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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의 이복동생, 정명공주

mkpark2022 2016. 4. 4. 22:22

 

 

 

광해군의 이복동생, 정명공주

 

 


개요

- 1603519일 정릉동 행궁, 정비(正妃)의 소생으로 태어나 사랑을 받던 어린 시절, 하지만 6살 때인 1608, 아버지 선조(宣祖)가 승하하고 5년 후인 1613년 급변한 정치상황으로 역모의 주모자로 지목돼 처형당한 외할아버지, 9살 남동생은 유배지에서 목숨을 잃고 피바람이 불면서 남은 것은 인목대비인 어머니와 나, 두 사람 뿐 나는 광해군의 이복동생 정명공주이다!”

- 정명공주는 누구? <신명호, 부경대학교 사학과 교수>

역사 속에서는 익숙한 인물이 아닌 정명공주, 최근 드라마 <화정>의 주인공으로 화정(華政)9살 때 정명공주가 쓴 글씨로 힘과 기세가 느껴지는 글씨로 원래는 각각 8자의 글로 그 일부인 화정(華政)은 막내아들이 물려받은 두 글자

- 선조(宣祖)가 정명공주를 사랑한 이유는?

선조(宣祖)는 후궁과의 사이에서는 여럿의 아이가 있었고 그 중의 하나가 광해군, 하지만 선조(宣祖)의 정비(인목왕후 김씨)가 낳은 첫 아이였던 정명공주, 의인왕후 박씨는 자식이 없이 사망하고 인목왕후 김씨가 1603년에 정명공주와 영창대군, 그리고 후궁 공빈 김씨가 1575년에 광해군과 그 전() 해에 임해군을 출생하게 되는데, 선조(宣祖)의 나이 52세에 정명공주를 얻게 된다.

- 공주를 얼마나 사랑했는지는 <봉작(封爵)>에서 알 수 있는데, <봉작>은 왕족·공신 등에게 관직을 책봉하는 것으로 일정한 나이가 되어야 가능했던 봉작, 봉작 전()에는 아기씨로 불렸던 왕의 자식들로 일반적으로 공주는 8살 이전 · 대군은 7살 이전에 봉작을 하게 되는데 정명공주는 두 살 때 봉작을 하게 된다.

- 봉작과 함께 정명공주가 받은 재산은 400만 평 토지의 수조권으로 여기에서 나온 세금이 약 1천 석으로 두 살 때 천석꾼이 되고, 정명공주를 얻고 3년 뒤에 영창대군을 얻게 되는데, 선조(宣祖)의 나이 55세로 늦둥이 비결은 어의(御醫) 허준의 덕분(?)

 

정명공주의 탄생과 광해군의 고뇌

- 인목왕후의 임신소식을 들은 광해군의 심정은?

광해군의 장인인 유자신이 인목왕후의 임신소식을 듣고 중전을 놀라게 하여 낙태시키려 하였다.” <계축일기> 이런 방해에도 불구하고 무사히 태어난 정명공주

- <계축일기>는 인목왕후의 임신부터 계축옥사까지 당시의 궁중 비화를 기록한 글로 작자는 미상(未詳)이나 인목왕후에게 편향된 시각을 보이는 것으로 보아 작자(作者)는 인목왕후의 궁녀로 추정

- 정비(正妃) 소생의 영창대군에 대한 선조(宣祖)의 사랑은?

빨리 봉작하는 대신 공주보다 많은 재산을 물려준 선조(宣祖), 세금을 걷을 수 있는 수조권이 아닌 토지 소유권을 준 선조(宣祖), 광해군의 아버지에 대한 의심은 엄청났을 것

 

선조(宣祖)의 유언이 불러온 파장

- 광해군에게 정명공주와 영창대군을 부탁하며 형제 사랑하기를 내가 있을 때처럼 하고 참소(讒訴)하는 자가 있어도 삼가 듣지 말라.” <선조실록 160821> & 신하들에게 따로 유언을 남긴 선조(宣祖) “대군이 어린데 장성하는 것을 보지 못하게 되었으니 이 때문에 걱정스러운 것이다. 내가 불행하게 된 뒤에는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기 어려운 것이니 만일 그릇되고 간사한 말이 있게 되면 원컨대 공들이 소중히 보호해주고 지켜주기를 바란다.” <광해군 일기 정초본 160822>

- 문제가 되는 것은 선조(宣祖)가 남긴 마지막 유언을 인목대비는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인계하게 되어 정국에 파장을 일으키게 되는 것으로 광해군이 못미더워 신하들에게 따로 유언을 남긴 선조(宣祖), 아버지가 죽으면서 너는 못 믿겠다, 한 것을 동네방네에 소문을 낸 것으로 유언의 공개로 분노와 위협을 느꼈을 광해군에게 영창대군은 왕권에 대한 위협이자 아버지의 사랑을 빼앗아 가는 경쟁자 같은 존재였을 것

- <계축일기>에는 왕인 형이 보고 싶어 정명공주와 영창대군이 함께 궁궐에 갔는데, 정명공주만 예쁘다고 안아주면서 영창대군에게는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자 나도 차라리 여자로 태어났으면 사랑을 받았을 텐데하기도···

- 정명공주를 귀여워한 광해군은 진심?

광해군은 영창대군을 미워하는 마음 때문에 죄의식을 가졌을 것이고 그 죄의식을 정명공주를 예뻐함으로써 해소했을 가능성이 있는 것(?)

 

광해군과 인목대비의 갈등

- 16133월 조정을 뒤흔든 역모사건이 일어났는데 정명공주의 외할아버지 김제남을 의심한 광해군, 인목대비는 여기 내 머리털을 베어서 증표로 줄 터이니··· 내 아버님과 동생을 놓아주소서.” <계축일기> 하지만 그 간절한 마음은 오라버니에게 닿지 못했다.

- 이 사건으로 외가는 풍비박산 나고 강화도로 유배된 동생 영창대군과 헤어진 지 열 달, 청천 벽력같은 소식이 들려오는데 동생이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것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 어머니와 내 앞엔 또 다른 인고(忍苦)의 시간이 기다리고 있었다.

- 그 당시 정명공주의 나이는?

1613년 계축옥사 때 11, 그리고 1614년 영창대군 사망 때는 12살로 고통스러워하는 인목대비를 지켜보는 정명공주 역시 광해군을 원망했을 것으로 귀여움을 받았던 만큼 광해군에게 느끼는 배신감도 컸을 것

- 정명공주에게는 상당한 혼란을 겪고 있던 시기로 자신을 둘러싼 정치적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사건, 당시 공포의 대상이었던 천연두로 정명공주가 위독하고 뚜렷한 치료방법이 없던 천연두는 발병 시 금기사항이 많았던 질병 번잡하고 시끄러운 것 자극적인 것 제사·초상집·연회장 출입 차고·달고·시고·짜고·맵고·쓰고·비린 음식, 천연두에 걸리면 먹지 말아야 할 음식이 너무 많아 부실한 영양으로 목숨을 잃는 환자가 다수 발생하게 된다.

- 그런데 인목대비 전(殿) 궁녀 한 명이 천연두 금기사항을 어기게 되는데, 궁녀가 금기 사항을 어긴 이유는? 정보에 의하면 그 궁녀는 광해군 측에 매수된 인물이라는 주장, 그렇다면 마마신을 노하게 하여 정명공주를 죽이려 한 사람은 광해군이었다는 얘기로 광해군은 정명공주의 죽음을 바랐나?

 

인목대비 VS 광해군의 갈등에 희생된 정명공주

- 인목대비 전(殿) 궁녀가 금기사항을 어긴 이유는?

광해군 측의 제거대상은 인목대비로 살아남은 유일한 자식 정명공주의 죽음은 인목대비에게는 큰 타격으로 광해군을 대신해 악역을 맡은 김개시에게 포섭된 다른 궁녀가 금기사항을 어긴 것

- 정명공주 제거에 실패한 광해군의 다음 수는?

1618년 인목대비를 후궁으로 강등시킨 광해군은 인목대비를 어머니가 아닌 역적으로 대한 것으로 지금의 덕수궁 경운궁에 유폐한 광해군, 폐모살제(廢母殺弟)의 시작이었다.

- 어머니 인목대비의 신분강등, 정명공주의 신분은?

인목대비는 역적이라는 이유로 후궁으로 강등된 것, 정식 후궁이 아니라서 궁호도 없었던 인목대비의 서궁은 그냥 서쪽에 사는 여자라는 뜻으로 아버지의 애까지 낳은 여자라서 아주 내쫒지 못하고 살려준 것으로 그의 딸 정명공주도 공주를 서인(평민)으로 강등시키는 것에 대해 유간이 말하기를 공주도 옹주로 낮추는 것이 온당하다고 하였으나 이이첨이 따르지 않았고···.” <광해군 일기 정초본 1618130>

- 후계자를 지명할 수 있는 권한을 가졌던 대비의 지위로 광해군에게는 위협적인 존재였던 인목대비여서 제거계획에 정명공주도 영향을 받은 것이고 인목대비의 유일한 희망인 정명공주이었기에 이를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을 한 인목대비

- 그리고 이때 궁궐 담을 둘러쌓고 파수대를 설치한 다음 무사(武士)를 시켜 지키게 한다.” <광해군일기 정초본 1618130> 두 사람을 가택연금 시킨 것으로 지금의 덕수궁 석어당이 정명공주와 인목대비가 유폐생활을 하던 곳이고 당시 정명공주의 나이 16, 불운한 개혁군주로 널리 알려진 광해군, 하지만 광해군에 의해 불행한 삶을 산 정명공주, 모든 불행은 선조(宣祖)가 뿌린 불행의 씨앗!

- 유폐 이후, 서궁에서는 어떻게 살았을까?

궁핍했던 서궁 생활을 기록한 계축일기, 흥부전 버전으로 까마귀가 박씨를 물어다 줘 박으로 먹을 것을 조달하고 겨울이 지나려면 너무 추워서 햇솜이 없어 추워 벌벌 떨고 있었는데 우연히 면화씨가 섞여 들여왔다. 그것을 심어 씨를 얻더니 많이 피어 솜을 두어 옷을 지어 입었다.” <계축일기> 그 만큼 궁핍했던 생활을 했던 것

 

정명공주의 유폐생활 생존기

- 기약 없는 유폐생활을 정명공주는 어떻게 버텼을까?

유폐기간 동안 서예(書藝)에 매진한 정명공주, 정신적 상처 치유에 도움이 되는 예술 활동으로 유폐시절 선조(宣祖)인 아버지의 글씨체인 한석봉 체를 따라 쓴 정명공주, 인목대비는 정명공주의 글씨를 보며 선조(宣祖)의 피를 이어받은 딸을 위해서라도 살아야겠다는 의지를 되살렸을 듯 정명공주는 붓을 잡고 큰 글자 작은 글자를 써서 인목대비의 마음을 위로하고 풀어드리고자 했다.” <남구만의 약천집>

- 한편 정명공주는 불교의 힘을 빌려 모진 유폐생활을 견딜 수 있었을 것으로 관세음보살보문품경을 열심히 썼다고 하고 <감지은니보문품경>은 정명공주가 유폐시절 감색 종이에 은가루로 쓴 관세음보살보문품경으로 정명공주의 삶에 대한 의지를 엿볼 수 있는 작품, 그러한 강한 정신력이 밑바탕이 되어서 1603~168583세 까지 장수한 정명공주로 희망의 불씨를 꺼뜨리지 않았던 것!

관세음보살보문품경 : 중생이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부르거나 생각하면 그 신통력으로 현재의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불교 경전

 

능양군, 인조반정을 일으키다

- 1623313일 새벽 창덕궁 쪽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얼마 후 서궁을 찾아온 한 무리의 신하들 대비는··· 광해군이 병사를 보내어 변란을 일으킨 것인가 의심하여 문을 잠그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광해군일기 정초본 1623313> 누구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에··· 날이 밝자 조카 능양군이 반정(反正)을 일으킨 것으로 어머니는 36가지 죄목으로 광해군 오라버니를 폐위시키고 어머니와 함께 유폐된 지 5년 만에 마침내 굳게 닫혔던 서궁의 문이 열렸다.

- 인조반정의 대표적 명분은 <폐모살제>어머니를 유폐시키고 동생을 죽였다는 것이 반정세력의 가장 큰 명분으로 만약 인목대비가 살아있지 않았다면 뭔가 구심점이 약한 것으로 반정성공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인목대비,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역사적 그날에 인목대비와 함께 했던 정명공주

 

정명공주의 때늦은 혼인

- 반정(反正) 이후 정명공주의 삶은?

신분과 재산을 회복한 정명공주는 때 늦은 혼인까지 하게 되어 21세에 결혼하게 되는데, 조선시대 21살이면 완전 노처녀! 반정 3일 만에 예조가 아뢰기를 정명공주의 부마간택을 속히 거행하소서 하니 따랐다.” <인조실록 1623316>

- 정명공주의 남편, 부마는 어떻게 골랐을까?

부마도 똑같이 적령기의 총각들은 혼인을 금하고 부마단자를 내는 것으로 정명공주의 부마 간택으로 전국에서 9명이 지원하는데 21살인 정명공주의 신랑감이 될 만한 나이의 남자들은 대부분 혼인했던 것으로 약혼자가 있던 인물을 파혼시키고 부마로 삼는다.

- 정명공주의 부마로 간택된 인물은 홍주원으로 본관은 풍산 홍씨로 조선 중기 4대 문장가 이정구의 외손(外孫)으로 서궁 유폐의 위기를 극복하고 혼인까지 하게 된 정명공주는 밀린 복을 받는 느낌(?)

- 공주는 시집을 가면 시댁(媤宅)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궁방(宮房)이라고 조선시대 대군··공주·옹주 등이 거처하는 집으로 궁궐 옆에 따로 살게 한 조선시대의 공주, 지금의 안국동 풍문여자고등학교 터에 있었던 정명공주의 살림집은 정명공주방 또는 남편의 이름을 붙여서 영안위방이라 불림

 

정명공주의 혼수 <정수환, 한국학중앙연구원 선임연구원>

- 정명공주의 살림집 규모는?

집의 규모는 대군이면 60· 왕자인 군이나 공주는 50···” <경국대전 공전> 이었으나 인조(仁祖)의 파격적인 지원 100~200칸 허용 철근 3천 근 · 목면 15(=500가마) 지원 자재운반 기일을 맞추지 못한 관리 파직

- 살림집 이외의 혼수는?

일체의 살림살이와 편의를 제공받고 조선 최고의 명장들이 동원되어 명품 가재도구를 만들고 당시 최고급 식자재인 꿩고기를 15년 동안 공급하는 등등

- 부마에게 하사된 것은?

1품의 품계와 그에 해당하는 녹봉을 지급받고 절수지라고 해서 일정한 공유지를 떼어 지급받는 토지가 있는데, 절수지를 개간·관리해서 생산물을 받게 되고 정명공주 부부에게 준 절수지가 얼마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으나 경상감사 박문수가 아뢰기를··· 영안위궁의 절수 받은 것 중 도내에 있는 것이 8,076결에 이릅니다.” <승정원일기 영조 4723> 이는 여의도 면적의 약20배 규모로 전국 8도로 치면 엄청난 규모였을 듯

- 엄청난 정명공주의 혼수, 문제가 되진 않았나?

당연히 많은 논쟁과 논란이 있었는데 국가재정에 타격을 입게 되자 백성을 사랑하는 방도는 경비를 절약하는 것입니다. 백성이 전하께서 백성의 생명은 돌보지 않고 한갓 사치만 일삼는 다고 하면 성덕에 누가 됩니다” <인조실록 162584> 조정 신하들의 강한 반대에 부딪힌 인조(仁祖) 심지어 개인의 사재를 털어 주라고 아뢰자 지금 대간이 사재를 써서 도와주라고 말한 것은 매우 모욕적인 말이다.” <인조실록 162678> 전통국가에서는 놀라운 일이 아닌 정명공주의 혼수, 당시 전통시대국가가 그런 모습이었다고 짐작해 볼 수 있는 일

- 인조(仁祖)의 과도한 호의?

정명공주에 대한 인조(仁祖)의 호의는 인목대비를 위한 것으로 반정(反正)의 명분 폐모를 바로잡을 필요가 있었던 인조(仁祖)는 인목대비에 대한 효()를 강조 정명공주 혼인 최대한의 혼수 마련으로 광해군과의 차별화를 부각시키려는 것, 1632년 세상을 떠난 인목대비 그리고 인목대비의 병수발을 들다 건강을 해친 인조(仁祖)는 인목대비 승하 후 초상을 치르면서 더욱 건강이 악화된다.

 

또 다른 위기, 인조(仁祖)의 의심

- 16231023일 의금부에서 국청이 열렸는데, 인조(仁祖)는 자신의 병이 누군가의 저주 때문이라고 의심하면서 저주사건의 주모자로 인목대비 전(殿) 궁녀들을 지목

- 인조(仁祖)가 인목대비 전(殿) 궁녀들을 의심한 이유는?

인조(仁祖)와 인목대비 사이에 뭔가가 있었다는 것을 의심할 수 있는 것으로 결정적인 증거 반고나 주문에 임금을 폐위하고 세우는 것 같았다반고(頒告)는 국내에 반포하는 명령서이고 주문(奏聞)은 중국황제에게 국내 사정을 알리는 보고서왕을 폐위하고 새로운 왕을 세우겠다.’는 의미, 반고와 주문을 작성할 수 있는 사람은 왕과 대비뿐으로 저 당시 인조(仁祖)가 쓴 것이 아니라면 인목대비밖에는···

- 인목대비가 또 다른 반정을 계획했다고 의심한 인조(仁祖) “인조는 측근들에게만 보여주고 얼마 후에 그 글을 가져다 불살라 버렸다.” <선조실록 16321023> 구체적인 내용은 기록되어 있지 않은 실록

- 인조(仁祖)가 문제의 문서를 손에 넣은 경위는?

정말 인목대비가 이 백서를 썼다면 아무렇게나 보관할 리가 절대 없는 것이고 인목대비 승하 후 대비 전(殿)을 뒤져서 찾아냈다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는 것, 그것은 정말로 하늘처럼 모시던 인목대비를 의심하고 있었나? 그리고 의심의 화살은 정명공주로 향하나?

- 인목대비는 정말로 반정을 도모했을까?

실록에는 인조(仁祖)가 불살라버렸다. “어떤 사람은 인목대비가 서궁에 유폐 당했을 때 쓴 것이라고 말하지만 외부사람으로는 그것이 그러한지 아닌지를 알 수 없다.” <인조실록 1632123> 오히려 인조(仁祖) 측에서 조작했을 가능성도 있는 것으로 인조(仁祖)가 인목대비를 견제했음을 보여주는 사건

- 또한 인조(仁祖)의 성품으로는 자작극일 가능성도 있는 것(?)이 정치적 이유로 아들(소현세자) · 며느리(세자빈 강씨)까지 제거한 인조(仁祖), 반정으로 정통성이 취약한 상태에서 왕위에 오른 인조(仁祖)는 같은 방식인 반정으로 왕위를 잃을 것을 우려하여 인조(仁祖)에게는 양날의 칼이었던 인목대비는 자신에게 반정의 명분을 준 사람이자 자신의 왕위를 위협하는 존재

-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것이 인조반정의 명분은 <폐모살제와 숭명반청>, 폐모살제는 인목대비를 추켜세우면 성립이 되지만, 숭명반청은 이미 정묘호란으로 청()에게 항복을 하면서 깨져버린 것으로 반정의 명분이 50%가 넘어간 것, 그 사이 수많은 반란이 일어났는데 반란세력들은 모두 인목대비에게 인정을 받아야 하는 것이어서 정묘호란 전후로 인목대비가 다른 반란세력과 손잡을 것을 두려워한 인조(仁祖)

- 인조(仁祖)가 정명공주까지 의심한 이유? <신명호 교수의 분석>

만약 반정을 꿈꾸는 사람이라면 인목대비를 설득하기 위해 정명공주를 먼저 포섭하려 했을 것으로 인조(仁祖)는 인목대비를 의심하는 한편 정명공주도 의심하고 있었을 것, 인목대비 사후 선조(宣祖)의 유일한 공주로 큰 권위를 갖게 된 정명공주, 혹시 반정세력들과 연계될까 정명공주를 끊임없이 의심하게 되는 것이고 실제로 기묘년(1639)임금이 병이 나서 자리에 누웠는데 궁중에서 저주의 변고가 일어났다··· 대게 임금은 정명공주를 의심한 것이다.” <연려실기술 인조조 고사본말 정명공주> 하지만 증거 불충분으로 흐지부지된 저주 사건

 

위기 속에서 체득한 정명공주의 처세술

- 인조(仁祖)의 의심, 정명공주의 위기 대처법?

문제만 터지면 정명공주를 의심하자 정치에 관심을 두지 않는 정명공주, 서예(書藝)를 그만두고 집안일과 독서에만 몰두, 하지만 남편이나 아들은 남자이고 유명한 서인 가문으로 정치판에 관심이 없을 수 없어 아들에게 글로 80세에 자신의 뜻을 남긴 정명공주 나는 원하건대 너희들이 다른 사람의 허물을 들었을 때, 마치 부모의 이름을 들었을 때처럼 귀로만 듣고 입으로는 말하지 않았으면 한다. 다른 사람의 장점과 단점을 논의하기 좋아하고 정치와 법령을 망령되이 시비하는 것을 나는 가장 미워한다. 차라리 죽을지언정 자손들 사이에 이런 행실이 있다는 말을 나는 듣지 않기 원한다.” <소학 중에서> 그야말로 침묵의 처세술을 알려준 것으로 노심초사하며 살아온 정명공주의 고도의 처세술

- 광해군 그리고 인조(仁祖)에게 처음에는 사랑받다가 나중에는 버림받고 의심받은 정명공주(1603~1685)와 동시대를 같이 산 송시열(1607~1689)은 정명공주의 묘지명을 쓰는데 공주는 부인의 존귀함에 걸맞게 겸손하고 공손하며 어질고 후덕하여 오복을 향유했다.” 고 적는다. 혜경궁 홍씨와 홍국영은 모두 정명공주의 후손

- 정명공주에 관한 전설로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로 피난한 정명공주가 재산이 가득실려 있는 배에 백성들이 서로 타고 강을 건너려 하자 재물을 내리고 백성을 태우고 강을 건넌 정명공주, 밝게 비추는 정치라는 의미의 화정(華政), 정명공주가 바란 화정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비추는 정치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