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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비의 아들 신돈, 공민왕의 사부(師父)가 되다

mkpark2022 2016. 12. 5. 21:23

 

 

 

 

노비의 아들 신돈, 공민왕의 사부(師父)가 되다

 

 


신돈, 공민왕에게 발탁되다

- 혁신적인 개혁을 감행하지만 요승(妖僧)이라 불리며 반역열전에 오른 신돈! 그의 참모습은 무엇인가? 암살의 위기에서 벗어난 공민왕, 깨어보니 꿈이었고··· 1등 공신 김원명이 승려를 소개하는데 바로 꿈에서 본 그 승려 매우 이상히 여긴 왕이 그와 이야기를 나누어 본 즉 총명하고 사리에 밝았으며 도를 깨우쳤노라고 큰 소리를 치는 것이 모두 왕의 뜻에 맞았다.” <고려사 반역열전>

- 신돈하면 떠오르는 이미지?

예전에는 부정적인 측면의 요승(妖僧)으로 표기했지만 요즘 교과서에 등장하는 신돈은 개혁가, 왕의 사부(師父)는 왕에게 학문을 가르치는 사람으로 공민왕은 신돈의 의견을 국정에 적극 반영, 그래서 실제적으로 정치적 힘을 갖게 된 왕의 사부 신돈

- <이익주 교수의 분석> 공민왕이 신돈을 기용한 것은 대단히 파격적인 일로 공민왕 14년 처음으로 관직을 받은 신돈, 공신호의 섭리공신이란 이성계가 공양왕을 옹립하고 받은 공신호로 이성계급 공신호를 받고 관직은 영도첨의사사로 도첨의사사는 판사의 가장 높은 관직인데 그 위에 상위 관직을 만들어 임명하면서 고위급 무신회의 기구인 중방판사감찰사 판사까지 임명하여 관리들을 감찰할 수 있는 권한까지 부여하여 전례가 없는 파격적인 인사

- 공민왕은 왜 신돈을 선택했을까?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보면 집권 초 반원 · 개혁정치를 펼친 공민왕, 그런 과정에서 기황후 등 친원 세력들과 대립하게 되자 내부적으로는 권문세족들이 저항을 하고 기황후 측에서도 덕흥군을 내세워 공민왕을 대신하는 왕을 삼으려는 시도와 외부적으로는 홍건족과 왜구의 침입이 잦아 대내외적인 정치 상황의 힘들고 지친 상태에서 신돈을 만나게 되는 것

- <덕흥군의 난> 이후 측근세력을 모두 잃은 공민왕, 그리고 개혁을 가로막는 최영 등 신흥 무신세력이 등장하여 공민왕의 입장에서는 개혁정치의 지속을 위해 뭔가 반전의 기회를 만들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서 신돈을 만나게 되는 것

덕흥군의 난 : 1362년 원나라가 공민왕을 폐위하고 덕흥군을 고려 국왕으로 세우려 함

- 또한 당시 공민왕에게 닥친 개인적 불행은 13652월 노국대장공주의 죽음, 그리고 3개월 뒤에 신돈이 발탁되는데 사랑하는 여인이자 정치적 동반자였던 노국대장공주의 죽음!

 

신돈, 국정을 맡길만한 인물인지 검증

- 승려인데 머리를 깍지 않았다? 이미 환속한 몸! “신돈은··· 어미가 계성현 옥천사의 여승이었다.” & “(신돈은) 어미가 천출이라는 이유로 승려들 사이에 끼지 못하고 늘 산방에서 떨어져 살았다.” <고려사 반역열전> 그래서 국정운영의 기본인 유교적 소양을 갖추기 어려운 환경에서의 성장?

- 신돈은 글을 모른다? “신돈은 글도 모르는 주제에 늘 도성을 오가면서 불법을 전파하는 척하며···” & “신돈은··· 여색을 밝혀 늘 검은 닭과 흰말고기를 먹어 양기(陽氣)를 돋우었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늙은 여우의 화신이라고 수군댔다.” <고려사 반역열전>

- 신돈이 뇌물을 받았다? “조정에 있는 자들이 모두 특혜를 바라고 신돈의 위세를 두려워 해 서로 뒤질세라 노비와 보물을 바쳤다.” & “신돈의 탐욕과 음란함이 날로 심하여져서 뇌물을 마구 받아 챙겼으며···” <고려사 반역열전>

- 고려 저잣거리의 참설? 진사년에 성인이 나온다는 것!” 신돈이 개성에 온 것이 1364갑진년이고 본격적으로 정치에 나선 1365년은 을사년이어서 신돈이 진사년에 나온 성인이라는 것!

 

공민왕이 신돈을 선택한 이유

- 노비 아들인 신돈의 신분이 수직 상승하여 고려 최고 권력자가 되어 확인되지 않는 각종 소문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공민왕이 직접 말한 신돈 발탁 이유는?

왕이 왕위에 있은 지 오래 되었는데 재상들 가운데에 많은 이들이 뜻에 맞지 않으니 세신대족은 친당이 뿌리처럼 이어져 있어서 서로 허물을 가려준다.” & “초야 신진··· 현달하게 되면 집안이 한미한 것을 부끄럽게 여겨 세신대족의 사위가 되고 처음의 뜻을 버린다.” & “유생들은 유약하고 강직하지 못하다··· 세 부류는 모두 쓰기에 부족하다. 세속에서 떨어져 홀로 선 사람(亂世獨立之人)을 얻어 그를 크게 사용하면···” <고려사 반역열전>

- 그게 바로 신돈이었던 것! 그래서 신돈을 통해 자신이 꿈꾸던 개혁정치를 펴고자 했던 공민왕은 권문세족 등의 기존 권력집단에게는 기대하기 어려운 덕목이었던 것

- 이른바 위임정치왕권을 한 인물에게 위임해 왕의 뜻을 대신 펼칠 수 있도록 보장해주는 것으로 처음에는 공민왕의 청을 거절한 신돈은 공민왕이 간절히 청하자 서로 맹서를 주고받는데 참소와 이간질을 잘 믿는다던데 이런 일을 하지 않으셔야 세상이 복되고···” <고려사 반역열전>

- 공민왕은 신돈에게 직접 답서를 써주는데 사부는 나를 구하고 나는 사부를 구할 것이며 다른 사람의 말에 미혹되는 일이 절대 없을 것을 부처와 하늘 앞에 맹세하노라!” <고려사 반역열전>

- 맹약 이후 신돈을 파격적으로 대우한 공민왕 왕이 여러 능을 참배할 때 백관들이 모두 왕을 따라 절을 올렸으나 신돈은 혼자서서 절하지 않았다.” <고려사 반역열전> 마치 군신관계가 아닌 왕과 대등한 관계처럼 행동한 신돈, 신돈이 등장하면 백관이 모두 일어나 맞이하는데 이런 사실이 외국에도 알려져 원나라 사신이 와서 듣자니 귀국에 권왕(임시 국왕 또는 국왕의 권한을 대행하는 사람)이 있다는데 어디에 있는 거요? 라고 물었다” <고려사 반역열전>

 

신돈의 개혁정치, 고려를 바꾸다

- 당시 백성들은 신돈의 존재를 인정했나?

권문세족들은 반발하지만 백성들은 환영하는데 당시의 권문세족들은 대농장을 소유하면서 사치와 향락을 누리던 시절, 반면 백성들은 자연재해와 고리대에 고통을 받았던 것으로 양인 백성들이 고리대를 갚지 못해 노비가 되기도 하는 상황에서 신돈이 모든 문제를 한 방에 해결하는 것!

- 교과서에도 등장하는 1366년의 전민변정도감 설치 노비가 된 양인 농부들의 신분 회복 불법 점유한 토지의 원상회복으로 전민변정도감의 설치 효과는 권세가들의 세력 약화와 국가 재정확보로 백성들은 열열이 환영 명이 나오자 권세가와 부호들이 점탈했던 전민을 그 주인에게 되돌려주었으므로 온 나라가 기뻐했다.” & “노비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성인이 나왔다! 고 떠들어댔다.” <고려사 반역열전>

- 원 간섭기에 설치하여 성과를 거두지 못했던 전민변정도감, 공민왕과 신돈의 강력한 추진력으로 개혁에 성공을 거두는 것에 의미가 있는 것, 또한 과거제도의 개혁인데 과거합격자들끼리 좌주(시험관) 문생(합격자) 계파를 만드는 폐단이 있었는데 왕이 직접 과거를 주관하여 기존의 좌주문생 관계를 혁파하는 것

- 당대 최고의 학자이며 정치가인 이제현과 대립하는 신돈 이제현 같은 경우 문생의 문하에서 또 문생이 생겨 마침내 온 나라가 그들 도적 떼로 가득하게 되었으니···” <고려사 반역열전> 이에 대한 이제현의 반격 이제현이 공민왕에게 신돈의 골상이 옛날 흉악한 자들과 같으니 가까이 하지 말라고 충고한 일이 있었다.” <고려사 반역열전>

- 좌주문생관계의 척결새로운 인재들을 개혁세력으로 만들겠다는 공민왕의 의지가 담긴 정책, 계속되는 신돈의 개혁은 홍건적의 난으로 소실된 성균관을 중수하여 성리학을 교육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이색·정도전·정몽주·하륜·권근 등을 배출하게 된다.

- 신돈을 향한 반격은 없었나?

공민왕 16, 신돈 암살 모의가 발각되는데 11명의 고려 정치핵심세력이 연루되었지만 금세 발각된 신돈 암살 모의 신돈이 왕에게 아뢰기를··· 이제 나라 사람들이 저를 죽이려고 하니 전하께서 불쌍히 여겨 주소서” <고려사 반역열전>

- 신돈 암살 모의 세력 전원을 극형 또는 유배 보내지만 공민왕 17년 또 다시 신돈 암살 모의가 발각되는데 공민왕이 이들을 순군옥에 가두었다가 모두 곤장을 쳐서 귀양시키는데 신돈은 자기 사람을 뒤쫓아 보내 유배길 도중에 그들을 목 졸라 죽이게 했다.” <고려사 반역열전>

- 신돈이 권력을 독주하자 기존의 정치가는 물론 공민왕의 어머니 명덕태후도 신돈을 경계하는데 공민왕은 명덕태후를 원망하였고··· 효심도 결국 사라지게 되었다.” <고려사 열전>

 

신돈, 공민왕의 정치적 아바타?

- 목숨의 위협을 받을 때마다 공민왕을 찾는 신돈의 권력은 결국 왕권에서 비롯되지만 공민왕의 신임을 잃으면 신돈의 권력도 끝이 나는 것, 그래서 이즈음에 공민왕이 신돈을 보호한 이유가 무엇일까?

과연 신돈만을 보호한 것인가? 인데 신돈이 제거한 정치 세력, 그들 대부분은 공민왕의 개혁에 반대하거나 대립한 정적들로 당시 숙청 기록 신돈은 권력을 마음대로 하며 은혜와 원수를 반드시 갚아 세가대족이 거의 주살당하여 사람들이 그를 호랑이나 이리 보듯이 하였다.” <동사강목>

- 신돈은 개혁보다는 공민왕의 정적 제거?

공민왕 정권 초 반원정치로 기황후와 대립 그리고 <덕흥군의 난>으로 공민왕 폐위시도 등 여러 차례 목숨을 잃을 뻔한 위기를 겪는 공민왕 <이익주 교수의 분석>계속해서 권문세족과 대립하여 개혁을 추진했을 때 목숨이 위험하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뜻을 대신해 줄 신돈에게 권력을 위임하여 개혁을 추진하면서도 왕의 안위를 지킬 수 있는 방법을 찾은 것

- 신돈이 공민왕의 정치적 아바타인 실례, 당시 백성들에게 가장 큰 고통은 노국대장공주 영전 조성사업이었지만 이 사업에는 간언하지 않은 신돈으로 신돈의 개혁정치가 백성을 위한 것이었는지 의문인 것!

- 신돈이 변했다?

신돈이 등장한지 4년이 되는 공민왕 18신돈 자신이 5도도사심관 자리에 오르려고 삼사를 시켜 해당 관직을 복구하도록 상소문을 올리게 했다.” <고려사 반역열전> 5도도사심관은 사심관을 통해 지방 권력을 장악할 수 있는 관직

- 이런 요청이 올라갔을 때 공민왕은 뜻밖의 반응으로 상소문을 불태워버리는데 신돈이 요청한 사항을 최초로 거부한 것으로 신돈의 권력욕을 경계하기 시작한 공민왕 전라도체복사 최용소가 서울로 돌아와서 먼저 신돈을 보고난 다음에 왕을 알현하였으므로··· 공민왕이 유사에 명령하여 그를 장형에 처했다.” <고려사 공민왕 19>

- 신돈이 기고만장하게 된 또 하나의 계기 명나라 황제가 사신을 보내 왕을 국왕으로 책봉하고 아울러 신돈에게는 채색비단과 황제의 인장이 찍힌 조서를 내리면서 상국(相國) 신돈(辛旽)이라고 칭했다” <고려사 공민왕 19> 어느새 왕만큼 높아진 신돈의 대내외적 위상 <신병주 교수의 분석>은 처음의 권력을 위한 순수한 열정은 사라지고 자신을 위한 권력욕만 남은 듯한 신돈

 

공민왕, 신돈을 버리다

- 13717월 갑자기 체포돼 국문을 당한 신돈의 측근들 선부의랑 이인이 익명서를 올려 신돈의 모역을 보고했다” <고려사 공민왕 20> 수원으로 유배된 신돈, 그러나 신하들은 신돈을 극형에 처할 것을 강하게 요청하고 결국 유배되고 이틀 만에 신돈의 목을 베고 사지를 찢어서 조리를 돌렸으며 경성 동문에 매달았다” <고려사 반역열전>

- <최태성 교사의 생각>은 신돈 처형 당시 공민왕은 냉혈정치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모습으로 권력이 한 곳에 집중되는 것을 경계한 공민왕, 부원 세력뿐만 아니라 초기 개혁을 도왔던 신하들도 권력이 지나치게 커지면 제거하는 모습이었는데 이제 신돈이 공민왕에게 위협이 된 것으로 결국 공민왕이 신돈을 버린 것!

- 이 무렵이 되면 전민변정 등 개혁의 성과를 거두는 것으로 자평할 수 있는 시기가 되는 것이고 나라 밖으로는 중국에서 -명 교체가 이뤄지면서 고려 국왕으로서 새롭게 명과 관계를 맺어야 하는 시기가 되자 신하인 신돈을 국왕 대신 내세울 수 없는 상황, 실제로 공민왕은 명의 책봉을 받은 후부터는 친정을 시작하고 서서히 신돈의 정치적 영향력이 축소되고 있던 시점

- 신돈은 정말 반역을 모의했을까?

<이익주 교수의 분석>은 당시 상황을 볼 때 신돈이 역모를 꾀할 이유가 없었던 것으로 신돈 사후의 역사는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부정적으로 기록되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

- 신돈에게 변명할 기회는 없었나?

신돈과 손을 잡고 모반을 행한 사람들에 대해서만 국문을 했고 신돈은 국문조차 당하지 않고 유배를 가고 유배지에서도 사형당할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신돈은 해명할 기회도 없이 처형당했던 것!

 

모니노(훗날 우왕)의 아버지는 신돈?

- 신돈이 죽은 후 고려 저잣거리에 도는 이상한 소문, 신돈과 애첩 반야와 공민왕이 연루된 이야기로 후대가 없어 상심한 공민왕에게 신돈이 애첩 반야를 보내고 공민왕을 만난 후 반야가 임신하게 됐다는 것 공민왕이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신돈의 집에 이르러 시중드는 여종에게 성은을 입혀 아들을 낳았다” <고려사절요 공민왕 20> 반야의 아들 이름은 모니노로 공민왕의 아들이니 신돈의 아들이니 하는데 진실은 누구도 알 수 없는 요상한 소문(?)

- 모니노의 아버지는 누구?

오랫동안 후계자를 얻지 못하던 공민왕이 신돈의 애첩을 만나고 아들을 낳았다는 것으로 공민왕도 놀라운 일!, 조선 건국의 주체세력들은 신돈의 아들이라 주장하고 공민왕 지지세력들은 공민왕의 아들이라는 것으로 모니노(우왕)가 누구의 아들인지는 누구도 알 수 없는 것

- 다만 우왕이 신돈의 아들로 기록된 이유는 조선 건국 세력이 신돈을 지나치게 악평함으로써 고려 말의 역사를 부정적으로 기록함과 그리고 그 보다 앞서 이성계가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을 세울 때 자기들의 행동을 폐가입진(廢假立眞)이라고 하는데 이는 가왕(假王)을 몰아내고 진왕(眞王)을 세운다는 뜻으로 가짜는 신돈의 자손으로 우왕·창왕은 왕이 아니라는 주장, 이런 것들을 보면 우왕의 기록이 조작되었다고 볼 수도 있는 것

- 그러나 실제 공민왕의 태도도 석연치 않은 것이 아들을 오랫동안 기다리던 상황인데 태어난 지 7년 후에야 모니노의 존재를 알리는 것, 그것도 신돈이 유배당한 시기에 처음 꺼낸 것이다 보니 그 당시 사람들이 왕의 말을 믿어야 할지··· 의심했던 것!

 

신돈에 대한 평가

- 갑자기 나타나 단 6년 만에 죽음을 맞이한 고려 최고 권력자 신돈, 그리고 죽은 후에도 고려를 들었다 놨다했던 드라마틱한 인물로 요승 VS 개혁가인지 평가하기 어려운 인물 신돈, 고려 말기에 속한 세력이 없었기 때문에 권력을 잡을 수 있었으나 속한 세력이 없었기 때문에 고려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던 인물로 역사 속에서 반복된 개혁가들의 운명!

- 신돈 집권기의 한계는 고려 최고 회의기관인 도당을 무력화하고 오히려 신돈의 측근들이 권력을 장악하여 신돈을 이용한 공민왕의 측근정치가 가능케 했던 인물 <신병주 교수의 분석>측근정치로 공적시스템이 무너지고 초기 순수한 개혁의지가 사라진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돈이 뿌린 개혁의 씨앗이 조선건국의 밑거름이 되었다는 점은 인정해야 할 일

- 그리고 현실의 승자 패자가 역사의 승자 패자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으로 신돈처럼 현실에서는 패배했지만 역사에서는 승자가 될 수 있다는 것으로 신돈의 전민변정 사업은 성공했지만 그것으로 개혁이 충분하지 않았다고 했을 때 신돈의 다음 세대에 활동하는 정도전 · 조준 등은 그보다 본질적인 개혁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래서 과전법의 시행 고려를 근본적으로 개혁하려는 시도의 끝이 왕조교체로 이어지는 것으로 신돈의 현실에서의 패배가 곧 역사의 패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이익주 교수의 분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