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임, 공민왕 시해사건을 수사하다
〇 개요
- 고려 말 최고의 권력자로 온갖 부정부패를 저지르며 국정을 농단한 이인임의 실체는?
<드라마 정도전> 왕위를 이을 후사가 없던 공민왕 “왕은 후사가 없음을 염려하여 홍륜··· 에게 여러 비(妃)를 강제로 욕보이고 아들을 낳게 하여 자식으로 삼고자 하였다.” <고려사 세가 공민왕 21년>
- 마침내 왕비가 회임을 하자 공민왕은 진실을 은폐하기 위해 홍륜을 제거하려하지만 한발 앞서 1374년 9월 공민왕의 침전을 기습한 홍륜은 왕을 시해하고 태후는 몇몇 대신에게 왕의 시해범을 찾게 하고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공민왕 시해사건! 그 수사의 중심에 이인범이 있었다.
〇 이인임, 국왕시해사건의 범인을 잡다
- 고려 말 14년간이나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 이인임 <드라마 정도전>에는 공민왕시해사건의 현장에 제일 먼저 도착한 사람이 이인임으로 나오지만 이는 작가의 상상력에서 나온 것이고 실제 기록은 “반적이 외부로부터 침입했다! 라고 외쳤으나 호위 군사들은 다리를 떨면서 감히 움직이지 못하였으며 재상과 집사(執事)들도 변란의 소식을 듣고 아무도 오지 않았다.” <고려사 열전 홍륜>
- 그럼 시해된 공민왕을 처음으로 발견한 인물은?
환관이 최초로 발견하여 공민왕의 어머니 명덕태후에게 알리고 “새벽에 태후가 와서 왕의 죽음을 비밀에 부치게 하고··· 경복흥 · 이인임 · 안사기 등을 불러 역적의 토벌을 비밀리에 논의했다.” <고려사 열전 홍륜>
- 이인임 혼자서 수사를 한 것은 아니지만 범인색출에 가장 큰 공을 세운 인물로 처음에는 원(元)과 관련된 인물을 의심한 이인임 “이인임이 병풍과 최만생의 옷에 혈흔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최만생을 순위부에 가두고 국문해 그 진상을 전부 알게 되었다.” <고려사 열전 홍륜>
- 10.26 사건 당시 합동수사본부장 전두환의 역할과 비슷했던 이인임, 그리고 최측근 자제위 손에 시해된 공민왕! 권력핵심부가 저지른 국가 지도자의 피살은 서로 두 사건이 오버 랩 되는 부분이다.
- 음서로 관직에 진출한 이인임은 관직 서열 2위인 수시중까지 승진하면서 정치적 감각이 뛰어났던 인물, 하지만 그 능력을 자기 이익을 위해서만 쓴 것이 그의 한계, 그래서 <고려사>에도 간신열전에 실린 이인임 “달콤한 말과 하찮은 은혜로 사람들을 우롱하여 모두의 환심을 사고···” <고려사 열전 이인임>
- 실제 기록에도 언변이 뛰어났던 이인임 “이인임이 글을 주어 보내면서 가서 이 글만 바치고 다른 말을 하지말라! 그러면 주상께서 깨닫고 반드시 회군하라고 분부할 것이다.” <고려사 열전 이인임> 그런데 실제로 이렇게 되는 것을 보고 동료들 사이에도 이인임의 능력은 상당히 인정받는 것으로 관료로서 승승장구하며 공민왕시해사건 이후 관료에서 정치가로 변신하게 된다.
〇 이인임, 우왕을 옹립하다
- 1374년 9월 공민왕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후계문제로 곤란에 빠진 고려 조정 “태후와 경복흥은 종친(宗親)을 옹립하려 하고 이인임은 우왕을 옹립하려고 해 결론을 내지 못했다.” <고려사 열전 신우> 강녕대군 우를 옹립하려 한 이인임, 하지만 태후는 우를 후계로 인정하지 않는다.
- 생전에 공민왕이 강녕대군 우를 후사로 삼았다고 주장하는 이인임, 그래서 이인임의 의도대로 즉위하게 된 우왕 “공민왕은 근신들에게 과거 신돈의 집에 가서 그 집 여종을 가까이해 아들을 낳았으니 그 아이를 잘 보호하라고 당부했다.” & “왕이 수시중 이인임에게 원자가 있으니 나는 아무 걱정이 없소 라고 말했다.” <고려사 열전 신우>
- 하지만 그 말을 들은 건 이인임뿐으로 우왕을 옹립하기 위해 지어낸 말은 아닌지? 공민왕이 정말 우왕을 후계자로 생각했다면 일찌감치 세자로 옹립했어야 한다는 <류근 시인의 생각> “공민왕이 모니노(우왕)를 세자로 삼으려고 공부를 시키자고 요청했으나 태후는 조금 더 커서 공부를 시키더라도 늦지 않소이다! 라며 반대했다.” <고려사 열전 신우> 우왕이 정말 공민왕의 아들인지 의심했던 명덕태후
- 아마 계속해서 우왕의 출신에 대한 의심이 있었고 공민왕도 비록 세자책봉은 실패했지만 우왕을 후계자로 만들려한 준비 ① 우를 강녕부원대군으로 책봉 ② 스승을 붙여 후계 교육 ③ 우(禑)를 궁인 한씨의 소생으로 공표
- 우의 생모는 신돈의 첩 반야, 하지만 또 다른 우왕의 탄생비화?
“반야가 임신해 만삭이 되자 신돈이 친구인 능우의 모친 집으로 보내 해산하게 했는데 돌도 못 채우고 아이가 죽어버렸다. 신돈의 책망을 겁낸 능우가 죽은 아이와 생김새가 비슷한 아이를 찾다가 이웃집 대졸(군인)의 아이를 몰래 훔쳐내 다른 곳에 숨겨 두었다.” <고려사 열전 신우> 기록에는 옆집 아이가 모니노가 되고 우왕이 되는 것으로 <이익주 교수의 분석>은 우왕 출신에 대한 고려사의 기록은 조선시대 사람들이 우왕을 깎아내리기 위해 만들어낸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
- 출생의 비밀부터 정통성이 취약한 우왕을 이인임이 옹립하려 한 이유?
이인임의 계산 ① 어리다는 것 ② 정통성이 취약 ③ 외척이 없음, 그래서 왕위에 옹립하면 정국 주도권을 이인임이 장악할 수 있는 것
- 정말로 막장의 아침 드라마 같은 현실, 우왕 2년 궁궐을 찾아온 우왕의 생모 반야 “반야가 밤에 남몰래 태후궁에 들어가 실은 내가 주상을 낳았는데 어째서 한씨를 모후로 삼았습니까? 하고···” & “반야가 새로 건축한 중문을 가리키며 하늘이 내 억울한 사정을 안다면 이 문이 반드시 무너지고 말 것이다. 마침 사의(司議) 허시가 들어서자마자 문이 저절로 무너졌으며···” & “결국 반야를 임진강에 던져 익사시키고···” <고려사 우왕 2년>
- 이인임이 권력에 더 집착했던 이유?
여기에는 이인임의 출신 배경에서 볼 수 있는 것으로 이인임 혼자가 아니고 권문세족을 대변하기 시작한 이인임, 신진사대부와 같이 개혁정책을 추진한 공민왕 그래서 개혁의 대상이 된 권문세가들은 공민왕의 정책에 대해 반감을 가졌으나 우왕 즉위 후 권력을 되찾으려 한 권문세족들의 중심에 이인임이 있었던 것!
- 또한 공민왕 때 겪었던 경험의 학습효과로 개혁을 명분으로 신하들을 휘둘렀던 공민왕, 신하들의 입장에서는 불안했을 것으로 이인임은 이렇게 잡은 정국 주도권을 다시 왕에게 넘기고 싶지 않았을 것이라는 <최태성 교사의 생각>
- 우왕 즉위를 반대한 세력은 없었나?
많이 있었고 우왕의 출신을 의심한 사람들의 반대가 심하고 우왕 옹립반대 여론이 가라앉지 않은 상황에서 우왕 집권에 결정적 힘을 실어준 인물이 최영!
〇 이인임, 최영과 손을 잡다
- <드라마 정도전> 최영은 부월(斧鉞, 임금의 권위를 상징하는 도끼)을 우왕에게 바치면서 충성을 맹세하는데 고려시대 충신 최영과 간신 이인임의 결합! 드라마에서는 최영은 우왕의 즉위를 마지못해 인정하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 드라마와 역사적 사실의 차이?
매우 피곤하게 묘사됐는데 우왕 즉위 당시 제주도 원정 중이었던 최영, 원(元)이 제주도의 말을 관리하기 위해 파견된 몽골인들 <목호(牧胡)>가 반란을 일으키자 1374년 7월 제주도 복호들의 반란을 진압하러 갔던 최영은 1374년 10월에 귀환해보니 이미 공민왕은 시해되고 새로운 우왕이 즉위한 상황!
- 최영이 우왕 즉위를 받아들인 이유?
최영 등 몇몇 무신들에게 유리했던 우왕의 즉위, 공민왕의 집권기에 홍건적의 난 · 왜구 침입 등의 변란으로 무신들의 역할이 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신세력을 견제하면서 개혁을 통해 이들을 제거하려 했고 신돈이 개혁을 할 때 가장 먼저 한 일이 최영을 경주 지방관으로 좌천시킨 것이어서 공민왕의 개혁에 불만이 컸던 최영에게 이인임의 개혁의 흐름을 중단시키는 정책은 최영과 이인임의 정치적 이해관계가 일치할 수 있었던 것
- 개혁 중단에 대한 사대부들의 반응?
1374년 11월 명(明) 사신이 고려 호송관에게 피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지는데 범인은 북원(北元)으로 피신하고 이 사건이 고려-명 관계에 미칠 영향은?
고려 조정은 긴급대책회의를 열고 조정대신들은 명(明)에서의 의심이 우려되는 상황으로 북원에 범인 압송을 요구해야 한다고 주장을 하며 신진사대부들은 명(明)을 자극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사이에 이인임은 “북원과의 외교 재개”를 제안한다.
- 공민왕이 친명반원 외교정책을 정한 고려는 원과의 거리를 두고 있었는데 이인임은 공민왕의 정책과 반대로 북원과 접촉을 시도하자 명 사신 피살 사건에 이인임이 연루됐다는 설도 나오면서 공민왕 시해에 따른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서 사신을 죽여 입을 막았다는 것
〇 이인임의 위기, 명 사신 피살사건
- 명 사신 살해 사건의 진실?
이인임이 사주한 것으로 기록된 <고려사> 하지만 이 시기 고려사를 기록한 사람들은 조선 건국 세력으로 이인임이 배후라고 왜곡 기록했을 가능성도 있다는 것 <이익주 교수의 분석>은 이인임이 명 사신 살해를 사주했을 가능성은 낮고 이인임이 북원과의 외교를 재개하려 하자 그것을 막기 위해서 사대부들이 만들어낸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
- 사대부들이 북원과의 외교를 강하게 반대한 이유?
친명반원의 공민왕 외교정책을 계승한 것이 아니기 때문으로 원(元)은 몽골족이고 명(明)은 한족(漢族)으로 중화(한족)에 사대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 것이고 또 한 가지는 명과 북원이 대립하고 있지만 명이 북원에게 승리할 것이라는 신진사대부들의 정세인식으로 패배할 북원과의 외교재개는 위험하다고 판단한 것
- <드라마 정도전> 이인임이 북원 사신 영접을 추진하자 정도전 등 사대부들은 이를 반대하지만 오히려 이인임은 정도전에게 북원 사신 영접을 지시하자 “정도전은 경복흥 집으로 가서 내가 (북원)사신의 머리를 베어 오든지 그렇지 않으면 명나라로 묶어 보낼 것이오! 라고 대들었다.” <고려사 열전 정도전> 북원 사신 접대를 거부한 정도전은 나주로 유배되고 유배지에서 백성들의 참상을 목격하면서 역성혁명의 원동력을 얻는 것
- 이러한 장면들이 <드라마 정도전>에서는 격하게 표현하지만, 사실은 정도전을 유배 보낼 때 염흥방이라는 정도전의 친구 “염흥방이 내가 시중에게 말씀드려 화가 어느 정도 풀렸으니 (유배)가지 말고 잠시 기다리라는 전갈을 보냈다.” & “정도전이 내가 주장한 것이나 시중이 노한 것은 각자의 견해를 지킨 일로 모두 나라를 위해 그러한 것이오, 지금 왕명이 내린 터에 어찌 공의 말만 듣고 중지하겠소? 하고는 떠나버렸다.” <고려사 열전 정도전>
〇 이인임, 사대부를 숙청하다
- 정도전의 유배에도 불구하고 계속되는 사대부들의 반발, 일부 간관들은 명 사신 살해 배후는 이인임이라고 처벌을 상소하고 혼란에 빠진 정국, 이인임의 대책은?
“간관이 재상을 비판한 것은 사소한 일이 아니기 때문에··· 반드시 시비를 가려야 합니다.” <고려사 열전 이인임> 그래서 이인임을 비판한 간관들을 국문하게 한 우왕, 결국 역풍을 맞게 된 사대부들은 정몽주 등 핵심인물이 유배되면서 오히려 이인임에게 정국 주도권을 내어주게 된다.
- 이인임이 북원과 외교를 재개하려 한 이유?
당시는 명(明)이 빠르게 확장하고 원(元)이 쇠퇴하면서 북원으로 쫓겨나 약해지고 있던 상황으로 급성장하는 명과 쇠락하는 북원의 상황을 모르진 않았을 이인임, 명과의 사대관계를 유지하면서 북원과도 따로 관계를 맺으려 한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그간 명과의 복잡하게 얽힌 문제들을 북원에 접근 해 문제를 완화할 목적이었을 것으로 보인다는 것
- 하지만 문제는 실효를 거두기 어려웠던 이인임의 양면외교는 이인임의 생각과 다르게 반응하고 명(明)은 공민왕의 시해 · 우왕의 정통성 등 계속해서 고려를 압박하고 반면 명(明)에 맞서는데 고려의 도움이 필요했던 북원은 계속해서 고려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자 결국 북원으로 쏠리게 되면서 북원으로부터 책봉을 받은 고려, 북원의 책봉은 명과의 관계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행위
-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우왕 3년 12월 “명나라 황제가 우리나라 사람 정언 등 358명을 돌려보냈다.” <고려사 우왕 3년 12월> 명과 관계회복의 기미가 보이자 바로 북원과 거리를 둔 이인임, 그러나 명(明)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아 어려움을 겪게 된 고려는 정세판단을 잘못한 것으로 이인임에게 외교는 권력유지수단이었던 것으로 개인의 권력뿐만 아니라 이인임이라는 사람 자체가 문제를 현상적으로 보고 단기적으로 풀어나가는 행동을 자주하면서 근본적인 문제를 보지 못했던 것
- 의외의 복병, 우왕
<드라마 정도전>에서 이인임의 대사 “정치인의 허리와 무릎은 유연할수록 좋은 법!”이라고 하는데 외교가 아닌 임기응변식 정책결정에만 발휘된 이인임의 유연성, 이것이 패착은 아닌지··· 사대부를 몰아내고 권력의 중심에 선 이인임, 하지만 이에 맞서는 복병이 등장하는데 바로 우왕! 비록 어리지만 왕으로서 의식은 있었던 우왕
- 죽은 노국대장공주를 위해 영전을 짓게 한 공민왕 “우왕이··· 토목공사로 백성들에게 고통을 겪게 할 수 없다. 금후로 건축공사를 일절 중단시키라고 지시했다.” & “강화와 서해 우리 백성 중에 왜적에게 죽임을 당해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지경이니 내탕의 재물을 내어서 매장하는 비용으로 쓰라고 지시했다.” <고려사 우왕 3년 6월>
〇 우왕의 좌절
- 우왕은 이인임을 견제하기 위한 움직임을 보였나?
아쉽게도 그런 기록은 남아있지 않고 왕권행사를 하지 못한 우왕, 결국 우왕의 유모가 나서서 이인임 제거 계획의 구심점에 서게 되는데 10대 초반 우왕의 왕권에 대한 강한 의지를 엿볼 수 있는 정황
- 우왕 유모의 이인임 제거 계획, 결과는?
실패로 끝나고 유모로 인해 곤경에 처한 우왕 “군사들을 대거 도열시켜 놓은 채 양부와 백관들을 소집해 유모 장씨를 국문하라고 주청하게 했다.” <고려사 열전 최영> 하지만 유모를 내어주지 않으려 저항한 우왕 “(우왕이) 이 여인이 나를 길렀으니 곧 나의 어머니와 같다··· 어찌 구하고 싶지 않겠는가?” <고려사 열전 최영> 최영을 통해 유모를 구하려 한 우왕, 하지만 우왕의 부탁을 거절한 최영
- 관리들이 궁 밖에서 시위를 하며 유모 장씨를 내놓기 전에는 들어가지 않겠노라고 장외투쟁을 하고 있었던 것, 결국 유모가 처형당하고 좌절을 겪으면서 바닥에 떨어진 왕권 “최영이 신이 불충하다고 꾸짖으시니 참으로 실망스럽습니다, 라고 하자 우왕은 다급한 김에 나도 몰래 실언했으니 깊이 후회하고 있소 라고 변명했다.” <고려사 열전 최영> 뒤바뀐 입장으로 왕을 꾸짖는 신하와 사과하는 왕
- 10대의 반항기를 거치는 우왕 그리고 사사건건 우왕을 간섭하는 이인임, 친정(親政) · 천도(遷都)의 반대에 부딪혀 못하게 되고 우왕을 학자들과 만나지 못하게 하여 공부를 못하게 하고 “이인임이 왕을 음악과 여색으로 인도하고 놀고 사냥하는데 빠지게 하여 정사(政事)를 할 겨를이 없게 하였다.” <고려사절요 우왕 14년> 왕으로써의 가능성을 보였던 즉위 초 10대 초반의 우왕이 4~5년 만에 너무도 많이 달라진 것으로 사춘기의 반항기 + 이인임으로 인한 무기력증 = 국정포기로 이어진 것
- 이인임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한 우왕 “우왕이 이인임을 부친으로 처 박씨를 모친이라고 불렀으며 이인임은 마치 왕을 데릴사위같이 대해주었다.” <고려사 열전 이인임>
〇 이인임의 국정 농단
- 왕을 정사(政事)에서 멀어지게 하고 국정을 농단한 이인임 “당시 이인임이 정방의 제조로 있으면서 하루에 재추(宰樞)를 59명이나 임명하기도 했으며···” <고려사 열전 이인임> 권력을 빙자해 불법적으로 뇌물 수수 · 토지 강탈 등으로 부를 축적한 이인임 “이인임이 악질 종놈들을 풀어서 좋은 양전(良田)을 소유한 자들을 모두 수정목으로 때려 빼앗았다, 관청에서 발행한 증서가 있더라도 감히 항의하지 못하므로 당시 사람들이 이것을 수정목 공문이라 불렀다.” <고려사 열전 임견비>
- 개혁을 외치던 사대부들은 유배가고 우왕은 왕으로서의 권위와 의지를 잃은 상황으로 아무도 이인임의 독주를 막을 수 없었던 우울한 시대였다는 것으로 사대부 정도전이 신흥무장세력 이성계를 만난 것이 바로 이 무렵으로 개혁의 싹이 트고 있었고 실제로 이인임의 독주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은 최영으로 초기에는 이인임 정권을 지탱하게 해줬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인임을 견제한 최영은 자기 관직을 내놓고 이인임을 막아야 한다고 하지만 번번이 뜻이 꺾인 최영의 의지!
〇 이인임 · 최영, 연립정권의 붕괴
- 최영은 이인임과의 연립을 후회하지 않았을까?
우왕 14년 1월 결국 결별한 이인임과 최영, 그 보다 먼저 우왕 13년 12월 이인임과 최영이 결별하게 되는 결정적 사건이 발생하는데 이인임과 권력을 나눠가진 부패세력 임견미 · 염흥방, 염흥방의 가노가 관리 조반의 땅을 빼앗자 염흥방의 가노를 죽인 조반, 그러자 염흥방은 누명을 씌워 조반을 역모혐의로 죽이려하고 이 사태가 우왕에게 까지 알려지자 최영과 만난 우왕은 이 자리에서 이인임 · 임견미 · 염흥방 제거를 결정한다.
- 이 상황에서도 이인임만은 살려준 최영 “임견미와 염흥방을 처형하고 이인임을 경산부로 유배 보냈다.” <고려사 열전 이인임> 최영이 이인임을 살려준 것을 보고 “사람들이 탄식하여 말하기를 임견미와 염흥방의 일당가운데 우두머리는 그물을 벗어났다, 라고 하였다.” & “또 말하기를 정직한 최공이 사사로이 늙은 도적(이인임)을 살려 주었다, 라고 하였다.” <고려사 열전 이인임>
- 유배 후 원인불명으로 사망한 이인임은 창왕 대에 와서 사후라도 이인임에게 벌을 줄 것을 상소한 사대부들, 마침내 공양왕 대에 이인임을 사후 처벌하는데 <부관참시>와 우리 역사에서 <파가저택(破家邸宅)>은 죄인의 집을 파괴하고 그 집터에 웅덩이를 파 연못을 만드는 형벌로 고려시대의 부관참시 형을 받은 건 이인임이 유일하고 3명의 왕이 바뀐 후 극형을 받은 이인임
〇 이인임이 고려에 미친 영향
- 이인임의 집권과 몰락, 그 의미는?
이인임 집권 당시 구조적 문제에 직면해 있었던 고려, 권력을 잡은 사람으로서 역사적 책임을 다하지 않은 이인임은 오히려 사익을 추구하며 결과적으로 고려의 구조적 문제 해결을 방해하는 역할을 하게 되는 것
- 고려 멸망의 원인 제공자 이인임은 국익이 아닌 개인의 권력을 위한 정치를 펼친 것, 그래서 고려사 간신열전에 기록되면서 어떠한 권력도 백성과 역사보다 오래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는 것
- 오로지 개인의 영달만을 위해 정치력을 발휘한 정상모리배 이인임, 이인임이라는 간신배를 통해서 국왕을 꼭두각시로 만들고 자신의 잇속을 챙기며 고려를 멸망의 길로 이끈 것을 볼 수 있었던 시간 & 자신의 권력만을 지키려고 했던 최고의 권력자, 그로 인해서 한 나라의 국운이 어떻게 쇠해졌는지를 보았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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