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his(한국사)

전쟁의 운명을 바꾸다 <제2편> 평양성 전투 

mkpark2022 2016. 10. 27. 22:56

 

 

 



전쟁의 운명을 바꾸다 <2> 평양성 전투




개요

- <드라마 임진왜란 1592> 1592413일 일본이 20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하고 순식간에 부산을 함락시키면서 한양을 향해 북상, 사태가 급박해 지자 430일 선조(宣祖)는 몽진에 나서고 선조(宣祖)의 피난 소식을 접한 토요도미 히데요시는 전군(全軍)에 조선의 왕을 잡으라는 명령을 내린다.

- 임진왜란 발발 20일 만에 한양이 함락되고 선조(宣祖)는 급히 평양으로 몽진하면서 흩어진 평양의 군민들을 소집한다. “상이··· 평양의 부로(父老)와 군민들을 소집하여 죽음으로써 지키겠다··· 성을 지키겠다는 뜻을 유시하고···” <선조실록 159262> 임금의 말에 다시 평양성으로 모여든 백성들

- 하지만 선조는 다시 의주로 떠나고 결국 15926월에 평양성이 함락되면서 조선 국토의 2/3가 일본의 발아래 있게 되고 동시에 임진왜란의 새 국면을 예고하는 사건으로 평양에서는 무슨 일이?

 

조선의 마지막 보루, 평양성이 함락되다!

- 15924월 부산이 함락되고 5월에는 한양이 함락 그리고 6월에는 평양성이 함락되어 불과 2달 만에 평양성까지 함락시킨 일본군, 반면 한양에서 부터 거듭된 선조(宣祖)의 몽진은 약속과는 달리 평양에서도 반복된다. “백성들이 부르짖기를 이미 성을 버리려고 했으면서 왜 우리를 속여 성에 들어오도록 하여 적의 어육(魚肉)이 되게 하는가? 모두 팔을 걷어붙이고 병장기를 든 채 만나는 사람마다 치곤하였는데 그 혼잡스런 상황을 막을 수가 없었다.” <선조수정실록 159261> 조정의 입장에서는 난동이다, 하면서 주동자 몇몇의 목을 벤 후 겨우 진정하게 된다.

- <방기철, 선문대학교 역사학과 교수>의 분석은 실제 평양성 같은 경우에는 북쪽에는 금수산이 있고 나머지 삼면은 보통강과 대동강이 흐르는 천혜의 요새로 외성·중성·내성·북성이 있었고 보통 백성들은 외성에 살고 있다가 외성이 함락되면 외성을 불살라버리고 내성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는 것

- 선조(宣祖)가 평양성에 들어오자 전국의 여러 고을의 양식이 평양성으로 모이고 있던 상황에서 항전의지를 불태웠던 평양 백성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몽진을 선택한 선조(宣祖), 이러한 상황이 안타까운 사실이라는 것!

 

선조(宣祖)는 왜 평양성을 버렸나?

- 고구려 때 수 · 당나라도 뚫지 못했던 평양성 <방기철 교수의 분석>은 선조(宣祖)가 평양성을 떠난 결정적 이유는 삼도근왕군의 패배5만이 넘는 대규모의 충청·경상·전라의 삼도근왕군이 북상을 하다가 용인 전투에서 일본군에 대패하자 선조(宣祖)의 입장에서는 절망적인 한양수복의 꿈과 그리고 위기의식을 느꼈을 것

- 하지만 백성들은 싸우겠다고 나서는데 왕이 무책임하게 피난 가는 것은 잘못! VS 하지만 선조(宣祖)의 목숨에 나라의 존망이 걸린 상황! 설상가상으로 평양성 함락에 대한 조선군의 실책은 대치하고 있던 일본군이 대동강을 건너려는데 물이 깊어 건너지 못하고 있던 상황에서 동이 틀 무렵 조선군이 기습공격하지만 일본군의 반격에 후퇴하는데 급한 마음에 얕은 곳으로 강을 건넌 조선군은 적군에게 도망 길을 안내한 셈

- 허무하게 함락당한 평양성, 내면에는 일본군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던 것, 일본군의 평양진입 소식에 의주로 피신한 선조(宣祖), 그리고 일본군이 강을 건너오자 무기를 버리고 도망간 조선군은 일본군에 대한 공포가 증폭되어있는 상황

 

명나라 파병의 진실

- <드라마 징비록 & 임진왜란 1592> 평양성 함락 이후 벼랑 끝으로 내몰린 조선의 운명, 의주로 피신한 선조(宣祖)는 급기야 요동 망명을 거론하는데 내가 천자의 나라에서 죽는 것은 괜찮지만 왜적의 손에 죽을 수는 없다.” <선조실록 1592613>

- 그리고 그 해 6월 명나라 부총병 조승훈이 이끄는 3천여 명의 명나라 군이 참전하게 되는데 조선에서 원군을 요청 후 두 달 만에 이뤄진 파병, 이러면서 조선에서는 16세기 동아시아 최초의 국제전으로 양상이 변화한다.

- ()에서 뒤늦게 파병을 한 이유?

명나라 입장에서도 계산한 바가 있어 소위 <조선향도론>으로 한양이 빠른 시간에 함락이 되자 일본과 내응하여 명나라를 침략하려 한다는 의심을 하게 되는 것 명에서 의심해 송국신을 보내 국왕의 진위를 실제로 알아보게 했다.” <선조수정실록 2561> 그러면서 본격적으로 파병을 결정한 것으로 일본군에게 조선이 너무 쉽게 무너지자 명나라도 당황했던 것

조선향도론 : 조선이 길을 안내해 일본이 명나라를 공격한다는 설

- 명군의 파병과 평양의 위치?

신라와 당나라가 전쟁을 할 때도 대동강 유역에서 싸우고 평양성에서 전쟁을 끝냈었고 한국전쟁 때도 중공군이 참전을 결정한 날이 1952105, 이 날은 국군과 유엔군이 평양성을 함락시킨 날로 이것은 우연의 일치일까? <방기철 교수의 분석>은 평양은 중국()에게 자국의 안전을 지키는 마지막 방어선이라는 것으로 임진왜란 때 명군의 파병 역시 평양성 함락이 결정적이라는 것

- 명나라 1차 파병의 규모는 조승훈을 중심으로 한 기병 3천 명으로 당시 일본군을 얕잡아 본 명나라 조승훈 왈 내 일찍이··· 10만 몽골군을 섬멸시켰으니 왜놈을 개미나 모기같이 볼 뿐이요.” <연려실기술> 자신만만하게 평양성을 공격했지만 결과는 실패, 또한 당시에는 비가 내렸는데 기병에게는 불리했고 빈 성처럼 꾸며 매복하고 있던 일본군에게 패배했던 것 적들은 험한 곳에 숨어서 조총을 요란스럽게 쏘니··· 진흙 속에 빠져 도망치지 못한 자는 모두 적에게 죽고 말았다.” <징비록> 명군 3천 명 중 2300명이 전사하여 전멸하다시피한 조승훈 군대!

- 그래서 전쟁이 명나라로 확산될 가능성이 있어 비상이 걸린 것 등래와 천진 등에 12천여 의 병력을 배치하고··· 선박을 은닉하여 유사시에 대비토록 조치했다.” <경략복국요편>

- 당시 내부적으로 혼란스러웠던 명나라는 영하에서 일어난 <발배의 난>을 수습하느라 진땀을 빼고 있던 터에 일본의 침략에도 대비가 필요한 상황이 되자 자국방어체제를 긴급 가동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평양성의 일본군과 강화협상을 시도했던 것

 

역사인물 소환, 도요토미 히데요시(드라마 임진왜란 1592의 김응수 역)

- 평양성 협상 내용?

당시 평양성에 주둔하고 있던 고니시 유키나가는 명나라 쪽에서 먼저 휴전을 제의해 왔다는 것 일본군은 더욱 교만해져··· 양떼가 범을 치는 것과 같다고 하였으니 양은 명나라 군사요, 범은 저를 가리킨 것이었다.” <징비록> 일본군을 보고 전의를 상실하였다는 것으로 이후 명나라 군과 일단 휴전하기로 협의

- 전쟁피해당사자인 조선을 빼놓고 휴전협상이라니?

조선이 나의 명령을 따른다면 일본군의 선봉에 서게 하여 명나라로 나아가리라.” <하야시 라잔, 도요토미 히데요시 보> 조선이 복속한다는 약속을 어겨 이렇게 됐다는 것

- 조선이 신하가 된다는 약속은?

1590년에 조선통신사가 가는데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복속사절로 오해를 한 것 첨지 황윤길을 통신사로 사성 김성일을 부사로 삼아 일본에 사신을 보냈다.” <선조수정실록 159031>

- 휴전협상이 오고간 게 사실?

일본이 조선을 침략했을 때 명나라 내부에서는 주전론(主戰論) VS 화의론(和議論)으로 의견이 대립했으나 조승훈 부대 참패 후 화의론이 급부상하고 명나라의 평양성 협상 목적 일본군의 본심 파악 50일 간의 휴전카드로 시간벌기, 휴전기간 동안 명나라를 자국방어 및 전열을 재정비하기 위한 것

- 일본군 고니시 유키나가는 대동강 이남지역은 일본이 갖는 걸로!” 하고 전쟁을 끝내자고 하자 명군 심유경은 상의 해보겠다!” 하며 일단 50일 간 휴전하기로 약속을 한다. 이른바 조선 땅을 나눠 갖자는 할지론

- 평양성까지 함락되어 조선 땅의 8할이 일본군에게 점령된 상황, “일본에서는 영주가 성을 버리고 도망하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것이라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주장! 이에 대한 <신병주 교수의 변론>은 문화의 차이로 일본에는 사무라이 정신이 있는 반면 유교의 나라 조선에는 왕이 끝까지 살아남아야 국가도 존재한다는 것

- <방기철 교수의 분석>조선의 시스템 때문에 일본은 조선을 함락시키지 못했다는 것으로 일본의 경우 영주가 죽으면 그 휘하의 장수 및 백성들은 항복해버리지만 조선의 경우는 장수가 죽어도 항복하지 않고 새로운 장수가 나와 끊임없이 항전한다는 것

- 평양 협상 이후 어떤 일이?

<드라마 임진왜란 1592> 159212월 명나라 이여송이 이끄는 4만 여 병력이 급파되고 새해가 밝자 평양성에서 다시 맞붙은 조명연합군 VS 일본군, 조명연합군의 평양성 탈환작전 개시! “먼저 성에 오르는 자에게 은() 5천 냥을 내릴 것이다!” 3일 간의 치열한 접전 끝에 고니시 유키나가의 일본군은 후퇴하고 평양성 탈환에 성공한 조명연합군, 그리고 평양성 탈환으로 임진왜란 전세는 역전된다.

 

평양성 탈환도에 숨겨진 이야기 <한남대학교 박물관 소장>

- <평양성 탈환도>18세기 조선 화공이 조명연합군의 평양성 탈환 장면을 그린 것으로 당시 평양의 중성 · 내성에 포진하고 있던 일본군이 조명연합군에게 포위되어 내성으로 쫓기는 일본군을 묘사한 것

- 명군이 오자 이여송을 찾아간 류성룡은 이여송을 처음 만났을 때 이여송은 나를 맞이했는데 대해보니 헌헌한 장부였다.” & “나는 평양지도를 꺼내놓고 자세히 설명했다··· 이여송은 내가 가리키는 곳마다 붉은 글씨로 표시했다.” <징비록>

- 이여송은 조선의 후예로 아버지 이성량은 평안도 강계 출신으로 <발배의 난>을 진압한 공으로 명()에서 위세가 당당 이여송이 조선에 올 때 부() 이성량이 글을 주기를 조선은 바로 우리 선조의 고향이니 너는 힘쓰라!” <선조수정실록 2691>

- 조선인은 겨우 다섯 명만 그려졌고 실제로는 구경꾼처럼 묘사한 이유?

평양성탈환작전에 조선군의 활약이 이처럼 미약했던 것은 아니고 도원수 김명원 외 조선군 1만 여 명이 조명연합군으로 활약 부총병 조승훈과 유격은··· 조선의 병사 김응서·이일 등과 평양성 함구문을 공격하였다.” <선조실록 26111> & “명나라 군사도 일본군의 뒤를 추격하지 않았는데 오직 이시언 만이 그 뒤를 쫓아 왜병 60여 명을 베었다.” <징비록>

- 평양성 전투에서 일본군의 예상치 못한 변수?

일본군의 평양성 전투 실패원인 조선의 추위 일본군은 눈이나 얼음 위를 걷는데 익숙하지 못한데다··· 수많은 자들이 동상으로 엄지발가락이 떨어져 나갔고···” <프로이스 일본사> 평양과 중화 사이 보급로를 차단당함, 대동강 남쪽의 일본군 보급지 중화를 유정 · 휴정대사 등이 이끄는 의승군들이 차단하고 있었던 것 의승군은 3개월 동안 평양과 대동강 남쪽의 일본군 보급지인 중화 사이의 적 보급로를 기습과 유격전으로 차단하였다. <쇄미록, 갑오일록>

- 평양성 모란봉 전투에서도 선봉에 서서 공격하여 평양성 탈환작전의 숨은 영웅인 의승군! 병사 100명을 잡는 것보다 보급로를 차단한 것은 치명적으로 뛰어난 활약에도 불구하고 존재감 없이 그려진 조선군!

- <류근 시인의 생각>평양성 전투의 모든 공을 명나라에 돌리려한 것 이항복이 아뢰기를 평양을 회복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이여송 제독의 공이니 생사당을 짓고···” <선조실록 1593112> 실제로 평양에 생사당 <무열사>를 세운 조선, 그리고 대명의리의 사상이 담겨있는 평양성 탈환도

생사당 : 공적을 고맙게 여겨 그 사람이 살아있을 때 받들어 모시는 사당

 

평양성 탈환, 어떻게 성공했나?

- 평양성 전투를 성공시킨 비밀 병기?

결정적인 무기는 화포(火砲)로 명나라군 구성은 이여송 장군이 이끄는 북병의 기마부대 송응창 경략이 이끄는 남병의 화포부대

남병 : 절강 · 복건성 등 남쪽지역 출신 병사들로 화포가 주무기

- 조선의 화포와는 무슨 차이?

고려 말 최무선에 의해 화약을 자체 생산하여 조선에서도 천자·지자·승자총통 등 다양한 화포를 사용하고 지자총통의 특징 2인 이상이 사용하는 공용화기 수성전(守城戰) · 해상전에서 주로 사용하고 천자·지자총통에 사용하던 대장군전(미사일 형태의 화살)적선에 쏘아 배를 침몰시키는 역할

- 하지만 조선의 기존 화포와는 차원이 달랐던 명나라 화포, 평양성 전투 당시 명군은 불랑기 포 · 호준포 등을 사용하는데 호준포는 기동성이 우수하여 오늘 날의 박격포처럼 야전에서 주로 사용하고 불랑기 포는 모포와 자포가 분리되어 모포 속에 자포를 넣어 고정한 후 발사하는데 장전해 둔 자포 여러 개를 준비한 다음 자포를 빠르게 교체하여 연속 발사가 가능하고 사정거리도 500~1,000m

- 반면 일본군 조총의 사정거리는 50~100m로 상대가 되지 않는 것으로 평양성 전투 승리의 비결 화포로 일본 조총수를 무력화 및 성벽 파괴의 화력전 살수들이 원앙진을 짜고 성문을 여는 근접전 기마부대가 성안으로 진입하여 기병전을 펼쳤던 것으로 역사학자들은 평양성 전투를 16세기 최초의 국제전 그리고 최대의 근대 화약전쟁으로 평가

 

전쟁의 판세를 뒤엎은 평양성 전투

- 수세(守勢)에서 공세(攻勢)전쟁의 물줄기를 바꾼 평양성 전투, 개전 이래 최초로 퇴각하는 일본군은 한양까지 퇴각하게 되는 것

- 일본군이 평양성 함락 이후 북진하지 않은 이유?

이순신! “우리는 바다를 빼앗겼다, 바다를 빼앗기면 본토에서 아무 것도 보낼 수 없다, 군대도 없고 밥도 없고 화약도 없이 무엇으로 전쟁을 한단 말이냐!” <도요토미 히데요시(김응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결정적 실수는 이순신을 몰랐던 것으로 바다를 빼앗겨 보급로를 차단당한 일본군

- 한산도 대첩의 승리로 보급로가 완전히 막힌 일본군 전라도·충청도·황해도·평안도 연해지역을 보전함으로써··· 이순신이 단 한 번의 싸움에서 이긴 공이다.” <징비록> 또 하나는 전국토의 80%를 일본이 장악했다고 하지만 의병들의 게릴라 전투 때문에 주요 거점만 장악의병이 쳐들어와도 떠나가지 말고 성을 지키고 있어라!” <소가문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서신> 일본군의 보급로 곳곳을 차단해 전력을 분산시킨 의병들, 후방부대의 지원 없이 일본군의 북진은 어려웠을 것

 

전쟁의 운명을 또 다시 바꾸다, 벽제관 전투

- 꼬여만 가는 전쟁의 운명<드라마 징비록> 1천여 기병을 이끌고 벽제관으로 향한 이여송, 하지만 벽제 혜음령에 매복해 있던 일본군 적이 보병을 써서 날카로운 긴 칼을 휘둘러 좌우로 치니 인마(人馬)가 모두 쓰러져 도저히 당해낼 수가 없었다.” <징비록> 명나라군은 벽제관 전투에 대패하고 겨우 목숨을 건진 이여송 제독(이여송)이 말하기를 동파(東坡)로 돌아가 군사를 휴식시킨 뒤 다시 진군하려고 할 뿐입니다.” <선조수정실록 2611> 사실상 전투 중단을 선언한 이여송의 태도 돌변, 여기엔 어떤 진실이?

- 일본에서의 임진왜란 3대첩 벽제관 전투 사천전투 울산성 전투로 ()을 이긴 전투에 높이 평가하는데 벽제관 전투 실패 원인?

평양성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던 화포, 하지만 화포를 활용하지 못한 벽제관 전투1천여 기병부대가 매복조에 걸려 패하게 되는 것으로 1차 평양성 전투의 조승훈 부대가 실패한 것과 유사한데 벽제관 전투의 패착은 상대를 무시했기 때문이라는 <배우 김응수의 생각> 조선을 얕잡아 본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일본을 얕잡아 본 명나라의 자만이 화를 부른 격

- <방기철 교수의 분석>은 명나라는 파병 당시 전투의 승리를 확신 했을까?

하지만 승패를 확신할 수 있는 전쟁은 없는 것으로 평양성 전투 직전 송응창이 보낸 편지 지금 명()이 믿는 것은 오로지 일본군들이 추위를 두려워한다는 사실 뿐입니다.” <여원찬획서> 명에서도 일본을 축출했으면 좋겠지만 최후의 자국방어선인 평양성을 지켜낸 것만으로도 만족할만한 성과라 평가했을 것

- 1차 전투 후 평양성 협상의 대동강 할지론, 설마 명나라에서도?

평양성 탈환전에서 예상보다 쉽게 물러난 일본군, 조명연합군의 입장에서는 평양에서 협상하려고 했지만 일본군이 약해 보이자 더욱 밀고 내려나갔던 것으로 벽제관에서의 패전이 오히려 명군의 본래 목적을 상기시킨 셈, 이후 명과 일본은 본격적인 강화협상에 돌입하여 일본군의 안전한 퇴각을 보장하고 서둘러 전쟁을 끝내려는 명나라

- 조선 방어의 중심인물인 류성룡과 가장 부딪혔던 부분으로 속히 일본군을 무찌르자는 주장 VS 이쯤 됐으면 되지 않았느냐? 조선군의 추격까지 금지시킨 명군 일본군을 공격 하지마!” 비극적인 것은 전시작전권과 협상권이 명()에게 있었던 현실

- 평양성 전투 이후 탄핵당한 이여송?

이유는 이여송이 평양의 전투에서 벤 수급 중의 절반이 조선 백성이며 불에 타죽거나 물에 빠져죽은 1만여 명도 모두 조선백성이라고 하였다.” <선조실록 1593111> 또한 명군들 중에는 전공다툼으로 조선인을 일본인으로 둔갑시켜 희생시키기 까지 하여 조선 백성의 입장에서는 명나라 원군에게 재산 · 목숨까지 수탈당한 처지

- 명군뿐만 아니라 일본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지시로 조선인의 귀와 코를 자르니 길바닥은 온통 피바다가 되었고···” <게이넨 조선일일기> 이래저래 죽는 것은 조선의 백성

- 그렇다면 이후 이여송의 처벌은?

처벌하지 않는데 명나라 입장에서는 자기 백성을 죽인 것도 아닌데 상관할 일이 아니고 조선에서도 이여송은 조선을 구해준 은인이라 하여 안 돼! 하면서 흐지부지 넘어가 버린 것

 

임진왜란 명군의 참전, 무엇을 남겼나!

- 임진왜란, 명나라가 참전하지 않았다면?

<류근 시인의 생각> 힘들었겠지만 결국엔 자력으로 극복했을 것, 명나라의 참전은 조선에게는 사채와도 같아 당장의 위기는 벗어났지만 이후 조선에게 오히려 악영향을 미쳤다는 것 <신병주 교수의 생각> 명나라의 참전은 조선에 약 주고 병 주고였다, 명군의 참전으로 위기를 넘긴 건 사실이지만 그것에만 지나치게 의존한 조선의 조정, 이후에는 명()이 멸망했음에도 불구하고 임금이 복원에 나아가 망배례를 거행하고 황단(태조·신종·의종)을 봉심하였다.” <정조실록 178267> 갈수록 대명의리의 명분만 강조하고 현실감각이 무뎌지는 역효과를 낳았다는 것

- <방기철 교수의 분석> 명나라의 참전을 통해서 얻을 수 있었던 교훈! 임진왜란의 당사자는 조선, 하지만 대륙 세력인 명나라 VS 해양세력인 일본이 조선에서 충돌, 그러면서 조선을 제외한 평양성 협상에서 등장한 조선 할지론, 그리고 1597년 정유재란 때 다시 등장한 조선할지론, 그리고 다시 1896년 아관파천 이후 러시아와 일본이 조선 할양론을 거론하고 2차 영일동맹 이후 수세에 몰린 러시아가 일본에게 38선을 제시하여 결국 남북으로 허리가 잘린 한국, 결과적으로 우리가 제대로 준비하지 않고 자국의 힘을 키우지 않으면 임진왜란 때 수모는 언제든지 반복될 수 있다는 역사적 교훈을 가슴 속에 새겨야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을 가지게 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