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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판 ‘사랑과 전쟁’ 태종 VS 원경왕후 

mkpark2022 2017. 8. 8. 16:37





조선판 ‘사랑과 전쟁’ 태종 VS 원경왕후



○ <KBS 드라마 용의 눈물>

- 1400년 12월 왕위에 오른 태종 이방원과 원경왕후 민씨, 하지만 즉위 1년도 안 돼 후궁을 들이기 시작한 태종과 이에 분노하는 원경왕후, 폐출까지 거론되며 후궁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태종과 원경왕후의 갈등

- 드라마처럼 왕과 왕비가 부부싸움을 할 수 있을까?

<김영수 교수의 생각>은 여성의 지위가 높았던 고려시대의 영향으로 조선 초기에는 가능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지만 설마 폐출까지야··· 하겠지만 실제로 성종(成宗)의 부인이자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 윤씨는 투기가 심하고 성종의 얼굴에 상처를 입히자 폐위되는 사례도 있었다


○ 태종의 부인 원경왕후 민씨는 누구?

- 여장부로 원경왕후의 아들은 세종(世宗), 율곡의 어머니 사임당이 그렇게 칭송을 받는 인물이라면 원경왕후 역시 이에 뒤지지 않는 인물로 세종의 총명 DNA는 외가로부터 물려받은 것으로 여흥 민씨 가문은 고려 중·후반 무렵부터 과거급제자를 대대로 배출한 가문

- 특히 원경왕후의 친정아버지 민제는 어려서부터 총명함이 남달랐고 원경왕후의 기록 역시 <세종실록> “태후(원경왕후)가 어려서부터 맑고 아름다우시며 총명하시고 인자하시기가 보통이 아니었다” 게다가 “상왕(태종)이 젊어서부터 세상을 경영할 뜻을 두시고··· 집안 살림은 돌보지 아니하셨으나 태후(원경왕후)께서 살림하는 데 능숙하시고···” 그야말로 현대판 내조의 여왕이라는 기록


○ 태종 VS 원경왕후, 가상 왕실 이혼 법정

- <임윤선 변호사의 원경왕후 변론> 열여덟에 이방원에게 시집와 남편의 성공을 위해 밤낮없이 내조한 원경왕후 민씨, 아내의 내조로 왕위에 올랐음에도 축첩하기 바빴던 태종 이방원 <태종실록> “성균 악정 권홍의 딸을 별궁으로 맞아들이었다. 정비의 투기가 더욱 심해졌다.” & “판통례문사 김구덕의 딸을 맞아 빈을 삼고 전 제학 노귀산의 딸과 전 지성주사 김점의 딸을 맞아 두 잉으로 삼았다.” & “임금이 권씨가 현행이 있다 하여 예를 갖추어 맞아들이려한다는 말을 듣고 임금의 옷을 붙잡고 말하기를 제가 상과 더불어 함께 어려움을 지키고 같이 화란을 겪어 국가를 차지하였사온데 이제 나를 잊음이 어찌 이에 이르셨습니까? 하며 울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음식도 들지 아니하므로 임금이 가례색을 피하도록 명하고 환관과 시녀 각각 몇 사람만으로 권씨를 별궁에 맞아들이게 하였다. 정비는 마음에 병을 얻었고 임금은 수일 동안 정사를 보지 아니 하였다”

- 태종 이방원에게는 원경왕후를 포함하여 왕후 19명과 31명의 자식이 있었고 정종도 기록에 나온 부인만 10명, 그리고 성종·중종도 부인이 12명, 하지만 왕실의 번영을 핑계로 축첩에 열을 올린 태종 부부간의 신뢰를 먼저 깨트린 사람은 누구일까?


○ 태종 VS 원경왕후, 부부갈등의 책임은 누구?

- <임윤선 변호사의 생각>은 왕실은 후사가 중요하기 때문에 후궁을 들였다고 태종을 비난할 수 없을 듯 하다는 의견 & <김영수 교수의 생각> 왕이 후궁을 들이는 게 분란을 일으킬만한 사안은 아니며 외척을 늘려 왕실세력을 보호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라는 것

- 여기서 잠깐, 정말 원경왕후의 투기가 문제였을까?

<이익주 교수의 분석>은 태종에게 순종하지 않았던 원경왕후를 왕의 입장에서 ‘투기’로 표현한 것일 듯하고 원경왕후의 질투는 왕이 되기까지 함께 고생한 남편 태종에게 보내는 항의의 표현이 아닐까?

- <KBS 드라마 정도전> 정도전의 사병혁파로 위기에 처한 이방원, 1차 왕자의 난 때에는 원경왕후와 처남들의 활약으로 정적(政敵) 정도전을 제거하고 권력을 잡았으며 2차 왕자의 난 때에도 친형 이방간과 싸우기를 망설이는 태종 이방원을 설득한 원경왕후, 결정의 순간마다 원경왕후와 처남들의 활약으로 위기를 극복한 이방원, 드라마 속 태종 즉위 일등 공신은 원경왕후 민씨

- 뿐만 아니라 1차 왕자의 난 직전 뛰어난 기지를 발휘해 태종을 구한 원경왕후, <태조실록> “정도전 · 남은 등이 도당을 결합하고 비밀히 모의하여 우리의 종친 원훈을 해치고 우리 국가를 어지럽게 하고자 했으므로···” <이익주 교수의 분석>은 실록이 사실이라면 원경왕후 민씨가 미리 정도전의 계획을 간파해 반격한 것으로의 해석이 가능하고 반대로 이방원이 먼저 난을 일으킨 것이라면 원경왕후가 1차 왕자의 난을 주도한 것으로 태종이 왕이 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고 2차 왕자의 난 때에도 친형을 상대로 싸워야 하는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힘든 선택을 앞둔 태종에게 원경왕후의 한마디가 큰 힘이 됐을 듯

- 태종도 원경왕후의 활약을 인정했을까?

고려 창건 당시 고민하는 왕건에게 손수 갑옷을 입혀준 유씨 부인, <태종실록> “너의 모후(원경왕후)의 꿈이 유씨의 제갑에 비교하면 더욱 중하다 하였다.” 또한 재산이 아들·딸 구별 없이 상속되었던 고려시대, 그래서 당대의 부부들은 결혼을 해도 각자 재산을 구분해서 관리했기 때문에 이혼과 재혼이 좀 더 자유스러웠을 것

- 그리고 심지어 아내 사후 재산을 친정으로 반환하기도 하여 <이익주 교수의 분석>은 고려시대 상속관행을 고려했을 때 원경왕후도 결혼 당시 많은 재산을 가져왔을 것으로 추정되고 이 재산이 이성계 집안에게는 큰 자산으로 이방원의 정치활동에도 부인 원경왕후가 가져온 재산이 큰 힘이 됐을 것

- 또한 친정아버지 민제의 도움도 컸지만 이방원이 왕이 되는 과정에서 적극적으로 참여한 원경왕후의 남동생들로 이방원으로써는 왕이 되는데 큰 도움을 받았던 처가인 것, 또한 민제가 하륜을 이방원에게 소개시켜주었다 하는데 <태종실록, 태종총서> “하륜이··· 본래 사람의 상보기를 좋아하여 민제에게 말하기를 ‘내가 사람을 상 본 것이 많지만은 공의 둘째 사위 같은 사람은 없었소! 내가 뵙고자 하니 공은 그 뜻을 말하여 주시오’ 하였다”

- 이성계에게 정도전이 있다면 이방원에게는 하륜이 있다! 이 정도로 태종 때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인데 장인 민제가 사위 이방원을 도울만한 사람들을 물색한 것으로 봐야 한다는 <김영수 교수의 분석>


○ 원경왕후 민씨 집안, 태종 이방원을 간택하다?

- 태종과 원경왕후의 만남은 어떻게 이루어졌나?

<이익주 교수의 분석>은 이방원이 원경왕후 민씨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원경왕후의 아버지 민제가 사위를 선택했다고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는 것, 결혼이 이뤄졌을 당시 민제는 고려시대 중·후반부터 뼈대 있는 가문 출신, 반면 이성계 가문은 인정받지 못한 상황으로 이방원의 간택 포인트 ① 이방원의 과거급제 ② 무장 이성계의 가능성으로 운봉전투 다음다음 해에 결혼이 이루어진 것

※ 운봉전투 : 1380년 이성계가 전라도 황산에서 왜구를 격퇴시키고 크게 승리한 전투

- 태조 이성계도 부인의 덕을 봤다?

태조의 두 번째 부인 신덕왕후 강씨의 백부 강윤충 <고려사열전 폐행 강윤충> “강윤충은 천예의 신분에서 일어나 선왕의 총애를 얻게 되자 간사하게 아첨하고 음탕한 짓을 저질렀습니다.” 민씨 집안과는 격이 다른 집안

- 당시 존경받지 못하던 이성계 집안, 이성계의 4대조부가 전주에 살다가 쌍성총관부 지역에 들어가 관리를 지내게 되는데 이는 고려를 배신하고 몽골의 앞잡이가 된 것으로 이러한 전력 때문에 혼인을 기피했던 고려의 명문가들, 이런 상황에서 이방원과 결혼한 원경왕후 민씨는 이성계 집안의 공주 같은 존재였을 것이라는 <이익주 교수의 분석>


○ 태종 VS 원경왕후, 파국을 맞다?

- 태종과 원경왕후의 관계를 파국으로 치닫게 한 결정적 사건은?

<KBS 드라마 용의 눈물> 일등공신에서 죄인으로 전락한 민무구 · 민무질 형제, 태종의 의심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고 또 다른 처남 민무휼 · 민무회 형제에게 가해진 고문, 왕비인 누나도 사지에 몰린 동생들을 구할 수는 없었고 결국 1410년 민무구 · 민무질 형제는 유배지에서 자살하게 하고 1416년 민무휼 · 민무회 형제도 유배지에서 자살하게 되어 4형제 모두를 잃게 된다.

- 태종은 왜 원경왕후를 배신했나?

<태종실록>에는 민무회와 민무휼이 스스로 그 죄를 알고 목메어 죽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민무구 · 민무질의 죽음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고 <태종실록 태종 10년> “제주에 가서 민무구 민무질에게 자진해 죽게 하였다.” 원경왕후의 동생들 4형제가 자살로 최후를 맞는다.

- 민씨 4형제의 죄목은?

민무구 · 민무질 형제의 죄목은 어린 왕자 양녕대군을 이용해 권력을 잡으려 했다는 것 <태종실록> “개국 정사 좌명공신 영의정부사 이화 등이 상소하여··· 민무구 · 민무질 · 신극래 등의 죄를 청하였다. 상소는 이러하였다···(중략) 지난해에 전하께서 장차 내선을 행하려 할 때 온 나라 신민이 마음 아프게 생각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나 민무구 등은 스스로 다행이라 여겨 기뻐하는 빛을 얼굴에 나타냈으며 전하께서 여망에 굽히시어 복위하신 뒤에도 온 나라 신민이 기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으나 민무구 등은 도리어 걱정하는 빛을 나타냈습니다.” 표정이 역모의 증거라는 것?

※ 내선(內禪) : 왕이 살아있는 동안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일

- 이것 말고도 역모의 증거라는 것이 평소에 민무구 · 민무질 형제가 했던 말들을 모아서 처벌을 하려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죽을죄에 해당하지 않는 민씨 형제의 잘못, 이러다 보니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방향으로 옥사(獄死)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

- <김영수 교수의 분석>은 태종은 공신들을 제거할 때도 덫을 놓고 시험을 거친 후 확실하게 확인이 되면 죽이고 폭력을 행사할 때에도 합리적으로 주변 사람들을 설득시킨 후 실행하는 것이 태종의 방식으로 종친 대표 이화를 이용해 민무구 · 민무질의 처벌에 동의를 얻은 태종

- 태종 대(代)의 관직생활은 긴장의 연속이었을 듯, 계속되는 왕의 시험으로 실수 한 번에 목숨이 좌우되는 신하들은 초긴장상태였기 때문이고 <임윤선 변호사의 원경왕후 변론> 축첩의 문제뿐만 아니라 민무휼 · 민무회 형제에게 가해진 가혹한 고문과 압슬에 주목해야 하는 것이 이익의 성호사설에 나오는 압슬은 나무토막을 다리 위에 놓고 노끈으로 묶은 다음 기왓장을 다리 사이에 끼어 사람을 시켜 번갈아 그 위를 밟게 하니 피가 솟아 땅으로 흘렀다.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압슬의 형이다.

- 민씨 형제의 자백을 목적으로 행해진 압슬형 “민무회가 승복하지 않기 때문에 두 사람을 써서 압슬하였으나 오히려 승복하지 않으므로 또 두 사람을 더하여 압슬하니···” <태종실록> 거짓 자백이라도 할 때까지 고통을 가했던 것

- 처남들에게 고문까지 하며 자살을 강요한 이유는?

<이익주 교수의 분석>은 태종의 입장에서는 죄가 없는 처남들을 처벌하려면 죄를 만들어야 하는 상황에서 증거가 없기 때문에 본인의 자백을 받아야만 하는데 역설적으로 죄가 없기 때문에 처남들을 고문하고 그 자백을 근거로 자살을 명령한 것으로 민씨 4형제가 무죄라는 심증을 굳히게 되는 이유라는 것, 태종 자신이 죽일 수 없으니 처남들 스스로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든 것

- <김영수 교수의 분석>은 외척 · 공신들의 죽음은 왕조시대 모든 역사에서 일어나는 일왕 개인의 성향의 문제가 아닌 구조적인 문제한(漢) · 당(唐) · 송(宋) 시대의 건국 초기에 모두 일어났던 일, 건국 이후 왕권을 안정시키는 과정에서 보통의 인간으로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발생하는데 사건 자체는 억울하고 비인간적인 일이지만 정치와 역사 발전의 측면에서 볼 때는 불가피한 일이라는 것


○ 태종 VS 원경왕후, 외척이 뭐길래?

- 원경왕후가 조금만 양보했더라면··· 동생들을 살릴 수 있지 않았을까?

여기서 잠깐 주목할 것은 원경왕후 때문에 민씨 형제들이 화를 당한 것이 아니라 역으로 처남들 때문에 원경왕후와 태종의 사이가 나빠진 것은 아닐까? 문제는 원경왕후와 태종 부부의 개인적인 불화보다 민씨 형제들로 대표되는 공신세력에 주목해야 하는 것이 이들은 공신세력이자 고려의 구세력들, 태종 이방원의 입장에서는 처남들이 계속해서 세력 확대를 하고 세자 양녕을 중심으로 이들이 결집하면 이씨 왕실의 장래가 위협받을 수 있다는 위기의식을 충분히 가질 수 있었을 것

- <김영수 교수의 분석>은 민무구 · 민무질 형제가 병권(兵權)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으로 모든 정치권력의 기초인 군사력은 가장 믿는 사람에게 맡겨야 되는데 이런 믿음도 의심하게 만드는 것이 병권(兵權)이 가진 이중적인 속성으로 왕의 입장에서 가장 믿는 사람에게 병권을 맡기되 정기적으로 교체하는 것이 가장 정확한 방법이라는 것

- 가까이서 외척의 전횡을 지켜본 태종, 바로 태조 이성계의 두 번째 정비인 신덕왕후 강씨가 베갯머리 송사를 통해 자신의 아들 방석을 세자로 앉힌 사건, 태종은 강씨를 통해 외척이 한 나라의 운명을 바꿀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1·2차 왕자의 난을 통해 본 원경왕후 민씨는 신덕왕후 강씨보다 더 똑똑하고 더 유력한 집안 출신으로 태종의 외척에 대한 트라우마로 외척을 정리하지 않으면 후대에 문제가 될 것이라 걱정하지 않았을까? 하는 <최태성 교사의 생각>

- 고려 태조 왕건도 외척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죽는데 <고려사열전 최승로> “경종께서 즉위하시니 옛 신하 중에 남아있는 사람은 40여 명뿐이었습니다.” 태조 왕건도 이를 알았지만은 외척의 문제를 해결할 힘이 없었던 것이고 피바람 속에서 왕위를 지켰던 혜종 · 정종 · 광종

- <이익주 교수의 분석>은 어느 나라든 건국할 때에는 자기편이 많을수록 유리하지만 나라를 만들고 나면 정리가 필요한 것인데 조선에서는 태종이 개국공신 정리를 한 것이고 혼인을 통해 왕실을 지켜주는 울타리 역할을 하는 외척, 국왕의 입장에서는 든든한 존재이지만 문제는 너무 커진 외척은 왕권까지 위협할 수 있는 존재, 그래서 외척이 가지는 양날의 칼이 되는 것으로 고난은 함께 하지만 영광은 함께 할 수 없는 게 권력

- 외척의 최후를 민씨 집안은 몰랐을까?

<태종실록> “(민제가) 항상 아들 민무구 등에게 이르기를 ‘너희들이 매우 교만하니 고치지 않으면 반드시 패할 것이다’ 하였으니” 하지만 아들들은 이를 듣지 않는데 이것이 권력이 가지는 힘, <김영수 교수의 생각>은 때가 되면 권력을 놔줘야 하는데 권력의 공백을 이기지 못하는 사람들, 그 마력을 이기지 못해 권력을 붙들고 있으면 그 뒤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불행이라는 것


○ 원경왕후의 남편 태종은 용서받을 수 있을까?

- <KBS 드라마 용의 눈물> 원경왕후의 마지막 가는 길에 병문안을 온 태종은 원경왕후에게 용서를 구하는데···

- 원경왕후의 폐비 논의가 있을 때에도 실제로 폐비시키지 않은 태종 <세종실록> “태후(원경왕후)가 병환이 드시었는데 상왕(태종)은 매일 오셔서 보시었고··· (원경왕후)가 수강궁 별전에서 훙(薨)하시니··· 흰옷과 소찬으로 30일을 지내셨으며···” 그리고 원경왕후 죽음 2년 뒤 세상을 떠나는 태종, 살아서는 같이 있지 못했지만 서초구 내곡동에 있는 헌릉에 합장된 태종과 원경왕후

- 용서할 수 있다는 <이익주 교수의 어록> 역사 속에는 이보다 더 잔혹한 일이 많습니다. 태종과 원경왕후 모두는 역사의 희생자로 원경왕후는 물론 태종도 불행 속에서 살았을 것, 태종은 자신에게 씌워진 왕관의 무게를 견디려고 했겠지만 왕과 왕비의 교육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갑자기 왕과 왕비 역할을 부여받은 사람들에게 투기하면 안 된다 처럼 개인의 윤리와 도덕으로 판단하지 말라는 요구를 받게 된 것, 그 행동의 결과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것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역사의 짐을 진 사람들이 불가피하게 겪어야 하는 고통이었다.”는 것

- <김영수 교수의 생각>은 정치가는 최종 결과를 가지고 평가받는 사람, 세종이 태종의 선택들이 옳았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으로 피바람 속에서도 조선 건국이 옳은 선택이었다는 게 증거로 세종도 그것을 느꼈기 때문에 태종의 정당화가 가능하다는 것

- 용서 받을 수 없다는 <최태성 교사의 생각>은 증거도 명확치 않은 상황에서 조선의 미래를 위해 많은 사람들을 죽인 태종, 태종의 행동이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인정을 한다면 오늘날의 정치인들이 잘못 배울 수도 있는 것이고 정치인들이 역사를 자기합리화의 수단으로 이용할 위험이 있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