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과 화친 그 후, 다시 항전을 꾀하다
〇 몽골의 1차 침입으로 유린당한 고려
- 1231년 8월 저고여 피살 사건을 명분으로 고려를 공격한 몽골과의 전쟁으로 처참히 짓밟힌 고려, 급기야 수도 개경이 포위되자 몽골과의 화친을 단행 “우리에게 항복하지 않고 대항하다 잡힌 자들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손이 있어도 없는 것 같으며 다리가 있어도 다리를 저는 사람과 같다, 들어라 우리가 너희에게 왔다, 너희 백성 가운데 투항한 사람은 옛날처럼 살 것이고 투항하지 않는 사람들은 죽일 것이다.” <고려사 고종 18년(1231)> 사실상 항복이나 다름없는 화친
- 당시 처참한 상황의 기록 “달단(몽골족)의 완악한 종내기가 이유 없이 국경을 침범하여··· 경기에 이르러 사방을 유린하되 마치 범이 고기를 고르는 것처럼 하니 백성들이 겁박을 당해 죽는 자가 길에 낭자합니다.”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전집 제25권>
- <이익주 교수의 분석> 당시 고려군은 귀주성 · 자주성 · 충주성에서 승리를 거두지만 몽골군의 침략을 막지 못한 고려, 몽골군이 3개의 부대로 나뉘어 고려를 침공하는데 선발대가 의주에서 빠르게 남하하여 충주 · 청주까지 남하하고 뒤를 이어 사르탁이 지휘하는 본진이 서해안을 따라서 안북부에서 고려의 3군을 격파하고 서경 · 개경의 수도를 포위, 또 하나의 부대는 의주에서 내륙 쪽으로 귀주 · 자주를 침공하는데 1231년 8월~12월 까지 4개월 만에 개경을 포위한 몽골군 <몽골군의 1차 침입 경로, 윤용혁(고려 대몽항쟁사 연구)>
〇 고려, 몽골과 화친을 맺다
- 이런 상황에서 서신을 보내 고려에 항복을 요구한 몽골, 결국 고려 조정은 몽골과의 화친을 선택하고 사신을 통해 공물(금·은·비단)을 보내고 몽골을 상국으로 섬길 것을 약속하고 화친을 맺으면서 고려에 72명의 다루가치를 설치하면서 1232년 1월에 철수한 몽골군
- 다루가치란?
다루가치는 몽골의 관직 이름으로 몽골의 정착지를 관리 · 감독하고 내정간섭을 하기 위해 파견한 관리인데 인구에 비해 넓은 지역을 통치하게 된 몽골은 소수의 관리를 파견해 직접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통치체계를 감시 · 감독하게 하는 것
- 다루가치를 비롯해 고려에 무리한 요구를 한 몽골은 육사(六事)라는 6가지 복속 조건을 요구 ① 인질을 보낼 것 ② 민호(民戶)를 조사해 호적(戶籍)을 보고할 것 ③ 지원군을 보낼 것 ④ 군량미를 보낼 것 ⑤ 역(驛)을 설치할 것 ⑥ 다루가치를 배치할 것, 그리고 상황에 따라서 고려 국왕의 친조(親朝)까지 요구하여 마음대로 고려를 지배하겠다는 의지
- 이것이 당시 몽골이 정복지역에 공통적으로 요구했던 사항으로 몽골이 생각한 속국관계는 전쟁을 하면서도 고려에 항복을 요구하면서 여러 가지 조건을 내세우는데 사르탁의 요구 ① 말 2만 필 ② 군복 백만 벌 ③ 수달가죽 2만장 ④ 왕족과 관인의 아들 · 딸 각 천 명을 인질로 보낼 것으로 아이들은 고려의 배신을 막기 위한 안전장치
- 몽골의 요구에 대한 고려의 대응?
협상을 통해 공물을 줄인 고려 ① 수달 가죽은 천 장 ② 왕족과 관인의 아들 · 딸은 각 오백 명의 조건으로 일단 화친을 맺고 말 170필과 수달 가죽을 보내는데 “온 사방을 샅샅이 뒤져··· 겨우 (수랄 가죽) 977개를 바치니 너그럽게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또한 인질문제는 “우리나라는··· 오직 한 사람의 정실과 혼인할 수 있으므로··· 소생이 많지 않습니다, 그 자제들을 모조리 상국으로 보내면 누가··· 상국을 받들겠습니까?” <고려사 고종 19년(1232)>
〇 고려의 히든카드, 천도(遷都)
- 몽골과 화친을 맺은 고려, 다른 계획이 있었나?
당시 최고의 권력자였던 최우를 중심으로 거론된 은밀한 계획(?) 몽골군이 철수하고 “(음력 2월 20일) 재추들이 전복사에 모여 도읍을 옮기는 것을 의논하였다.” <고려사 고종 19년(1232)>
- 고려가 천도를 결심한 이유?
<이익주 교수의 분석>은 고려가 수도를 옮기려고 한 것은 몽골과의 화친을 깨고 항전을 도모하기 위한 것, 고려를 복속시키기 위해 다루가치를 설치한 몽골, 천도는 다루가치의 감시로부터 벗어나는 방법, 실제로 72명의 다루가치를 공격한 고려는 천도와 동시에 몽골과의 전쟁을 각오한 것은 아닐까?
- 고려가 천도하려 한 곳은? 그리고 왜?
천도의 후보지는 강화도, 섬이 수도가 된 것은 우리 역사상 처음이지만 1231년 12월 몽골과 화친을 협상하며 수도로 거론된 강화도 “승천부 부사 윤인 · 녹사 박문의가··· 최우에게 말하기를 강화는 난을 피할만합니다, 하였다.” & “최우가 그 말을 믿고 두 사람을 시켜 먼저 가서 살펴보게 하는데···” <고려사절요 고종 18년(1231)> 항전의 수도로서 지리적 이점을 가지고 있었던 강화도
〇 걸어서 강화 속으로···
- 김포시에 위치한 대명항, 바다 건너 강화도가 한 눈에 들어오는데 강화초지대교를 건너면 자동차로 3분 거리, 몽골의 침입을 피해 개경을 떠난 고려인들 그들은 왜 강화도로 향했던 것일까? “한 50여 년 전에는 여기서 물 내려가는 소리가 광성보에 부딪혀서 8Km까지 소리가 들릴 정도로 물살이 셌다” 는 <최영필, 김포어촌계장의 증언>
- 물살이 셀 때는 어느 정도였나?
소용돌이가 생겨 그 중심으로 사람이 빨려 들어갈 정도로 셌기 때문에 경험 많은 어부들도 잠시 피해 쉬어갔다는 물길, 폭이 좁아 물살이 빠른 손돌목에는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는데 고려 고종이 몽골의 침입을 피해 강화도로 천도할 때 바로 이곳에서 손돌이 모는 배를 타고 강화도로 건너가는데 물살이 너무 세서 위협을 느낀 고종이 첩자와 내통한 것으로 오해하여 손돌을 죽일 것을 명하는데 손돌은 “저 하나 죽는 것은 문제가 없습니다만 임금님은 무사히 건너야 하니 내가 바가지를 띄울 테니 바가지를 따라가면 강화도에 도착할 것입니다.” 손돌의 말대로 무사히 바다를 건너간 고종
- 고려 궁지(사적 제133호)는 강화도에 도착해 새로 궁궐을 지은 터로 지금은 그 자리에 조선시대 건물인 외규장각만 남아있는데 1232년에 천도해서 1270년까지 39년을 머물다 개경으로 돌아가는 고려는 이곳을 개경과 똑같이 만들기 위해 뒷산인 북산을 송악산으로 바꾸고 내성·중성·외성을 쌓아 몽골의 침입에 대비하고 원래는 토성(土城)이었으나 조선시대 석성(石城)으로 만들어진 강화산성(사적 제132호)은 내성이 있던 곳
- 손돌목의 전설은 역사적 사실인가?
손돌목의 전설은 안타깝게 사실이 아닐 것, 왜냐하면 당시 고종의 행적을 보면 “(음 7월 6일)왕이 개경을 떠나 승천부에 도착했다.” <고려사 고종 19년(12312)> 승천부는 강화도의 북쪽으로 다음 날 강화도로 들어가는데 손돌목은 강화도의 동쪽으로 김포 쪽 에서 들어오는 길이어서 <이익주 교수의 분석>은 몽골의 침입으로 천도를 단행한 다급한 상황에서 거리가 훨씬 먼 김포 쪽까지 돌아가지 않았을 것이어서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
- 그래서 손돌목 전설은 고려 때 고종이 아니라 조선시대 정묘호란으로 피난을 갔던 인조(仁祖)의 이야기(?) 손돌목 전설의 핵심 포인트는 강화도 앞바다는 물길이 세고 빠르다는 것으로 바로 이점이 강화도의 전략적 가치
- 강화도의 전략적 가치
① 조수간만의 차 최고 9m ② 섬주변의 물살이 빠름 ③ 복잡한 해안선 ④ 엄동설한에도 얼지 않는 바닷물 ⑤ 한강·예성강·임진강이 연결되는 교통의 요지 ⑥ 넓은 면적으로 섬 안에서 식량조달 가능, 그러나 거리가 가깝다는 것은 적을 방어하는데 치명적 단점, 하지만 짧은 폭의 바다를 건너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닌 것이 고려 수군이 강화도를 지키고 있어 공격하기 어려워 당시 이규보는 “천 만의 오랑캐 기병 새처럼 난다해도 지척의 푸른 물결 건너지 못하리···”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전집 제18권> 장기전에 유리한 천혜의 요새라는 것
〇 강화 천도, 찬성 VS 반대
- 천도에 대한 반응은?
부정적 의견이 지배적으로 천도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닌 것, 당시 권력을 잡고 있던 최우도 반대 여론을 억누르지 못하는데 최우와 고위 관료들은 여러 차례(1232년 2월·5월·6월) 천도에 대해 논의를 하며 계속 설득해 나가는 과정을 거친다.
- 또한 고종의 태자시절 스승이었던 유승단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은 도리에 맞는 일이니 예로써 섬기고 믿음으로 사귄다면 저들이 무슨 명분으로 우리를 괴롭히겠습니까? 도성과 종묘사직을 내팽개치고 섬에 숨은 채 구차하게 세월을 보내면서 변방의 백성과 장정들을 적의 손에 죽게 만들고 노약자들을 노예로 잡혀가게 하는 것은 국가를 위한 원대한 계책이 아닙니다, 하며 반대했으나···” <고려사열전 유승단>
- 300여 년간 수도로서 기반을 다진 개경 “국기가 태평한지 이미 오래되니 개경의 호수가 10만에 이르고···” <고려사절요 고종 19년(1232)> 대략 50만 인구의 터전이었던 개경, 그래서 개경의 전체 인구가 강화도로 이주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
- 찬반의 의견대립을 종결지은 사건?
1232년 6월 “최우가 재추들을 그 집으로 모아 천도할 일을 의논하였다.” 하지만 찬성과 반대의 의견대립에 부딪힌 고위 관료들, 그 때 “야별초 지유 김세충이 문을 밀치고 들어가 힐문하기를 개경은 태조 때부터 지켜온 것이 무려 200년이 되었다··· 이를 버리고 가면 장차 도읍할 땅이 어디냐고 하였다.” & “최우가 성을 지킬 계책을 물으니 김세충은 대답하지 못하였다.” <고려사절요 고종 19년(1232)> 결국 태집성은 김세충의 목을 베어 죽일 것을 청하고 결국 처형당한 김세충
- 천도를 반대한 김세충은 어떤 인물?
김세충에 대한 기록은 이것이 유일한데 김세충의 관직은 야별초 지유로 하급 지휘관, 야별초는 최우가 도적을 막기 위해 조직한 특수부대로 삼별초를 구성하는 핵심부대로 김세충은 최우의 핵심세력으로 재추들이 회의할 때 밖에서 호위하고 있었던 것
〇 강화도 천도를 위한 자작극?
- 그런 김세충이 최우에게 반기를 든 것은 미리 계획된 연극(?) 많은 사람이 반대한 강화 천도를 김세충을 죽임으로써 반대 의견을 잠재워 강화 천도를 단행하려는 최우의 계획일 수도 있다는 <최태성 선생의 생각>
- 갑자기 등장한 김세충, 그리고 확실한 것은 김세충 사후 “사람들은··· 천도를 곤란하게 생각하였으나 최우를 두려워하여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다.” <고려사절요 고종 19년(1232)>
- 1232년 6월 김세충을 죽인 뒤 바로 강화도로 천도하는데 마침 이때가 장마철 “장맛비가 열흘이나 계속 내려 진흙이 발목까지 빠져서 인마(人馬)가 쓰러지곤 하였다, 고관이나 양가의 부녀자들이 맨발로 짐을 이고진 채 길을 떠났으며···” 이것은 얼마나 다급한 상황이었는가를 상상할 수 있는 상황 & “환과고독(鰥寡孤獨)으로서 갈 바를 잃고 통곡하는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고려사절요 고종 19년(1232)> 아비규환 피난길의 모습
〇 강화 천도, 작전? 도피?
- 최우가 강화 천도를 감행한 이유?
그래서 지금까지도 학계에서는 작전 VS 도피로 논란이 되고 있는 강화 천도, 작전이라고 보는 쪽은 강화 천도는 항전 의지를 표명한 것으로 항전을 강조하는 입장이고 도피라고 보는 쪽은 최우가 자신의 안위와 정권을 지키기 위해 도피한 것, 또한 이런 지적을 가능하게 한 이유 하나는 초적(草賊)과 백성들의 반란에 위협을 느끼고 천도한 것
- 몽골의 1차 침입 당시 3군을 편성해 전면전을 펼치다 참패한 고려, 전면전보다는 게릴라전이 유리하다고 판단하여 고려는 전략으로 <산성해도입보책>을 선택하는데 백성들을 산성 및 섬으로 들어가게 해 몽골의 기병을 막을 수 있게 하는 사실상의 방법으로 강화 천도 역시 산성해도입보책의 일환으로 볼 수 있는 것
〇 고려의 아트 예고
- 고려의 강화 천도, 몽골의 반응은?
고려가 강화도로 천도한 후 1232년 8월 몽골이 2차 침입을 해오고 강화도를 정벌하려 한다. “적이 배를 만들어 (강화도로)쳐들어가려고 하였다.” & “그 때 변려가··· 붙잡혀 적이 길을 물으면서 단근질까지 하였으나 물길이 매우 험하여 배를 타지 못한다고 답하였더니 적이 그것을 믿고 배를 불사르고 물러갔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54권>
- 1232년 9월에 오고간 서신 “그대들은 교묘한 말로 설득하여 우리가 철군한 후 갑자기 변하여 섬으로 들어가 버렸다, 너희가 진심으로 투항하겠다면 섬에서 나와 나를 맞이할 것이요, 진심으로 투항하지 않는다면 군대를 보내 우리와 싸우자.” <고려사 고종 19년(1232)>
- 몽골의 선전포고에 대한 고려의 반응은?
위에 대한 답신 “우리나라가 도읍을 깊고 치우친 땅으로 옮긴 것은 본래 상국의 명령이 아니었으므로 진실로 꾸지람이 없을 수가 없기 때문에 두렵고 부끄러워서 때에 맞춰 찾아가 뵙지 못하였을 뿐이지 투항하고자 하는 마음은 하나이며 어찌 두 마음이겠습니까?” & “비록 섬에 숨어있으나 오히려 꿈에서도 마음은 폐하의 조정에 있습니다.” <고려사 고종 19년(1232)> 언어의 연금술사 고려, 마음만은 항상 거기 있어요! 라는 것
〇 몽골이 강화도를 침략하지 않은 이유?
- 몽골의 2차 침입, 육지의 상황은?
고려의 땅 곳곳을 공격한 몽골군, 하지만 고려 조정이 있는 강화도는 공격할 생각은 하지 않고 강화도에서 나올 것을 요구한 몽골, 당시 몽골은 세계 최강국이었는데 강화도를 침략할 힘이 없었을까? 몽골의 주력부대는 기마부대로 수전(水戰)에 약했던 것은 아닐까?
<이익주 교수의 분석> 몽골이 수전(水戰)에 약했다면 대제국을 건설하지 못했을 것, 일본과 베트남을 침략할 때는 배를 이용했고 당시 몽골은 일정한 패턴으로 정복지역에서 군대를 징발해 다른 나라와의 전쟁에 이용했는데 실질적으로 병자호란 때 명나라 출신 수군을 활용해 강화도 점령에 성공한 청나라
- 몽골은 왜 강화도를 공격하지 않았을까?
고려를 침략한 몽골의 병력은 겨우 몇 백 · 몇 천 명으로 전 국토를 헤집고만 다니지 점령하고자 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거의 노략질 수준, 고려를 침략한 몽골의 진짜 목표?
처음부터 몽골의 침략 목표가 그것이 아니었다는 것으로 몽골의 주 점령 대상은 금 · 남송으로 고려와 일본을 견제해 금(金) · 남송(南宋)과의 연합을 막는 것이 고려 침략의 목표
〇 전쟁에 시달린 고려 백성들의 삶
- 고려 백성들의 삶?
백성들은 산성과 섬으로 대피해 몽골에 대항하는데 고려 백성의 삼중고는 식량과 식수부족 · 세금 마련 · 몽골과의 전쟁 등으로 고충을 겪게 되고 중앙군은 주로 강화도 방어에 주력했던 것으로 몽골의 1차 침입 때 전면전을 치르다 패배한 고려군은 몽골군과의 전면전을 피해 강화도 수비에 전념하여 몽골과의 전쟁을 고스란히 떠안은 백성들 “몽골군이 춘주성(봉의 산성)을 몇 겹으로 포위하여··· 여러 날을 공격하였다, 성(城) 중의 우물이 모두 말라서 소와 말을 잡아 피를 마시는 등···” <고려사절요 고종 40년(1253)> 그래서 고려 조정에서는 세금을 감면하고 곡식을 나눠주기는 하지만 역부족인 상황
- 분노하고 안타까운 것은 피폐한 백성들과는 달리 풍족한 삶을 누린 최우 “최우가 소나무와 잣나무를 많이 뽑아다가 정원 안에 옮겨 심었는데··· 그 정원의 숲이 몇 십리에 뻗쳤다, 마침 그때 혹독한 추위가 닥쳐 인부들 가운데 얼어 죽는 사람이 생기자··· 어떤 사람이 승평문에 방을 써 부치기를 사람과 잣나무 가운데 어느 것이 중한가? 하였다.” <고려사 열전 최이(최우)>
- 뿐만 아니라 강화 천도 후 끊임없이 연회를 즐긴 최씨 정권 “비단 장막과 능라 휘장을 둘러친 후 그 가운데 그네를 매달아 수놓은 비단과 화려한 조화로 장식하였다, 산봉우리 모양의 얼음을 담은 큰 화분 네 개를 설치했는데 그 화분은 모두 은테를 두르고 나전으로 장식했으며 큰 항아리 네 개는 십여 종의 이름 난 꽃을 꽂아 보는 사람들의 눈을 황홀하게 하였다.” <고려사열전 최이(최우)>
- 그래서 강화 천도 이후 수많은 민란이 발생하고 심지어 너무 힘들자 “관리들이 백성들의 재물을 마구 침탈해··· 백성들이 고통을 견디지 못해 도리어 몽골군의 침략을 환영했다.” <고려사 고종 43년(1256)>
- <이익주 교수의 생각> 최우를 비롯한 권력자들의 사치스러운 행동은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한편으로는 항전대책을 마련하는데 몇 개의 군·현 사람들을 한 성에 모으고 산성방호별감을 파견하여 수령들을 지휘해 몽골에 항전하고 전쟁이 소강상태에 접어들자 백성들을 본고장으로 돌려보내고 구휼을 하는데 결과적으로 몽골을 상대로 30년간 맞서 싸운 고려의 항전의지 자체는 높이 평가받아야 된다는 것
- <신병주 교수의 생각> 몽골의 위세에 중앙아시아 · 러시아와 유럽 일부 지역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지던 시대에 몽골의 군사력에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저항한 고려, 만약 고려가 몽골에 항복했다면 안타까운 역사가 됐을 것
- 후대에 평가를 할 때는 잘잘못을 따지고 이분법적으로 생각하기 쉬운 역사적 평가, 하지만 만약에 우리가 800년 전에 이 상황이었으면 어떻게 했을까? 한쪽에서는 범이 고기를 마음대로 고를 수 있는 침략이 있고 막을 수 있는 군사력은 없을 때 어떻게 행동했을까? 현재 우리의 생각과 기준으로 역사를 평가 하지 말고 당시 상황 속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판단이 무엇이었는가? 를 고려해야 한다는 <이익주 교수의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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