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실> 제1편 태종(太宗), 노비 장영실을 발탁하다
〇 우리가 아는 장영실
- 조선의 과학자 장영실의 일대기를 담은 <KBS 대하드라마 장영실> 사극에서는 보기 드문 정교한 그래픽으로 조선의 과학기술을 재현하고 탄탄한 스토리와 실감나는 연기로 연일 화제를 모으고 있는 드라마, 하지만 드라마 속 장영실의 파란만장한 삶은 과연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허구일까?
- 오만 원 권 최초 발행 시 최종 모델 후보까지 오른 세 사람은 신사임당 · 김구 · 장영실로 화폐의 모델로 선정이 됐다는 것은 이미 모든 국민에게 인지도가 알려졌다는 의미이고 장영실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자격루, 우리 역사에서 과학자 중 장영실 만큼 업적과 명성이 널리 알려진 과학자는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영실은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하여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는 사실?
- 드라마 장영실의 인기 비결? <정성희, 실학박물관 책임연구원 문학박사>
조선과학사를 전공한 정성희 박사는 드라마 <장영실> 제작진과 함께 전통 천문학에 대해 2달 정도 공부하였다는데 <장영실>의 인기 비결은 ① 배우들의 출중한 연기 ② 과학을 쉽게 설명한 것
- 15세기 조선 최고의 과학자이면서 기술자 장영실, 그는 수많은 천문기구를 만들고 세종(世宗)시대 종3품 대호군에 오르기까지 하지만 과학자의 꿈을 펼칠 수 없었던 장영실, 그는 가장 미천한 신분이었던 노비였기 때문, 그러던 어느 날 장영실에게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는데 그가 왕에게 발탁되는 것이고 그를 알아본 사람은 태종(太宗)이었다.
- 세종(世宗)이 아닌 태종(太宗)에 의해 역사에 등장한 장영실 “장영실은··· 공교한 솜씨가 보통사람보다 뛰어나므로 태종께서 보호하시었고 나도 역시 이를 아낀다.” <세종실록 15년> 장영실은 이미 태종(太宗) 때에 발탁되어 재능이 널리 알려진 듯
- 태종(太宗)의 보호를 받은 장영실 ‘보호’를 발탁으로 봐도 될까?
태종(太宗) 대에 발탁되고 세종(世宗) 대에 능력을 발휘한 장영실은 세종(世宗) 대에 자격루를 비롯한 많은 성과물로 인해 세종(世宗)이 발탁한 것으로 오해하는데, 태종(太宗)은 세종 · 장영실 등 인재를 알아보는 안목이 있었던 듯
〇 노비 장영실, 출생의 비밀은?
- 장영실의 아버지는 서운관 출신 장성휘? 장영실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으나 “장영실은 그 아비가 본래 원나라의 소주·항주사람이고 어미는 동래의 기생이었는데···” <세종실록 15년> & 장영실 아버지의 이름은 실록에는 전해지지 않으나 “장영실은 항주출신인 장서의 9세손이고 부친은 장성휘이다.” <아산 장씨 세보> 학계에서는 세종실록 기록을 받아들이고 있고 요즈음의 다문화가족 출신인 셈
- 장영실 아버지는 왜 중국에서 조선까지 왔을까?
조선 전기 빈번했던 귀화로 국경을 침범해 약탈을 일삼던 여진족, 조선 정부는 이들을 향화(向化)라 해서 귀화를 넘어 문명인으로 교화시키기까지 하는데, 고려 공민왕 때 <이지란의 난>의 이지란은 귀화한 여진족 출신 장군, 귀화정책을 통해 건국 초, 나라의 안정을 도모한 이성계는 조세감면과 관직을 통해 귀화인들을 포섭하고 장영실 아버지 장성휘도 조선의 귀화정책을 통해 조선에 왔을 수도···
※ 이지란(1331~1402) : 고려 공민왕 때 조선으로 귀화한 여진족 장군 출신으로 초명은 쿠룬투란티무르로 청해 이씨의 시조이면서 이성계를 도와 조선 건국에 공을 세움
- 하지만 장영실의 아버지는 여진족이 아닌 중국에서 귀화?
이런 경우 조선으로 귀화한 중국인은 주로 전문 기술자로 예측컨대 장영실의 아버지도 조선에 필요한 기술을 가지고 있어 조선에서 정책적으로 귀화를 시키지 않았을까(?) 당시 부산은 왜구의 침범이 빈번해 무기제조기관이 있었고 무기제조 기술을 지닌 장영실의 아버지가 부산으로 가지 않았을까(?) 귀화정책의 한 가지 방법은 결혼하는 것으로 장영실 아버지 장성휘 역시 동래현의 관기와 혼인해 정착했을 수도···
- 장영실의 출생을 추론할 수 있는 에피소드로 세종(世宗) 때 금 제련 기술을 보유한 중국인 기술자 김새가 북방 이민족에게 포로로 잡혀 있다가 조선으로 도망 오는데, 세종(世宗)은 장영실을 보내 금 제련 기술을 배우게 하지만 돌을 핑계 삼아 기술을 가르쳐 주지 않는 김새 그래서 결국 기생을 아내를 맺어주고 그를 포섭하는데, 김새 이야기를 토대로 장영실 아버지와 어머니의 만남을 추정해 볼 수 있는 것
- 아버지는 귀화인인데 장영실의 신분은 왜 노비일까?
조선의 신분제 사회에서는 양반이나 양인이 관기인 천민 아내와 결혼하는 경우가 많은데, 부모 중 한쪽이 천인이면 소생은 천인이 되는 것
- 당시 노비들의 삶은 어땠을까?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하고 말하는 도구에 불과했던 조선의 노비는 매매·상속·증여의 대상으로 조선 초기 말 한필이면 노비 두 명을 살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 장영실처럼 노비가 과학자가 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것으로 노비 장영실이 태종(太宗)에게 발탁된 건 기적!
〇 장영실, 태종(太宗)의 눈에 든 이유
- 태종(太宗)은 장영실을 어떻게 발탁했나?
건국 초, 많은 인재가 필요했던 조선은 도천법이라는 각 지방을 다스리는 관찰사들이 우수한 인재를 중앙에 추천하는 제도가 있었는데, 물론 기록에는 없지만 도천법을 통해 장영실이 상의원에 근무하게 됐을 것이고 상의원은 기물과 장식품도 제작했기 때문에 기술이 뛰어난 사람을 등용했을 것으로 세종(世宗)과 더불어 장영실의 후견인 역할을 했던 이천이 장영실의 능력을 알아보고 이끌어 줬을 것
※ 상의원(尙衣院) : 조선시대 국왕과 왕비의 의복을 만들고 궁내의 재화를 관리·공급하던 관청 & 이천 : 조선 초기 무신·과학자로 금속활자에 조예가 깊어 인쇄술 발달에 크게 공헌
- 태종(太宗)과 장영실은 어떻게 만났을까?
아쉽게도 기록이 존재하지 않고 손재주와 사물의 원리를 이해하는 능력이 뛰어났던 장영실에 대한 소문이 태종(太宗)의 귀에 들어간 것이 아닐까(?) 로 추측
〇 조선 최대의 우주쇼, 구식례(救食禮)
- 1406년 6월 6일, 일기예보를 담당하는 서운관 박염이 일식(日蝕)을 예보하자 왕실에서는 구식례를 준비하는데, 서운관 박염의 일식예보는 빗나가고 분노한 태종(太宗)은 박염을 동래로 귀향을 보내라고 명하는데, 요즈음도 눈 예보가 빗나가면 난리 듯이 당시는 더했던 것이 태양은 곧 왕이고 왕은 하늘의 질서를 꿰뚫고 있어야 하는 존재로 왕에게 일식(日蝕)을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은 필수!
- 구식례(救食禮)란?
달에 의해 사라진 해를 다시 구해내는 의식으로 예전에는 일식현상을 천문학적으로 이해하지 않고 음(陰)인 달이 양(陽)인 해를 가리는 현상으로 이해를 했던 것으로 달은 신하이고 해는 왕을 가리켜 일식(日蝕)은 신하가 왕을 해(害)하는 부정적 현상으로 해석하고, 또한 일식(日蝕)은 왕이 부덕해서 생기는 것으로 인식했기 때문에 발생하지 않는 것이 좋지만 만일 발생하게 되면 빨리 원상대로 복구하는 것이어서 구식례를 통해 달을 향해 병사들이 활을 쏜다든지 하여 일식(日蝕)을 해소하려고 노력했던 것
- 하늘의 움직임에 유독 민감하게 반응한 태종(太宗),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태종(太宗)이 왕위에 오르기 위해 수많은 피를 손에 묻혀 하늘을 두려워했던 것
〇 장영실을 발탁한 태종(太宗)은 누구?
- 1398년 조선에는 피바람이 부는데, 이방원이 왕자의 난을 일으킨 것으로 당시 실권자인 정도전을 제거하고 이복동생인 방석 · 방번을 죽이고, 이후 왕위계승에 불만을 품은 친형 방간이 일으킨 2차 왕자의 난을 제압하고 자신의 손에 수많은 피를 묻히면서 권력을 찬탈한 이방원은 1400년 마침내 조선의 3대 왕 태종(太宗)에 오른다.
- 권력을 위해 거침없이 칼을 휘두른 태종(太宗)의 이미지는 무인 · 킬러이지만 태조(太祖) 이성계의 아들 중 유일하게 문과에 급제한 이방원은 성균관에서 수학하며 고려 말 명나라 사신으로 간 적이 있는 어떤 면에서는 문·무를 겸비한 인물! 기록으로 보면 실제로는 체격이 크지 않지만 건강한 무인 이미지가 강한 태종(太宗)은 기록된 것과 기억하고 싶은 것의 차이에서 오는 것
- 하늘에 관심이 많았던 태종(太宗)?
태종(太宗) 때에는 천문과 기상이변에 대한 기록이 상당히 많은데, 한편으로 보면 태종(太宗)이 그런 부분에 상당히 민감했다고 볼 수 있고 특히 천둥과 벼락이 치면 두려움에 떨었다는 실록의 기록들이 있으며 천둥이 치면 서운관에서 바로 보고하도록 하고 보고하지 않으면 벌을 내린다든지 하여 천재지변 기상이변을 두려워 한 태종(太宗)
- 1416년에는 기근이 들자 태종(太宗)은 내가 부덕해서 그런다며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고 “신하들이 어떤 조언을 해도 모두 듣겠다며 심지어 나더러 삭발을 하라 하여도 내가 마땅히 따르겠다.” <태종실록 16년> 조선시대에는 부모에게 물려받은 머리카락 한 올도 소중히 여겼다는데 왕이 삭발까지 한다는 것은 하늘에 민감한 것을 넘어서 하늘을 두려워한 태종(太宗)
〇 역사심리학으로 읽는 태종(太宗) <문철영, 단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 하늘을 두려워했던 태종(太宗)의 심리는?
태종(太宗)은 왕위에 오르기 위해 피바람을 일으킨 인물로 충격적인 것은 고려 말 충신인 정몽주를 1392년에 격살시키는데, 물론 이때 정몽주를 치지 않았다면 조선 건국은 없을 수도 있었겠지만, 정몽주의 격살을 아버지인 태조(太祖)가 반길 줄 알았지만 칭찬은커녕 오히려 아버지에게 꾸짖음을 받은 태종(太宗) “너희가 마음대로 대신(大臣)을 죽였으니 내가 사약을 마시고 죽고 싶은 심정이다.” <태조실록 1권 총서> 그래서 조선 개국 전후로 태조 이성계에게 소외당하고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당한 태종(太宗)
- <문철영 교수의 분석> 이방원의 마음속에서 자라난 증오와 소외감이 아버지를 왕위에서 끌어내리고 형제를 살육하는 패륜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으로 조선왕조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부자지간의 갈등, 태종(太宗)도 아버지와의 갈등 극복을 위해 몸부림 쳤을 것
- 실제로 태종(太宗) 6년인 1406년 8월에 궁궐에 나타난 부엉이 울음소리에 불안함을 느낀 태종(太宗)은 병사들에게 귀신을 쫓는 <방상시탈>을 쓰고 궁궐을 지키라고 명하는데 실록에 부엉이가 처음 등장하는 시점은 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난 지 보름 후, 이성계가 사랑하는 아들 방번과 방석을 잃어버린 기억이 생생한 시점에 밤중에 마치 아기울음소리 같았던 부엉이 울음소리 “밤에 부엉이가··· 울어 상왕이 북쪽 양정으로 옮겨가서 거쳐하였다.” <태조실록 7년> 어쩌면 태종(太宗)은 부엉이 소리만 들어도 <살인의 추억>을 떠올릴 수밖에 없는··· 그래서 자기 내면에 존재하는 죽음과 죽임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을 것
- 신하에게 말하기를 내가 여기까지 온 것은 하늘이 도운 것이지만··· “안으로는 부왕의 책망을 받고 밖으로는 민심이 흉흉하니···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두려워 할 뿐이다.” <태종실록 1년> 하늘을 잘 읽을 수 있는 인재가 필요했기에 장영실을 눈여겨보지 않았을까?
-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가뭄이 일어났을 때 하늘이 분노한 것이라고 말한 태종(太宗), 하늘이 기분 좋으면 상을 주고 화가 나면 벌을 주는 인격체적인 존재로 생각하고 지금까지 하늘이 나를 도와 여기까지 왔는데, 이제 하늘이 날 버리는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에 전전긍긍했던 것으로 아버지 이성계를 하늘에 투영하고 그 하늘로부터 버림을 받을까 봐 두려움에 떨었을 것이고 이러한 태종(太宗)의 불안한 심리를 이해하는데 역사심리학이 필요한 것
〇 노비 장영실, 명나라로 유학가다!
- 1421년 동래현의 관노에서 궁궐 상의원의 노비로 일하던 장영실은 주변의 인정을 받으며 더욱 천문연구에 매진을 하던 어느 날, 세종(世宗)의 부름을 받는데 노비였던 장영실이 명나라 유학을 가게 되는 것으로 그가 일생일대의 기회를 얻게 되는 순간이다.
- 결국 장영실에게 유학의 기회를 준 건 세종(世宗)?
하지만 1421년 이면 태종(太宗)이 상왕으로 지내던 시기로 궁극적으로는 태종(太宗)의 의중이 반영됐을 것, 이를 뒷받침하는 것이 당시 왜구의 소굴인 대마도 정벌도 세종(世宗)의 업적으로 알고 있으나 사실은 당시 상왕이었던 태종(太宗)의 작품으로 1418년부터 1422년까지는 상왕 태종(太宗)이 주요한 현안에 직접 관여하는데, 태종(太宗)이 장영실을 발탁했다는 것을 고려했을 때 장영실의 명나라 유학에도 관여했을 것
- 노비 출신인 장영실의 명나라 유학, 가능한 일일까?
노비가 양반의 시중을 들기 위해 짐꾼으로 외국에 간 사례는 있지만 이처럼 임무를 맡고 중국에 유학한 노비는 장영실이 최초일 듯 하고 엄격한 의미에서는 유학이라기보다는 태종(太宗)이 미션을 주는데 ① 천문서적 수집 ② 곽수경(원나라 천문학자)의 천문의기를 보고 그대로 재현하는 것으로 기술습득을 위한 파견의 성격
- 명나라 천문기술이 조선에 큰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한 세종(世宗) “각종 천문기계의 모양을 모두 눈에 익혀와 빨리 모방하여 만들라.” <연려실기술> 왕이 모방을(?) 하지만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로 60~70년 대 선진기술을 배우기 위해 많은 인재들이 해외로 연수를 가게 되는데, 이들은 낮에는 현장견학으로 밤에는 이를 기록하는 것으로 일과를 보냈다고···
-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서 명분보다 실리를 추구한 태종(太宗)과 세종(世宗), 이때는 건국 초 건강한 국가이념이 살아있던 시기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하는 <하여가>를 떠올리게 하고 실리중시의 결정판이 곧 훈민정음
- 당시 명나라의 천문기술은 어느 정도?
원(元)나라가 세계 대제국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특히 천문학은 아랍 쪽이 발전했었는데 그 지역을 정복했던 영향으로 이를 계승한 명(明)나라, 과학기술의 선진국 원(元)나라의 천문기술이 집약된 <관성대>천문관측소, 요즈음도 그렇지만 국가 주요시설은 이방인이 함부로 들어갈 수 없는 통제구역으로 장영실도 출입허가를 받지 못했을 가능성이 많은 것
- 우리가 러시아에 가서 우주선을 봤다고 해서 우주선을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 듯 중요한 것은 한번 봤다는 것에 의미가 있는 것이고 천문과 관련된 책을 수집하고 그 책을 토대로 천문기구를 연구하고 이를 재현하게 하는데, 장영실이 만든 자동으로 시간을 알려주는 물시계 자격루, 어디에서 발상했는지에 대하여는 학자에 따라 이견이 있지만 명나라 유학을 통해 자동 물시계의 정보를 수집하지 않았을까(?) 선진적인 천문기술 접한 장영실에게 창의적 발상의 밑거름이 된 좋은 기회였을 것
- 천문기구를 보고 영감을 얻은 장영실은 이론과 실기를 모두 겸비한 인물! 태종(太宗)의 유연한 인재등용시스템 덕분에 노비였던 장영실을 발탁해 세종(世宗)의 든든한 조력자로 키우는데 조선 초기 유연한 교육 · 열린 기회 · 충분한 지원이 과학기술을 발전시킨 배경이 아니었을까?
- 학벌 · 인맥 · 스펙에 갇힌 오늘 날에 교훈을 주는 태종(太宗)과 장영실, 태종(太宗)은 악역을 맡으면서 세종(世宗)시대의 민본 · 실용 · 자주의 성과를 이룩하는데 그 중심에 있었던 인물이 장영실이고 태종(太宗)의 트라우마가 장영실을 낳았다는 새로운 분석과 그러한 위대한 업적을 남긴 태종(太宗)임에도 불구하고 태종(太宗)이 왕위에 오르기까지 뿌렸던 수많은 피들에 대하여 함부로 면죄부를 줄 수는 없다는 점은 다시 한 번 생각해야 할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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