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빌라이와 원종의 만남, 고려의 운명을 바꾸다
〇 개요
- 무려 여섯 차례의 전쟁으로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고려, 결국 1259년 강화를 맺기 위해 몽골에 간 고려 태자는 당시 남송을 공격하기 위해 사천에 있었던 몽골의 칸 뭉케를 만나기 위해 지금의 베이징인 연경을 거쳐 사천 쪽으로 가는 도중 뜻밖의 소식을 듣게 되는데 갑작스런 몽골 칸의 죽음, 그래서 고려 태자(훗날 원종)일행은 고려로 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조문을 할 것인가? 망설인다.
- 당시의 상황은 수도인 카라코룸에서 국정을 돌보고 있는 칸의 동생 아릭 부케, 하지만 또 다른 동생 쿠빌라이도 만만치 않은 존재로 어찌할 줄 몰라 고민하다가 결국은 방향을 돌려 남쪽으로 향하던 고려 태자 일행은 때마침 북상하고 있던 쿠빌라이와 만나게 되고 두 사람의 만남이 고려에 미친 영향은?
〇 쿠빌라이와 원종의 만남
- 쿠빌라이는 누구?
몽골의 국호를 대원(大元)으로 바꾼 징기즈칸의 손자 쿠빌라이, 동방견문록의 저자 마르코 폴로가 쿠빌라이를 두고 칸 중의 칸이라고 극찬한 인물로 중국의 남송을 완전히 멸망시킴으로써 전 중국을 지배한 인물
- 원종이 쿠빌라이와 만날 수 있었던 이유?
고려의 태자였던 원종이 몽골에 파견되어서 아직 칸에 오르기 전(前)인 쿠빌라이를 만나게 되는데 뭉케 칸 사망 후 동생들 사이에서 벌어진 후계자 경쟁, 몽골은 적장자 상속의 원칙이 없어서 귀족 · 황족들이 쿠릴타이를 열어서 합의하여 몽골 칸을 선정하는데 뭉케 칸 사망 당시 아들들은 어리고 동생인 쿠빌라이와 아릭 부케가 경쟁하는 사이에 쿠빌라이를 만난 고려 태자
※ 쿠릴타이 : 몽골을 비롯한 북방 유목민 사이에 옛날부터 전해 온 합의제도
- 고려의 태자나 조선의 세자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상큼 발랄, 하지만 이들이 만날 당시 고려 태자는 41세이고 쿠빌라이 역시 45세로 원숙한 나이였던 두 사람
〇 28년 전쟁의 끝, 강화
- 고려가 강화를 결심한 이유?
몽골의 5차 침입 이후 완전히 달라진 전쟁양상, 지금까지의 치고 빠지는 양상이 아닌 정복하여 눌러 앉아 약탈을 일삼는 것, 게다가 관리들의 수탈까지 겹쳐지면서 몽골에 투항하기도 하여 백성들의 민심이반이 심해지자 조정 내에서도 힘을 얻는 강화론
- 강화 한 해 전인 1258년에 중요한 사건이 발생하는데 함경남도 일대의 백성들이 몽골에 항복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몽골이 이 지역에 쌍성총관부를 설치하는데 이는 고려 땅의 일부가 몽골 땅이 되었다는 것으로 이것이 확산되면 고려 영토가 모두가 몽골 땅이 될 수도 있다는 위기감에서 고려 조정에서는 강화를 서두르게 되는 것
※ 쌍성총관부 : 1258년 몽골이 고려의 화주(함남 금야군) 이북을 다스리기 위해 설치한 몽골의 지방 관청
- 28년간의 항전을 주장했던 최씨 무신 정권의 최우 · 최의 · 최항, 이들에게 강화는 곧 권력의 상실이지만 결코 항전을 계속할 수 없었던 고려의 현실
〇 최씨 무신 정권의 붕괴
- 원종이 강화를 맺기 위해 몽골로 갈 수 있었던 이유?
최씨 무신 정권의 붕괴로 1258년 최씨 무신 정권을 무너뜨린 강화론자 유경과 무신 김준, 당시 최의의 사망으로 62년 만에 무너진 최씨 무신 정권,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권불십년(權不十年)> 꽃은 열흘 붉은 것이 없고 권세는 십년을 넘지 못한다는데 62년의 세월동안 끝날 듯 끝나지 않는 무신 정권
- 군사력이 필요하여 무신 김준을 끌어들인 유경,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유경을 몰아내고 무신 김준이 정권을 잡으면서 최씨 무신 정권이 김준 무신 정권으로 교체되던 시기
- 김준은 몽골과의 강화에 찬성했나?
찬성이라기보다는 강하게 반대하지 못했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으로 항전과 강화에서 고민에 빠진 김준은 문신관료들의 주장에 떠밀리 듯 강화하게 되는 것인데 태자의 입조를 조건으로 몽골군의 철수를 요구한 고려
- 그래서 선(先) 회군 후(後) 태자입조를 조건으로 강화가 성립되는데 전쟁도 끝내고 고려도 지켜야 했던 태자의 입조! 만나야 할 칸은 사망하고 돌아가자니 아득하고 누군가를 만나야 하는데 그렇다고 후계자가 정해진 것이 아닌 상태여서 후계자 경쟁 중이었던 쿠빌라이와 아릭 부케, 둘 중 한 사람을 선택하는 것은 위험한 일로 둘이 전쟁이라도 한다면 자칫 남의 싸움에 휘말릴 우려도 있는 것
〇 원종을 반긴 쿠빌라이
- 원종을 만난 쿠빌라이의 반응은?
“쿠빌라이가 깜짝 놀라 고려는 만 리나 떨어져 있어 과거 친히 정벌에 나섰던 당 태종조차도 굴복시키지 못했는데 이제 그 나라의 태자가 스스로 와서 나에게 귀부하니 이는 하늘의 뜻이로다 하고 기뻐하면서 크게 칭찬하고···” <고려사세가 원종 원년>
- 당시 쿠빌라이의 상황을 이해할 필요가 있는데 뭉케 칸이 죽고 쿠빌라이와 아릭 부케가 서로 후계자 경쟁을 한다면 누구에게 정통성이 있느냐? 하면은 많은 사람이 아릭 부케의 손을 들어주는데 이유는 ① 뭉케 칸의 장례 주관 ② 수도 카라코룸의 수비 ③ 몽골 귀족과 황족의 지지, 이러한 불리한 상황에서 고려 태자가 아릭 부케에게 가지 않고 자기에게 왔다는 것, 쿠빌라이는 고려 태자와 만난 것을 하늘의 뜻이라고 생각했거나 아니면 적어도 하늘의 뜻이 자신에게 있다고 정치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기회로 만들었을 것이라는 <이익주 교수의 분석> 당시 아릭 부케는 고려에 대해 크게 신경을 쓰지 않고 유라시아와 몽골 국가들의 지지를 얻는데 집중했던 것
〇 고종의 죽음
- 방향을 남쪽으로 돌린 태자는 쿠빌라이를 만나 동행하게 되고 몇 달이 지난 후 충격적인 소식을 듣게 되는데 고종의 승하 소식에 서둘러 귀국을 결심한 태자 “(쿠빌라이는) 다루가치인 쉬리다이 등으로 하여금 왕을 호위해 귀국하게 했다.” <고려사세가 원종 원년>
- 태자가 몽골에 있는 사이 각각의 왕을 잃은 고려와 몽골, 드라마나 소설이라면 그야말로 막장 급! 1259년 6월 30일 고종이 승하하는데 사실은 뭉케 칸보다 열흘 먼저 사망했는데도 고종의 죽음을 늦게 알게 된 태자!
- 쿠빌라이가 원종에게 특별한 호의를 보인 이유?
당시 몽골 내부에서 태자의 처우에 대해서 논의가 있었는데 “우리가 그를(고려)국왕으로 임명해 귀국시켜 준다면··· 1명의 병사를 수고롭게 하지 않고도 1개의 나라를 얻는 일입니다” <원사 세조본기 중통 원년>
- 이에 태자를 국왕으로 임명하고 귀국시킨 쿠빌라이, 몽골 정복지역에서는 매우 이례적인 사건으로 원종이 돌아간 후 칸으로 선출된 쿠빌라이, 한편 원종은 귀국 도중 8~9일 동안을 서경에서 지체하게 되자 원종을 위해 고려에 조서를 보낸 쿠빌라이 “만약 다시 반란을 일으켜 윗사람을 해치는 자가 나온다면 이는 자기 임금을 능멸하는 것이 아니라 곧 내가 정한 법을 문란케 하는 것이니···” <고려사세가 원종 원년> 원종에 대한 지지를 명확하게 밝힌 쿠빌라이
- 원종의 귀환이 늦어진 이유?
강화 도중에 왕이 바뀌게 된 상황에서 새로운 왕(원종)에 대한 불안감이 컸던 무신정권의 최고 권력자 김준은 태자인 원종이 즉위하면 몽골의 지원을 받아 왕권이 강화될 거라 판단하여 김준 역시 권력으로부터 소외당하는 것을 피하고 싶었을 것이어서 태자(원종)가 아닌 안경공(태자의 동생)을 왕으로 옹립하려 한 것, 하지만 강화를 주장했던 관료들의 거부로 실패하게 되고 또한 원종 즉위의 든든한 명분이 된 고종의 유언
- 즉위 후 쿠빌라이에게 신하가 되겠다는 뜻을 밝힌 원종을 고려 국왕으로 책봉하게 된 쿠빌라이, 이러한 책봉은 매우 이례적인 사건으로 정복한 국가의 왕을 책봉한 적이 없는 몽골, 그래서 태자(원종)와 쿠빌라이의 만남은 역사의 흐름을 바꾼 운명적 만남인 것으로 몽골의 치세아래 멸망한 중국의 왕조 남송, 반면 국가체제를 유지한 고려이지만 속 시원하게 기뻐하기는 애매한 상황!
- <이익주 교수의 분석>은 역사를 평가하는 자세에서 늘 강조하는 것은 그 당시의 상황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것으로 28년 동안 항전한 고려의 궁극적 목표가 몽골의 멸망은 아니었을 것, 그렇다면 고려의 목표는 어떠한 관계를 맺으면서 국가를 유지하는 것이었을 텐데 바로 그것이 책봉 · 조공을 통한 사대관계였을 것이라고 한다면 전쟁의 성공이라고 볼 수 있는 것
〇 고려와 몽골의 강화조건
- 고려는 몽골에 6가지 강화조건을 제시 ① 의관은 본국의 풍속을 따르며 고치지 않는다! <불개토풍(不改土風)> 이는 대단히 중요한 것으로 문화를 지키는 것은 곧 그 국가를 유지하는 것으로 정치 · 경제 · 사회 모든 부문에서 독자적인 전통을 지킨 고려
② 개경환도를 재촉하지 않는다! 28년의 전쟁으로 폐허가 된 개경은 환도에 앞서 준비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
③ 몽골군대를 철수한다!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한 요구
④ 다루가치를 소환한다! 전쟁 중에 파견되어 고려에 있던 다루가치를 모두 돌아가게 한다는 것, 이는 앞으로도 파견하지 않겠다는 약속으로 몽골이 고려의 내정간섭을 하지 않겠다는 것과 공물수취를 방지하겠다는 의미
⑤ 사신은 몽골 조정에서만 보낸다! 외교 창구를 단일화 하는 것으로 과거 여러 경로로 공물을 요구했던 몽골, 같은 상황이 재발할 것을 방지하려는 요구
⑥ 전쟁 중에 몽골에 항복한 고려인들을 돌려보낸다!
전쟁 중에 몽골에 항복해 몽골로 들어간 고려인들, 그런데 문제가 된 것은 이들이 몽골군을 도와 고려를 공격하는 변질자라는 것으로 <부원세력(附元勢力)>을 돌려달라는 것은 강화 이후 부원세력의 영향력 행사를 방지하기 위한 요구
※ 부원세력 : 원(몽골)에 기대 고려에 심각한 피해를 입힌 세력
- 6가지 강화조건의 역사적 의미는 고려라는 나라를 지킨다는 것, 사실상 패배한 전쟁이지만 고려의 6가지 요구는 고려의 국호와 왕실을 유지하고 고려의 영토를 지키기 위한 것, 그래서 고려는 <불개토풍> 조항을 통해 고려의 국가 유지에 대한 약속을 얻어내는데 성공을 했을 것이라는 <이익주 교수의 분석>
- 전쟁에서는 패했지만 요구할 것은 요구하면서 결코 비굴하지 않은 고려, 몽골 입장에서도 다른 나라는 쉽게 항복을 했지만 28년간 줄기차게 저항한 고려와 다시 전쟁한다는 것은 몽골의 입장에서도 부담이었을 것이어서 고려의 강화 조건은 28년 항전의 성과라는 <신병주 교수의 분석>
〇 쿠빌라이의 호의
- 고려의 강화 조건에 대한 쿠빌라이의 반응?
고려의 6가지 요구를 거의 들어 준 쿠빌라이, 하지만 몽골에 투항한 자를 돌려달라는 조건에서는 “스스로 원해 이곳에 몸을 기탁하고 있는 고려사람 십여 명의 소재는··· 반드시 밝혀내야 할 것이며 이후에도 이같이 여기에 머물겠다고 하는 자들은 다시는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고려사세가 원종 원년>
- 쿠빌라이와 원종의 만남, 의도 VS 우연?
쿠빌라이 주변에 많았던 한인 관료들, 당시 원종 일행은 한인 관료들로부터 정보를 얻었을 것으로 이들에게 얻은 쿠빌라이에 대한 우호적인 정보가 원종의 선택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도 있다는 <최태성 교사의 생각>
- 우연 VS 의도, 모두 가능한 가설이지만 이를 판정할 수 있는 사료는 없고 다만 그 당시 원종과 쿠빌라이의 동선(動線)을 통해 추측 가능한데 쿠빌라이는 남송을 공격하기 위해 악주에 머물러 있다가 사망소식을 듣고 개봉 쪽으로 가고 있었고 원종도 육반산에서 개봉 쪽으로 가고 있던 상황
- 두 사람이 만난 지점을 사료에서는 <양초지교>라 하는데 이곳은 개봉에서 130Km가 떨어져 있는 거리여서 원종이 직접 찾아가지 않으면 만나기 어려운 거리로 우연히 만나기엔 너무 넓은 중국 대륙이라는 <이익주 교수의 분석>
- 보다 중요한 것은 우연이라는 상황을 필연으로 만든 기회포착의 능력자 원종이라는 것으로 우호적인 관계형성은 유리한 협상을 할 수 있는 원동력으로 원래 의도했던 뭉케 칸을 만나는 것보다 더 큰 성과를 얻은 원종이라는 <신병주 교수의 분석>
〇 몽골의 6사(事)
- 몽골은 고려에 무엇을 요구했나?
몽골도 똑같이 6가지 복속조건의 6사를 요구 ① 납질(納質), 인질을 보낼 것 ② 조군(助軍), 군사를 보낼 것 ③ 수량(輸糧), 군량을 보낼 것 ④ 설역(設驛), 역을 설치할 것 ⑤ 공호수적(供戶數籍), 호구를 조사해서 보고할 것 ⑥ 치달로화적(置達魯花赤), 다루가치를 둘 것
- 몽골의 6사 요구에 대한 고려의 반응은?
원종 즉위 3년째부터 요구해온 6사, 고려의 외교력이 빛나는 점으로 선별적으로 6사를 받아들이는데 이미 이행했다고 주장하는 ①④ 전쟁 중에 인질이 된 고려 왕족으로 충족하고 개경-몽골의 기존교통로로 충족된 것, 또한 ②③은 앞으로 필요하면 하겠다는 것이고 아울러 ⑤⑥도 언젠가는 하겠다는 주장을 하는데 호구조사는 고려의 국세노출이고 다루가치는 내정간섭으로 고려의 지혜로운 대응은 ① 이미 이행 했다 ② 앞으로 하겠다 ③ 언젠가 하겠다고 대응을 한다.
- 다만 국왕의 친조요구는 받아들인 고려,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원종 5년에 몽골에 친조로 쿠빌라이를 다시 만난 원종, 그간 줄기차게 친조 요구를 거부한 고려였지만 유독 친조 요구만 받아들인 원종, 하지만 우호적인 관계의 친조는 지금의 정상회담 정도
- 언제까지나 미룰 수만은 없는 6사의 이행?
원종의 입장에서는 6사를 들어주려고 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마음대로 이를 이행할 수 없었던 원종, 김준 무신 정권은 여전히 친몽 반대 세력으로 어긋날 수밖에 없는 왕권과 무신정권
〇 무신정권의 최고 실력자 김준을 제거한 원종
- 무신정권 최고 실력자 김준과의 대립, 고심 끝에 원종은 김준을 제거하려 하고 원종의 뜻에 따라 암살을 계획한 무신 임연 “임연은 큰 몽둥이를 만들어 궤짝에 넣어서 선물인 것처럼 꾸며 미리 궁중에 두고 거사할 날짜까지 정했다·· 왕명이라며 김준을 불렀고 김준은 급히 조정으로 달려 나왔다.” <고려사열전 김준> 원종의 계획대로 제거당한 김준
- 사실은 먼저 원종을 폐위시키려 한 김준, 무신정권이 몽골에 비협조적임을 안 쿠빌라이 “···황제는 김준의 부자 및 그 동생 김충을 모조리 몽골 수도로 오게 했다.” <고려사세가 원종 9년> 하지만 몽골에 입조할 생각이 없었던 김준은 자신이 권력을 잡고 있을 때 몽골 친화적인 원종을 폐위시키려는 시도를 하지만 주변 인물의 반대로 무산되고 원종도 이대로 두어선 않되겠다, 판단하여 김준을 제거하게 되는 것
- 그러면 무신정권은 끝?
그렇질 못하고 최씨 무신정권 → 김준 무신정권 → 임연 무신정권 → 임유무 까지 계속 되면서 최고 권력자만 바뀔 뿐 끝날 듯 끝나지 않는 무신정권
〇 원종의 폐위사건
- 몽골에 입조한 원종의 아들 심이 돌아오기 위해 1269년 7월에 압록강 접경지역 파사부에 도착하자 은밀하게 태자에게 말을 전하는 수상한 자가 있었으니 아버지 원종이 폐위됐다는 것 “관노 정오부가 몰래 강을 건너가서 임연이 왕을 폐립한 사실을 말했다.” <고려사 세가 원종 10년>
- 이에 태자는 다시 몽골 행을 결심하는데 쿠빌라이 칸에게 도움을 요청하려는 것, 김준 제거를 위해 손을 잡았던 원종과 임연이었는데 임연이 원종을 폐위시킨 이유?
김준 제거 후 새로운 갈등에 접어든 원종과 임연, 당시 원종은 몽골과 강화의 아이콘 같은 인물, 하지만 왕실이 몽골과 가까워질수록 무신정권은 상대적으로 약화되는 결과로 지금까지의 무신정권의 실력자가 그랬듯이 꼭두각시 왕을 옹립시키기 위해 원종을 폐위시킨 임연은 스스로 교정별감이 되어 권력을 장악하려 했던 것
※ 교정별감 : 고려 무신 정권 최고 정치기관인 교정도감의 수장
- 쿠빌라이에게 돌아가 도움을 요청한 원종의 아들 태자 심, 그리고 원종 폐위 소식을 듣고 고려에 조서를 보낸 쿠빌라이 “국왕과 태자 및 그 일족 가운데 하나라도 해를 입는 일이 있다면 짐이 반드시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국왕이 안경공 왕창 및 임연과 함께 짐의 궁궐로 와서 면전에서 직접 정황을 설명하면··· 만약 기한이 넘도록 오지 않는다면 군대를 진격시켜 완전히 소탕해버릴 것이다.” <고려사세가 원종 10년>
- 원종과 쿠빌라이의 사이를 잘 알고 있었을 텐데 임연은 왜 이런 행동을?
이 사건은 임연의 모험이라 할 수 있는데 몽골에서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원종 복위 요구는 충분히 예상 가능한 것이지만 마땅히 대응할 수단이 없던 임연은 대비책도 없는 상황에서 급하게 원종폐위를 추진한 임연의 무모함에서 비롯된 사건이라는 <이익주 교수의 분석>
- 폐위사건 이후 쿠빌라이에게 의지한 원종, 복위 후 또 다시 친조해 군대를 요청 “얼마간의 병력을 주신다면 곧장 옛 수도로 가서 바다 섬에 남아있는 신민들을 설득해 출륙하게 한 다음 이로써 권신을 제거하고 나머지는 잘 타이르도록 하렵니다.” <고려사세가 원종 11년>
- 몽골의 군사력을 빌려 왕권을 되찾으려 한 원종, 과거 무신 정권에 휘둘렸던 고려 왕실이 앞으로는 몽골의 간섭에 자유로울 수 없을 것, 또한 몽골에 군사력을 요청함과 동시에 아들 태자 심과 쿠빌라이 딸과의 혼인을 요청한 원종, 결국 쿠빌라이의 사위가 된 태자 심, 이후 지속된 고려 국왕과 몽골 황실의 혼인, 그리고 점차 심해진 몽골의 내정간섭, 임연의 폐위사건도 원종의 지나친 친몽 형태도 바람직스러워 보이지는 않는 것
〇 원종과 쿠빌라이의 역사적 만남
- 그 후, 임연은?
근심과 울분으로 등창이 나 죽게 되고 몽골군을 끌고 와 무신정권을 무너뜨린 원종, 이것으로 무신정권의 막은 내리고 100년 무신정권의 종지부를 찍은 쿠빌라이와 원종의 만남, 그 당시 몽골을 평가할 때 13세기 세계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했던 몽골의 침략을 받은 나라들 중 국가를 유지한 나라는 극소수라는 것을 전제하고 고려를 평가해야 할 것
- 이때 국가를 유지하도록 해준다는 쿠빌라이의 약속을 훗날 <세조구제(世祖舊制)>라고 부르게 되는데 원 간섭기 내내 고려의 독립성을 지켜준 <세조구제> 따라서 고려라는 나라를 존속시킬 수 있었던 원종과 쿠빌라이의 만남이었다는 것에 의미를 갖는 것
※ 세조구제 : 고려의 전통과 왕조체제를 유지하도록 한 쿠빌라이의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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