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합과 배신의 드라마, <관산성 전투>
〇 관산성 전투
- 427년 수도를 평양으로 천도(遷都)한 고구려는 본격적인 남진정책을 추진하자 수도를 웅진으로 천도한 백제는 물론 신라까지 불안하게 되면서 백제와 신라는 <나제동맹>을 체결하고 120여 년간 동맹이 지속되었지만, 554년 12월 백제·왜·대가야 연합군이 신라의 관산성을 기습 공격하면서 120년 간 지속되어온 <나제동맹>이 파탄되고 오랜 동맹국이었던 신라의 배신에서 촉발된 전투
- 관산성 전투의 역사적 의미는? <전덕재, 단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신라가 관산성(옥천)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한강유역을 확실하게 장악했다는 것과 그간 열세였던 신라가 관산성 전투의 승리로 반도의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삼국통일의 기반을 마련했다는 점
〇 120년 전(前) 백제와의 동맹을 깬 신라
- 5세기 고구려는 장수왕의 남하정책으로 백제가 위기에 몰리면서 433년 <나제동맹>을 체결하고 120년간 지속된 동맹관계, 하지만 553년 관산성 전투를 시작으로 신라가 백제의 한강유역을 탈취하면서 <나제동맹>은 파기되고 120년의 기간에 고구려는 광개토왕과 장수왕을 거치면서 전성기를 이루고 있었다.
- 신라는 왜 동맹을 파기했나?
당시 고구려는 왕위계승을 놓고 귀족간의 분쟁상태, 고구려의 위기를 틈타 신라 진흥왕과 백제 성왕이 연합하여 551년 고구려가 차지한 한강유역을 공격하여 신라는 한강 상류 10개 군을 백제는 한강 하류 6개 군을 차지하게 되는데, 신라의 궁극적 목표는 한강 하류를 차지하는 것으로 553년 신라가 한강 하류를 급습하여 두 나라의 동맹이 깨진 것이고 신라는 침탈한 한강 하류에 신주(新州)를 설치하고 김유신의 조부(祖父)인 김무력 장군을 신주 지방관으로 임명한다.
- 10군과 6군의 위치?
신라가 차지한 10군은 괴산·진천·안성·제천·원주·여주·춘천·가평·양구·화천, 백제가 차지한 6군은 포천·서울·하남·인천·과천·수원·화성지역으로 신라가 욕심을 낼만한 한강 하류지역, 신라의 한강하류 진출 목적 ① 고구려와 백제가 연합할 경우 신라의 존망이 걸린 상황 ② 중국과의 독자적 교류를 위한 관문항(당항진) 확보가 절실한 과제여서 백제가 차지한 한강 하류를 호시탐탐 노렸던 것
- 한강 유역은 백제의 고토(故土)로 고구려로부터 76년 만에 수복한 땅, 국가 간의 관계에서 국익에 우선하는 가치는 없다지만 120년 간 지속돼온 동맹을 일방적으로 파기하다니? 교사들도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역사적으로는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너희들끼리는 절대 이래서는 안 된다고 가르친다고···
- 관산성 전투 4년 전(前) 드러난 신라의 야심
금현성(연기군)은 백제 땅, 도살성(괴산군)은 고구려 땅으로 먼저 백제가 도살성을 공격하여 고구려가 밀려나고 다시 고구려는 금현성을 보복 공격하여 백제가 밀려나면서 싸움에 지친 고구려와 백제 군사, 이 틈을 노려 신라가 도살성과 금현성을 동시에 급습하여 군사 1천여 명을 주둔시키면서 삼국의 각축전이 펼쳐진 청주지역이 신라에 편입되어 한강유역으로 나아갈 수 있는 교두보가 확보된 셈
〇 관산성 전투의 라이벌, 백제 성왕 VS 신라 진흥왕
- 진흥왕 출생이 534년이고 나제동맹을 깨고 한성(漢城)을 차지한 것이 584년으로 당시 진흥왕의 나이는 21세이고 반면 백제 성왕은 50대 후반으로 패기만만 20대 VS 노련한 50대의 대결
- 백제 성왕은 어떤 인물?
① 천도(遷都), 475년 고구려에 한성(漢城)을 빼앗긴 후 웅진으로 천도하고 성왕은 다시 538년 사비로 천도하면서 백제의 중흥을 꿈꾸며 국호도 남부여(南夫餘)로 정하는데 국호를 수정한 것 자체가 빼앗긴 고토를 되찾겠다는 의지의 반영 ② 이름 그대로 성왕(聖王) “지혜와 식견이 뛰어났고 일을 처리함에 결단성이 있었다. 이름 자체가 나라사람들이 성왕(聖王)이라고 불렀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성왕> 또한 <일본서기>에는 성명왕(聖明王)으로 기록하여 성(聖)스럽고 총명한 왕이었다는 뜻 “성명왕은 천지의 도리에 통달하였고 명성은 두루 퍼졌습니다.” <일본서기 권 제19 흠명기>
- 신라 진흥왕은 어떤 인물?
① 수렴첨정, 540년 7세에 즉위한 진흥왕, 어머니 지소태후가 수렴첨정 실시 ② 진흥왕 순수비, 창녕비·북한산비·황초령비·마운령비로 진흥왕이 국토확장과 국위선양을 목적으로 세운 기념비이며 현재까지 총 4개가 발견, 주목이 되는 것은 황초령비와 마운령비로 <삼국사기>에는 신라의 함경도 진출에 대한 기록이 없지만 이 비(碑)를 통해 신라의 함경도 진출을 알 수 있는 증거물로 중요한 것
- 현재는 <북한산 순수비>의 훼손을 막기 위해 1986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기고 터만 남아 비봉(碑峰)으로 불리고 정복 군주 진흥왕과 중흥 군주 성왕의 대결에서 승자는 과연 누가 될 것인가?
〇 고구려와 신라의 밀약(密約)
- 552년 고구려는 북방의 신흥세력인 돌궐의 공격을 받고 있었다. 당시 고구려는 정치적인위기로 왕위계승을 두고 귀족 간의 내분을 수습해야 하는 내우외환에 빠지게 되자 고구려는 은밀히 신라와 접촉한다. 신라 불가침의 약속을 통해 한강유역을 확보하기로 하고 고구려와 신라가 밀약(密約)을 하게 되는데 백제의 운명은?
- 고구려와 신라의 밀약설, 사실인가?
돌궐과 고구려의 중간에 있는 말갈과 거란이라는 유이민 집단, 이들은 고구려 지배하에 있었는데 그 지배권을 돌궐이 노리면서 갈등이 시작되고 고구려의 입장에서는 서북쪽에서는 돌궐 · 남쪽에서는 백제와 신라가 올라오고 있는 상황에 왕위쟁탈전까지 겪으면서 내우외환의 위기를 수습해야 하기에 백제 모르게 동맹을 체결했다는 의미로 <려·라 밀약>으로 표현
- 밀약(密約)의 근거 ① 황초령비 “사방으로 영토를 개척하여 백성과 토지를 널리 획득하니 이웃나라가 신의를 맹세하고 화호(和好)를 요청하는 사신이 서로 통하여 오도다.” <황초령 진흥왕 순수비문> 이웃나라는 고구려를 칭한 것 ② <삼국유사> 백제가 신라에게 고구려를 치자고 제안하자 진흥왕은 “나라의 흥망은 하늘에 달려있으니 만약 하늘이 고구려를 미워하지 않는다면 내 어찌 고구려의 멸망을 바랄 수 있겠느냐?” 그러자 고구려가 감동을 하고 신라와 우호관계를 맺었다는 기록으로 밀약을 염두에 둔 진흥왕의 선심성 멘트(?)
- <전덕재 교수의 분석> 신라가 시혜(施惠)를 베풀어서 고구려와 동맹을 맺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으로 보여 진다는 것으로 배신·야합의 감성 VS 유연함·실리추구의 이성
- 신라의 배신, 왜 백제는 응징에 나서지 않았나?
애인이 바람을 피우는 것을 알면서도 힘이 약해서 물러서야만 하는 심정, 고구려와 신라의 밀약을 눈치 챈 백제, 신라와의 관계회복을 위해 작전상 잠시 후퇴한 것이고 또한 신라 뒤에는 고구려가 있어서 현재는 싸워봤자 이길 수 없다는 판단을 한 것으로 이번에 싸우지 않음으로써 다시 신라에게 접근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해 둔 것
〇 겉 다르고 속 다른 <결혼동맹>
- 성왕(聖王)의 뜻밖의 선택?
백제가 신라에게 한강유역을 빼앗긴지 석 달이 지난 553년 10월, 성왕(聖王)의 예측불허의 행보는 딸을 진흥왕에게 시집보내는 것, 자신의 뒤통수를 친 진흥왕을 사위로 맞아들이자 주변국에서는 성왕(聖王)이 진흥왕(眞興王)을 집안싸움으로 끌어들이려는 전략이 아니냐는 추측도 나오고···
-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 신라 진흥왕도 백제 성왕의 <백년손님> 제안에 응하는 것, 정치 9단들의 팽팽한 힘겨루기? 적국의 왕에게 딸을 시집보낸 성왕(聖王), 120년간의 <나제동맹>에 금이 가자 다시 이어 붙이려는 성왕의 혼테크 전략인가? 아니면 단순한 위장일까?
- 성왕은 결혼을 통해 신라와 우호관계를 회복하려 했던 것, 또한 신라의 입장에서도 성왕의 딸을 인질로 삼아 백제의 침략을 저지시키기 위한 측면도 있었을 것, 어쨌든 백제는 딸을 신라로 보내 안심시키고 왜(倭)에 원병을 요청하여 보복전을 준비하기위해서 왜(倭)에 많은 문물을 전해주고 도움을 요청했다는 <일본서기>의 기록
- 성왕(聖王)의 정치적 노림수, 진흥왕은 알았을까?
진흥왕도 성왕(聖王)의 마음을 읽었던 듯 “진흥왕 15년(554년) 가을 7월 명활성을 보수하여 쌓았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 명활성은 475년 고구려가 백제의 한성을 함락시켰을 때 신라가 위협을 느끼고 월성에 있던 왕궁을 명활성으로 옮긴 사례가 있는데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보수했던 것으로 적(敵)과의 동침 · 오월동주(吳越同舟) · 동상이몽(同床異夢)의 꿈을 꾸고 있었던 것
〇 백제와 신라의 국운을 건 <관산성 전투>
- 왜 관산성인가?
관산성은 현재의 충북 옥천으로 추풍령을 넘으면 신라의 수도인 경주로 향하는 중요한 관문이자 신라의 입장에서 보면 대전의 동쪽 탄현을 넘으면 백제의 수도 사비(泗沘)로 직행할 수 있는 곳으로 교통의 요지
- 관산성 전투 전략보고서
백제는 신라에게 도살성과 한강하류 그리고 딸까지 내주고 철천지원수 신라에 맞선 백제의 필승전략, 관산성 전투의 백제 총사령관은 태자 여창(昌)으로 <백합야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인물
- 관산성 전투를 이끈 사람이 성왕(聖王)이 아니고 태자 여창(昌)?
<백합야전투>는 553년 태자 여창(昌)을 선봉으로 한 백제군이 고구려군을 공격해 승리한 전투로 태자 여창(昌)을 총사령관으로 한 신라 복수전을 앞두고 백제 조정은 팽팽한 의견대립을 하는데 원로귀족들은 <려·라동맹>을 의식해 전쟁을 반대하지만 태자 여창(昌)은 젊은 기세를 몰아 전쟁을 감행한다. 병력은 왜군(倭軍) 1천여 명·말 100필·배 40척과 대가야 연맹군대로 왜(倭)와 대가야까지 합세한 국제연합군을 형성
- 공격 시기는 기록에 따라 다른데 <삼국사기>에는 554년 7월 · <삼국유사>에는 9월 · <일본서기>에는 12월로 차이, 대체적으로 삼국시대의 전쟁은 수확이 끝난 후 전투를 개시한 것으로 보아 12월에 공격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정
- 백제의 공격, 성공이었나?
백제·와·대가야 연합군의 관산성 기습공격은 성공
- 백제의 급습에 밀린 신라의 대응은?
관산성으로 진격한 백제 연합군의 총공세가 시작되고 신라군은 이에 맞서 싸워보지만 전멸하고 파죽지세의 백제 연합군은 초반 관산성을 장악해 나가자 관산성이 함락위기에 놓인 신라는 신라군을 총동원하며 한강 신주(新州)의 <김무력 부대>를 투입하면서 신라의 반격이 시작되고 그 무렵 백제 성왕이 관산성을 향해 오고 있는 길목에 신라군이 매복하고 있었다.
〇 관산성 전투, 신라의 반격
- 전투초기에 중요한 지역인 한강유역을 지키던 김무력 장군까지 동원했다는 것은 그 만큼 신라가 급박했다는 반증(?), 하지만 <려·라동맹>으로 고구려 견제가 필요 없었던 신라, 반면 백제의 입장에서는 고구려 견제를 위해 국경에 병력을 분산시킨 상황
- 백제의 패전, 결정적 요인?
백제 성왕의 전사 “성왕이 신라를 습격하고자 몸소 보병과 기병 50명을 거느리고 밤에 구천(狗川)에 이르렀다··· 신라의 복병이 나타나 그들과 싸우다가 혼전(混戰) 중에 임금이 병사들에게 살해되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성왕>
- 50명만의 군사를 이끌고 관산성에 들어간 성왕(聖王)의 실수?
현재는 구천(狗川)을 <구진벼루>라고 부르는 지역으로 이곳 너머에 관산성이 있어 성왕은 이 지역을 통과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성왕이 밤에 잡혔다고 해서 야간 기습작전으로 생각하고 있으나 사비에서 출발했다면 밤늦게 도착할 수도 있었을 것이고 현대의 시각으로는 50명이면 어불성설이라 하지만, 성왕의 판단착오로 백제군이 관산성을 장악했다고 판단하여 측근의 경호원만 이끌고 관산성으로 이동했던 것 “좌평(佐平) 네 명과 병사 2만 9천 6백 명의 목을 베었으며··· 돌아간 말이 한 필도 없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
- 성왕(聖王)이 관산성으로 향한 이유?
오랜 행군과 전투로 지친 태자, 성왕(聖王)은 아들과 병사들의 격려차 관산성으로 향한 것
- 신라군은 어떻게 성왕의 동선(動線)을 알았나?
신라가 사전에 정보를 입수한 듯하고 백제 패인은 김무력 부대 투입을 예상치 못한 것
〇 관산성 전황(戰況)과 백제의 패전
- 성왕을 사로잡은 신라군의 작전?
끝이 송곳처럼 뾰족한 서너 개의 발을 가진 쇠못 <마름쇠(질려)>를 길에 깔아놓고 말이나 사람이 밟을 경우 순간적으로 이동능력을 상실하면 급습하는 작전, 또한 매복 작전에서는 장애물도 중요하지만 숨어있다 들키지 않는 것이 중요한 것으로 병사들의 입막음의 소음차단방법은 나뭇가지로 재갈을 물어 입을 막은 것으로 이 방법은 병서에도 나오는 일반적인 군사 상식
- 신라의 승리 요인은 기민한 군사 동원으로 상황에 따른 대처를 한 반면 초반의 승리에 마음을 놓고 경솔하게 움직인 성왕(聖王)은 단 한 번의 실수로 최후를 맞게 되는 것이고 양국의 희비는 엇갈리게 되는 것
- 일반적으로 성왕이 관산성 전투 중 전사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성왕의 허무한 죽음에 대한 실체
〇 백제 성왕의 최후
- 신라군의 기습공격에 생포된 백제 성왕 “왕의 머리를 베게 하여 주소서” vs “왕인 나의 목숨을 노비 출신 장수인 네 놈에게 맞길 수는 없다.” vs “우리나라 법에는 맹세한 것을 어기면 국왕이라 할지라도 마땅히 종의 손에 죽습니다.” vs “지금껏 부끄럽지 않게 살아왔거늘 구차하게 살고 싶지는 않다. 어서 베어라!” <드라마의 대사> 신라 노비의 손에 최후를 맞는 성왕, 신라 귀족들은 전장에 나갈 때 노비를 데려가는 경우가 많았는데 고간 도도의 노비가 성왕을 죽였을 것으로 추측, 백제에서는 성왕을 노비가 죽였다고 하여 성왕의 비참한 죽음을 부각시키려는 의도
- 성왕(聖王)이 국법을 어겼다는데?
신라의 입장에서는 딸을 시집보낸 것은 동맹의 지속으로 백제 성왕(聖王)이 신의를 버렸기 때문에 노비에게 죽임을 당한 것은 마땅하다는 것, 여기에서 법(法)이야기가 거론되는데 신라는 법흥왕이 율령을 반포하고 당시 율령이 잘 시행되고 있다는 증거
- 성왕의 죽음에 대한 기록은 구덩이를 파서 묻었다는 기록 외에도 “신라가 명왕의 두골(頭骨)을 남겨두고 나머지 뼈를 백제에 예(禮)를 갖춰 보냈다.··· 지금 신라왕이 명왕의 뼈를 북청 계단에 묻었다.” <일본서기 제19 흠명기>
- 성왕(聖王)의 딸의 심정은 어땠을까?
결국은 남편이 아버지를 죽인 것이고 아버지는 계단에 묻혀 있는데 그 곳을 다닐 수가 있었을까? 아마 폐위시켰을 듯···
- 누구보다도 괴로웠을 태자 여창(昌), 아버지의 명복을 빌기 위해 승려가 되려하여 <일본서기>에는 성왕 사후 위덕왕(여창) 즉위까지 3년의 공백기가 있는데 사실 여부를 떠나 관산성 전투 패배 후유증으로 시달린 백제 모습의 반증
〇 관산성 전투 이후 삼국의 운명?
- 진흥왕은 승승장구, 특히 신라의 이사부는 대가야 병합으로 낙동강의 서안에서 함경도 지역까지 진출하여 진흥왕 시기에 신라의 최전성기를 달성
※ 이사부 : 지증왕·법흥왕·진흥왕에 걸쳐 활약한 신라의 장군
- 백제와 신라의 표리부동한 결혼식, 딸을 시집보내며 복수를 하기 위해 왜(倭)와 손잡고 또한 사위가 되면서 침략에 대비해 성(城)을 쌓는 비정한 정치현실, 관산성 전투는 주연이 진흥왕처럼 보였지만 얘기를 끝내고 보니 비극의 주인공은 성왕(聖王)
- 나라나 개인에게 정해진 운명 같은 게 있는 것인지 어떻게 다 이긴 전투에서 아들을 위문하러 갔다가 위문이 아니라 아들의 조문을 받게 된 성왕(聖王), 이것이 바로 허무(虛無)와 무상(無常)인 것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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