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렬왕, 몽골공주와 혼인하다
〇 개요
- 변발호복을 하고 몽골황실과의 혼인을 치러 친원 세력이라는 오명을 쓴 충렬왕, 고려 국왕으로써의 새로운 면모를 알아본다.
- 1270년 고려 원종은 태자를 몽골공주와 혼인시키기 위하여 쿠빌라이 칸에게 문서를 보내지만 확답을 얻지 못한 원종은 태자를 몽골에 보내고 정식으로 청혼문을 보낸다. “왕이 도당에 글을 올려 태자의 혼인을 청하였다.” <고려사절요 원종 11년(1270) 2월> & “왕이 추밀원사 김련을 딸려 보내면서 두 나라간의 혼인을 요청했는데···” <고려사세가 원종 12년(1271) 1월>
- 결국 청혼한지 4년 만에 39세의 태자 왕심과 17세의 제국대장공주의 혼인이 성사됐다 “태자 왕심과 황제의 딸인 제국대장공주가 혼인했다.” <고려사세가 원종 15년(1274) 5월>
〇 고려, 몽골의 부마국이 되다
- 충렬왕과 제국대장공주의 혼인은 고려와 몽골 황실간 최초의 통혼으로 원종이 무신정권의 실권자 임연에 의해 폐위되었을 때, 마침 태자는 몽골에 가있었는데 돌아오는 길에 원종폐위 소식을 듣고 쿠빌라이에게 그 사실을 알리고 도움을 요청하여 정치력을 발휘했던 인물로 당시 나이가 마흔에 가까웠기 때문에 몽골황실과의 혼인에 대한 정치적 의미를 충분히 알았을 태자 왕심
※ 원종폐위사건 : 1269년 원종이 무신정권 집권자 임연에게 폐위 당했으나 몽골의 도움으로 4개월 만에 복위되었던 사건
- 1260년 정화궁주와 혼인하여 이미 부인이 있었던 태자 왕심, 이 혼인은 원종이 뜬금없이 요청한 것은 아니고 혼담을 먼저 시작한 것은 몽골이었다(?) 1269년 몽골사신에게 상좌(고려왕과 동등한 자리)에 앉을 것을 권한 원종 “지금 태자께서 이미 황제의 따님과 약혼을 하셨으니 국왕께서는 이제 황제의 부마대왕의 부친이십니다. 그러니 황제의 신하인 우리가 어찌 국왕과 대등한 예우를 받겠습니까?” <고려사세가 원종 10년(1269) 11월>
- 공식문서가 오가기 전에 이미 혼담이 오고간 사이였기 때문에 원종이 1270년 2월 첫 청혼을 하는데 여러 가지 사건으로 인하여 4년이 지난 1274년 5월에 혼인을 하게 되는 것
〇 고려와 몽골 황실, 혼인의 밀고 당기기
- 원종이 보낸 청혼서 “우리나라가 귀국에 청혼한 것은 영원히 좋은 인연을 맺자는 것이지만 분수에 넘는 짓일까 두려워 오랫동안 마음을 털어놓지 못했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공주를 태자에게 내려주셔서 혼례를 성사시켜 주신다면 우리나라는 만세토록 성실히 제후로서의 의무를 다하겠나이다.” <고려사세가 원종 11년(1270) 2월>
- 몽골의 쿠빌라이 반응은?
“짐의 자식은 이미 혼인하였으니 형제들과 의논하여 마땅히 허락하겠다, 이번에(다른) 일로 와서 요청하였으니 안 될 듯하다··· 특별히 사신을 보내와서 청한 연후에 허락할 것이다.” <고려사세가 원종 11년(1270) 2월>
- 그래서 그 해 8월 “태자 왕심(충렬왕)을 몽골에 보내··· 황제의 생일을 축하했는데···” <고려사세가 원종 11년(1270) 8월> 그리고 원종은 1271년 1월에 2차 청혼의 표문을 올린다. “폐하께서 너무 서둔다고 여기실까 우려한 나머지 미처 아뢰지 못하고 미루어두었던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소원한 나라를 친밀히 하는 은덕을 베푸사 길이 보호를 받는 영광을 누리게 하소서.” <고려사세가 원종 12년(1271) 1월>
- 쿠빌라이 칸은 드디어 고려 태자와의 혼인을 허락하지만 혼례식은 무한정 연기되고 1272년 2월 몽골에 입조했던 태자가 고려로 돌아오는데 변발호복의 차림 “나라사람들은 태자가 오랑캐 옷차림에 변발까지 한 것을 보고 모두 탄식했으며 심지어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 <고려사세가 원종 13년(1272) 2월>
- 어느덧 시간은 흐르고 1274년 5월 혼담이 오간지 5년 만에 드디어 고려 태자와 몽골 공주가 혼인을 하게 되는데 공주의 본명은 “쿠툴룩켈미쉬”이고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는 1310년 몽골 무종(武宗)이 추봉한 이름
- 혼인 후, 원종이 승하하고 1274년 왕위에 오른 충렬왕 “왕이 공주를 맞이하기 위해 서북면으로 행차하는 길에··· 왕이 변발하지 않았다고 이분희 등을 책망하자 말을 달리면서 방망이를 휘둘러 예복을 입은 사람들을 마구 때려 몰아내게 하는 바람에 왕을 시중하던 자들이 뿔뿔이 흩어져버렸다.” <고려사세가 충렬왕 즉위년(1274) 10월> 이때부터 고려 조정에서는 변발을 하기 시작한다.
〇 고려 - 몽골, 통혼의 이유
- 이렇게까지 애써서 성사시켜야 했던 혼인이었나?
<신병주 교수의 분석>은 당시의 상황을 보면 아버지 원종이 무신정권에 의해 폐위됐을 당시 몽골의 도움으로 복위되는 과정을 지켜본 충렬왕, 왕권의 강화를 위해서는 몽골의 힘이 필요하다는 판단이었고 가장 확실한 방법은 몽골 황실과의 혼인!
- 이를 계기로 고려왕은 몽골공주를 부인으로 맞이하는데 원 간섭기의 7명의 왕 중 25대 충렬왕 · 26대 충선왕 · 27대 충숙왕 · 28대 충혜왕 · 31대 공민왕까지 5명이 몽골공주와 혼인하게 되고 29대 충목왕(12세 사망) · 30대 충정왕(15세 사망)은 어린나이로 혼인 전에 사망하게 되어 원 간섭기의 모든 고려왕이 몽골공주와 혼인했다고 볼 수 있는 것
- 이러면서 고려 국왕이자 몽골황실의 부마가 된 후 대외적 지위가 달라진 고려국왕, 몽골에서 온 사신들과의 연회에서 왕이 몽고사신에게 술을 따르면 엎드려 절을 하고 술잔을 받아 마시고 다시 엎드려 절을 하는 절차를 밟게 되는데 옆에 있던 다루가치는 그런 절차를 따르지 않았던 상태, 그래서 몽골 사신은 왕은 황제의 부마인데 어찌 그럴 수 있느냐며 꾸짖고 충렬왕은 몽골사신 · 다루가치와의 관계에서 우위를 차지하게 된다.
- 쿠빌라이 칸의 부마 7명 중 충렬왕만 몽골부족이 아닌 고려인으로 칸의 부마는 쿠릴타이(Khuriltai)라고 해서 몽골의 왕족과 장수들로 구성된 족장회의로 칸의 추대 등 중대사의 협의체에서 충렬왕에게도 몽골 황실의 일원으로 쿠릴타이에 참여할 수 있는 대우를 받는 것
- 고려와의 혼인을 통해 몽골이 얻는 것은?
몽골이 남송을 정복하기 전의 대립상황에서 남송과 고려의 협력을 차단하는 효과, 그리고 당시 몽골의 가장 큰 목표는 일본정벌로 고려의 군사력을 끌어들일 계획이었을 것이라는 <신병주 교수의 분석>
- <이익주 교수의 분석>은 몽골이 첫 청혼에 대답을 미룬 것은 강화도 출륙(出陸) 후에 이야기 하자는 뜻이었고 몽골이 청혼 승낙 후 혼례를 미룬 것은 삼별초 항쟁의 추이를 보려했던 것, 또한 당시 몽골의 오랜 목표는 일본정벌로 고려를 원군으로 끌어들여야 했기에 쉽게 청혼을 거절할 수 없었던 것
〇 제국대장공주, 고려의 새로운 권력자
- 고려로 시집온 제국대장공주는 어떻게 살았나?
제국대장공주는 충렬왕이 즉위한 이후에 고려에 오게 되는데 국민의 반응 “왕이 공주와 연(輦)을 함께하고 입성하니 부로(父老)들이 뜻밖에도 오랜 병란 끝에 태평시절을 다시 보겠구나! 라며 경하했다.” <고려사 충렬왕 즉위년(1274) 11월> 몽골과 고려의 혼인으로 적어도 전쟁은 없겠구나! 하는 정도가 아니었을까(?)
- 고려와 몽골 황실의 첫 혼인 사례로 충렬왕의 두 번째 부인인 제국대장공주는 여러 부인 중의 하나일 뿐이다(?) 별궁으로 거처를 옮긴 정화궁주, 여기서 변수가 생기는데 제국대장공주의 등장으로 고려 왕비 서열을 정하는 원칙을 확립하여 몽골의 공주가 1위 몽골공주의 아들이 태자가 되는 것으로 확실히 정해진 것
- 제국대장공주가 혼인 후 바로 아들을 낳자 “식트르가 평상에 자리를 마련한 것은 정화궁주와 동등하게 대우하려는 뜻이라고 고자질하자 공주가 대노해 즉각 높은 의자가 있는 서상으로 자리를 옮기게 했다··· 결국 잔치를 중지시킨 다음 전에서 내려와 통곡하며 자기 아기가 있는 곳으로 가겠노라고 앙탈을 부렸다.” <고려사 후비열전 충렬왕 제국대장공주>
- 또한 대규모 예산이 투입되는 궁궐조성사업을 지시한 제국대장공주 “공주가 일찍이 잣과 인삼을 중국 강남으로 수출해 많은 이득을 남겼다, 나중에는 환관을 각지에 보내어 그 물품들을 구하게 했는데 이러한 물품이 생산되지 않는 곳에서도 빠짐없이 거두어들이자 백성들이 이를 매우 고통스럽게 여겼다. <고려사 후비열전 충렬왕 제국대장공주>
-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공주 주변의 사속인(몽골어 케링구)이 같이 따라오는데 이들이 권력에 접근하여 국정관여 · 토지와 재물 약탈 등 만행을 저지르게 되는 것
- 제국대장공주의 행동에 대한 충렬왕의 반응은?
혼인 초라서 통제가 불가능했던 것 “공주가 흥왕사 금탑을 가져다가 내궁에 들여놓았다, 금탑의 장식 대부분은 쿠라다이와 셍게 등이 훔쳐갔다.” <고려사 후비열전 충렬왕 제국대장공주> 제국대장공주가 내궁에 금탑을 들여놓은 것을 본 충렬왕 “공주가 금탑을 허물어 다른 용도로 쓰고자 하기에 왕이 말렸지만 공주가 듣지 않아 울기만 하였다.” <고려사 후비열전 충렬왕 제국대장공주>
- 그런데 이보다 더 심한 것은 “왕이 요양 차 천효사로 거처를 옮기려 하여 먼저 산 아래로 갔다 공주가 뒤따라 왔으나 시종하는 사람이 적다고 화를 내며 돌아가기에··· 공주가 지팡이를 들고 쫓아 나와 왕을 때리자··· 왕이 모자를 내동댕이치고 홀라대를 쫓아내며 이 모든 일은 네놈들의 짓이니 반드시 그 죄를 물을 것이다 고 꾸짖었다.” & “공주의 노여움이 조금 풀려 천효사까지 왔는데··· 왕이 기다리지 않고 먼저 들어갔다고 하면서 다시 욕을 하며 왕을 때리고는···” <고려사 후비열전 충렬왕 제국대장공주> 제국대장공주는 충렬왕을 두 번이나 때리고 돌아갔다는 것 “이를 본 문창유가 설공검에게 이 보다 더 수치스러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라고 탄식했다.” <고려사 후비열전 충렬왕 제국대장공주>
〇 몽골 황실과의 혼인, 달라진 고려
- 몽골황실과의 혼인 이후, 달라진 점은?
중요한 변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기본적으로 고려의 중앙관제가 격하 “관직의 명칭도 우리(몽골) 조정과 같은 것은 또한 고쳐야 할 것이다.” <고려사세가 충렬왕 원년(1275) 10월> 그래서 중서문하성과 상서성 통합하여 첨의부로 6부를 합쳐 4사로 추밀원을 밀직사로 어사대를 감찰사로 격하시킨다.
- 또한 고려 왕실에서 쓰는 용어도 고려 전기에는 황실의 용어로 짐(朕) · 폐하(陛下) · 태자(太子)를 고(孤) · 전하(殿下) · 세자(世子)로 한 단계씩 낮추고 왕의 문서인 조서(詔書)도 교서(敎書)로 바꿔 사용하는 것
- 그렇다고 해서 엄처시하에 휘둘렸던 것만은 아니고 매사냥을 즐긴 충렬왕은 자주 밖에 나가 매사냥을 즐겼으며 다른 궁녀들을 만났고 특히 무비(無比)라는 궁인을 아꼈다는 것 “기실공주의 투기를 꺼린 나머지 사냥을 핑계로 궁궐을 나와 애첩을 만나려는 속셈이었다.” <고려사세가 충렬왕 22년(1296) 2월>
※ 무비 : 충렬왕이 도라산으로 사냥할 때마다 데리고 가 사람들이 ‘도라산’이라 부를 정도로 총애를 받았던 궁인
〇 충렬왕의 측근정치
- 이전에는 매를 불법적으로 포획해 몽골에 바치면서 이득을 취하는 세력이 많았는데 충렬왕 9년(1283) 응방도감을 제도화하여 매사냥을 빌미로 힘을 키운 부원 · 친원 세력을 몰아내는 효과를 얻어내는 것, 그런데 충렬왕이 개인적으로 신임하는 인물에게 응방을 맡기고 또 같이 그들과 어울리며 개인적으로 신임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왕권을 강화하려는 측근정치를 펼친다.
- 대표적인 기구로 몽골식 기구이긴 하지만 <비체치>를 만들어 왕을 보좌하고 정책결정에 참여하게 하고 <홀치>를 만들어 측근의관자제로 구성된 왕실 호위담당을 하게하는 등 친위부대를 만드는데 이것은 몽골 황제의 친위군인 <케식>을 모방해 온 것이고 몽골 황실과의 혼인을 통해 얻은 지위로 왕권강화에 성공한 충렬왕
- 하지만 충렬왕이나 고위관료들은 변발호복을 하는데 백성들에게는 변발호복을 강요하지 않았던 충렬왕, 그리고 관제는 격하됐으나 인사권은 충렬왕이 장악한 것으로 일반백성들이 몽골 풍습을 받아들이지 않도록 노력한다거나 쿠빌라이 칸의 지위를 이용해 고려의 국가적인 독립을 계속해 지키려고 노력한 것에 대하여는 높이 평가해야 할 일
〇 세조구제(世祖舊制)
- 1278년 고려 사위와 몽골 장인의 대타협! <세조구제> ① 호구조사를 고려의 자율에 맡길 것 ② 고려 다루가치를 폐지할 것 ③ 고려 주둔 몽골군을 철수시킬 것 ④ 홍차구와 부원배를 소환할 것 등 <세조구제>는 고려의 자주성과 독립성을 인정하는 조약으로 고려의 자주성을 지킬 수 있는 명분이 되고 쿠빌라이가 죽은 후에도 몽골의 후손들에 의해서 이것은 쿠빌라이의 옛 제도였다라고 해서 계속 지켜지는데 세조구제는 이후, 고려의 자주성을 지키는 명분이 되고 이는 충렬왕 외교의 큰 성과라고 말할 수 있는 것
- <세조구제> 대타협의 결과를 두고 “지금 천하에 군왕과 신하가 있고 민과 사직이 있는 곳은 오직 고려뿐입니다.” <고려사열전 이목> 고려의 자주성과 독자성을 높이 평가한 부문
〇 제국대장공주 다시 보기
- 제국대장공주의 입장에서 보면 시집오기 전 고려라는 나라에 대하여 얼마나 알았을까? 고려에 대해 잘 알지 못했던 제국대장공주는 혼인 전 몽골에서 했던 그대로 행동했을 것, 그리고 그것이 특이하다 보니 사관들에 의해서 대서특필된 것이고 세월이 흐르면서 달라진 제국대장공주
- 흥왕사의 금탑도 충렬왕이 병들고 어느 날 주위에서 “재액을 털어내기 위해서는 정성을 다해야하는 법입니다, 유독 흥왕사의 금탑이 아직 궁중에 있으니 원컨대 돌려주소서라고 요청하자 공주가 모두 허락하였다.” <고려사 후비열전 충렬왕 제국대장공주>
- 난폭한 제국대장공주의 모습은 초기이고 점차 나아지는 모습을 보이는데 몽골에서는 가정에서 남성과 대등한 지위에 있었던 몽골 여성들, 1221년에 몽골에서 온 사신 중에는 여성도 있었다는 것
- <신병주 교수의 분석>은 시대적 관점으로 본다면 직접 상업과 생산 활동에 참여했던 제국대장공주, 그런 모습은 고려와 몽골의 관계를 위해 충렬왕을 도왔던 것으로 해석이 가능하고 충렬왕에게 “사냥만 일삼으니 나랏일이 어찌되겠습니까? 라고 하니 왕이 부끄럽고 화가 나 길바닥에 주저앉았다.” 또한 1293년 왕부부가 몽골에 가는데 “공주는··· 여기 있는 맛난 음식들은 백성들의 피땀이니 돌아오는 길에는 백성들로부터 거두어 환심을 사려는 것은 하지 말라고 하였다.” <고려사 후비열전 충렬왕 제국대장공주>
- <이익주 교수의 분석>은 결국 충렬왕은 제국대장공주를 정치적 동반자로 만드는데 성공한 것으로 보이는데 제국대장공주를 따라 고려로 온 케링구를 고려 관리로 만든 충렬왕은 이들을 몽골과의 황실외교에 활용하는데 고려의 어떤 관리보다도 비공식적인 외교에는 적합한 사람들로 케링구를 왕권강화에 적극 이용하고 제국대장공주가 아무리 횡포를 부려도 권력의 핵심을 제국대장공주에게 내어주지 않았던 것
- 왕권이 안정되자 매사냥과 연회를 과하게 즐겼던 충렬왕 “감찰사에서 현 정국을 비판하는 글을 올리자 왕이 크게 노하여 시사 심양을 숭문관에서 국문하게 했다, 잡단 진척과 시사 문응을 바다 섬으로 유배 보내고 전중시사 이승휴를 파직시켰다” <고려사세가 충렬왕 6년(1280) 3월>
〇 제국대장공주의 죽음과 충렬왕
- 1297년 충렬왕과 제국대장공주가 세자의 혼례를 마치고 몽골에서 돌아온다. 그러나 환궁하자마자 병을 얻은 공주 “당시 수령궁에 작약 꽃이 활짝 피었는데 공주가 한 송이를 꺾어오게 하여 한참을 만지작거리다가 흐느껴 울었다. 결국 제국대장공주는 현성사에서 죽으니 나이가 39세였다.” <고려사 후비열전 충렬왕 제국대장공주>
- 고려로 환궁한지 보름 만에 세상을 떠난 제국대장공주, 충렬왕이 제국대장공주를 부인으로 사랑한 것이 아니라 정치적 방패 또는 외교적 수단으로 대했기 때문에 외로움이 컸을 것(?) 혼인 후 세월이 흐르면서 허울만 좋을 뿐 제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허망함도 있었을 것(?)
- 충렬왕의 시대적 과제는 몽골의 간섭에서 고려를 지켜내는 것, 그 점에서 충렬왕은 몽골과의 일정한 거리를 두고 몽골의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 부마라는 지위를 이용해 노력했던 인물로 평가할 수 있는데 몽골의 간섭에서 벗어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국가기구를 활용하지 않고 측근 세력을 이용한 것이 충렬왕의 한계라는 <이익주 교수의 분석> 이러한 후자의 어두운 부분 때문에 아들(충선왕)과 대립하는 이유가 되어 아들 충선왕의 개혁정치에서 밀려나게 되는 빛과 그림자가 동시에 있었던 충렬왕 시대라고 평가할 수 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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