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note(기행&서간)

미서부를 다녀와서(하)

mkpark2022 2010. 11. 8. 20:44

미국은 세계각지에서 몰려온 인종들이 소득수준에 따라 계층화 되어있는 듯 했다.

일반적으로 택시기사는 아프리카계, 주차요원과 식당종업원은 히스패닉, 어물전은 러시아 등 동 유럽계,

델리와 세탁소는 한국계가 주로 차지하고 있었고 그 위에 유대인과 백인 주류 계층이 자리 잡고 있었다.

 

놀라운 것은 아무도 현재의 계층편입에 대해 불만스러워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국가가 제공하는 공교육과 자신들의 근면함을 통해 당대 혹은 다음 세대에

상향적 계층 이동이 가능 하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기 때문이란다.

 

지금까지 자동차로 몇 시간씩 달려오면서 볼 수 있었던 옥토들이

오늘날 켈리포니아 농업의 근간을 이루고 있었고 그 농업의 중심지인 프레즈노에 도착했다.

Water Free 호텔에 여장을 풀고 저녁식사를 했다.

식사 후 호텔주변을 산책하다 보니 모든 나무 마다

지하로 호스가 연결되어 물을 공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곳까지도 사막이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내일의 일정을 맞추기 위해서는 새벽 5시에 기상이란다.

내일을 위하여 일찍 잠자리에 들자.

이른 아침을 먹고 5:30에 요세미티국립공원을 향해 출발했다.

아이티너리에는 인스피레이션 포인트, 엘카피탄, 면사포 폭포 등등이 있었는데

폭우로 산사태가 나는 바람에 다른 길로 가다보니 요세미티 폭포만 구경할 수 있었다.

 

해발 4000m 의 고지에서 보는 요세미티 폭포는 뒤쪽에는 아무것도 없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물줄기가 마치 인공폭포처럼 보였다.

그 뒤쪽으로 한참 떨어진 해발 6000m의 산위에서 눈이 녹아내린 물줄기가 거대한 폭포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그 폭포의 규모에 자연의 위대함을 다시 한 번 실감하게 된다.

문득 “하늘을 먹물로 삼고 바다를 두루마리로 삼아도 다 적을 수 없는.....”

나도 모르게 콧노래가 흘러 나왔다.

 

- 폭포 앞에서 -

 

요세미티를 출발하여 샌프란시스코로 향하는 도중에 LA에서 배달된 도시락으로 점심을 때우고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베이 브릿지, 차이나 타운, 금문교,

이탈리아 교민촌 등을 구경한 후 베이 크루즈 유람선 관광을 했다.

 

샌프란시스코는 1906년에 대지진으로 폐허가 되면서 하나 둘 이곳을 떠나게 되었는데

중국인과 이탈리아 사람들만이 지금까지 거주하면서 그들만의 타운을 형성하면서 살아가고 있단다.

 

주정부는 폐허된 샌프란시스코의 재건을 위해 무역박람회를 개최 하여 세계에 알리고

이민을 유인하여 오늘날 미국에서 제일 살기 좋은 곳이 되었다 한다.

 

세계에서 제일 살기 좋은 곳으로 많은 사람들은 안드레아 보첼리의 고향인 이탈리아의

토스카나를 꼽는다. 첫 번째 이유가 온화한 기후라고 한다.

샌프란시스코도 기후가 년 중 내내 온화하여 온도의 차이가 그리 심하지 않아

미국에서 제일 살기 좋은 곳이라 한다.

 

센프란시스코에서 서쪽으로 직진하면 우리나라의 독도와 만난다니

우리나라도 위도 상으로는 꽤 살기 좋은 곳에 위치하고 있는 듯 했다.

 

 

- 금문교 앞에서 -

 

유람선 관광은 금문교와 알카트라즈 섬, 베이 브릿지를 구경하면서 보낸 시간이 대략 한 시간 정도가 소요됐다.

알카트라즈 섬을 보니 영화 “빠삐옹”이 생각났다.

사실 이 섬은 죄수를 가두는 감옥으로 사용했었는데 그곳에서 죄수가 탈주하는 사례가 발생하여

지금은 감옥으로 사용하지 않고 있다한다.

 섬 주위를 돌면서 보니 여기 저기 폐허의 자국들이 남아있었다.

 

유람선 관광을 마친 후 석식을 하기 위해 식당으로 옮기는데 처형의 또 다른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다.

자기 집으로 우리를 초대하기 위해 예약된 식당으로 우리를 픽업하러 온단다.

그래서 우리는 일행에서 이탈하여 식사 후 호텔로 직접가기로 가이드와 약속하고 처형의 친구 집에 도착했다.

일식 요리 집 이었는데 우리의 김치와 밑반찬 몇 가지를 곁들인 새로운 퓨전 음식들이었다.

 

저녁 식사 후 일본인 남편은 패키지여행에서는 구경할 수 없는 샌프란시스코 곳곳을

드라이브 하면서 상세히 소개시켜 주었고 두 시간을 달려 숙소인 산호세의 Wyndham Hotel 까지 바래다주었다.

자기 아내의 친구에 대한 배려라는 생각이 들도록 성의 있게 우리를 안내했다.

 밤늦도록 구경을 했더니 피곤하여 쉽게 골아 떨어졌다.

 

기상 후 아침식사하기엔 너무 이른 시간이어서 몬트레이 에서 아침 식사를 하기로 하고 출발을 했다.

세계에서 아름답기로 유명한 태평양 연안 해안가인 17마일 드라이브 코스를 관광했다.

많은 유명인사들이 별장을 소유하고 있는 몬트레이 해변은 정말 멋있었다.

해변을 지나면서 볼 수 있었던 새끼 낳는 고래와 유유히 걸어 다니는 사슴과 원시림은 자연 그대로였다.

 

 - 물개 떼들 -

 

특히 패블 비치의 골프 홀은 주변의 경관과 너무 잘 어울려서 퍽 인상적이었다.

특히 우리의 세계적인 골퍼들이 여기 내가 서 있는 18번 홀에서 우승컵을 받으면서

환호성을 울리던 TV화면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다음 목적지인 덴마크 민속촌인 솔뱅을 향했다.

도착하여 덴마크식의 점심을 먹었다.

야채가 곁들인 스테이크 종류였는데 맛이 있었다.

 

덴마크 민속촌은 신대륙 개척당시 덴마크인 자녀와 미국인자녀가 학교에서 싸우는 사건이 계기가 되어

덴마크인 끼리의 단합을 위하여 마을을 형성한 것이 오늘날의 관광 상품이 되었다 한다.

 

입구 쪽에 인디언 보호구역이라는 팻말이 보였다.

아메리카 인디언은 몽고족이 뱅골 만을 건너 아메리카 대륙에 이주하였다는 설이 설득력이 있어 보였다.

그 안에 사는 인디언들은 우리의 얼굴과 너무나 많이 닮아 있었다.

우리가 자랄 때 그림책에서 볼 수 있었던 코가 큰 인디언 추장모습은

미국인들이 백인을 우상화한 그림 이란다.

 

몽고족의 특징으로 몽고반점과 눈에 쌍거풀이 없는 것, 곰방대로 담배를 피우는 것,

급할 때 빨리 빨리 하며 발음 하는 것, 아이를 등에 업어 키우는 것 등의 몇 가지로 대변할 수 있다는데

모두 우리와 흡사한 것들이어서 깜짝 놀랐다.

 

사실 이 땅의 주인인 그들이 평화롭게 살고 있는데 어느 날 스페인함대가 침범하여 함락시킨 땅을

미국이 다시 빼앗았으니 인류의 역사는 뺏고 빼앗기는 역사의 반복인가 보다.

 

그 침략자들은 무력으로 그들을 억압하여 땅을 뺏고 학살하다.

결국은 인디언을 보호한다는 미명하에 그들을 보호구역 안에 격리시켜놓고 건강에 해로운 담배와 술,

아편 등을 값싸게 공급하여 그들을 말살하려는 미국의 인디언 정책에 분노가 느껴진다.

 

- 솔뱅의 입구에서 -

 

이번 여행에서 느낀 점은 미국이라는 나라는 참으로 거대하다.

따라서 육로수송은 한계가 있어서 항공 산업이 발달할 수밖에 없었음을 느꼈고,

미국이 지금처럼 산업화 되는 과정까지 자연을 있는 그대로 보존하여 후손에 고스란히 물려줄

준비를 하고 있는 그 선조의 지혜가 오늘의 미국이 있도록 하는 밑바탕이 아니었나 생각을 해본다.

 

또 한편으로는 이 정도의 관광자원이야 우리나라에도 얼마든지 있지 않은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는 롱 비치해변이나 퀸메리 호의 주변 경관에 못지않은 우리나라 남해안의

크고 작은 섬들을 관광 상품화하여 세계에 알리지 못하는

우리네의 관리들은 무엇을 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뿐만 아니라 얼마 전 일본과의 독도문제가 발생했을 즈음의 미국에 있는

한국대사관의 홈페이지에 소개된 우리네의 동해는 일본해로 표기가 되어 있더란다.

어처구니없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화가 치밀어 오르기도 했다.

 

해외에 나가면 모두가 애국자가 된다지만 부존자원을 마케팅화 하여 세계에 알리지 못하는

관계 당국에 대한 아쉬운 마음은 어떻게 달래야 할지 모르겠다.

 

이렇게 6박7일의 일정을 마치고 회사 출근을 위하여 우리 남정네들은 돌아와야만 했고,

아낙들은 뉴욕에 살고 있는 조카가 초대하여 우리의 한국행 출발 네 시간 후에

뉴욕으로 향하기로 하고 LA 국제공항을 이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