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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 피살사건의 진실, 이방원은 무죄인가?

mkpark2022 2017. 7. 28. 14:25





정도전 피살사건의 진실, 이방원은 무죄인가?



○ 조선 최고 권력자 정도전의 의문의 죽음

- 1398년 8월 26일 밤, 경복궁 근처의 민가에서 갑자기 불길이 치솟고 한 사람이 뛰쳐나오자 누군가에 의해 저항 한번 못해보고 목이 베어 쓰러진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당시 조선의 최고 권력자 정도전이었다.

- 포은 정몽주의 경우는 11392년 4월 4일 철퇴를 맞고 사살됐다는 기록이 있으나 정도전의 경우에는 살해 도구의 기록이 없다.

- 조선시대 사형 집행방법에는 참형(斬刑)의 목을 베어 죽이는 방식과 교형(絞刑)의 목을 매달아 죽이는 방식이 있고 여기에 능지처참(陵遲處斬)이라는 대역죄인의 신체를 여섯 갈래로 찢어 죽이는 형벌이 있고 가장 점잖은 방법의 사약(死藥)이 있다.

- 특히 참형(斬刑)은 고통스러운 형벌이어서 고통을 덜기 위해 뒷돈을 건넬 정도로 집행과정이 고통스러운 형벌, 게다가 고통스러운 것보다 더 무섭게 느끼는 것은 신체가 분리되어 더 무섭게 여겨지는 형벌로 그 시대의 관념에서 신체가 분리된다는 것은 뭔가 수치스럽기도 하고 죽음의 모욕까지 뒤따르는 것이어서 이를 기피하려 했던 것

- <박현모 교수의 추측>은 정도전을 일부러 베어 죽였을 것이다. 현대 살인사건에서도 살해방법을 보면 살인범의 감정 상태와 의도가 어느 정도 추정이 가능하다는 것, 예컨대 피해자의 상처가 난잡할수록 감정↑살인의 고의성과 계획성↓반면 피해자의 상처가 깨끗할수록 감정↓ 살인의 고의성과 계획성↑는 것으로 정도전 피살사건의 특징으로 보면 ① 계획적 ② 감정이 배제된 상태 ③ 보여주기식 살인이라는 것


○ 정도전에게 원한을 품은 자는 누구?

- 이방원이 직접 정도전을 살해했을까?

직접 하지는 안했을 것이고 정몽주를 제거할 때처럼 휘하에게 살인을 지시했을 것, 법률적으로 직접 살인을 행한 자는 정범(正犯)이고 실제로 범행을 행하지 않아도 범행의사가 같다면 공동정범(共同正犯)으로 간주하는데 <태조실록 태조 7년> “정안군이 말하였다. 네가 조선의 봉화백이 되었는데도 도리어 부족하게 여기느냐?··· 이에 그를 목 베게 하였다.” 이에 따르면 이방원을 정범으로 보는 것은 타당

- 당시의 기록 <태조 7년 월 26일 태조실록 14권> “정도전과 남은 · 심효생 · 장지화 등이 몰래 반역을 도모하여 국가의 기본을 요란시켰는데 다행히 천지와 종묘, 사직의 도움으로 힘입어 죄인들이 죽임을 당하고 왕실이 다시 편안하게 되었다.”

- 정도전이 정말로 반역을 모의했을까?

평범한 술자리로 보이는 사건현장, 살해현장 의문 ① 역모를 모의하면서 술을 마셨다? ② 블랙리스트 · 서약서 등 물적 증거가 없다 ③ 진술이나 자백을 통한 인적 증거가 없다는 것으로 법적 절차 없이 즉결심판한 것은 석연치 않은 사건으로 조선 초에도 역모 사건인 경우 법적 절차를 거친 후 처벌을 받았음, 게다가 이방원은 수사 · 처벌권한이 없던 왕자 신분으로 역모는 조작될 가능성이 높다는 <이익주 교수의 분석>


○ 사건발생 D-17, 정도전과 이방원에게 무슨 일이?

- 당시 명(明)과의 외교 갈등 상황에서 진법훈련을 실시한 정도전, 왕자나 공신들이 가지고 있던 사병(私兵)을 모두 모아 진법훈련을 시키려는데 이를 따르지 않던 왕자와 공신들에게 태형을 상언한 정도전

- 조선시대 형벌의 오형 ① 태(笞)는 가장 낮은 형벌로 회초리 ② 장(杖)은 곤장 ③ 도(徒)는 징역형 ④ 유(流)는 유배 ⑤ 사(死)는 극형 <박현모 교수의 생각>은 실제 이방원이 직접 맞은 것은 아니지만 그 휘하가 태형을 맞은 것은 이방원을 향한 모욕이었을 것

- 왜 왕자들과 공신들은 진법훈련에 참여하지 않았나?

사병의 독자성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새나라 조선의 사병혁파라는 의지의 표명에 왕자와 공신들 사이에서는 정도전이 진법 훈련을 빌미로 사병을 빼앗을지도 모른다는 위기감 팽배

- 태형사건과 정도전의 상관관계?

군권(軍權)의 총지휘자 정도전 VS 정도전에게 위기감을 느꼈던 이방원 <이익주 교수의 분석>은 이방원의 진법훈련과 태형 상언은 이방원에게 무언의 협박이었던 셈, 이방원은 자존심이 센 인물로 자존심을 보여주는 장면, 말을 타다 떨어졌는데 사관(史官)에게 이를 기록하지 말아달라고 부탁 <태종실록, 태종 4년> “노루를 쏘다가 말이 거꾸러짐으로 인하여 말에서 떨어졌으나 상하지는 않았다” 그 만큼 허점을 보이기 싫어한 이방원

- <최태성 강사의 생각>은 명(明)과의 전쟁을 앞둔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모든 군인이 국가에 소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정도전의 사전혁파는 당연한 일로 정도전의 견제가 아니고 이방원이 자발적으로 위협을 느낀 것, <이익주 교수의 분석>은 이방원은 명과의 전쟁은 일어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고 진법훈련은 국내정치용으로 생각했을 듯

- 한편으로 생각하면 역성혁명의 과정을 지켜본 이방원은 정도전을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죽을 것이라는 위협감을 느꼈을 것으로 정당방위였다?

법률적으로 정당방위로 인정하기 위해서는 현존하는 위험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질 않은 것 같고 이방원으로서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수도··· 친구 OR 적일 수밖에 없는 정치적 현실에서는···


○ 정도전 & 이방원, 그들을 갈라놓은 결정적 사건은?

- 1388년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회군을 결심한 그에게 대업의 꿈은 멀지않았다. 그리고 그의 곁에는 두 조력자 삼봉 정도전과 5남 이방원이 있었는데 위기의 순간마다 해결사 역할을 했던 이방원과 혁명의 설계를 맞았던 정도전

- 정도전이 꿈꾼 조선은 민본중심의 이상국가의 건설로 정도전과 뜻을 같이 했던 이방원, 두 사람은 난세를 끝내고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겠다는 일념으로 1392년 조선 개국 전까지 이 들은 함께라면 누구도 두려울 게 없던 존재였다.

- 고려 말 이성계가 권력을 잡기 전까지는 이 두 사람에게는 공동의 목표가 있었는데 ① 이성계를 중심으로 권력을 장악 ② 이성계를 새로운 나라의 왕으로 추대라는 목표가 있어 정치적 동지이자 든든한 조력자였던 정도전과 이방원

- 이성계가 역성을 포기할 때마다 말렸던 두 사람, 이방원은 <태조실록, 태조 총서> “지금 소인의 모함을 당했으니 만약 스스로 변명하지 못하고 손을 묶인 채 살육을 당한다면 저 소인들은 반드시 이씨(李氏)에게 나쁜 평판으로써 뒤집어씌울 것이니 뒷세상에서 누가 능히 이 사실을 알겠는가?” 하는데 불과 몇 년 전에 똑같은 얘기를 정도전이 한다. <용비어천가 제2권> “지금 한쪽 지방으로 물러가 거처하면 참언이 더욱 기승을 부려 반드시 화를 헤아릴 수 없을 것입니다. 정도전 · 남은 등이 이해(利害)를 밝혀 태조를 강력히 만류하였다.” 공동의 목표를 위해 브로멘스 같은 존재의식을 보여준 두 사람


○ 이방원 공신에서 배제된 이유는?

- <태조 1년 8월 20일, 태조실록 1권>에 개국공신에 대한 명단이 나오는데 개국공신에 포함되지 않은 이방원, 당시 개국공신에게는 최대 220결의 토지와 노비 30명을 하사 받았는데 이방원은 공신에 책봉되지 못하고 왕자에게 지급하는 토지 100결을 하사받는데 그친다.

※ 1결 = 1ha(약 3,000평)

- 개국에 대한 이방원의 기여도가 낮았나?

<이익주 교수의 분석>은 기여도로만 따진다면 이방원은 개국공신의 가장 큰 자격이 있는 것이 이성계의 해주 낙마사건 이후, 이성계와 대립관계에 있던 정몽주가 이성계 세력에게 공격을 가하면서 정도전 · 조준 · 남은 등은 유배 · 죽음의 위기까지 처한 상황에서 이방원이 정몽주를 죽이면서 사태를 역전시키고 조선을 건국하는 출발점이 된다.

- <박현모 교수의 분석>은 1392년 4월 정몽주가 사망하고 7월 조선이 개국하는데 정몽주 제거 후 와해된 고려의 구세력, 따라서 이성계에 대한 반대 세력이 없어져 개국의 어려움이 없었던 것으로 개국의 기여자 이방원의 입장에서는 억울한 점도 있었을 듯

- 왜 이방원은 개국공신 명단에서 제외되었나?

이성계의 깊은 뜻인 듯, 이방원을 비롯한 모든 왕자를 정치에서 배제한 이성계, 다섯 아들은 모두 개국에 공이 있는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개국공신에 포함되지 않은 것, 여기에는 공(公)과 사(私)를 분명히 한다는 인상을 주고 싶어 한 이성계의 의지인 듯, 하지만 가족이라고 챙기는 것도 문제이지만 일부러 배제하는 것 또한 역차별?

- 과연 진짜 이유는?

돼지 국밥과 조랭이 떡국, 당시 개성 사람들은 돼지 국밥을 성계탕이라 불렀는데 이성계가 돼지띠라는 점에 빗대어 삶은 돼지고기로 만든 국 요리로 이성계를 폄하하려는 것이고 조랭이 떡국은 이성계의 목을 비틀고 싶은 개성 사람들의 마음을 투영시켰다는 설화가 있는데 고려의 많은 충신이 죽어가는 것에 대하여 민심이 악화된 상황으로 이성계는 이것이 부담이 되어 자신들의 아들들을 권력에서 배제했을 것이라는 추측이고 역성혁명 이후 민심 안정이 최우선이라 생각한 이성계

- 이방원은 왜 아버지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을까?

이성계는 고려의 마지막 왕이자 조선의 첫 번째 왕으로 고려를 계승 받아야 했던 열악한 개국과정이라서 가족보다는 민심 챙기기가 것이 우선이었을 것, 이방원의 입장에서는 정도전이 모든 공을 가져가고 자신을 권력에서 배제시킨 것으로 생각했을 듯하다는 <박현모 교수의 생각>

- 정도전과 이방원의 대립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단서는 8남 이방석, 이성계에게는 신의왕후 한 씨에게서 나은 여섯 아들과 신덕왕후 강 씨에게서 나은 두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11세의 어린 나이에 세자가 된 이방석


○ 정도전 VS 이방원, 결정적 대립 이방석

- 개국 직후 8명의 아들 중 누구를 왕세자로 삼을 것인가? 1392년 8월 20일 개국공신과 함께 세자책봉이 이어지는데 아주 뜻밖에 여덟 째 방석이가 세자에 책봉, 이것이 뜻밖인 것이 세자의 기준인 적장자 우선이라면 39세의 방우가 되어야하고 덕(德)이 우선이라면 성인이 된 형들이 나섰을 것으로 서열 · 덕 · 공의 자격기준에서 가장 부족했던 이방석

- 같은 날 개국공신과 세자책봉에서 모두 제외된 이방원에게는 충격적인 사건이었지만 이성계가 고려에서 자리를 잡을 때 큰 도움이 됐던 강씨의 처가

- 하지만 이성계에게 이방원이 특별한 것은 여덟 아들 중 유일하게 문과에 급제한 아들, 그래서 가문의 영광이자 지방에 있던 이성계에게 중앙의 정계 소식통이었던 유일한 아들인 셈, 그래서 왕의 하사품으로 받은 갓끈을 아들 이방원에게 준 이성계였지만 세자의 자리는 8남 방석에게로···

- 정도전은 왜 세자책봉에서 이방원을 배제했나?

정도전의 입장에서는 이성계의 의지를 읽은 동시에 이방석을 세자로 책봉함으로써 자신의 꿈을 이루고자 했던 것, <조선경국전>은 1394년 정도전이 태조에게 바친 법전으로 조선 개국의 기본 강령을 논한 규범체계서로 정도전의 철학이 담긴 책


○ 정도전의 꿈, <조선경국전>

- 그 중의 일부 <고왈인주지직(故曰人主之職) 재론일상(在論一相) 총재지위야(冢宰之謂也) 상이승군부(上以承君父)> “임금의 직책은 한 사람의 재상을 정하는데 있다. 재상은 위로는 임금을 받들고 밑으로는 모든 관리를 통솔하며 만인을 다스리는 것이니 그 직책이 매우 큰 것이다. 재상은 임금의 아름다운 점은 순종하고 나쁜 점은 바로 잡으며 좋은 일은 받들고 옳지 않은 것은 막아서 임금으로 하여금 가장 올바른 경지에 들게 한다.”

- 이는 왕은 존재하되 재상의 역할이 막강한 역사상 유례없는 국가체제, 재상은 지금의 국무위원으로 이 사람에게 모든 권력을 집중시키고 왕의 역할은 한 사람의 재상을 임명하는 것이 전부로 정도전이 꿈꾼 조선은 왕은 상징적인 존재이고 모든 정치는 재상이 하는 현대의 입헌군주제와 비슷한 재상론

- 입헌군주제는 17세기 영국의 명예혁명 이후 등장하는데 시대를 앞서 간 정도전의 사상, 그렇다면 정도전에겐 왕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자신이 국가의 중심이 되고자 한 야욕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 태조 이성계는 정도전의 재상론을 수용했나?

당시 사상으로는 혁명적이었던 재상론, 그런데 정도전의 경험 속에서는 이 길이 최선의 길이라 생각을 했던 것, 왜냐하면 왕은 세습을 하면서 자동적으로 되기 때문에 성군도 폭군도 나올 수 있는 것, 심지어 정도전이 고려 말에 겪었던 아주 우스운 우왕 같은 경우도 나올 수 있는 것이고 이런 왕이 나왔을 때 그 피해는 고스란히 백성에게 있는 것으로 이를 막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 무엇인가에서 생각한 것일 것, 그래서 민을 위한 능력 있고 청렴한 재상중심의 세상을 꿈꾼 것

- 지금은 정도전이 자신을 위한 정책이 아니냐?고 반문하지만 당시 정도전의 생각은 당대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상적인 조선을 이끌어갈 정책으로 생각을 한 것 <태조실록 태조 3년> “판삼사사 정도전이 조선경국전을 지어서 바치니 임금이 이를 관람하고 감탄하여 칭찬하면서 말과 비단과 명주 · 백은을 내려주었다.” 정도전의 재상론을 수용한 태조, <박현모 교수의 분석>은 이성계는 떠밀리 듯 왕이 된 사람이고 이방원 역시 평범한 왕자로 유례없던 재상국가를 인정하지 못한 건 당연한 일

- 정도전과 이방원의 가장 큰 대척점은 정도전의 재상중심제 VS 이방원의 절대군주제, 조선의 왕자이자 고려의 과거급제 문신이었던 이방원은 신돈으로 인한 고려의 쇠퇴를 보면서 재상 정치의 문제점을 인식한 상황에서 정도전에게 휘둘리는 아버지와 사병해체 위기를 보며 결단했을 것

- 부패한 국가의 원인을 정도전은 무능한 왕 때문이고 정도전은 왕이 부패한 권문세족에게 휘둘리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것, <원동연 대표의 생각>은 왕권에 대한 야심이 확고했던 이방원이 정도전과 부딪힐 수밖에 없는 숙명이었을 것

- 실제로 이방원에게 그런 생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고 결과도 정도전 살해 후 이복동생 이방석 · 이방번을 죽이고 권력을 독차지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든다. 그래서 이 사건을 이방원에 의한 <제1차 왕자의 난>이라 칭한다.


○ 정도전 살해, 이방원의 정당방위인가?

- <원동연 대표의 생각>은 정당방위였다. 재상국가에서는 자신의 죽음도 명백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던 선택이었을 것 & <박현모 교수의 생각> 정당방위였다. 자신의 역사 · 정치적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한 정당방위였다. & <최태성 강사의 생각>은 정당방위가 아니었다. 정당방위를 인정하면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권력을 찬탈한 자들에게 역사의 면죄부를 주는 것 & <이익주 교수의 생각>은 정당방위가 아니었다. 새로운 세상을 열망한 사람들의 노력으로 개국한 조선, 이방원의 개인적인 욕심으로 조선은 평범한 나라가 되었고 조선 건국의 거대한 정치 실험이 실패로 끝나고 우리의 정치 발전이 수백 년 지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