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해 둔 음식으로 저녁식사를 했다.
여러 종류의 술과 음식이 있었는데 동서는 우리가 가져간 복분자 술이 제일 좋단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많이 가져올 걸 하는 아쉬움이 든다.
밤이 늦도록 피곤한 줄도 모르고 술과 지난 이야기로 밤을 지샜다.
이튿날 시차와 피곤을 견디지 못해 늦잠을 잘 줄 알았던 우리가
먼저 일어나 조깅하자고 깨우니 동서가 놀란 눈치이다.
오늘 하루는 시차적응을 못해 피곤 해 할까봐 가벼운 쇼핑으로 하루를 보내려고 했는데
의외로 우리가 팔팔하니 스케쥴을 바꿔 아침 식사 후 롱비치 해변을 가잔다.
롱비치 해변을 향해 한참을 가는데 처형이 어디론가 전화를 한다.
친구의 언니가 근처에 사는데 미국에 간다니까 한번 만나고 오라고 했단다.
그 언니는 우리가 자동차로 달리는 곳 근처에 살고 있었다,
가까운 곳이니까 당장 들란다.
고향의 까마귀만 봐도 반갑다는 한국인 특유의 정서인 듯 했다.
우리는 안내하는 데로 차를 돌려 그녀의 집에 들렀다.
여행객을 상대로 숙박업을 하고 있었다.
규모는 꽤 커 보였고 남편과 사별 후 딸과 둘이서 모텔을 운영하고 있단다.
차를 한잔씩 마신 후 점심을 먹으러 가자고 한다.
우리는 아침 식사한지 얼마 되지 않아 사양했는데 자기는 우리랑 같이 먹으려고 아침도 먹지 않고 기다렸단다.
승용차로 30여분을 달려 도착한 곳은 한국인이 운영하는 빛고을 이라는 갈비 집 이었다.
고기의 양이 실로 많아서 혼자서 1인분 먹기가 힘들었다.
식사 후 기념촬영을 하며 다음을 기약하고 주소와 전화번호를 주고받았다.
자동차로 한참을 달리다 보니 롱비치 해변이 보였다.
자동차의 앰프에서는 Acker Bilk의 “해변의 길손” 클라리넷 연주가 흘러나와 분위기를 돋우었다.
그 유명한 롱비치 해변을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느냐며 차에서 내려 해안을 따라 걸었다.
롱비치 해안은 실로 거대하다는 것 외에는 별 다른 감명은 없었다.
우리나라의 서남해안의 크고 작은 섬들이 얼마나 멋있게 자리 잡고 있지 않는가?
우리의 그 좋은 자원을 세계적인 관광자원화 하지 못함이 못내 아쉬웠다.
외화수지 적자만 운운할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미래를 짊어질 젊은이들에게 세계최고를
두루 돌아보며 견문을 넓히게 하고 우리의 자원을 관광 마케팅화 하여
세계에 널리 알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다시 자동차는 퀸 메리 호를 향해 질주했다.
가까운 거리라 했는데 두 시간이다.
미국이라는 나라는 “거대 하다”라는 한마디로 표현할 수 있었다.
켈리포니아 주가 남한의 일곱 배 정도가 된다하니 두 시간의 거리는 가까운 곳에 속한단다.
너무 늦은 시간에 도착하여 퀸메리 호에 들어갈 수 없음이 못내 아쉬웠다.
- 퀸메리호 앞에서 -
주변의 레스토랑에서 랍스타를 먹었는데 여섯 명이서 십 여 만원으로 실컷 먹을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동서의 어머님 댁에 들렸다.
연세가 90이 넘었다는데도 한국의 정치 현안에 대하여 당당하게 얘기하시는 것과
LA DOGERS 팀 선수들의 타율을 모조리 외우고 계시는걸 보니 젊으셨을 때는 보통이 아니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귀한 손님들이 오셨으니 내일은 식구들 모두 모여 야외 바비큐 파티를 하자 신다.
아침 식사 후 파티에 필요한 재료를 구입하기위해 쇼핑을 하고 돌아오니 훈이네 내외와 처모가 먼저 와 있었다.
미숙아로 태어난 지 3년이 지난 5년 전 한국에 왔을 때는 몸도 가누지 못한 예린이가 이제 소녀처럼
많이 자라 있었고 그 아래로 예솔이가 태어나 세 돌이 지났단다.
어찌나 공을 좋아하는지 마트에 축구공이 없어서 사주지 못하고 돌아옴이 못내 아쉬웠다.
뒤를 이어 형님네 큰 동생 과 어머니, 작은 동생 내외와 자식들이 도착하여 바비큐 파티가 시작됐다.
모두들 지나간 얘기들로 시간 가는 줄 모른다. 파티는 자정이 가까워서야 끝났다.
내일 요새미티의 2박 3일의 일정에도 불구하고 식탁에 둘러앉아 또다시 시작이다.
다음날 아침 8시 집 근처의 주유소로 우리를 픽업하기 위한 차량이 온다기에 기다리고 있는데 관광버스가 왔다.
LA 시내에 있는 삼호관광에서 집결하여 여행코스별로 분산하여 차를 나눠 탔다.
우리가 탄 차는 요새미티 국립공원을 거쳐 샌프란시스코와 솔뱅을 경유하여 돌아오는 2박3일의 코스였다.
버스가 출발하여 한 시간 정도 달리니 황량한 사막 땅이 나오기 시작했다.
사막을 또 다시 한시간정도 더 달려 도착한 곳이 동부한남체인 이었다.
우리나라의 관광객을 상대로 대량생산된 상품을 쇼핑할 수 있도록 마련된 공간 이었다.
메이드 인 유에스에이는 없고 모조리 중국제품이다.
쇼핑몰을 제외한 주변은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사막 이었다.
아이들에게 선물할 리바이스 청바지를 사기위해 여기 저기 들렀지만 맞는 사이즈가 없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미국인들의 체형에 맞도록 제작된 것이란다.
우리나라의 매장에 있는 상품들은 리바이스에 로열티를 지불하고 우리나라에서 만드는 것이라고 한다.
점심식사를 위해 다시 버스를 타고 한 시간 정도 달려 바스토우 라는 도시에 도착을 했다.
야채샐러드에 빵이 준비 됐었는데 그 지방에서 직접 생산한 야채들이어서 그런지 싱그럽기 그지없었다.
다시 버스를 타고 서너 시간을 달렸다.
가는 길에는 캘리포니아의 농산물인 오렌지, 포도밭이 길 양옆으로 즐비하게 서 있었는데
어느 곳에서 보아도 정방형의 형태로 길이 뚫려 있었다.
농기계들이 자유롭게 드나들도록 해서 인듯했다.
- 뒷 뜰의 양귀비 -
평소에 건포도를 먹으면서 느낀 생각인데 왜 가공단계가 한 단계를 더 거치는 건포도의 가격이
생포도보다 저렴한가하고 의아해 했는데 현지에 와보니 의문이 풀렸다.
사막 땅에 수로를 만들어 포도가 익을 때까지는 물 공급을 하다가 포도가 완전히 익으면
물 공급을 중단하여 포도를 나무에서 건조시킨 후 기계를 이용하여 털어 낸다고 한다.
이렇게 건조한 포도는 자연에서 건조했기 때문에 곰팡이도 피지 않고 최상의 상품이 되는 것 이란다.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미국에서는 농업에 종사하기 위한 라이센스를 얻기 위해서는
4년간의 농업학교를 다니면서 열다섯여 종류의 농기계 수리 및 작동법과 농약의 피해 등
농사관련의 학습을 이수한 후에야 농업에 종사할 수 있단다.
WTO 체제에 대비해 우리의 농업인구를 2%정도 더 줄여야 한다는 신문보도가 그때는 납득이 가지 않았지만
미국의 농사 현실에 대하여 듣고 보니 농업생산성을 높여야한다 라는 것으로 이해를 할 수 있었다.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여건들이 이정도 인데 우리처럼 소작농에 그것도 배운 것이 없고
특별하게 할일 이 없으면 농사를 짓는 우리네와의 국제경쟁력이란 비교할 수 있겠는가?
달리면서 느낀 건 데 가도 가도 끝이 없는 황량한 사막을 후버댐을 막아 옥토로 일굴 수 있었던 것은
신대륙을 발견하기 위해 범선을 타고 대서양을 횡단한 콜롬부스의 개척정신이 밑거름이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며 인류의 번영을 위한 그들의 정신에 다시 한번 경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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