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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

mkpark2022 2017. 1. 10. 17:34


                                                                                                                                                                                   



화랑



개요

- 격랑의 삼국시대, 아름답고 화려하게 제 몫을 살면서도 위기의 순간에는 조국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쳤던 청년들, 삼한일통의 중심에선 사내들 화랑을 만나본다.

- 1,500여 년 전 신라사회를 뒤흔든 꽃 같은 청춘들의 등장, 삼한일통의 원대한 꿈을 꾸는 그곳에 화랑이 있었다. “미모의 남자를 택하여 곱게 꾸며 화랑(花郞)이라 이름하고 그를 받들었는데 무리가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삼국사기> 요즈음 꽃 미남의 원조인 화랑

- 수박(手搏)은 주로 손을 써서 상대방을 공격하거나 수련을 하는 전통무예로 고구려 벽화에서 수박도가 많이 등장하지만 경주 용강동 고분군에서 발견된 토우는 수박희를 하는 모습으로 화랑도의 무예가운데 수박 등으로 훈련했을 것으로 추정

 

화랑, 어디까지 알고 있나?

- ‘화랑하면 떠오르는 이미지?

황산벌에서 계백과 맞서 싸운 관창으로 충용스런 전사(戰士) 애국정신의 화신(化身)으로 세속오계는 화랑도가 지켜야 할 행동규범으로 구체적인 기록을 보면 화랑은 외모가 아주 수려했다기보다는 좋은 가문 출신의 남자로서 덕행이 있는 자를 뽑아 화랑이라고 하였다.” <삼국사기>

세속오계(世俗五戒) : 사군이충(事君以忠) 사친이효(事親以孝) 교우이신(交友以信) 임전무퇴(臨戰無退) 살생유택(殺生有擇), 원광법사가 귀산과 추항에게 내려준 세속의 5가지 계율로 이후 화랑도가 지켜야 할 행동규범으로 수용

- 신라 진흥왕이 인재등용을 위해 만든 화랑제도 어떤 보필자와 충신은 화랑으로부터 나왔고 훌륭한 장수와 용감한 왕들은 화랑으로부터 생겼다.” <삼국사기> 화랑에 대하여 높이 평가하고 있는 모습

 

본격적인 화랑 탐구 시간

- <KBS 드라마 화랑> 화랑도는 함께 모여 심신 수련 중인 화랑과 낭도들을 가리키는 말로 진골귀족 화랑 1에 따르는 낭도는 700~1,000 여명이며 15~18로 나이 제한이 있었던 화랑제도

- 또한, 신라 중앙의 고위관리인 화주화랑과 낭도를 지원하고 관리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는데 이들은 화랑과 관련된 사건에 대한 처벌도 담당했던 것

- 신라에서는 한 명의 여성 화랑을 두었다?

처음으로 원화(源花)를 받들었다... 미녀 두 사람 즉 남모와 준정을 뽑고 무리 3백여 명을 모았다. 그 후에 다시 미모의 남자를 택하여 곱게 꾸며 화랑이라 이름하고 받들었다.” <삼국사기>

- 원래 화랑은 여성이었다?

최초의 원화(여성 화랑) 남모준정, 서로를 질투한 두 원화 준정이 남모를 자기 집으로 유인하여 억지로 술을 권하였다. 남모가 취하게 되자 끌고 가 강물에 던져서 죽었다.” <삼국사기> 이것이 발각되어 결국 사형에 처해진 준정, 그리고 원화제도는 폐지되는 것

- 고대의 대부분 여성은 관직 진출이 불가능한데 애초에 여성을 원화로 삼은 이유?

신라 초기 국가제사를 주관했던 여성은 무녀(巫女)의 성격도 포함하고 있으며 무리를 이끌고 산천을 돌며 제사를 지냈는데 여성 사제의 전통에서 비롯된 원화

 

신라 화랑도의 특징

- 전사(戰死)한 화랑으로서의 모습은 언제?

5629, 가야가 반란을 일으키자 토벌에 나선 신라군의 선봉은 5천 기병을 이끈 화랑 사다함 사다함이 전단문에 들어가서 흰 깃발을 세우자 성안의 사람들이 두려워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 “(전공(戰功)을 논할 때)왕이 좋은 토지와 포로 2백 명을 상으로 주었다. 사다함이 세 번이나 사양하였다.” <삼국사기> 이후 함께 죽기로 맹세한 친구 무관랑이 병으로 죽게되자 이를 슬퍼하며 7일 만에 숨을 거둔 사다함

- 참전 당시 사다함의 나이는?

15~16세였던 사다함, 1대 화랑은 설원랑으로 사다함은 2대 혹은 3대 화랑으로 추정 사다함의 계통은 진골에서 나왔다... 풍채가 밝고 빼어났으며 뜻과 기개는 바르고 점잖았다. 사람들이 화랑으로 받들기를 청하였으므로... 그 무리가 무려 1천 명이었고 그들의 환심을 다 얻었다.” <삼국사기 열전 사다함> “사다함은 포로는 풀어 양인(良人)이 되게 하고 토지는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삼국사기> 화랑정신을 실천한 사다함은 친구의 죽음까지 함께 한 것

- 무관랑은 사다함의 낭도로 추정되는데 화랑과 낭도의 관계는 평생을 같이 하는 운명공동체와 같은 역할로 전장에서 낭도는 화랑의 사단으로 임무로 무관랑과 사다함은 화랑과 낭도의 신의를 보여주는 일화

- 고고한 기개의 상징인 화랑, <찬기파랑가>는 신라 경덕왕 때 승려 충담이 화랑 기파랑을 추모하여 지은 향가 & <모죽지랑가>는 신라 효소왕 때 득오가 화랑 죽지랑을 사모하여 지은 향가로 죽지랑은 백제와의 전쟁에서 김유신 휘하 장수로 활약, 기파랑이든 죽지랑이든 향가로 전해진다는 것은 신라인들 사이 흠모와 존경의 대상이었던 화랑

 

화랑의 교육제도

- 참전(參戰)은 화랑의 의무?

의무인 것만은 아닌 기록 왕은 (사다함의) 나이가 어려서 (종군을) 허락하지 않았으나 그가 힘써 청하고 뜻이 확고하여 마침내 명령하였다.” <삼국사기> 자발적으로 참전한 기록

- 화랑도 교육은 어떻게 이뤄졌나?

당시 최고의 지식층인 승려에 의해 3년간의 전인교육(全人敎育)을 받은 화랑 함께 어울려 노래와 춤을 배우는 인성교육 산천을 돌아다니며 심신단련을 하면서 ..예 등을 자연스럽게 습득

- 화랑을 따르는 무리가 낭도인데 이들은 귀족.두품.평민 등 다양한 계층이 참여하여 다양한 신분끼리 어울리며 계층 간 완충 역할을 한 화랑도

- 화랑이 전사(戰士)의 이미지로 굳어진 이유?

신라의 발전사와 같이 한 화랑도, 5세기 약소국이었던 신라6세기 한강 유역을 확보하면서 급성장하는 6세기 진흥왕 때 화랑도를 조직하고 진평왕 때 세속오계 이념이 정착하여 문무왕 때 삼한일통의 전쟁에 화랑이 활약하면서 김유신 등이 화랑이다 보니 전사(戰士) 집단으로 떠오른 것

 

배사향공의 상징, 화랑

- <드라마 대왕의 꿈> 660년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과 황산벌에서 맞붙은 백제의 계백, 신라는 압도적 병력을 앞세워 백제를 네 차례 공격에 나서지만 거듭된 작전실패로 패색이 짙어진다, 이때 등장한 어린 화랑 관창 관창의 아버지 품일이 이르기를... 오늘이 바로 공명을 세워 부귀를 취할 수 있는 때이다, 라고 하였다.” <삼국사기 관창 열전> 홀로 적진 한가운데로 뛰어든 화랑 관창, 그러나 이내 포위돼 붙잡히고 결국 백제군에게 목숨을 잃고 “(신라군이)관창의 목을 보고 분에 받쳐서 모두 죽을 마음을 먹고 북을 치고 고함을 지르며 진격하자...” <삼국사기 관창 열전> 관창의 죽음으로 전의(戰意)를 불태운 신라군

- 대부분의 화랑들은 국가를 위해 개인을 희생하며 멸사봉공(滅私奉公)으로 표현되는 화랑정신, 그러나 멸사봉공은 일제강점기 조선총독이 일제에 충성하라는 뜻에서 강조된 표현이고 조선시대에는 배사향공(背私嚮公) 으로 사()를 배척하고 공()을 향한다는 뜻

- 어린 나이에 맹목적인 애국심으로 바친 목숨, 어른들에게 이용당한 것은 아닐까? VS 화랑정신을 지금의 시각으로만 봐서는 안 되는 것이 삼국이 대립하고 있는 상황에서 국가와 사회에 의해 키워진 엘리트 집단, 그에 걸맞은 시대적 역할을 하는 것도 필요하다는 것

- 아들 관창을 말리지 않았던 아버지 김품일, <최태성 교사의 생각>은 군사기가 떨어진 상황에서 반전(反轉)이 필요했던 신라, 어린 목숨의 희생으로 일어난 분노를 전쟁에 활용됐다는 측면이 강한 것으로 미래를 이끌어야 할 인재, 그래서 더욱 안타까운 화랑의 죽음이라는 팽팽한 의견의 대립

- 당시 아버지와 함께 참전했던 화랑들, 전선(戰線)에서 목숨을 잃는 것이 충이자 효라고 생각했던 것, 그래서 관창보다 앞서 적진에 뛰어든 화랑 반굴의 아버지는 김유신의 동생 김흠춘 김흠춘이 아들 반굴을 불러 신하가 되어서는 충성만 한 것이 없고 자식이 되어서는 효만 한 것이 없다. 위험을 보고 목숨을 바치면 충과 효가 모두 이루어진다.” <삼국사기 관창 열전> 목숨을 걸고 먼저 나가 싸우는 것이 충(사군이충), (사친이효)의 길이요 거기에다 임전무퇴까지 한꺼번에 실행할 수 있는 것

- 629년 낭비성 전투에서 아버지와 함께 참전한 화랑 출신 김유신, 고구려 공격으로 전세(戰勢)가 불리해진 신라, 김유신이 아버지를 찾아가 옷깃을 바루면 깃옷이 바르게 되고 벼리를 당기면 그물이 펴진다. 제가 벼리와 옷깃이 되겠다!” 전쟁에서 핵심 역할을 하겠다는 김유신의 각오 김유신은 곧 말에 올라 검을 뽑아들고 참호를 뛰어넘어 적진을 드나들면서 장군을 베어 그 머리를 끌고 왔다.” & “(신라)군사들이 이를 보고 승기를 타고 분발하여 공격해 성안에서는 두려워 감히 저항하지 못하고 모두 나와 항복하였다.”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

- 화랑은 무훈(武勳)을 세우는 것만이 유일한 출셋길?

그렇지만은 아닌 것이 엄격한 골품제의 신분사회인 신라에서 진골 귀족인 화랑은 참전(參戰)하지 않아도 관리가 될 수 있는 신분, 그렇다면 왜?

- 삼국통일 전쟁기의 신라, 전쟁터에 나가 싸우는 것이 가문, 동료들의 명예를 지키는 일이라는 분위기가 팽배했던 것, 반면 관리등용의 기회가 적었던 두품 출신 낭도들에게 전쟁은 출세의 길로 신라 젊은이들에게 전쟁은 인생을 바꿀 수 있는 기회

 

신라는 지금

- 김유신 장군이 둘째 아들을 죽여 달라고 주청하는데 <드라마 대왕의 꿈> 6728월 나당전쟁이 한창일 무렵, 당나라군과의 석문전투에서 신라군이 대패(大敗)하는데 이 전쟁에 김유신의 아들 김원술은 비장(裨將)으로 참전하였으나 퇴각을 하고 만다. “김유신이 김원술은 왕명을 욕되게 하겠다고 생각될 뿐만 아니라 또한 가훈을 저버렸으니 죽어야 하옵니다. 라고 하였다.”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 이 때 문무왕이 등장하며 만류로 위기를 넘긴 김원술, 하지만 김유신은 부자지간의 연을 끊겠다는 선언을 한다.

- 사실은 김원술이 전사(戰死)하고자 하였으나... 그를 보좌하던 담릉이 그것을 말리며... 만약 죽더라도 이루는 것이 없으면 살아서 후일에 공을 도모하는 것만 못합니다. 라고 하였다.” & “김원술이... 곧 말을 채찍질하여 달려 나가려 하였으나 담릉이 고삐를 잡아당기며 놓아주지 않아서 끝내 죽지 못하였다.” & “김원술은 부끄럽고 두려워 감히 아버지를 뵙지 못하고 시골에서 은둔하였다.“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

김유신 VS 김원술, 죽지 못한 죄?

<전덕재 교수의 생각>시대적 상황을 고려해도 김유신의 태도는 과도한 면이 있는 듯 한 것이 원술이 전쟁에 나갈 때 비장의 직위였는데 비장은 부사령급 대왕이 원술은 비장인데 혼자에게만 무거운 형벌을 내릴 수는 없다며 곧 사면하였다.”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

- 하지만 김유신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 당시 석문 전투에 참전했던 70세의 아진함 아진함 일길간이 상장군에게 나는 나이가 이미 일흔이니 능히 얼마나 더 살 수 있겠소? 지금이 무릇 내가 죽을 때요 라고 말하며 곧 창을 비껴들고 적진으로 돌격하여 전사하였다.”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 그리고 아진함의 아들도 함께 전사(戰死)를 하게 되는 상황이었기 때문

- 신라가 화랑도 정신을 중요시 한 이유는 화랑도는 백성들이 보고 배울 수 있는 모범으로 전쟁터에서 보인 신라 지배층이 보인 솔선수범이지 않았나? 당시 장수이자 정치가였던 김유신의 입장에서 아들의 행동은 국정운영의 리더십에 치명타를 입을 수도 있는 상황으로 오늘날에도 시사점을 던져주는 김유신 부자의 일화

- 영국 왕실의 노블리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로 해리 왕자가 10년 간 군복무를 하면서 아프간 최전선에서 복무하는 모습에 매스컴에 소개되면서 많은 화제를 남겼는데 1,500여 년 전 신라에 존재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가치로 의미가 깊은 것

- 이후 김원술의 행방은?

결국 아버지와 화해를 못하게 되는데 아버지 김유신의 사후 어머니를 뵈러 온 김원술 김원술의 어머니가 너는 이미 선친에게 아들노릇을 하지 못하였는데 내가 어찌 그 어미가 될 수 있느냐? 라고 말하며 마침내 만나주지 않았다.”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

- 김원술 본인도 이를 씻기 위해 열심히 살았던 듯, 675년 매소천성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운 김원술 김원술은 부모에게 받아들여지지 못한 것을 뿐하고 한스러워 하여 벼슬을 받지 않고 일생을 마쳤다.”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 죽지 못한 자의 슬픔!

- <전덕재 교수의 분석>은 당시 신라 사회 내의 가치를 보여준 김유신 김원술 부자 사례, 삼국 중 가장 약소국이었던 신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국을 통일하게 되는데 그 원동력 중 하나는 화랑도와 그들을 지도했던 지배층의 솔선수범의 정신이 아니었나 하는 것

 

그날의 소회, 화랑이란?

- 사회가 지켜야 하는 공통의 가치가 있던 시절, 그때 젊은이들은 이토록 아름다웠구나! 믿었던 가치들이 무너진 요즘, 그 피해까지 짊어져야 하는 젊은 세대들, 청년들이 화랑처럼 빛날 수 있도록 가치를 제대로 세우는 그날이 오기를...

- 대에 따라 달라지는 화랑을 보는 관점, 과거에는 국가에 대한 충성심만으로 강조된 화랑도였지만 이제는 사회지도층들의 역할과 책임감으로 바라봐야 해서 화랑은 노블레스 오블리주이다.”

- 화랑이란 낙화(洛花) !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무성한 녹음과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위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이형기, 낙화 중> 아름답고 화려하게 제 몫을 살아가지만 국가자신명예를 위해서라면 배사향공의 정신을 발휘할 줄 아는 꽃다운 존재 화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