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 이성계와 손을 잡다.
〇 개요
- 1388년 최영과 이성계가 이인임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손을 잡는다! 하지만 이성계는 훗날 고려를 멸망시킨 장본인, 고려의 마지막 충신 최영과 이성계의 숙명적 대결
- 우왕 옹립 후 권력을 독점한 이인임 세력 “염흥방의 노비가 전 밀직부사 조반이 백주에 소유하고 있던 토지를 빼앗았다.” <고려사 열전 임견미> 이인임 세력의 국정농단에 흉흉해진 민심에 최영은 특단의 조치를 내리는데 우왕과 최영의 밀담! 이 때 등장하는 뜻밖의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이성계였다!
- 이인임 제거에 나선 최영과 이성계 “임견미와 염흥방을 처형하고 이인임을 경산부에 안치시켰다.” <고려사 열전 임견미> 14년간 권력을 잡고 있던 이인임 시대를 종식시킨다.
- 이인임 시대를 종식시킨 최영과 이성계의 연합작전, 고려의 마지막 명장 최영 VS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 이들의 생애를 보면 둘의 관계는 라이벌이 아니다?
최영은 1316년생 VS 이성계는 1335년생으로 19살의 부자지간의 나이 차로 당시 최영은 전국의 군사를 총지휘하는 위치이고 이성계는 동북면의 군사를 지휘하는 도원수의 관직으로 최영의 지휘를 받던 여러 도원수들 중 한명 “크고 작은 87차례의 전투를 치르면서 적의 급소를 치고··· 하늘이 용맹과 지혜를 내려준 사람이 아니라면 어떻게 이렇게까지 될 수 있겠습니까?” <목은집> 당시 최영은 구국의 영웅으로 살아있는 전설, 이에 비해 이성계는 신흥 장수 정도
〇 이성계와 최영의 연합
- 어떻게 가능?
<드라마 정도전>에서는 왕과 최영의 밀담장소에 이성계가 등장하여 제안하는 것으로 나오는데 이는 극적 효과를 위한 설정이고 최영이 이성계를 끌어들였을 것이라는 <신병주 교수의 분석> “우왕이 최영과 밀담을 나눈 뒤 임견미와 염흥방을 처단하고··· ” <고려사 열전 최영>
- 최영이 굳이 이성계와 손을 잡은 이유?
이성계가 각별한 점은 당시 원수(元帥)는 한 지방의 군사를 통솔하는 일을 맡아보던 장수인데 사병적(私兵的) 성격이 강했던 이성계의 동북면 군대는 강한 충성심과 조직력으로 전투력이 탁월!
- 또한 황산대첩은 이성계가 전라도 지리산 근방의 황산에서 왜구를 격퇴하는 전쟁 “최영이 이성계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공이 아니면 누가 능히 이일을 하겠습니까? 공이 아니면 나라가 장차 누구를 믿겠습니까?” <조선왕조실록 태조 총서> 황산대첩 이후 무장으로서 능력을 인정받은 이성계! 이를 계기로 두 사람이 손을 잡게 되는 것
- 최영과 이성계 만남의 또 다른 기록은 해풍군 전투에서 왜구와 맞서 싸웠던 최영 “왜적들은 늘 두려워할 사람은 오직 머리가 허옇게 센 최영뿐이라고 하며···” <고려사 열전 최영> 그래서 왜구는 최영을 집중공략하고 있어 어려움을 겪는 사이에 이성계의 기병이 등장 “태조(이성계)가 날랜 기병을 거느리고 바로 나아가서··· 적군을 크게 부수었다.” & “태조가··· 단 한 번의 화살을 쏘니 다섯 마리 까마귀의 머리가 모두 떨어졌다.” <조선왕조실록 태조 총서>
- 이성계에게 최영과의 연합은 출세의 기회?
1356년 쌍성총관부에서 고려로 귀부해온 이성계 가문으로 고려 중앙 정계에 아무런 연고가 없던 이성계, 권력욕 VS 구국의 일념? 결과만 놓고 본다면 권력욕이 있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 이인임을 제거한 뒤 관직은 최영이 문하시중이고 이성계가 수문하시중으로 당시 문하시중은 최고의 관직(책임 총리)이고 수문하시중은 두 번째 관직
- 중요한 것은 이성계가 고려로 들어온 다음 홍건적이나 왜구가 아닌 고려인을 상대로 군사를 일으킨 것은 최초로 이인임 제거는 이성계가 고려 정치에 관여한 첫 번째 사건! 하지만 최영과 이성계가 아직까진 정치와 관여되지 않았고 부정부패 세력을 척결하자는 순수한 마음이 우선이었을 것이라는 <이익주 교수의 분석>
〇 명나라의 철령 이북 땅 요구
- 최영과 이성계 사이를 뒤흔드는 사건 <드라마 정도전> 고려에 철령 이북 땅을 요구한 명나라 “명나라 황제가 말하기를 철령 이북과 이동과 이서지역은 애당초 개원로(開元路)에 속했던 것이니 그 관할 하에 있던 군인과 민간인도 요동에 소속시키도록 하라” <고려사 우왕 14년(1388)> 명나라의 영토 요구에 충격에 빠진 고려 조정, 그리고 외교적 협상을 주장한 이성계 VS 요동정벌을 주장한 최영
- 명나라가 요구한 철령 이북 땅은 어디?
쌍성총관부는 몽골이 고려의 화주(함남 영흥) 이북을 직접 총지휘하기 위해 설치했던 관부인데 1356년 공민왕의 반원운동으로 쌍성총관부를 수복하면서 북쪽으로 더 올라가 함북 길주까지 진출하여 압록강 중류까지 고려 영토에 포함시켰는데 공민왕 때 수복한 영토를 모두 요구한 명나라
〇 요동정벌 필요한가?
- 쌍성총관부 지역은 이성계의 고향으로 이성계의 부 이자춘의 내응으로 쌍성총관부를 수복할 수 있었던 고려, 명의 철령 이북 땅을 요동에 귀속시키겠다는 통보에 충격에 빠진 고려
- 명나라의 요구에 대한 고려조정의 의견?
최영은 고려 영토를 빼앗으려는 명에 맞서 요동을 공격해야 한다는 주장 VS 이성계는 철령 이북 땅이 우리 땅임은 이견이 없지만 명에 사대하는 지금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칠 수는 없는 것으로 시기적(時期的)으로도 그렇고 외교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주장 “장마철이라 활을 붙여놓은 아교가 녹고 대군이 전염병에 걸릴 것입니다.” & “이성계가 말하기를 온 나라의 군사들이 원정에 나서면 왜적이 허점을 노려 침구할 것입니다.” <고려사 우왕 14년(1388)>
- “어떤 사람이 이성(泥城)으로부터 와서 말하기를 근자에 내가 요동에 갔었는데 군사가 모두 오랑캐를 치러 가고··· 성중에는 다만 지휘하는 자 한 명이 있을 뿐이니 만일 대군이 이르면 싸우지 않고 항복을 받을 것입니다. 최영이 크게 기뻐하며 물건을 후하게 주었다” <고려사 우왕 14년(1388)> 명나라에서 철령위 설치를 통보해 온 상황에서 팽팽하게 맞선 양측의 주장
〇 최영과 이성계, 대립하다!
- 이성계가 이토록 강력하고 오랜 시간 자기주장을 하는 것은 처음으로 무장(武將)에서 정치가로 변신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 특히 이성계의 요동 4불가론 ① 여름철에 군대를 발해손 안 된다 ② 왜구의 침략 우려 ③ 장마철 질병 우려, 이 세 가지는 군인으로써의 판단인 것, 그런데 ④ 이소역대(以小易大)는 안 된다는 것
- 이소역대 불가는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를 수 없다는 것으로 이는 성리학자들이 주장하는 명분론으로 군인이었던 이성계가 쉽게 생각할 수 없는 내용으로 여기에서 이성계가 신진사대부인 정몽주·정도전 등과 사전 교감이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성계를 중심으로 새로운 고려를 꿈꾸는 세력들이 결집하기 시작했다는 것
- 최영의 판단으로 당시 국제정세를 보면 명에게 쫓겨 북쪽으로 피신한 원나라 “최영이 배후(裴厚)를 원나라로 보내 서로 도와 요동을 협공하기로 맹약을 맺었다” <고려사 열전 최영> 요동이 비었다는 정보와 원나라와의 협공 카드 등 최영의 요동 정벌의 주장 일리가 있는 것으로 요동정벌의 이유로 이성계를 제거하기 위한 최영의 음모? 그렇지 않다는 것, 최영의 음모론은 요동 정벌 실패를 전제로 한 것으로 요동 정벌이 실패할 경우 최영뿐만 아니라 우왕까지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는 것이 <이익주 교수의 분석>
- 최영 VS 이성계 갈등의 시초는 이인임 세력의 처결문제로 이인임 세력 모두를 축출하자는 최영 VS 정권을 잡은 지 오래되어 모두 이인임 세력인데 모두를 축출하면 소는 누가 키우느냐는 것! 전격 숙청론 VS 포용론의 대립
- 이는 둘의 성향의 차이! 최영의 강인한 품성 “출정길에 군졸이 이탈하면 곧바로 참수하여 조리돌리고···” & “최영의 조카사위가 살인을 저지르자 헌사로 이동시켰다. 도당에서는 최영과의 연고 때문에 죄를 경감시켜주려고 순위부로 이감했다. 그러자 최영이 노하여 죄 없는 사람을 죽였으니 당연히 헌서에서 재판을 받아야 한다며 헌사로 돌려보냈다.” <고려사열전 최영> 융통성이 없어서 오히려 적이 많이 생길 수 있는 성격
- 반면 이성계는 “휘하의 사람들을 예절로 대접했으며 평생에 꾸짖는 말이 없었으므로 여러 장수와 휘하 사람들이 모두 그에게 소속되기를 원하였다.” <조선왕조실록 태조 총서> 최영의 강경하고 권위적이며 보수적 성향! VS 이성계의 온건하고 민주적이며 진보적인 성향!
〇 이성계, 위화도 회군 결정
- <드라마 정도전> 1388년 4월 18일, 고려 요동 정벌군 출정! 계속된 장마로 행군에 어려움을 겪고 “좌·우도통사가 상언하기를 신들이 뗏목을 띄워 압록강을 건너는데 앞에 큰 내가 있어 비가 와 물이 넘치니···” <고려사 우왕 14년(1388)>
- 더 이상 건너지 못하고 압록강 중간 위화도에 주둔하고 있던 사이 긴급회의가 소집되고 회군을 건의하는 우군도통사 이성계와 이를 반대하는 좌군 도통사 조민수 “이성계가 회군(回軍)을 청하는 글을 올리자··· 우왕 역시 허락하지 않고 진군을 독촉했다.” <고려사열전 최영>
- 결국 이성계 장군은 위화도에서 회군을 결정, 일각에서는 출병 전부터의 회군을 결심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게 되는데 위화도 회군 이후 고려의 운명은?
- 위화도 회군, 이성계는 왜?
군인이 작전 상 후퇴할 수는 있지만 왕명도 없이 회군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 군법의 위엄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이성계, 출정 전부터 회군 결심을 했을 것이라는 <류근 시인의 생각> 최영의 구상은 기습작전으로 한 달 안에 요동을 공격하는 것, 하지만 고려군의 행군 일정을 보면 서경에서 위화도까지 19일이 소요되고 또 위화도에서 15일을 지체하다 회군하여 9일 만에 개경에 도착하는 것으로 회군은 사전부터의 기획(?)
- 당시 군심을 파악한 이성계, 당시의 병사들은 주로 농군들로 여름 철 징병으로 인해 중단된 농사로 불만이 쌓였을 병사들, 또한 장마로 도강(渡江) 불가능 등 요동 정벌의 현실적 한계에서 결단을 내린 것이지 처음부터 의도한 것은 아니라는 것
- <이익주 교수의 분석>은 이성계가 처음부터 회군할 목적이었다면 위화도까지 가지 않았을 것이고 여러 차례 우왕에게 회군을 요청한 이성계, 회군 요청이 거부되자 결국 왕명 없이 회군을 선택한 것으로 출병하는 과정에서 결정한 일이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라는 것
〇 위화도 회군, 최영의 패착
- “최영이 말하기를 지금 대군이 길에 올랐는데··· 신이 가서 독려하겠습니다, 라고 하자 우왕이 말하기를 경이 가면 누구와 더불어 정사를 하겠는가? 하였다.” <고려사절요 우왕 14년(1388)> 우왕의 트라우마는 1374년 공민왕 시해 당시 개경에 최영이 없었던 것 “우왕이 말하기를 선왕께서는 경이 남쪽을 정벌하러 갔기 때문에 해를 당하셨다. 내가 어찌 하루라도 경과 한 곳에 있지 않겠는가? 라고 하였다.” <고려사절요 우왕 14년(1388)> 우왕이 자신의 안위를 위해 최고지휘관인 최영의 출정을 막다니···
- 팔도도통사로 출정군의 총지휘관이었던 최영, 그리고 좌군도통사는 조민수이고 우군도통사는 이성계인데 정작 팔도도통사가 참석을 못하고 조민수에게 출정군의 지휘권을 맡겼던 것인데 위화도에서 조민수가 이성계에게 설득을 당했든지 굴복을 당했든지 이성계와 함께 회군을 단행한 조민수!
-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당시 요동 출정 좌·우군의 규모는 4만여 명으로 고려군의 전군이어서 조민수가 회군을 동의할 경우 실패가능성은 없는 것으로 조민수를 설득 “만약 상국의 국경을 범하여 천자에게 죄를 얻는다면 종사(宗社)·생민(生民)의 재화(災禍)가 즉시 이르게 될 것이다.” & “임금 측근의 악인을 제거하여 생령(生靈)을 편안하게 살지 않겠는가?” <고려사 우왕 14년(1388)>
〇 위화도 회군, 이성계와 신진사대부의 합작품?
- 이성계 회군의 명분은 “반역이 아니라 사직을 위한 것!”을 내세우는데 여기에는 신진사대부들의 조언이 있었을 것이라는 <이익주 교수의 분석>으로 실제로 위화도 회군 성공 이후 정도전을 성균관 대사성에 조준을 사헌부 대사헌에 임명하고 성균관과 사헌부를 통해 고려 개혁을 주도하는 것으로 위화도 회군은 이성계와 신진사대부들의 합작품이라고 볼 수 있는 것
- 출병 전 이성계의 이중심리?
요동정벌이냐? 회군이냐? 출병 전 두 마음을 품고 갔는데 막상 위화도에 도착하니 요동정벌이 불가능하다 판단하고 회군을 결정한 듯하다는 <최태성 교사의 생각> & 처음부터 요동정벌을 반대했던 이성계, 위화도 회군은 왕명을 거역한 반란이지만 더 큰 희생을 막겠다는 명분에서는 타당하게 해석될 수도 있다는 <신병주 교수의 생각>
〇 위화도 회군 이후 최영과 이성계
- <드라마 정도전> 1388년 6월 개경에 당도한 이성계 군대가 성안으로 진입하자 정예군을 앞세워 방어에 나선 최영, 그리고 전세(戰勢)가 불리해지자 최영은 후퇴하고 전투를 승리로 이끈 이성계 “우왕이 최영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이별하니··· 최영이 우왕에게 두 번 절하고···” <고려사 우왕 14년(1388)>
- 이성계 군대에 체포된 최영 “태조(이성계)가 말하기를 이 사변은··· 백성이 힘들게 되어 원망이 하늘에 이른 까닭에 부득이했던 것입니다.” <고려사 우왕 14년(1388)> 마침내 최영이 체포됐다.
- 이성계가 굳이 최영을 체포한 이유?
원칙주의자 최영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았을 이성계, 만약 이성계가 먼저 최영을 체포하지 않았다면 최영은 왕명을 어기고 회군한 이성계를 처형했을 것
〇 명나라의 철령 이북의 요구 결과는?
- 철령 이북 땅은 어떻게 되었나?
요동 정벌에 나서기 전(前)에 박의중을 보내 명나라 설득에 나선 고려, 이런 상황에서 1388년 4월 18일 요동정벌의 출정에 나서는데 마침 같은 날 명 조정 “황제가 말하기를 몇 개의 주(州)가 고려가 말 한대로라면 모두 귀속시켜 주어야 할 것 같다.” <명 태조실록 홍무 21년(1388)>
- 명의 태도가 변한 것도 모르고 고려에서는 요동정벌을 강행하자 명에서도 이 소식을 듣고 고려를 공격해야 한다는 계획이 수립, 그러다가 회군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 공격을 중지한 명나라는 결국 철령 이북 땅을 포기하는 것 <이익주 교수의 분석>은 고려와의 전쟁은 명나라에도 부담이었지만 이성계가 회군함으로써 명나라의 고민이 해결된 셈!
- 원(元)과의 협공으로 요동을 정벌할 가능성?
4월이면 원나라는 사실상 멸망한 상태로 협공카드는 효력이 없는 것, 하지만 최영이 직접 출정했다면 요동정벌에 성공할 수도 있겠지만 문제는 너무 많은 것을 들여 사후 관리하는 것이 문제였을 것이라는 <이익주 교수의 분석>
- 사실은 1370년 요동을 공격해 동녕부를 점령했던 이성계, 하지만 당시의 현실적 한계로 고려인만 추려 데려오고 동녕부를 고려의 영토에 편입시키지 않는 것, 명나라의 국력이 점점 강성해지는 상황에서 요동 정벌에 성공하더라도 지키는 건 어려웠을 것, 그렇다면 당시 최영이 국제정세에 다소 둔감했던 것은 아닐까? 또한 요동 공격을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면 명나라가 철령 이북 땅을 쉽게 포기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이익주 교수의 분석>
- <드라마 정도전> 1388년 12월 최영에게 사형이 선고 “처형을 받으면서도 말씨나 얼굴 빛이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고려사 열전 최영> “최영이 만약 내가 어떤 탐욕의 마음을 가졌다면 나의 무덤에 풀이 날 것이요 그렇지 않다면 풀이 나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임하필기> 73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 고려의 영웅 최영의 씁쓸한 최후!
〇 최영의 마지막
- 죽으면서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한 최영! 최 씨 앉은 자리엔 풀도 나지 않는다! 최 고집은 최영장군의 일화에서 유래,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최영장군의 묘 실제로 풀이 나지 않았는데 “최영의 무덤은··· 붉은 흙이 드러나서 단 한 줌의 풀도 없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이를 붉은 무덤이라고 부른다.” <임하필기> 1970년대 이후로 풀이 나기 시작했다고~
- 한 번의 선택으로 역사적 평가가 달라지기도 하는데 <이익주 교수가 본 최영의 문제>는 반대하는 중론을 물리치고 요동 공격을 독단적으로 결정한 최영, 이것이 나라 전체를 전쟁터로 만들 수 있는 중대한 문제로 윤 소정이라는 사람이 최영을 평하는데 “공(功)은 한 나라를 뒤덮었으나 죄(罪)는 천하에 가득 찼다.” <고려사 열전 최영> 촌철살인으로 최영에 대한 평가에 공감이 가는 부분
- 최영의 죽음에 슬퍼한 백성들 “(최영이)죽은 날에 개경 사람들이 저자를 파하였으며··· 소식을 듣고··· 모두 눈물을 흘렸다. 시신이 길가에 버려지자 길가는 사람들이 말에서 내렸다.” <고려사열전 최영>
- 한 인물에 대한 평가는 사후 평가도 살펴봐야 하는 것으로 연산군 시절 국정을 농단한 인물 장녹수 “장녹수를··· 베니 사람들이 다투어 기왓장과 돌멩이를 그의 국부에 던지면서 일국의 고혈이 여기에서 탕진됐다고 하였는데··· 잠깐 사이에 돌무더기를 이루었다.” <연산군일기 1506년 9월 2일> 이러한 평가를 대비해 봐도 최영장군은 국민들로부터 인정을 받는 죽음이었다고 볼 수 있는 것으로 최영은 역사 속에서는 패했지만 민중들 사이에서는 꼭 패자만은 아니었다는 것!
〇 역사 속에서 승자와 패자, 그 결정 이유
- 최영은 왜 실패했고, 이성계는 왜 성공했나? 이성계는 유턴이 있었고 최영에게는 직진만 있었다. & 이성계에게는 새로운 시대에 대한 비전과 철학, 신진사대부라는 동지가 있었고 최영은 국가에 대한 충정은 있었으나 시대의 변화를 감지하지 못했다
- 둘 다 훌륭한 분들이지만 최영에게 아쉬운 것은 개인은 청렴했으나 개인의 청렴함이 사회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생각하지 못했다는 것으로 최영의 죽음 이후 멸망의 길을 걷게 된 고려, 최영은 고려의 마지막 버팀목이었지만 국제적 감각 · 사회변화에 대한 안목이 없었다는 것이 오히려 안타까운 일이라 할 수 있는 것
- 어떠한 권력도 백성과 역사보다 오래 살아남지 못한다는 것과 역사는 지식보다 의식이 중요하다는 것 & 역사는 재미와 지식 이상의 것, 가치관 · 생각하는 방법 · 현실인식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올바른 역사를 공부하는 게 중요하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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