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구침공 - 고려, 계엄을 선포하다
〇 왜구 침공! 계엄 선포
- 14세기 중반 계속된 왜구의 침입과 약탈로 인해 고려에는 1358년 5월 14일 계엄이 선포되고 왜구(倭寇)는 강화도 · 교동도까지 침략해 재물을 약탈한다.
- 계엄령은 전시 등 국가비상사태 시 군(軍)이 행정권 · 사법권을 행사하고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할 수 있는 법제도인데 왜구 침략, 당시 고려의 상황은?
1357년 · 1358년 · 1360년 · 1363년··· 여러 차례 선포된 고려의 계엄, 그런데 당시의 계엄은 요즈음의 의미와는 다르고 징계할 계(戒) 엄할 엄(嚴)의 경계를 엄히 한다는 정도의 뜻, 하지만 도성의 수비를 강화할 정도로 왜구가 교동도 · 강화도 그리고 강을 건너 개경 가까이 예성강 하류까지 침범했던 것
- 왜구(倭寇)란?
구(寇)는 도둑 구로 왜인들로 이뤄진 도적 집단으로 왜구는 일본의 정규군이 아닌 것으로 왜구가 고려를 침입한 이유는?
경제적인 이유로 미곡을 운반하는 조운선과 조창(곡식 창고)을 약탈한 왜구, 이들의 본거지는 쓰시마인데 일본 본토보다 더 가까운 고려를 약탈한 것으로 농토가 적어 고려와의 무역을 통해 식량을 조달한 쓰시마 백성들, 여몽 연합군이 1274년 · 1281년 일본 공격 이후 무역을 중단하자 쓰시마 백성들은 일본 본토에서 식량을 조달받다가 14세기 중반 고려의 방비가 약해진 틈을 타 고려를 약탈한 것
〇 왜구 침입의 역사
- 지리적으로 가깝다 보니 왜구 침입의 역사가 오래된 것으로 삼국시대부터 등장 “왕이 길을 끊고 자르자 왜구가 무너지고 패하니 베고 죽은 자가 수없이 많았다.” <광개토대왕릉 비문> 또한 신라의 삼국 통일을 완성한 문무대왕 “왕의 유언에 따라 동해 가운데의 큰 바위에 장사지냈다. 왕은··· 늘 이렇게 말하였다. 죽은 후에 나라를 지키는 큰 용이 되어서··· 우리 나라를 수호하겠소!” <삼국사기 기이 문무왕 법민>
- 삼국시대부터 드문드문 나타나기 시작한 왜구가 고려 말 1350년 경인년을 기점으로 본격화되기 시작하는데 1350년 이후 40여 년간 500여 회의 침공으로 왜구의 규모는 최소 배20여 척~ 최대 500여 척으로 평균 배 1척당 20여 명이 탑승하여 최대 1만 여 명이 몰려온 셈으로 생계형 도적이 아닌 사단 급 규모
- 14세기 왜구가 기승을 부린 이유?
14세기 불안정해진 일본 본토의 정세, 일본에 두 명의 천황과 두 개의 조정이 존재하던 남북조 시대, 남조와 북조의 계속된 전쟁으로 변방의 통제권을 잃은 일본, 그리고 생계가 어려워지자 도적이 된 일본 변방 주민들, 여기에는 농민 · 하급무사 · 중간 영주 등 각계각층에서 왜구가 속출
- 곡식이 나지 않는 척박한 땅 쓰시마, 당시 백성들의 삶의 기록 “자식을 기를 수 없어 자식을 낳으면 바다에 던지기도 한다.” <대마문제> 백성들의 삶이 얼마나 비참했는지를 알 수 있는 정황, 1991년 소말리아 내전이 시작되면서 출몰한 해적, 시대를 막론하고 전쟁이 일어나면 전쟁과는 상관없는 제3자가 피해를 보기 마련인 것
〇 왜구 침공의 상황
- 1350년부터 본격화 된 왜구침입은 갈수로 심각해지는데 “공민왕 7년에 왜적이 침구하는 바람에 땅을 잃고··· 주민들이 떠났다.” <고려사 지리지 남해현> & “(왜구가) 최씨를 잡아서 욕보이고 칼을 빼어 위협하였다. 최씨가 욕을 당하고 사느니 차라리 의롭게 죽을 것이다. 하니 적들은 결국 최씨를 죽이고 젖먹이는 어머니가 죽은 줄도 모르고 기어가 젖을 빠니 피가 줄줄 흘러 입에 들어가 곧 죽었다.” <고려사 열전 정만의 처 최씨>
- 왜구의 만행은 약탈 · 납치 · 겁탈 · 살해 등으로 단순한 도적이 아닌 살인마에 가까운 것으로 왜구 침입에 대한 대책이 시급했던 것 <삼강행실도>는 삼강에 모범이 될 만한 충신 · 효자 · 열녀의 현실을 모아 만든 책으로 삼녀투연(三女投淵)은 왜구의 겁탈을 피해 강물에 투신한 세 처녀를 묘사한 것
- 또 한 가지 안타까운 것은 고려의 문화제를 약탈해간 것 “왜적이 승천부 흥천사를 침투해 충선왕과 한국공주(계국대장공주)의 영정을 탈취해 갔다.” <고려사 세가 공민왕6년>
- 그리고 1365년 예성강 하구까지 침범하여 태조 왕건의 아버지 묘(창릉)를 약탈해 간 기록이 있어 당시 상당수의 문화재가 약탈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수많은 고려 문화재가 산재해 있는 쓰시마
- 규슈에 있는 고려 불화 <수월관음도> 등 국외로 유출된 우리의 문화재는 공식적인 기록으로 16만 7천여 점으로 일본에만 7만여 점이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환수가 어려운 우리문화재, 2011년 145년 만에 돌아온 외규장각 의궤도 돌아오긴 했지만 5년 마다 갱신하는 대여 방식으로 환수한 것
- 14세기 중반 혼란스러운 고려의 상황은 엎친 데 덮친 격 ① 공민왕의 반원운동 ② 홍건적의 침입 ③ 동북면 지역의 여진족 침입 ④ 공민왕 폐위사건 · 덕흥군의 침입 등 일련의 사건들이 왜구의 침입 시기와 동시에 이뤄진 것이어서 왜구방어에 집중 할 수 없었던 것이고 당시 명나라의 위협을 받던 청나라도 왜구의 침입에 대응할 여력이 부족하여 원도 고려도 대응할 여력이 없어지자 더욱 조직화 되고 강성해진 왜구의 세력으로 고려는 악순환을 겪게 되는 것
〇 왜구침입에 대한 고려의 대응
- 고려의 대응으로 토벌작전과 함께 군사체제를 강화 ① 지방군 재정비를 위해 진수군 증설과 수군 재건 ② 연해와 섬 출신자들을 선군으로 배치 ③ 도순문사를 각 도에 파견해 왜구 방비, 방어체제를 구축함과 동시에 일본과 직접 접촉을 시도한 고려는 1366년 일본 조정에 사신을 파견해 왜구 금압을 요구하는데 여몽연합군의 일본 공격 후 단절된 일본과의 외교가 90년 만에 재개되면서 여러 차례 일본에 파견된 고려의 사신
- 이인임의 배명친원의 외교정책을 반대하다 언양으로 유배한 정몽주는 유배에서 풀려난 뒤 바로 일본에 사신으로 파견되는데 당시 일본에 간다는 것은 목숨을 걸어야 했던 일 “정몽주를 천거하여··· 왜구를 금지시킬 것을 청하도록 하니 사람들이 이를 위태롭게 여겼으나 정몽주는 전혀 어려운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고려사 열전 정몽주> 고려의 충신이자 외교전문가 정몽주 “왜승들 가운데 시를 구하려는 자에게는 붓을 들어 바로 지어주니 승려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고려사 열전 정몽주> 고려판 한류 열풍!
- 당시 일본에서도 왜구들 때문에 골칫거리 “정몽주가 글을 써서··· 보내니 적의 우두머리가 글의 간절하고 슬픈 말을 보고 포로 100여 명을 돌려보내었다.” & “서쪽 바닷가 지역의 완악한 백성들이 틈을 엿보다 (고려를)노략질한 것이지 저희가 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 조정에서도 장수를 보내 토벌하고자 전투를 벌이고 있습니다, 천지신명에 맹세코 해적질을 금지시키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고려사절요 우왕 2년(1376)>
- 왜구토벌을 위해 우왕 4년과 5년 두 차례에 걸쳐 고려에 파견된 일본군, 우왕 5년의 경우에는 일본군 186명을 고려에 파병하는데 일본이 고려에 파병하는 것은 역사상 최초로 일본의 파병은 일본군과 왜구가 다름을 알리기 위한 것, 하지만 왜구 금압에 실패한 일본 정부 그리고 이를 보면서 고려는 본격적으로 왜구 토벌 전을 벌이게 된다.
〇 홍산대첩, 최영의 활약
- 1376년 최영이 왜구토벌을 위해 홍산으로 출정 “왜구가 험하고 좁은 곳에 웅거하고 있었는데 3면이 모두 절벽이고 오직 하나의 길로만 통할 수 있었으므로···” & “최영이 몸소 사졸들보다 앞서 매우 날카로운 기세로 돌진하자 적이 쓰러졌다.” <고려사절요 우왕 2년(1376)>
- 최영의 등장으로 본격 시작된 왜구 토벌 전, 1376년 왜구는 부여를 거쳐 공주 · 논산으로 침범하는데 왜구와 싸우다 전사한 양광도 원수, 이 소식을 들은 최영은 내가 출전하겠노라! 고 외치는데 홍산대첩 당시 종1품 판삼사사인 최영의 당시 나이는 61세 “왕과 여러 장수가 (최영이) 나이가 들었다는 이유로 그만 두게 하였으나 최영이 청하기를 두 세 번 하기에 이르자 이를 허락하니 최영은 잠도 자지 않은 채 떠났다.” <고려사절요 우왕 2년(1376)>
- 홍산대첩에서 부상당한 최영 “적 한 명이 숲속에 숨어 최영을 쏘아 입술을 맞추니··· 최영이 태연자약하게 활시위를 당겨서 적을 쓰러뜨리고 이미 맞은 화살을 뽑았다.” & “최영이 몸소 사졸들 앞에 서서 용맹하게 돌진하니 적이 바람에 쓰러지는 풀과 같았다.” & “적이 항상 말하기를 두려워할 사람은 오로지 백발의 최만호 뿐이다.” <고려사 열전 최영>
〇 왜구 침공 상황, 침입 양상의 변화
- 홍산대첩 이후 변화하기 시작한 왜구의 침입 양상, 침입 초기에는 남·서해안 위주로 침범하였으나 이때부터는 홍산 · 공주 · 부여 내륙까지 침범하는데 육지 전에도 능숙했던 왜구(?)
왜구가 고려에 상륙하여 말을 타고 약탈을 자행한 것으로 단순한 해적이 아니라 기병화 된 모습으로 물론 말을 약탈한 것도 있지만 일본에서부터 말을 싣고 온 왜구는 해전과 육지전의 양동작전을 펼친 것, 그러자 조정에서는 개경의 위협을 느끼고 철원으로의 천도가 논의되고 있던 상황
- 왜구가 내륙 깊숙이 들어온 이유?
조정에서는 그간 해안을 이용하여 운반하던 세곡을 왜구가 들끓는 해로를 피해서 육로를 이용하여 세곡을 운반하기 시작하자 곡식 약탈을 하기 위해 내륙까지 진입한 것
- 왜구의 숨은 의도? 개경근처까지 와서 위협한 왜구, 고려를 정복하려는 계획?
<이익주 교수의 분석>은 조직적이고 규모가 커진 왜구가 강화도 · 교동도 개경근처까지 침략했기 때문에 그렇게 보는 시각도 없진 않지만 결정적인 것은 왜구가 개경을 공격한 적이 없는 것으로 왜구의 목적은 단순 약탈이고 고려를 정복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을 것
- 그렇다면 왜구가 고려 백성을 납치한 이유?
납치해간 고려인을 노비로 팔아넘긴 왜구, 또한 노 젓는 일꾼으로 이용하거나 고려를 약탈하기 위한 길잡이로 납치했을 수도 있어 고려인을 납치하여 왜구로 만든 것이라는 <신병주 교수의 분석>
〇 진포대첩의 승리 비결, 최무선의 화포
- 1380년 8월 왜구가 500여 척의 선박을 이끌고 진포에 침입하여 해안가에 정박하고 마을에 불을 지르며 재물을 약탈하여 백성들의 시체가 산과 들을 정도로 참혹한 상황! 이 때 최무선이 발명한 화포를 이용하여 왜구를 총공격 “최무선이 제작한 화포를 이용하여 배를 불태우자··· 왜구가 거의 다 타죽었고 바다에 빠져 죽은 자도 또한 많았다.” <고려사절요 우왕 6년(1380)>
- 진포는 전북 군산과 충남 서천 사이에 있는 포구로 이곳에서 최무선이 화포를 처음 사용한 것으로 백병전에 능숙했던 왜구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가까이 오기 전에 공격해야 하는 상황으로 화포는 원거리 공격에 가장 좋은 무기인 것
- 이러한 상황을 파악한 고려는 명나라에 화약을 요청하지만 재료만 보내주고 화약제조법을 알려주지 않자 직접 화약제조에 나선 최무선은 여러 차례 실패 끝에 화약제조에 성공 “원의 염초기술자가 최무선과 같은 동네에 살았는데 잘 대우하여 몰래 그 기술을 묻고···” <고려사 우왕 3년(1377)> 원나라 때 발명된 화약무기는 최무선의 노력으로 화약무기 국산화에 성공하게 되는 것
- 진포대첩의 규모?
기록에 의하면 진포에 정박해 있던 500여 척의 배의 왜구들은 모두 노략질을 하러간 사이 100여 척의 전함으로 왜구 선박 500여 척을 불태운 고려군, 진포에 남아있던 왜구는 거의 죽임을 당하고 일부는 도망을 처 옥천을 거쳐 영동에서 먼저 와있던 왜구와 합류를 하여 상주 · 성주 · 함양을 거처 남원으로 흘러 들어간다.
- 당시의 비참했던 상황의 기록 “왜적이 두세 살 된 여아를 잡아서 머리를 깎고 배를 갈라 깨끗이 씻은 다음 쌀과 술을 같이 차려놓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제사가 끝나자 쌀을 나누어 먹고 술 석 잔을 마신 다음 아이를 불태웠는데 창자루가 갑자기 부러졌다.” <고려사 열전 변안열>
- 이 왜구뿐만 아니라 당시 일본에서는 제례를 지내고 점을 치는 의식이 있었는데 창자루가 부러지자 불길한 징조라고 판단하고 후퇴한 왜구, 그리고 이들을 추적하다 원수 2명과 500여 명의 군사를 잃은 고려
〇 황산대첩, 이성계의 등장
- 남원에서 후퇴하던 왜구는 인월에서 진을 치고 있고 왜구토벌을 위해 황산 서북쪽으로 향한 고려군, 왜구토벌 가능성은?
토벌대장으로 임명된 이성계 장군, 어려운 전투에서는 여러 명을 상대하기 보다는 적장, 즉 지휘관을 무력화시키는 것이 중요한데 당시 왜구 대장 아지발도는 아지(아기) + 바투(몽고어의 용사) “적장(아지발도)의 나이는 겨우 15~16세쯤에···” <고려사절요 우왕 6년(1380)>
- <드라마 정도전> 이성계의 고려군 VS 아지발도의 왜구, 백병전에 능한 왜구의 공세에 고전하는 고려군 “(아지발도가)백마를 타고 창을 휘두르면서 돌진해 오니 향하는 곳마다 쪼개지고 쓰러져 감당할 수 없었으므로···” & “아지발도는 얼굴까지 견고한 갑옷으로 둘러서 화살을 쏠만한 틈이 없습니다.” & “이성계가 활을 쏘아 꼭지를 맞혔는데 투구의 끈이 끊어져 기울어지자 아지발도가 바로 썼다. 태조(이성계)가 즉시 쏘아서 다시 꼭지를 맞히자 투구가 떨어졌고 이지란이 바로 활로 쏘아 죽였다.” <고려사절요 우왕 6년(1380)> 적장 아지발도의 죽음으로 왜구는 쓰러지면서 황산대첩은 고려군의 대승리!
〇 이성계의 신궁 신화
-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과녁의 카메라 렌즈를 맞힌 김경욱 선수, <퍼팩트 골드>라는 신조어를 남겼는데 왜구 대장 아지발도를 제거해 적의 사기를 떨어뜨린 이성계 “태조가 대우전(大羽箭)을 20발 쏘고 이어서 유엽전(柳葉箭)을 그들에게 쏘니··· 모두 그들의 얼굴에 적중했다.” <고려사절요 우왕 6년(1380)>
- 대우전은 큰 깃을 붙인 화살로 깃과 촉이 크고 화살대가 굵은 것이 특징으로 깃이 크기 때문에 단거리에서도 빠르게 궤도의 안정성을 찾을 수 있고 장거리 전에 유리한 유엽전은 촉의 모양이 버드나무 잎과 같은데서 유래하고 깃의 크기가 작은 유엽전은 화살의 깃이 휘어져 있기 때문에 회전하면서 날아가는 것이 특징
- 아지발도의 투구 꼭지를 맞혀 투구를 벗긴 이성계, 투구가 떨어진 틈을 타 아지발도를 죽인 이지란(여진족 출신 장수) 끝이 없는 이성계의 신궁전설, 중요한 것은 조선 건국 후에 기록된 <고려사> & <고려사절요>는 이성계에 대해 윤색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는 <이익주 교수의 분석>
〇 황산대첩의 승리, 이성계의 명성
- 1380년 황산대첩의 승리로 명성이 높아진 이성계가 구국의 영웅으로 등장하는데 바로 이즈음 정도전이 유배에서 풀려나와 이성계의 명성을 듣고 찾아가게 되는 것으로 조선 건국의 주역 이성계와 정도전의 운명적 만남이 이루어진 것이어서 황산대첩의 의미가 큰 것
- 기록에는 “처음에는 적이 우리보다 10배나 많았는데 오직 70명만이 지리산으로 달아났다. 말 1,600여 필과 무수히 많은 병장기를 획득하였으며 시냇물은 무두 붉어져서 6~7일이 지나도록 색이 변하지 않아 사람들이 마시지 못하고 모두 그릇에 담아 오래 가라앉힌 뒤에야 마실 수 있었다.” <고려사절요 우왕 6년(1380)>
- 황산대첩 이후 왜구는?
계속된 왜구의 침입을 토벌작전으로 대응했으나 작전을 바꿔 1389년 2월 병선 100여 척을 끌고 왜구의 근거지 쓰시마정벌에 나선 고려군은 정박해 있는 배 300여 척을 불태우며 승리를 거두고 쓰시마에 포로로 잡혀간 100여 명도 귀환하면서 쓰시마정벌 이후 줄어든 왜구의 침략
- 고려의 쓰시마정벌이 효과를 거두기도 하지만 좀 더 장기적으로는 쓰시마정벌 3년 후인 1392년에 일본의 남북조가 통일이 되고 정치적 혼란이 멈추게 되면서 자국민의 왜구 활동을 금압한 일본, 그러면서 왜구가 일반 백성으로 되돌아가는 것으로 일본 정치의 안정이 왜구가 줄어드는데 영향을 미쳤다는 것과 또 한 가지는 이보다 좀 더 먼저 1388년에 원나라가 멸망하면서 명나라의 통제력이 회복되고 명나라의 왜구에 대한 방어책으로 외국과의 교역 및 해외 도항(渡航)을 금지하는 <해금정책(海禁政策)>이 효과를 거두면서 왜구활동이 줄어들게 되는 것
〇 왜구가 동북아시아에 미친 영향
- 원나라 멸망에 영향을 미친 왜구, 왜구토벌로 군사력이 분산되면서 명나라에 의해 멸망하게 되고 한때는 여몽연합군의 일본 공격 이후 단절된 고려와 일본의 외교관계를 회복하는 계기를 만드는 것
- <이익주 교수의 분석>은 왜구를 고려와 일본의 관계로만 볼 것이 아니라 동북아시아의 국제질서의 변화라는 점에서 해석해야 하는 것이 공교롭게 1388년 원·명이 교체되고 1392년에는 고려·조선의 왕조 교체와 일본의 남북조가 통일되어 한국·중국·일본의 왕조교체에 준하는 변화가 같은 시기에 발생하는데 이것이 서로 연관이 되면서 동북아시아 국제질서의 변화 속에서 왜구의 역할이 무엇이었는지 한번 쯤 의문을 가져볼 필요가 있다는 것
- 왜구 격퇴 과정에서 백성의 신망을 받는 최영 · 이성계 같은 영웅이 등장하고 왜구의 침입으로 인한 국가의 위기가 누군가에게는 영웅이 되는 발판이 되기도 하여 왜구는 단순한 도적이 아니라 동북아시아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위협적인 존재라는 인식이고 무엇보다도 나라의 기강이 무너지면 도적떼에게 마저도 백성은 고통을 받게 된다는 것
- 그간 잊고 있었던 500여 년의 고려 역사를 되찾을 수 있었던 시간으로 고려는 몇 가지 점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들이 있는데 하나는 유교·불교가 공존하는 나라로 사회의 다양성이 살아있는 고려, 또 하나는 넓은 세상과 교류한 나라로 개방성이 살아있는 고려, 그래서 다양성과 개방성은 21세기 현재 우리에게 필요한 가치로 이러한 것들을 고려가 가지고 있었다는 것, 고려 500여 년을 되돌아보면서 조선만이 우리의 역사가 아니라 조선과 또 다른 고려의 500년이 있음을 기억해야 하고 여기에서 조선의 역사가 이어진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해야 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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