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종(端宗)의 비극, 할아버지 세종(世宗)의 책임인가?
○ 개요
- 1457년 영월로 유배된 단종은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다, 실록에 기록된 사인(死因)은 자살, 하지만 사건의 진실은 세종의 둘째 아들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고 조카를 죽음으로 내몬 것, 이미 오래 전부터 싹터온 왕실의 비극, 그 시작은 세종(世宗) 시대였다.
- 단종의 죽음과 할아버지 세종이 과연 무슨 관계?
<장지연, 대전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 세종 6년에 문종을 세자책봉 하고, 세종 30년에 단종을 왕세손으로 책봉하면서 조선 건국 최초로 순조로운 적장자 왕위계승이 되도록 해놨더니 아들인 수양대군이 단종의 왕위를 찬탈한 사건이 발생한 것
○ 왕위계승, 세종(世宗)의 유일한 실패
- 세종은 위대한 업적을 많이 남겼지만 세종의 뜻대로 되지 않은 것이 후사문제가 아닌가? 생각된다는 <이익주 교수의 분석> 오늘의 포인트는 왕위계승 과정에서 세종의 실수가 과연 있었는가? 하는 것
- 세종이 죽게 되자 세자기간 29년으로 준비된 왕 문종이 즉위를 하지만 재위 2년 4개월 만에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하면서 왕실의 비극은 시작이 된다.
- 문종(文宗)은 병약했다?
흔히들 그렇게 생각하지만 “육예(六藝) · 천문(天文) · 역상(曆象) · 성률(聲律) · 음운(音韻)에 이르기 까지 통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문종실록 총서> 또한 무예 · 병법에 출중했던 점과 측우기를 장영실이 만들었다고 하는데 문종의 아이디어로 탄생한 측우기, 또 한 가지는 화차를 마차에 실고 달리면서 쏘는 이동식 화약무기를 개발하는데 이 역시 문종의 아이디어로 출중한 후계자 문종에게 왕위를 물려준 세종
- 문종이 너무 일찍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39세에 승하하게 되는데 문제는 단종의 나이가 너무 어렸다는 것으로 당시 단종의 나이는 12세로 단종의 나이가 스무 살만 되었어도 과연 수양대군 삼촌이 왕위를 넘봤을까? 한다는 <이익주 교수의 분석>
○ 문종(文宗)의 후사가 늦어진 이유는?
- 문종의 늦은 나이 27세에 단종을 낳은 것 “휘빈 김씨를 세자빈으로 삼았더니 뜻밖에 김씨가 미혹시키는 방법으로써 압승술(壓勝術)을 쓴 단서가 발각되었다.(중략) 남자가 좋아하는 부인의 신을 베어다가 불에 태워서 가루를 만들어 가지고 술에 타서 남자에게 마시게 하면 내가 사랑을 받게 되고 저쪽 여자는 멀어지게 되어서 배척을 받는다 하오니 ‘효동 덕금 두 시녀의 신을 가지고 시험해 보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세종실록, 11년> 이는 사랑이 그리운 문종의 휘빈 김씨 이야기
※ 압승술 : 주술을 쓰거나 주문을 외어 남자를 미혹시키는 일
- 12살인 문종을 위해 세자빈을 간택한 세종은 안동 김씨의 명문가 출신의 휘빈 김씨를 선택하지만 문제는 문종의 마음을 얻지 못했던 휘빈 김씨, 왕실 여인의 가장 큰 임무는 후사를 보는 것이지만 하늘을 봐야 별을 딸 수 있는 것으로 휘빈 김씨의 압승술 ① 문종이 좋아하는 궁녀의 신발을 태워 가루를 술에 타 문종에게 먹이기 ② 뱀이 교접할 때 흘린 채 액을 수건으로 닦아 간직하기였지만 미수에 그친 압승술
- 세종, 드디어 문종의 비인 휘빈 김씨를 퇴출시키다?
세종은 완벽한 사람으로 왕위에 있으면서 실패한 적이 없었던 위대한 성군, 그래서 자식에 대한 교육도 철저하여 아들인 문종을 자신과 똑같은 사람으로 만들고 싶었던 계획이었는데 며느리 휘빈 김씨 폐출로 틀어진 세종의 계획
- 두 번째 세자빈을 간택하기로 한 세종은 세자빈의 조건에 미모를 추가 “허조만 유독 ‘불가 하옵니다’(중략) 오로지 얼굴 모양만을 취하고 덕(德)을 보고 뽑지 않게 될 것입니다‘ 임금(세종)이 말하기를 ’잠깐 본 나머지 어찌 곧 그 덕을 알 수 있으리오 이미 덕으로서 뽑을 수 없다면 또한 용모로서 뽑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세종실록 11년>
- 그래서 문종의 두 번째 세자빈은 순빈 봉씨가 간택되지만 1436년 10월 26일, 세종은 두 번째 세자빈인 순빈 봉씨의 폐출을 밝히는데 첫 번째 휘빈 김씨의 폐출 후 7년만의 일이다. <원동연 대표의 생각>은 세종이 며느리 고르는 기준이 너무 엄격했거나 여자 보는 안목이 낮았던 것? <이익주 교수의 생각>은 여기에는 세종과 문종이 약간의 차이가 있는데 세종이라면 아버지가 골라준 배필이라면 싫어도 좋아했을 사람이지만 문종은 그 점에서 만큼은 아버지 세종을 닮지 않은 듯하다는 것
- <세자 이혼 발표 기자 회견> 1436년, 세종 18년 10월 26일
① 왜 자꾸 세자 문종을 이혼시키는 거죠?
“성품이 술을 즐겨··· 큰 그릇으로 연거푸 술을 마시어 몹시 취하기를 좋아하며” & “궁인들이 혹 서로 수군거리기를 ‘빈께서 소쌍과 항상 잠자리와 거처를 같이 한다’ 고 하였다” <세종실록 18년>
② 순빈 봉씨도 세종께서 간택하지 않았나요? 문종에게 맡길 수는 없었나요?
국모(國母)의 선택은 너무나 중요한 일로 이를 내가 결정하지 않으면 누가 한단 말이오?
③ 당사자인 문종의 입장도 세종과 같나요?
당연한 말씀, 내가 결정하면 따라야지···
- 세종도 독특한 캐릭터인 것이 문종만 이혼시킨 것이 아니라 넷째 임영대군과 여덟째 영응대군까지 이혼시키는데 문종까지 합치면 다섯 번의 며느리를 이혼시키고 영응대군 같은 경우에는 세종 사후(死後) 전처와 재결합을 하기도 하는 등 아들들의 의사를 무시한 세종의 지나친 개입으로 문종의 후사가 늦어졌고 단종의 비극도 여기에서 비롯됐다는 것?
- 단종의 죽음, 세종의 책임이라는 <이익주 교수의 분석>은 세종은 ‘만기칠람’이라고 해서 임금이 온갖 정사를 친히 보살피며 대체적으로 성공을 거두었는데 후사결정도 그렇게 될 수 있다고 매사에 자신만만해 하는데 여기에서는 그렇게 안 된 것으로 이는 세종의 책임이라는 것, 세종의 책임이 아니라는 <최원정 아나운서의 생각>은 문종의 후사가 늦어진 건 문종의 건강이 문제가 아닐까? 생각
- <이익주 교수의 분석>은 합궁(合宮)은 왕과 왕비가 침전에서 만나는 것으로 일관들이 길일을 선택해 왕의 합궁날짜까지 결정하는데 아들을 얻기 위하여 사(巳)와 인(寅)자가 들어가는 날은 안 되고 초하루 보름 그믐 안 되고 일실·월식 있는 날 안 되고 그렇게 해서 결정이 되더라도 천둥 번개가 치거나 강풍이 부는 날은 안 되고 게다가 합궁 당일 건강상태가 좋지 않으면 안 되고 하여 한 달에 한 번 정도 가능했던 왕과 왕비의 합궁으로 후사를 보기에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
○ 외로운 어린 왕, 단종(端宗)
- 문종의 후사를 잇기 위해 세 명의 후궁을 들여 준 세종은 권씨 · 홍씨 · 정씨 세 명의 세자빈 후보를 들여 주고 “세자의 뜻은 홍씨를 낫게 여기는 듯하나 내 뜻은 권씨를 적당하다고 생각한다.” <세종실록 18년> 문종의 아이를 출산한 경험이 있었던 현덕왕후 권씨는 세 번째 세자빈으로 책봉된다.
- 그리고 1441년 조선의 6대 왕 단종이 탄생 “이제 적손이 생겼으니 나의 마음이 기쁘기가 진실로 이와 같을 수가 없다” <세종실록 23년> 단종의 탄생에 그 누구 보다 더 기뻐했던 세종, 하지만 단종이 탄생한지 하루 만에 숨을 거둔 현덕왕후 권씨, 세자빈의 죽음으로 비통에 빠진 조선 황실, 하지만 이는 앞으로 닥칠 더 큰 비극을 예고하고 있다,
- 태어나자마자 든든한 후견인을 잃은 단종, 그리고 유독 아내 복이 없었던 문종, 현덕왕후 사후(死後) 문종의 어머니인 소현왕후 신씨 그리고 세종(世宗)까지 잇따른 왕실의 줄초상으로 세자빈을 들이지 못한 문종은 재위기간 왕비를 두지 않은 유일한 왕으로 남게 된다.
- 이 당시의 가계도를 보면 어린 단종에게 남아 있는 가까운 혈육은 유일하게 누나 경혜공주 뿐으로 문종 승하 후 단종의 정치적 후견인이 하나도 없는 사고무친(四顧無親)상태로 왕이 된 것
○ 세종(世宗)은 왜 아들들을 등용했나?
- 삼촌이 어떻게 왕위를 넘볼 수 있었나?
“진양대군(훗날 수양대군) 이유에게 명하여 명나라 사신들에게 잔치를 베풀게 하였다.” <세종 17년> & “진양대군 이유와 안평대군 이용을 시켜 왕세자빈의 무덤혈을 살피게 하고 길지를 찾아보게 하였다” <세종실록 23년> & “언문으로 운회를 번역하게 하고 동궁과 진양대군 이유, 안평대군 이용을 시켜 감독하게 하였다” <세종실록 26년> & “대사헌 허후를 불러 수양대군 이유에게 시켜 전지(傳旨)하였다” <세종실록 27년> 세종은 아들들에게 여러 가지 일을 시켰는데 수양대군에게는 명 사신 접대 · 왕의 전지(명령)를 각 관서나 신료에게 전달 · 여러 관서의 제조로 임명 · 집현전 편찬 작업 감독 그리고 안평대군에게는 조정의 불사 등 왕실과 관련된 사업을 추진 · 집현전 편찬 작업 감독 등
- 대군들에게 왕실의 허드렛일이 아닌 중요한 업무를 맡겼던 세종, 공법(共法)이라는 토지에 관한 세금 제도를 완성할 때 이를 담당하는 전제상정소 책임자를 수양대군에게 맡게 하고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에게 집현전 편찬 작업에 참여를 하게 하는데 집현전이라는 것이 세종 대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던 기관에 두 아들을 참여시킨다는 것은 세종이 두 아들을 크게 신뢰했다는 증거, 그리고 그 활동을 통해 수양이 집현전 학자들과 인맥을 쌓을 수 있었던 것으로 이것이 훗날 수양대군이 왕이 되는데 중요한 발판 역할을 한다.
- 대군들에게 정치적인 업무를 맡겨도 되는 걸까?
<종친불사>라고 왕의 8촌 이내 친족은 벼슬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제도가 자리를 잡는데 종친불사의 원칙을 어겼던 세종, 심지어는 관직을 주려하는 상황까지 이르며 조선시대에서도 유일무이했던 예외적인 사례
- <원동연 대표의 생각>은 아들들에게 권력을 키워준 것은 갈등의 불씨를 만든 것이고 발생할 문제를 미리 헤아리지 못한 것은 세종의 책임이라는 것, <임윤선 변호사의 생각>은 능력이 출중했던 수양과 안평을 왕의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정사에서 배제하는 것이 세종에게는 안타까웠을 것이어서 인재를 등용하는 차원에서 아들들에게 일을 시켰을 것, <최태성 교사의 생각>은 능력 중심으로 인재를 등용했던 세종이라면 능력 있는 아들들을 쓰지 않을 이유가 없었을 것이라는 것, 세종에게 책임이 있다는 <최원정 아나운서의 생각>은 종친불사의 폐해를 모를 리가 없는 세종이 판단력을 잠깐 잃었던 것은 아닐까?
- 세종(世宗)이 대군들을 정사(政事)에 등용시킨 이유는?
<세종실록의 기록들> 세종 2년, “상왕이 말하기를 주상이 어렸을 때부터 고기가 아니면 밥을 먹지 못하였으니” & 세종 4년 “신하들이말하기를 전하께서 평일에 육식이 아니면 수라를 드시지 못하였는데” & 세종 4년 “태종이 유언을 남기시길 주상은 고기가 아니면 진지를 들지 못하니 내가 죽은 후 권도를 좇아 상제를 마치라고 하였다” 아버지 태종이 자신의 상중이라도 고기를 먹게 하라는 유언을 남길 정도로 세종은 고기를 사랑한 사람
- 하지만 세종은 효자라서 태종의 상중에 고기를 먹지 않다가 며칠 만에 몸이 축나는 허손병에 걸리는데 문제는 좋은 것만 먹으면 탈이 나는 것으로 육식을 즐기고 운동을 싫어했던 세종 “태종이 말하기를 주상은 사냥을 좋아하지 않으시나 몸이 비중하시니 마땅히 때때로 나와 노니셔서 몸을 존절히 하셔야 하겠으며” <세종실록 즉위년> 왕조시대 왕의 건강은 나라의 근간이랄 수 있는 것
○ 세종의 은퇴기자 회견
- 1445년(세종 27년) 5월 1일 “내가 세자에게 선위하고 한가롭게 있으면서 병을 수양하고자 하였더니··· 이제 군국의 중한 일 외의 일에 서무를 세자로 대신 다스리게 하고자 한다”
- 세종은 어릴 때부터 많은 질병에 시달리는데 29세에 두통과 이질 · 30대에 풍질과 소갈 · 40대에 다리수종, 안질과 임질 · 50대에 풍증과 수전증 등 40대 이후에 나타난 당뇨합병증으로 50대부터 급격히 악화된 병세 “임금이 풍증으로 수전증이 있어 수결을 두기가 어려워서 정사를 보지 못하겠노라” <세종실록 28년>
- 성인병인데 고기를 먹어도 되나요?
기록을 보면 “일찍이 신하들에게 지갈(止渴)시킬 약을 문의하라 명하였사온데 의원은 말하기를 (중략) 흰 장닭 · 누른 암꿩 · 양고기 등은 모두 능히 갈증을 지식시킨다.” <세종실록 13년> 세종에게 이러한 식재료는 효험이 있는 것
-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인 세종은 각종 질병으로 고통스러웠던 재위기간의 말을 보낸다. “을사년에는 내 병이 심하다 하여 외간에서 관각을 짜기까지 하였다.” <세종실록 31년> 세종의 재위 말은 관까지 짤 정도의 건강 상태에서 정신력으로 이뤄낸 훈민정음 창제의 업적
- 대군들의 정사 참여는 결국 세종의 건강 악화 때문으로 재위 말까지 과도한 업무에 시달렸던 세종, 장기 계획으로 이뤄야 할 것들은 많은데 시간은 많지 않은 것, 세종의 책임이라는 <원동연 대표의생각>은 담당관청과 소속된 신하들이 있는데 굳이 대군들에게 정사를 맡길 필요가 있었을까? 남을 믿지 못했던 완벽주의자 세종은 자신의 아들을 분신으로 만들어 마무리 하려는 생각을 했을 것이라는 인상을 준다는 <이익주 교수의 분석>
○ 단종(端宗)의 비극, 할아버지 세종의 책임?
- 세종이 신하들에게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아니되옵니다!‘ 였을 것, 조선의 훌륭한 관료는 위에서 시킨 대로 잘 따르는 것이 아니라 소신을 끝까지 굽히지 않고 자신의 기개를 보이는 것이어서 신하들을 끊임없이 설득해야 했던 세종은 한층 더 힘들었을 것, 게다가 세종 26년에 아들 광평대군과 세종 27년에 평원대군의 죽음, 그리고 세종 28년에 소현왕후 심씨까지 승하하여 가족들의 연이은 죽음으로 괴로워했던 세종은 재위 말 불교에 귀의하며 신하들과 더더욱 대립하고 세종이 원했던 불사(佛事)를 대신 진행해 주었던 대군들은 경복궁 안에 불당을 건립한다.
- 병환이 깊어진 세종이 문종과 수양대군에게 남기는 마지막 유언, 먼저 문종에 이르기를 “국가의 안위가 네 한 몸에 달려있다” 그리고 수양대군에게 “국가에 재난이 많을 때는 너희들이 함께 도와야 한다, 수양 너는 보통 아들과는 다르다, 나라의 안위에 관계된다.” 이 말을 들은 수양대군은 감격의 눈물을 흘린다.
- 세종에 책임이 있다는 <원동연 대표의 생각>은 수양대군의 권력욕을 부추기는 발언이 아니었을까? 수양대군의 입장이라면 문종의 사후 정사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건 불가능한 일일 것, 왜냐하면 이미 역사의 주연 노릇을 했기 때문에···
- 세종은 아들 수양대군의 야심을 전혀 몰랐을까?
재미있는 것이 세종이 수양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하는 단서가 하나 보이기는 하는데 평소에 수양이 옷을 크게 입고 다니자 “세조(수양대군)가 항시 품이 넓은 옷을 입고 있으므로 궁인들이 이를 보고 웃었는데 세종이 말하기를 ‘너같이 효용한 사람은 옷을 넉넉하게 입는 것이 좋다’” 라고 평가를 하는데 효용은 사납고 날쌤을 의미하여 무사 · 오랑캐 · 향리에게 표현되는 용어이고 왕실에서 ‘효용하다’라는 평가를 받는 인물은 양녕대군, <장지연 교수의 분석>은 수양은 성격이 급하고 성질 사나운 아들일 뿐으로 왕이 될 재목이 아니라고 평가했을 것
- <최태성 교사의 생각>은 이미 세자 문종과 왕세손 단종까지 책봉해놓은 상태여서 세종은 수양이 왕위를 넘볼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을 것, <이익주 교수의 분석>은 이 대목에서 세종이 권력의 냉정한 속성을 방기한 것으로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삼촌이 조카의 왕위를 찬탈한 수많은 사례들이 있고 세종의 재위 말 급격히 건강(등창)이 악화된 문종, 그래서 문종과 단종에게 순조롭게 왕위가 계승되지 못할 가능성을 세종은 이미 인지하고 있었을 것
- 단종(端宗)의 죽음, 할아버지 세종 때문이다?
4:2로 책임이 아니다는 의견이 지배적으로 세종의 책임이 아니라는 <최태성 교사의 생각>은 아들을 끔찍하게 사랑했던 세종, 그 과정에서 세종의 실수가 있었지만 단종을 잘 보필해달라는 세종의 유지를 어긴 것은 수양대군의 잘 못으로 단종의 비극을 세종의 책임으로 모는 것은 결과론적인 접근이라는 것
- 세종의 책임이 있다는 <이익주 교수의 분석>은 문제가 개인의 욕심을 벗어나는 구조적인 문제로 종친불사의 원칙은 종친이 정치에 참여할 경우 생겨날 왕실의 비극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것인데 수많은 관리들이 반대하는 데도 불구하고 종친불사의 원칙을 어긴 것은 세종의 독선으로 이렇게 제도가 무너진 상황에서 권력욕을 가진 종친이 등장한다면 비극은 예고된 것으로 정치를 하는 사람은 자기가 몰랐더라도 뒤에 나타날 가능성까지 책임을 져야한다는 것
- 세종의 책임이 없다는 <장지연 교수의 생각>은 고려시대에 종친불사의 원칙이 내내 지켜졌지만 삼촌이 조카의 왕위를 찬탈한 일이 발생한 것으로 단종의 비극은 종친불사의 원칙을 어긴 세종 개인의 책임이라 볼 수 없고 혈통으로 왕위를 계승하는 왕정 시스템 자체의 문제로 왕정 시스템에서는 어떠한 안전장치를 하더라도 이러한 비극은 되풀이 될 것
- 세종에게 한줄 평을 남긴다면?
‘과유불급(過猶不及)’ 모두를 당신이 하려고 하셨기 때문에 & 역사적으로 천재들은 늘 자기함정에 빠지게 되는 것으로 ‘천재의 숙명적인 자기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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