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이성계는 정말 아들 이방원을 죽이려 했나?
○ 아들 이방원에게 활을 쏜 아버지
- <KBS 드라마 용의 눈물> 조선왕조를 개창한 태조 이성계는 아들 태종 이방원에게 활을 쏘는데 과연 이들에게는 무슨 일이?
- 서울 성동구 행당동 살곶이 다리에 전해지는 살인미수 사건, 아버지를 마중나간 이방원에게 갑자기 날아든 화살, 기둥 뒤에 숨어 간신히 화를 면하지만 활을 쏜 사람은 놀랍게도 아버지인 이성계, 아들에게 활을 쏜 아버지는 진짜 아들을 죽이려 했나?
- 이성계의 살인미수 사건은 역사적 사실?
먼저 현대의 친족 간의 살인 미수, 법적 판결은?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거나 죽이려 하는 것은 존속살해로 가중처벌을 받지만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거나 죽이려 하는 것은 단순 살인죄에 해당한다.
- 사건의 정황은 태조 이성계를 맞이하기 위해 장막을 설치한 태종 이방원 “하륜 등이 아뢰기를 상왕의 노여움이 아직 다 풀어지지 않았으니 모든 일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차일을 받치는 높은 기둥은 의당 큰 나무를 써야 할 것입니다 하니 태종이 허락하여 열 아름이나 되는 큰 나무로 기둥을 만들었다.” & “태조가 바라보고 노한 얼굴빛으로 가졌던 동궁과 백우전을 힘껏 당겨서 쏘았다. 태종이 급해서 차일 기둥에 의지하여 몸을 가렸으므로 화살이 그 기둥에 맞았다.” <연려실기술>
- <연려실기술>의 기록은 조선 후기 실학자 이긍익이 지은 사서로 400여 가지의 야사(野史)에서 자료를 수집 · 분류하여 적은 기록으로 문제는 이 책이 야사를 모아 놓은 책으로 이성계가 이방원에게 화살을 쏜 이야기는 사관이 기록한 실록(實錄)에는 전혀 나오지 않아 <연려실기술>에는 실려 있지만 이것이 과연 사실인지 여전히 의문은 있는 것
- 같은 시기의 실록에는 “태상왕이 서울로 돌아왔다.” <태종실록 태종 2년 12월 8일> 그런데 당시의 서울은 한양이 아닌 개경으로 “임금이 금교역(황해도 금천)에 나아가서 태상왕을 맞이하고 장전으로 들어가서 헌수하였다.” <태종실록 태종 2년 12월 8일> 사건이 일어났다 하더라도 장소가 성동구 행당동의 살곶이 다리는 아니라는 것
- 살곶이를 풀이하면 화살이 꽂히는 곳으로 오래 전부터 ‘살곶이 들’로 불리던 곳 따라서 살곶이 들 + 명궁 이성계 + 사이가 안 좋은 부자 = 살곶이 전설이 만들어진 것으로 역사적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는 <이익주 교수의 분석> 하지만 사람들이 그렇게 믿었다는 것이 사실이 곧 역사적 사실
- 태종 이방원의 살해 리스트를 보면 이성계 에게는 충신이던 정도전 · 남은 · 신효생, 또한 친구인 정몽주, 그리고 사위 이제와 아들 이방번 · 이방석 등으로 태조 이성계의 충신 · 친구 · 가족을 척살한 이방원
○ 태조 이성계는 정말 아들을 죽이려 했나?
- <원동연 대표의 생각>은 죽이려 했다, 아들 · 사위 · 친구 · 충신 할 것 없이 모두 죽인 이방원, 아들이라기보다는 원수로 보지 않았을까? & <임윤선 변호사의 생각>은 죽이려 하지 않았다,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워했을 수는 있지만 이성계는 조선의 왕으로 혼란보다는 개국한 조선의 정국 안정을 더 중요시 하지 않았을까? & <이익주 교수의 생각>은 미워는 했겠지만 차마 죽일 생각을 했을까? 좀 더 살펴보기로 하고···
- 태조 이성계와 태종 이방원의 사이는 원래부터 나빴을까?
금쪽같은 아들 이방원, <태조실록 총서> “태조가 높은 코에 용의 얼굴이었는데 태종의 용모가 이를 닮았다. 태조께서 대접하기를 여러 아들보다 다르게 하고··· 태종이 또한 효성을 다하였다” 또한 여덟 명의 아들 중 유일하게 과거 문과에 급제한 이방원 “전하(이방원)가 과거에 급제하니··· 태조가 대궐 뜰에 절하고는 매우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다. 후에 제학에 임명되니 태조가 매우 기뻐하며 사람을 시켜 관교를 읽기를 두세 번에 이르렀다.” <태조실록 총서>
- 이방원의 문과급제는 집안의 명예를 올리는 일로 이성계 고조할아버지는 고려를 배신하고 몽골의 쌍성총관부 지역에 들어가서 부원세력이 된 집안으로 아무리 이성계가 백전백승하는 명장이라 하더라도 고려 사람들이 이 집안을 보는 눈은 차가웠을 것, 그런데 이런 가문의 품격을 높일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은 과거 급제자를 배출하는 것, 그래서 아들들에게 공부를 시키려고 하는데 그런 아버지의 꿈을 풀어준 유일한 사람이 이방원으로 이성계 집안이 고려에서 인정받고 권문세족과 어울릴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 셈
- 또한 이성계가 요동을 정벌하러 출정을 했을 때 위화도 회군으로 출정한 장수의 가족들을 인질로 잡으려 한 최영, 이를 이방원은 먼저 예측하고 가족을 피신시키는데 이런 판단이 위화도 회군을 성공으로 이끈 포석이 된다.
○ 이성계는 왜 떠돌았나?
- 태종 즉위 후 2년간의 이성계의 행보 <태종 1년 윤3월 1일> “태상왕이 새 도읍(서울)에 행차하였다.” & <태종 1년 윤3월 11일> “태상왕이 새 도읍에서 금강산으로 거둥하였다.” & <태종 11년 4월 10일> "이때 태상왕이 안변부에 있었다.“ & <태종 1년 11월 26일> ”밤중에 태상왕이 소요산(경기도)에 가니···“ & <태종 2년 8월 2일> ”임금이 회암사로 가서 태상왕을 뵈었다.” & <태종 2년 11월 1일> “태상왕이 동북면으로 향하였다.”
- 태조 이성계가 떠돌아다닌 이유?
이방원의 입장에서 보면 1.2차 왕자의 난을 거쳐 무력으로 왕위에 오른 자신의 집권에 정당성을 보여주기는 취약한 것, 거기에다 아버지마저 밖에서 돌아다닌다면 부자관계를 의심하게 되고 이는 곧 태종 이방원의 집권의 정당성에 의문이 제기 되는 상황이었을 것
- 유학의 나라 조선에서 아버지의 행방을 모른다는 것은 커다란 불효 <태종실록 2년 10월 27일> “임금이 태상왕의 향하는 곳을 알지 못하여 사람을 시켜 살피었으므로 ‘사람의 행렬’‘이 길에 잇닿았다.”
- 태조 이성계의 의도적인 방황?
이성계의 방황은 효도라는 명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심각한 문제로 갑자기 고기를 끊은 이성계 <태종실록 2년 88월 2일> “태상왕이 조용히 임금에게 말씀하시기를 왕사의 말이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으면 후생에 반드시 머리 없는 벌레가 된다고 하기에 내가 고기를 먹지 않는다 하였다.”
- 심지어 자신이 머물고 있는 회암사에 토지를 주라고 한 태조 이성계,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회암사에 토지를 주게 되는데 문제는 태종 이방원의 불교계 정리 사업과 충돌하게 되는 것으로 태조 이성계는 아들의 정책을 고의로 방해하는 것
- 또한 회암사에 있는 아버지를 찾아가자 이성계가 말하기를 내가 지금 이렇게 열심히 불공을 드리는 것은 두 아들과 한 사위 때문이라고 하는데 이들은 1차 왕자의 난으로 인해 척살을 당한 인물들로 노골적으로 태종 이방원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낸 이성계
○ ‘조사의의 난’과 이성계의 관계?
- <드라마 용의 눈물> 1402년 11월 5일, 동북면 안변부사 조사의가 난을 일으킨다. <태종실록 4권> “안변부사 조사의 등이 군사를 일으켜 사람을 주군에 보내어 군사를 조련하였다. 조사의는 곧 현빈 강씨(태조 2비)의 족속인데 강씨를 위하여 원수를 갚고자 한 것이었다.” 난을 진압하기 위해 직접 출정한 태종 이방원
- 당시 왕이 직접 출정할 만큼 급박했던 ‘조사의의 난’?
조사의의 난이 발발지역은 안변 · 영흥 · 함주 · 맹주 · 덕주 · 안주로 모두 동북면 지역으로 당시 반란군 규모는 6~7천 명에 동북면 북쪽의 여진족이 가세를 할 경우는 만 명 이상, 또 한 가지 문제는 지방관들이 조사의의 군에게 적극 대응을 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어서 직접 출정한 태종 이방원
- 조선왕조 최초의 반란인 조사의의 난과 태조 이성계와의 관계는?
이성계가 떠돌아다니던 지역은 양주를 거쳐 김화 · 철령을 지나 동북면의 함주 지역으로 조사의의 난이 일어난 지역, 또한 태종 2년 11월 1일 동북면으로 향한 이성계 그리고 11월 5일 조사의의 난이 발발한 것으로 태조 이성계가 의도적으로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동북면으로 향한 것이 아닐까?
○ ‘조사의의 난’ 배후는 이성계?
- <태종실록 2년 11월 5일> “태상전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즉위한 이래로 조종의 능에 한 번도 참배하지 못하여 일찍이 생각하고 있었는데 지금 다행히 한가한 몸이 되었으니 동북면에 가서 선조의 능에 참배한 뒤에 금강산을 유람코자 한다. 서울에 들어가면 잠시도 문을 나서지 않겠다.” 이러한 태조 이성계의 전갈을 받은 날 ’조사의의 난‘이 발발한 것
- 여기에서 동북면이라는 지역을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동북면 지역은 원 간섭기에 쌍성총관부가 있던 곳으로 ① 대대로 이성계의 가문이 실력을 키워온 곳 ② 태조 이성계를 따르는 사람이 많아 태조 이성계의 영향이 미치는 지역으로 조사의의 세력에 이성계가 가세한다면 동북면 전체가 조선을 공격할 수도 있다는 <이익주 교수의 분석>
- 시기적으로 보면 우연히 겹치고 있는데 태종의 입장에서는 아주 위험한 상황, 하지만 사료에는 이성계와 조사의가 만났다는 기록이 없어서 단정하지 않는 것이 역사학자의 태도라는 <이익주 교수의 생각>
- 난을 진압한 쪽에서 생각해 보면 태종의 입장에서 아버지와 조사의가 손을 잡고 반란을 일으켰는데 태조 이방원이 어떻게 기록해야 하는가를 생각하면 무력으로 권력을 잡은 자신에게 아버지의 반란은 정통성이 훼손되는 일, 태종의 입장에서는 조사의의 반란에 아버지는 관련이 없는 것으로 만들고 싶었을 것이라는 <이익주 교수의 분석> 그래서 근거가 있더라도 계속 물증을 없앤 것은 아닌지··· 역사는 승자의 기록으로 한 번 더 뒤집어야 비로소 보이는 역사
○ 조사의의 난, 의도된 축소?
- 조사의의 난의 결과는?
1402년 11월 27일 평안도 안주까지 내려온 반란군은 왕이 직접 이끄는 4만여 명의 군사가 올라온다는 소식에 뿔뿔이 흩어져 소멸된 반란군
- 조사의의 난 처리는?
관군에게 잡혀 개경에서 처형당한 조사의와 아들을 포함해서 반란군 주모자 16명이 처형되는데 이상한 것은 반란가담자를 관대하게 처리한 태종 이방원은 태조의 측근 등 반란의 주요 가담자를 ‘태상왕의 명을 어길 수는 없었을 것이다’ 며 처벌하지 않는다.
- 이 사실은 태종실록이 아닌 세종실록에 나오는 이야기로 세종의 입을 통해 아버지가 했던 말들의 기록 “박만은 성품이 물러서 태상의 명을 어길 수 없었을 것이다. 또 박만들의 일을 어찌 일일이 법대로만 할 수 있었겠느냐?” <세종실록 즉위년 10월 28일>
- 기록에는 없지만 학계에서도 조사의의 난의 배후에는 이성계가 있었다는 견해가 있음,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되어 귀환하면서 태종 이방원을 겨누는 화살을 쏘게 되는 것으로 반란이 화살로 변하면서 야사의 형태로 전해 오는 것
○ 이성계는 정말 아들 이방원을 죽이려 했나?
- <최태성 교사의 생각>은 죽이려 했다, 아들 이방원은 자신이 세운 역사를 지우려 한 인물로 태조 이성계는 그런 아들을 죽이려 했을 것, 정치에서 왕과 아들은 부자관계가 아닌 정적(政敵) & <임윤선 변호사의 생각>은 죽이려 했다, 정치인 이성계는 아들보다 자신이 만든 나라 조선을 더 사랑했을 것 & <강문식 박사의 생각>은 죽이려 하지 않았다, 정권을 타도하려는 의지는 있었으나 태종 이방원을 죽이려 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개국한 지 10년 밖에 안 된 조선으로 국가존립에 위협이 될 결정적인 일을 하지 않았을 것이지만 폐위시키려는 의도는 충분했었을 것이라는 것
- 태조와 태종의 관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세계사의 기록에도 순조롭지 않은 개국초기의 1 · 2대 왕의 계승문제, 당고조가 나라를 세웠는데 당태종 이세민이 형을 죽이고 아버지를 협박해 자신이 황제가 되는데 순탄치 않은 왕위 계승은 세습왕조 국가의 구조적 문제로 이들의 갈등 역시 세습왕조국가의 필연적 운명인 듯하다는 <이익주 교수의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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