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얼굴의 세종(世宗), 제2편 세종은 왜 황희를 선택했나?
○ 개요
- 1427년 신창현(지금의 아산)에서 아전 폭행사건이 발생하는데 아전 표운평이 아무 이유 없이 종들에게 구타를 당하고 폭행의 주동자는 서달이라는 자로 무고한 피해자 표운평은 다음 날 결국 죽게 되고 사건은 은폐된다.
- 하지만 살인사건의 조서를 살펴 본 세종(世宗)은 사건처리에 의아함을 느끼고 재조사를 명하고 서달 살인사건을 은폐하려는 움직임이 드러나는데 놀랍게도 화해(청탁과 압박)를 종용한 고위관리자들이 있었으니 그 중심에 황희가 있었다.
- 청백리 정승의 대표 황희, 진짜 그 황희가 맞나? 하지만 인간 황희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황희의 진 모습을 보는 시간
○ 황희, 살인사건을 은폐하다?
- 황희가 살인사건을 은폐하려던 이유?
<군산대학교 역사철학부 박사 유재리> 서달은 황희의 사위이자 서선(형조판서)의 아들로 지금의 총리 · 장관 관련인 살인사건으로 황희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의 사위가 살인범이 되는 것이어서 사건을 수습하려고 나서면서 신창현 출신의 맹사성에게 화해를 부탁하는데 둘은 좌의정과 우의정으로 모두 청백리 “맹사성이 (표운평의 형을) 불러오게 하여 알아듣도록 말하기를 ‘우리 고을의 풍속을 불미스럽게 하지 말라’고 하였다” <세종실록 권 36> 이렇게 압력 겸 청탁을 가하자 인근 고을의 현감들이 발 벗고 나서면서 서달 구출작전이 펼쳐진 것
- 그래서 사화장(私和狀, 지금의 합의문)을 써주고 사건의 주범을 서달의 종으로 범인을 바꿔치기를 해서 사건을 무마하려고 하는데 당시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에 대해서는 왕이 직접 조서를 보게 되어 있어서 세종이 살펴보니 의아한 점이 있자 의금부에 재수사를 의뢰한다. “임금이 사건의 조서에 어긋난 점이 있음을 의아하게 여겨 의금부에 내려서 다시 국문하여 죄를 매겼다.” <세종실록 권 36>
- 결국 모든 사건의 전말이 밝혀지게 되는데 근자에도 흔히 볼 수 있는 낯설지 않은 장면들로 지금으로 치면 범인 은닉죄로 중죄 중의 중죄, 당시에도 크나 큰 사건으로 여겨져서 서달 같은 경우에는 장형 100대에 유배라는 무거운 형벌을 받지만 돈으로 죄를 대신하지만 새로운 좌의정 · 우의정이 파직을 당하고 신창현 주변의 다섯 고을의 현감들도 모두 파직을 당하는 나라를 뒤흔든 대형 비리 사건
○ 우리가 아는 황희
- 황희는 어떤 사람?
아버지는 판강릉부사였고 73년간의 관직생활에 23년간 재상 자리에 오르고 이·호·예·병·형·공조 판서직을 두루 역임하면서 우리 역사상 가장 화려한 공직 스펙의 소유자로 세종과 함께 세종의 업적을 나누었던 인물
- 황희를 가장 먼저 알아본 사람은 태종으로 지신사(비서실장)에 발탁하면서 얼마나 믿음을 주었던지 “(황희가) 비록 하루 이틀만이라도 임금(태종)을 뵙지 않으면 반드시 불러서 뵙도록 하였다.” & “(태종이) 일찍이 말하기를 ‘이 일은 나와 경만이 알고 있으니 만약 누설된다면 경이 아니면 곧 내가 한 짓이다’ 하였다” <문종실록 권12 황희 졸기> 이 정도로 황희를 가까이에 두고 신임을 하게 되는 것
- 이렇게 믿어줬는데 태종(太宗)이 양녕을 폐위시킬 때 황희는 반대를 하자 한편으로는 매우 서운해 하면서 ‘공신이 아닌데 공신 대접을 해줬다, 하면서 유배를 보내지만 압송은 하지 말라고 지시한다, 세종(世宗)은 자신을 반대했던 황희가 껄끄럽지 않았을까?
○ 황희의 별명
- 황희의 또 다른 반전으로 별명이 황금대사헌으로 “황희가 대사헌이 되어서 설우의 금을 받았으므로 당시의 사람들이 ‘황금대사헌’이라고 일컬었다.” & “황희가 장인 양진에게서 노비를 물려받은 것이 단지 3명뿐이었고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것도 많지 않았는데 집안에서 부리는 자와 농막에서 흩어져 사는 자가 많았다.” & “정권을 잡은 여러 해 동안에 매관매직하고 형옥을 팔아 (뇌물을 받았다)” <세종실록 10년 6월 25일>
- 비리 관료를 뜻하는 황금대사헌 <유재리 교수>도 처음 사료를 읽고 깜짝 놀라 충격을 받았다고 하는데 논란이 있었던 황희의 황금대사헌이라는 별명의 기록 “당시 사람들이 ‘황금대사헌’이라고 일컬었다 하였으나··· 지금 여기에 앉아있는 8~9인은 어찌 한 사람도 들은 적이 없는가?” <단종실록 권2> 하여 애매한 부분이 없진 않다. 하지만 아니 땐 굴뚝에서 연기가 날 리 있는가?
- 당시의 사람들도 오늘 이 자리의 우리처럼 황희는 훌륭한 사람인데 설마 하는데··· <임윤선 변호사의 생각>은 보강증거 없이 전언(傳言)만으로는 유죄입증이 불가능 하지만 청백리 이미지에 손상이 간 것은 사실로 오늘 날의 인사청문회 통과는 어려운 일
○ 황희의 <인사청문회>
- 의혹 1. 뇌물수수 사건
“(박용이) 좌의정 황희에게 말 한 필을 뇌물로 주고 또 잔치를 베풀어 대접하고 편지를 받아왔다··· 고 하였습니다.” <세종실록 권 40> 사헌부에서 탄핵을 받은 것 “희가 아뢰기를 ‘박용에게서 말과 술대접을 받고 편지를 써주었다는 것은 다 신이 한 일이 아닙니다. 신이 불초한 몸으로 외람되게 수상의 직위에 있어서 온 나라가 모두 바라보고 있는데 이와 같이 몸을 더럽히는 오명을 얻었으니··· 이제 만약 다시 변명하지 않는다면 세상의 여론이 어찌 허위인가 진실인가 구분해 알겠습니까?”
- 의혹 2. 부동산 편법 교환
“(처남의) 법에 어긋난 일이 발각되자 황희는 이 일이 풍문에서 나왔다고 글을 올려 변명하여 구하였다.” <문종실록 권 12 황희 졸기> & “(황보신이) 교하현의 15결을 받았는데 예로써 속공되게 되었사온바··· 신의 과전과 바꿀까 하여 글을 갖춰 승정원에 올렸다.” <세종실록 권 93>
- 의혹 3. 사생활 논란
“박포의 아내는 도망하여 서울에 들어와 황희의 집 마당 북쪽 토굴 속에 숨어 여러 해 동안 살았는데 황희가 이때 간통하였으며 일이 무사히 된 것을 알고 돌아갔다.” <세종실록 권 40>
- 이에 대해 “신으로 인하여 누가 사헌부에 미쳤으니 놀라움을 이기지 못하여 깊이 스스로 부끄러워하고 있습니다··· 신을 관직에서 물러나게 하여 길이 성택에 젖게 해 주신다면 참으로 다행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세종실록 권 40> 황희 후보자 사퇴 선언!
○ 황희 비리의 진실은?
- 2017년의 청문회라면 통과하기 힘들 듯··· 하지만 적임자라면 조그만 허물은 덮어줄 수도··· 그러나 서달 사건 · 황금대사헌 · 박포 아내와의 간통 등은 모두 <세종실록>의 기록들, 그런데 실록 편찬 당시에도 황희의 비리를 폭로한 사관의 자질을 의심하는데 “(사관) 이효문은 나의 친속이나 사람됨이 조급하고 망령되고 단정치 못한데 그 망을 취하여 믿을 수 없으니 이를 삭제함이 어떠한가?” <단종실록 권2> 이효문이 황희에 대해서 악감정이 있음을 의심하는 것
- 현대 재판에서도 증언의 신빙성을 낮추기 위해 증인을 공격하기도 하는데 더욱 큰 문제는 사초로 시간이 지나면서 변색이 되는 사초, 하지만 유독 황희의 비리가 적힌 사초만 변색이 되지 않았다는 <유재리 교수의 증언> “이효문의 사초를 살펴보건 데 오랫동안 때가 타서 종이 빛이 다 누런데 오직 이 한 장만이 깨끗하고 희어서 같지 아니하니 사사로운 감정으로 뒤에 덧쓴 것이 분명합니다 삭제한들 무엇이 훼손되겠습니까?” <단종실록 권2>
○ 황희 중용한다? VS 안한다?
- 내가 세종(世宗)이라면 비리사건에 연루된 황희의 중용은?
황희를 중용하지 않겠다는 <원동연 대표의 생각>은 아버지 태종과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줘야 했던 세종은 청렴한 사람들을 등용해 인사의 선명성을 보여줘야 한다는 것 & 역시 황희를 중용하지 않겠다는 <임윤선 변호사의 생각>은 거대한 둑을 무너뜨리는 건 작은 구멍으로 능력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을 등용하는 것은 기강을 해이하게 만드는 것
- 황희를 중용하겠다는 <유재리 박사의 생각>은 세종의 위치가 아직은 견고하지 않은 상황으로 세종에게는 황희가 필요했을 것이어서 현실적으로는 씁쓸한 사건이지만 차선책으로 중용할 수밖에 없을 듯하다는 것으로 관료를 채택함에 있어서 능력이냐? 도덕성이냐? 고민해 보는 시간
○ 세종은 왜 황희를 택했나?
- 세종이 황희를 중용한 이유?
서달 살인 은폐 사건 이후 황희를 좌의정으로 복직시키려는 세종, 하지만 모친상을 이유로 복직을 거부하는 황희를 수차례 종용 끝에 복직을 시키는데 폐백(幣帛)은 선물하다 폐(幣) + 비단 백(帛)으로 <이익주 교수의 분석>은 선물이 일상화되었던 당시의 사회 분위기로 선물과 뇌물의 경계가 모호한 상황에서 황희의 행동이 나올 수 있었던 것
- 황희가 비리관료로 탄핵을 받을 때 세종이 하는 말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의 대신으로는 황희와 같은 이가 많지 아니하다. 하륜·박은·이원 등은 모두 재물을 탐한다는 이름을 얻었는데 하륜은 자기의 욕심을 채우기를 도모하는 신하이고 박은은 임금의 뜻을 맞추려는 신하이며 이원은 이(利)만 탐하고 의(義)를 모르는 신하였다.” <세종실록 권53> 황희는 이들보다는 낫다는 것으로 그 당시의 사람들 중에서는 덜하다는 평가가 당시에도 있었던 것
- 황희는 성격이 담백했던 것 같다는 <유재리 박사의 생각>은 귀양지에서도 유력자들은 뇌물과 청탁을 받기 마련인데 “황희가 남원에 이르러서는 두문불출하고 손님을 사절하니 비록 동년이나 친구일지라도 그 얼굴을 보기 힘들었다. 태종이 그 사실이 나닌 것을 알고서 임인년 2월에 불러서 서울에 돌아오게 하였다.” <문종실록 권12> 자신에게 주어진 결과를 겸허히 수용할 줄 알았던 황희
- 일반적인 탐관오리들은 자기 행동에는 관대하고 남의 행동에는 인색한 법인데 황희는 자신과 타인 모두에게 관대하여 형벌을 논할 때도 되도록 가벼운 형벌로 처벌하자는 등 나름대로 자신과 타인에 대한 일관성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라는 <이익주 교수의 분석>
- 황희의 회전문 인사, 73년간 장관과 비서실장에 이어 국무총리 까지 역임하면서 안 해 본 직책이 없는 황희, 실록에 세종이 황희를 등용한 이유가 기록이 되어 있는데 정리하자면 ① 세상을 다스려 이끌만한 재주와 실제 쓸 수 있는 학문, 즉 실용 학문 ② 태종이 선임한 검증된 인재로 부정부패의 혐의는 있지만 업무능력이 보장된 관리로 흠이 있어도 필요한 사람이라면 중용한 세종, 대표적으로 조말생이라는 사람의 노비뇌물죄는 교수형 감으로 수많은 신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를 복직시켜 함길도의 관찰사로 파견시키는데 세종은 야인통제에 조말생이 적합하다고 판단했던 것
- 또한 장영실의 중용과 관련된 이야기로 관노(官奴)였던 장영실에게 관직을 주는데 반대한 신하들, 출신보다 능력을 우선한 세종 “황희 등이 말하기를 ‘김인은 평양의 관노였으나 날래고 용맹함이 보통사람에 뛰어나므로 태종께서 호군을 특별히 제수하시었고··· 그것만이 특례가 아니오라 유독 영실에게만 어찌 불가 할 것이 있겠습니까?” <세종실록 권61> 세종이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해 준 것
- 하지만 다시 터진 황희의 문제는 아들 “황중생(황희의 아들)이 동궁의 소친시가 되어 궁중에서 급사하였는데··· 잃어버렸던 금잔과 금띠도 모두 중생이 훔친 것으로 다 자복하였다” <세종실록 권91> 이 때 황희의 반응은 자기 자식이 아니라고 성(星)을 갈아버리는 것
- 완벽해 보이는 세종의 콤플렉스 ① 조선 건국에 참여하지 않음 ② 왕위계승 적장자가 아님, 13년 세자기간의 양녕대군 VS 2개월 세자기간의 세종은 자신의 능력을 검증하거나 자기 사람을 만들 시간이 없었던 것이고 세종의 잠재력에 대한 태종의 인정과 상징적인 왕권만 가진 상황이어서 뭔가를 보여줘야만 했던 것
- <유재리 박사의 분석>은 건국에서 수성(守成)의 시대로 넘어가는 당시의 상황에서 칼이 아닌 실력으로 자신을 보여줘야 했던 과제 앞에서 황희를 중용했을 것, 그리고 여기에는 황희의 독특한 정치적 성향이 있다는 <이익주 교수의 분석>은 정치가라기보다는 전문 관료의 이미지가 강한 황희, 태종이 황희를 지신사로 발탁을 했을 때 이를 반대한 하륜, 하지만 결국 태종은 황희를 발탁하자 공신 집단들 VS 황희는 혼자 싸우는 것, 그래서 오랜 시간 영의정의 자리에 있었지만 자기 세력을 키우지 않았고 임금의 총애를 바탕으로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을 한 인물이라는 것
○ 세종의 용인술
- ① 트레이닝의 왕, 신하들에게 학습을 시킨 왕으로 <사가독서제(賜暇讀書制)>는 인재양성을 위해 문신에게 유급휴가를 주어 학문에 전념하게 한 세종의 정책으로 이를 통해 두각을 나타낸 대표적 인물이 신숙주 · 성삼문 등
- ② 지켜보고 있다, 인사 파악을 통해 자기 사람으로 만든 세종, 지방 파견 시 임금에게 인사를 했던 관리들, 그 범위는 감사(도지사) · 부윤(시장)급에서 6품(수령·현령)까지 확대하여 의례적으로 만난 것이 아니라 모든 신상을 파악한 후 업무를 지시하는 것, 지방 관리에게 왕과의 대면은 평생의 영광
- 그리고 중요한 것은 적재적소에 사람을 배치한 세종, 음운·외국어에 능한 신숙주를 집현전에 배속하여 한글 창제 작업을 과거에 급제한 문신 박연에게는 아악을 정리하도록 하고 한 번 맡긴 일에 대해서는 끝까지 믿는다는 것, 그래서 전문성을 가진 관리가 유독 많았던 세종 시기
- ③ 솔선수범의 아이콘, 훈민정음을 만들 때는 직접 중국어도 배우면서 솔선수범 앞장서서 실행하다 보니 신하들이 따르지 않을 수 없었던 것
○ 세종과 황희
- 능력 + 노력 + 게다가 다른 사람의 의견을 경청한 세종은 회의를 통해 의사결정을 하는데 특히 황희의 의견을 가장 많이 따른다. “임금이 말하기를··· 삼군을 나누어 정하는 것은 황희와 맹사성의 논의에 좇을 것이다 하였다.” <세종 15년 2월 21일> & “임금이 황희 등의 논의를 좇아 최윤덕에게 내전하였다.” <세종 15년 2월 28일> & “모두 황희 등의 논의에 따랐다.” <세종 15년 3월 22일> & “임금이 희 등의 논의에 좇아 즉시 형조에 교지를 내렸다.” <세종 15년 10월 24일> & “임금이 말하기를 ‘의복을 주는 것은 황희 등의 논의에 따르라’ 하였다.” <세종 16년 9월 8일> & “임금이 말하기를··· ‘마땅히 황희의 논의에 따라야 할 것이다 하였다.” <세종 20년 5월 22일> 일이 되는 방향으로 방법을 제시한 황희는 세종에게 정말로 필요한 인물이었을 것
- 세종에게 예스맨만이 아니라 NO라고 말한 황희는 왕의 보조를 맞추는 신하가 아닌 주관이 있는 관리로 “세종이 중년 이후에는 새로운 제도를 많이 제정하니 황희는 생각하기를 ‘조종의 예전 제도를 경솔히 변경할 수 없다’ 하였다” <문종실록 권12 황희 졸기>
- 임금이 그렇다고 해도 그렇지 않다고 말 할 수 있는 사람 “총재는 인주의 아름다운 점은 순종하고 나쁜 점은 바로 잡으며 옳은 일은 받들고 옳지 않은 것은 막아서 인주로 하여금 대중의 지경에 들게 해야 한다.” <조선경국전> 이는 정도전이 구상했던 그 재상의 모습이고 반대의 목소리에 귀 기울인 세종도 대단한 것으로 훌륭한 왕과 재상의 조화로 황희는 80이 넘자 나이를 핑계로 물러서려 하지만 세종은 이를 용인하지 않는다.
- 유일하게 황희를 중용하지 않겠다는 <최태성 교사의 생각>은 황희가 아니었어도 세종은 더 능력 있는 사람을 발굴할 수 있었을 것, 황희를 중용한다는 <원동연 대표의 생각>은 두 거인 세종과 황희의 만남, 이것은 조선의 행운! <최원정 아나운서의 생각>은 ‘세종 같은 임금과 황희 같은 정승이 필요한 시기’ 물론 결과론적이기는 하지만···
- <유재리 박사의 생각>은 황희는 세종의 뜻에 따라 발전하기 위해 노력했던 인물 <이익주 교수의 분석>은 언제나 도덕적으로 깨끗한 사람만이 정치를 하는 것은 아니라 발전기에는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더라도 능력 있는 사람이 중용이 되기도 하는 것으로 세종의 시대는 능력 있는 인재가 필요한 시기였다는 것, 하지만 그때와 지금은 다르다는 것으로 과거의 사례로 현재를 합리화하는 것은 역사와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데서 오는 오류이고 조선은 왕정의 시대이지만 지금은 모든 권력이 국민들로부터 나오는 시대로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은 그 자체로도 정당성을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이고 과거 황희가 용납됐다고 현재 부도덕한 사람이 용납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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