕은 장수를 매복시켜 기철 등을 죽이고 고려 내의 부원세력을 일망타진 하게 되는 것.

- 공민왕의 업적 고려 내 기황후 세력 제거 정동행중서성 이문소 폐지 쌍성총관부 수복을 위해 군대 출정, 이것이 공민왕 5(1356) 518일 하루에 일어난 사건인데 조일신의 난이 실제로 끝난 다음에도 끝까지 부원 세력과의 싸움을 포기하지 않았던 공민왕은 계속 기회를 엿보고 있다가 원나라의 쇠퇴 정세를 정확히 읽고 부원 세력의 척결에 나선 것

- 공민왕의 쌍성총관부 수복 과정?

공민왕의 주도면밀성을 읽을 수 있는 대목으로 쌍성총관부는 1258년 몽골이 고려의 화주(함남 금야) 이북을 다스리기 위해 설치한 몽골의 지방관청으로 고려는 이를 되찾고 옛 영토를 회복하기 위해 이 지역을 관리하는 쌍성총관부 지방 관리였던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사전에 포섭

- 공민왕이 반원운동을 일으키기 전 “(3) 환조(이자춘)가 입조하자 왕이 영접하여 말하기를 완악한 백성들을 어루만지느라 어찌 수고롭지 않겠는가? 하였다.” & “왕이 환조(이자춘)에게 경은 마땅히 돌아가서 우리 민()을 잘 진무할 것이며 만약 변란이 발생하면 나의 명령을 따르도록 하라고 하였다.” <고려사세가 공민왕 5(1356)> 약속대로 쌍성총관부의 문을 열어준 이자춘은 공을 인정받아 고려 정계에 진출하게 되고 이것이 훗날 이성계의 출세에 발판이 되게 하는 이자춘의 선택인 것이다.

 

공민왕의 개혁, 기황후의 반응?

- 공민왕의 반원 개혁에 대한 기황후의 반응은?

원나라의 입장에서는 도발이라 생각하겠지만 고려의 반원 개혁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원나라, 그 만큼 국력이 쇠퇴하고 있었기 때문이고 원이 쇠퇴하게 되는 결정적인 것은 한족(훗날 명나라)의 힘이 강성해지면서 국제 정세의 판세가 바뀌는 상황에서 고려는 원나라의 내정간섭을 끊어내는 결과를 만들고 이 일이 끝난 다음 대원 관계에서 주도권을 잡은 고려는 98년간 지속되었던 원나라의 간섭을 물리치는 대성공을 이룬다.

- 공민왕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왕 즉위에 영향을 준 기황후, 또 다른 측면으로 보면 충혜왕을 폐위시키고 중정왕을 폐위 후 죽음에 까지 이르게 한 인물로 공민왕 자신도 언제든지 제거될 수 있다는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어서 선제공격을 하게 되는 것이라는 <신병주 교수의 분석> 그런 점에서 공민왕의 개혁은 자신의 목숨을 걸고 했던 개혁!

 

공민왕 암살시도, 범인은 누구?

- <드라마 개국> 13633월 홍건적의 침입으로 피난길에 나섰던 공민왕과 노국공주, 난이 진압되자 둘은 개경으로 돌아오는 길에 흥왕사에 머무르게 되는데 한 밤중에 50여 명의 자객이 흥왕사를 습격하고 이들이 노리는 것은 공민왕의 목숨 환관 이강달이 왕을 업고 창문을 통해 나가 도망가서···” & “환관 안도치가··· 스스로 왕을 대신하여 침대에 누워있었으므로 적이 그를 왕이라 생각하고 죽이고는···” & “밀실에 이르러 왕에게 담요를 뒤집어 씌워 숨기고 공주가 그 문 앞에 앉아있었다.” <고려사절요 공민왕 12(1363)>

- 한 밤중에 벌어진 공민왕의 암살시도! 노국공주의 덕에 위기를 넘겼지만 누가 공민왕을 죽이려 했나? 1362원나라에서 공민왕 폐위를 전격 결정하고 후임으로는 작은 아버지 덕흥군으로 알려지자 고려는 충격에 빠지게 된다.

- 공민왕 폐위, 명분은?

공식적인 것은 홍건적의 난 때 고려가 국인(國印)을 잃어버리고는 새 인장을 제멋대로 만들어 쓰고 있다고 거짓말을 하자···” <고려사> 하지만 공민왕 폐위는 기황후 가족을 위한 복수로 보인다는 분석

- 당시 덕흥군의 나이는 50세로 왕이 되기에는 너무 많은 나이라는 지적은 당연하고 석연치 않은 점은 이뿐만이 아니라 덕흥군은 아들이 없어 양자를 들여야 하는데 기황후의 일족인 기삼보노가 양자로 지목됐다는 것, 이를 접한 고려 조정은 원()과의 일전(一戰)도 불사하다는 주장이 나오고 원나라에서는 공민왕 폐위는 이미 결정된 일! 이라는 입장을 고수하는데 공민왕의 폐위와 기삼보노의 등장, 진실은?

기황후의 복수전, 사실일까?

- 공민왕의 암살시도와 폐위결정, 기황후의 복수전 시작?

기황후가 직접 지시했다는 기록은 없으나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이 흥왕사의 변을 일으킨 김용은 공민왕의 측근으로 김용의 배신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홍건적의 난>1351년 한족(漢族) 농민들이 몽골지배에 저항해 일으킨 반란으로 이들은 원나라의 수도 공격에 실패하자 밀려서 고려로 들어온 것

- 홍건적의 침입으로 수도를 빼앗긴 고려, 공민왕은 안동으로 몽진하는 상황이 벌어지자 고려 조정에서는 이런 모든 상황은 공민왕의 잘못이라는 주장과 원나라가 반원운동을 일으킨 고려를 문책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속에서 공민왕의 측근이었던 김용이 공민왕을 먼저 죽이고 원나라에 다시 충성해야 한다는 생각이었고 공민왕에 대한 복수의 기회를 찾던 기황후와 김용의 이해관계가 일치했던 것

- <이익주 교수의 분석>은 기황후가 김용을 사주했다는 기록은 없지만 원에서 덕흥군을 왕으로 세우고 기삼보노를 원자로 삼으며 김용을 판삼사사로 삼고···” <고려사> 이를 보면 기황후와 김용의 사전 교감 가능성은 충분한 것

- 기황후 부원세력을 없애기 위해 노력한 공민왕, 하지만 없애면 또 다시 등장하는 부원세력들 또한 눈여겨봐야 하는 것은 덕흥군을 왕으로 옹립하고 기삼보노를 덕흥군의 양자로 삼은 기황후의 본심은 결국 자신의 일족인 기삼보노를 고려의 국왕으로 만들기 위한 의도가 짙게 베어있다는 <신병주 교수의 분석>

 

공민왕 VS 기황후, 전투 결과?

- <드라마 개국> 원나라에서 공민왕을 폐위한다는 소식을 들은 고려 조정, 공민왕은 서둘러 서북과 동북지역 방어에 나서고 1364년 덕흥군을 앞세워 고려를 침략한 원나라 1만 대군 황후가 태자에게 말하기를 너의 나이가 이미 장성했는데 어찌 나를 위하여 원수를 갚아주지 않느냐? 라고 하였다.” <고려사절요 공민왕 12(1363)> 이것이 공민왕 폐위전쟁으로 이어진 것이고 고려 조정은 이성계와 최영을 앞세워 방어에 나선다.

- 전투 결과는?

기황후가 크게 패배하는데 군대 중 연경까지 돌아간 자는 겨우 17기였다.” <고려사열전 최유> 1만 명 중 0.17%의 생존율로 전투에 대승한 최영과 이성계가 공민왕의 측근 세력으로 부상케 되는 계기가 된다.

- 그렇다면 절치부심의 기황후 복수전이 너무 쉽게 끝난 것은 아닌지?

원나라에서 공민왕 폐위결정은 1362년이고 덕흥군을 앞세운 전쟁은 2년 뒤인 1364년으로 2년 동안 1만여 군사를 모으는 것도 어려웠던 원나라! 기황후는 기울어가는 원나라의 사정을 파악하지 못했던 것, 반면 2년 동안 원나라에 대비해 철저히 준비한 공민왕

 

기황후의 최후

- 기황후의 최후는?

기황후의 최후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고 공민왕이 예견한 대로 원()이 쇠퇴하면서 주원장의 명이 흥기되고 1368년 원나라의 수도를 점령한 명()의 주원장, 또한 수도를 빼앗기고 북쪽으로 도망간 원나라 황실 “(1368) 기황후는 순제를 따라 북쪽으로 도망했다.” <원사 후비열전> 이것이 기황후에 대한 마지막 기록이고 훗날 원나라를 망하게 했다는 비판을 받은 기황후, 실제로 수도는 빼앗겼지만 바로 망한 것이 아니라 20년 간 존속하며 명과 경쟁했던 원나라

- 기황후의 무리한 간섭이 부른 고려의 반원정서가 원() VS ()의 경쟁에서 오히려 친명정책을 펼친 것이고 고려와 명의 연합원나라 멸망을 앞당긴 이유가 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기황후가 원의 멸망을 앞당긴 셈

- 기황후의 개인적인 욕심과 야망 그리고 복수심이 일으킨 참사, 또한 참을 때는 참으며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공격할 줄 알았던 공민왕, 반원개혁에 성공함으로써 공민왕은 고려의 자주성을 되찾을 수 있었고 원 간섭을 끊었기 때문에 이후 우리 민족은 스스로의 힘으로 왕도를 교체할 수 있었다는 것과 원나라의 치하에서 고려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지키려 한 공민왕의 끈기와 노력은 높이 평가해야 할 것

- 공민왕이 기황후에게 일격을 가했던 반원개혁을 전격적으로 이루어 낸 1356518일은 200년 가까이 지속된 세계 제국이 저물기 시작한 날로 몽골 황실의 부마국인 고려에서 반원운동이 성공하고 견고했던 몽골 중심 질서에 균열이 생기면서 결국 원나라의 멸망으로 이어지는 대사건이 벌어진 것으로 공민왕의 반원운동은 세계사적 의미를 가진 사건으로 볼 수 있다는 <이익주 교수의 분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