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얼굴의 세종(世宗), 제3편 세종은 사대주의자였나?
○ 세종(世宗) 명나라에 공녀를 바쳤다?
- 조선 초 명나라를 지성으로 사대한 조선은 명나라의 황제에게 조선의 처녀를 공녀로 차출해 보내는데 "사신 황엄, 해수가 황씨를 데리고 돌아가는데 (중략) 길옆에서 보는 자가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태종실록 17년 8월>
- 뿐만 아니라 1424년 8월, 영락제는 6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는데 영락제의 총애를 받던 공녀 한씨는 순장의 위기에 놓인다.
- 공녀하면 떠오르는 고려 출신 기황후로 고려시대부터 시작된 가슴 아픈 역사, 기록에 따르면 "유천우를 원(元)에 파견하여... 처녀 10인을 바쳤다." <고려사세가 충렬왕 원년11월 17일> 이를 시작으로 공민왕까지 80년간 20여 차례 원에 공녀를 보냈다는 기록이 있으나 기록되지 않은 것을 포함하면 상당수에 이를 것.
- 당시는 원명교체기로 대를 이어진 악습으로 공녀뿐만 아니라 말 만여 필까지 조공으로 요구해 오는데 명(明)이 원(元)의 적폐청산을 정책적으로 내세웠지만 실제 통치시스템은 원을 답습하는 경향이 있어 조선에 말, 공녀, 화자를 요구한다는 <계승범, 서강대학교 사학과 교수>의 분석
- "죽는 날 모두 뜰에서 음식을 먹이고 식사가 끝난 다음 함께 마루에 끌어 올리니 곡성이 점각을 진동시켰다. 마루 위에 나무로 만든 작은 평상을 놓아 그 위에 올라서게 하고 그 위에 올가미를 만들어 그 속에 넣게 한 다음 평상을 치워버리니 모두 목이 졸려 죽게 되었다 한씨가 죽을 때 유모 김흑에 이르기를 '낭아 나는 간다.'고 하였는데 말을 마치기 전에 곁에 있던 환자가 평상을 빼내므로 최씨와 함께 죽었다." <세종 6년 10월 17일>
- 순장(殉葬)을 당한 한씨에 이어 공녀로 선발된 동생 한계란, 이 사실을 안 한씨가 너무 가슴 아파하다 병이 들자 오빠가 약을 지어 보내는데 “또 막내딸이 얼굴이 아름답다고 아뢰었으므로 와서 뽑아가게 되었는데 병이 나게 되어 그 오라비 한확이 약을 주니 한씨가 먹지 않고 말하기를 ‘누이 하나를 팔아서 부귀가 이미 극진한데 무엇을 위하여 약을 쓰려 하오’ ” <세종실록 9년 5월 1일> 자매를 명의 공녀로 보낸 상황으로 공녀는 지위고하를 가리지 않고 차출
○ 세종(世宗)의 지성사대, 어느 정도였나?
- 애민제일주의자 세종이 정말 공녀를 보냈을까?
세종의 외교 키워드는 지성(至性), 그래서 명(明)의 다섯 황제를 모시는데 명(明)에서도 이를 인정 하고 “충의(忠義)와 정성(精誠)이 지성에서 나와··· 특별하게 여러 황제께서 돌보아 총애하심을 입었고···” <세종실록 32년 2월 22일>
- 공녀 외에 세종이 명(明)에 조공으로 바친 것은?
예리한 눈과 날카로운 발톱, 뛰어난 사냥실력을 자랑하는 조선 최고의 명품 해동청, 그런데 문제는 명나라의 황제들도 조선의 매에 매력에 빠져 명 황제를 위한 필수 조공품이 된 조선의 자랑이 조선의 고민거리가 된다 “해청은 포획하기가 매우 어려워서 이로 연유하여 외방백성들의 소요가 막심하고···” <세종실록 10년 11월>
- 수백 명이 동원될 정도로 잡기 어려운 해동청, 감사·수령·절제사 등 조선 관료들의 주요 업무가 된 해동청 잡기, 해동청의 주요 서식지는 함경도 연해주 일대로 급기야 조선에 수백 명의 해동청 체포군을 보낸 명나라, 윤봉이 조선에 체포군으로 들어와 민가의 개를 징발하자 이징옥이 협조를 거부하며 징발된 개를 모두 돌려주고 잡은 해동청을 보고하는데 요구 수량을 늘일 것 같아 포획한 숫자를 줄여서 보고한다.
- 애민을 실천한 이징옥에게 세종(世宗)이 상을 주지 않았을까?
<계승범 교수의 분석>은 윤봉은 명 황제의 명령을 받고 조선에 온 사신으로 민가의 개를 징발한 것도 공무집행으로 조선의 관원인 이징옥에겐 명의 사신인 윤봉을 도와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인데 잡은 해동청을 풀어주고 포획 사실을 누락시킨 이징옥의 행동은 엄연한 공무집행방해로 세종의 입장에서는 더욱 더 큰일 인 것
- 이징옥은 목숨을 보존했을까?
결국은 이징옥을 처벌하는데 “의금부에서 이징옥의 죄를 국문하여 아뢰니 직첩(職牒)을 거두고 외방에 부처(付處)하도록 명하였다.” <세종실록 14년 11월 20일>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윤봉이 그러면 내가 미안하잖아 하면서 오히려 사면을 부탁해 오는데 세종의 반응은 ‘사신을 속이는 것은 하늘을 속이는 것과 같다’며 이징옥의 처벌을 강행한다.
○ 세종(世宗)의 골칫거리 명나라 사신의 정체는?
- 당시 명나라 사신의 위세는 어느 정도였나?
<드라마 장영실> 황제의 칙서를 가지고 온 명나라 사신들을 조선의 왕이 직접 맞이할 정도로 극진히 모시는데 공식 조공 외에 다양한 뇌물을 요구하는 사신들로 조선은 골칫거리, 사실은 명나라 사신은 조선 사람으로 환관으로 차출되어간 인물, <계승범 교수의 분석>은 당시 명(明)은 외국에 사신을 파견할 때 그 나라 정세를 잘 아는 사람을 대표 사신으로 보내기 때문에 조선에서 환관으로 간 대부분은 평민출신이지만 사신으로 출세해 고향에 돌아온 상황으로 금의환향한 사신들에게 조선 파견은 과거의 울분을 풀고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기회, 사신의 횡포를 처벌하기 어려운 조선의 입장에서 이들을 달래기 위해 뇌물을 바칠 수밖에 없었을 것
- 이징옥 유배와 관련된 명 사신 윤봉을 조사하면 또 다른 비리가 밝혀지지 않을까?
<명나라 사신 윤봉의 비리 수사> 윤봉 · 경주출신 · 명나라 환관 · 재직기간은 3대 영락제~7대 경태제 · 황제의 총애를 받아 좌소감 · 태감 등 중요한 관직을 맡고 세종 때 여덟 번 사신으로 파견된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로 조선에 사신으로 12차례 파견 “윤봉이 그의 삼대를 추증해 주기를 청하므로 이조에 내려 의논하도록 명하였다. 윤봉의 아버지 윤신에게는 가정대부 경창부윤을 증직하고 조부 윤단에게는 통정대부 공조참의를 증직하며 증조부 윤공제에게는 통훈대부 판 사재감사를 증직하였다” <세종실록 8년 4월 8일> & “내사 이귀를 보내어 윤봉에게 산노루를 주었다.” <세종 10년 8월 25일> & “윤봉이 요구한 물건이 200여 궤나 되었다. 궤짝 1개를 매고 가는데 여덟 명을 써야 하는데 궤짝을 매고 가는 사람들이 태평관(숭례문 근처)에서부터 사현(모래내)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이어졌다.” <세종실록 11년 7월 16일> & “윤봉이 귤, 모과 각 1백 개와 곶감 30접 올벼 종자 서른 말을 요구하므로 모두 주도록 허락하였다.” <세종실록 13년 9월 8일>
- <명나라 사신 윤봉의 주장> ① 조선의 2대 숙원사업인 금과 은 조공면제 ② 조선에 명의 고급정보를 제공했다는 것으로 실제로 명의 중요정보를 조선에 전해주었던 조선 출신 명 사신들, 그리고 조선출신의 환관을 통해 빠르게 외교현안 해결, <계승범 교수의 분석>은 조선의 입장에서 명의 사신들은 골칫덩어리이자 외교무대의 조력자 겸 첩자이고 명 사신이 받은 뇌물의 절반 이상은 명의 관료들에게 상납됐을 것, 하지만 사신이 받은 뇌물을 옮기기 위해 입부 1,600명이 동원되고 숭례문에서 모내내까지 줄지어 갈 정도였다는 것은 문제
○ 세종(世宗)의 지성사대 이유가 있다?
- 세종이 명(明)에 굴욕적인 사대를 한 이유?
명의 3대 황제 영락제(1360.5~1424.8)는 1대 황제 주원장의 넷째 아들로 조카 건문제를 몰아내고 3대 황제로 등극하는데 그의 업적 ① 세계 최대 규모의 궁성 자금성 축조 ② 2만 3천권에 달하는 영락대전 편찬 ③ 30년간 7번의 해외 원정을 떠난 정화(鄭和)의 대함대
- 세종(世宗)의 지성사대와 영락제의 상관관계?
<계승범 교수의 분석>은 명 황제의 통치력이 미치는 범위와 세종의 지성사대는 밀접한 관계로 15세기 영락제 때 명나라의 최대 판도를 이룬 상황으로 국경확보를 위해 동서남북으로 전쟁을 일으킨 인물로 조선도 위협받을 수 있는 상황에서 세종에겐 외교적 선택의 폭이 좁았을 것
- 하지만 사신들의 요구가 지나쳐 “내가 조선국에 가서 국왕에게 말하여 좋은 여자가 있으면 몇 명을 뽑아서 데리고 오라” <태종실록 9년 8월 15일> & “지난해에 너희가 데리고 와서 바친 여자는 뚱뚱한 것은 뚱뚱하고 못생긴 것은 못생기고 키가 작은 것은 작아서 모두 좋지 못하였다. 왕이 지금 만일 뽑아둔 여자가 있거든 많으면 두 명 적으면 한 명을 다시 보내오도록 하라‘.” <태종실록 9년 5월 3일>
- 위의 두 사례는 태종(太宗) 때의 일이고 조선에 처음으로 공녀를 요구한 인물이 영락제, 그 이후의 황제들은 팽창정책을 펴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세종은 명(明)의 사대 요구를 받아주는데 <애민주의자 세종의 주장> 사랑하는 백성을 공녀로 보낸 건 인정하지만 명(明)의 선덕제 때 공녀 53명이 조선으로 돌아왔고 이후 조선에서 사라진 공녀 이는 지성사대를 했기에 가능했다는 것,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그저 외교일 뿐이라는 고도의 정치 외교술?
- 고려 때도 사대를 했지만 몽골의 침략에 맞서 30년 동안 저항한 반면 싸움 한 번 하지 않고 사대를 한 세종은 지나친 사대주의자가 아닐까? 하는 <최원정 아나운서의 생각> 이에 대한 세종의 변론, 작은 나라 조선의 길목을 거대제국 명이 막고 있는 상황으로 <계승범 교수의 분석>은 명(明)과의 관계에 신생왕조 조선의 운명이 달린 상황에서 세종의 사대가 ‘과했나 · 적절했나’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조선의 외교는 사대에서 출발했다고 볼 수 있는 것
○ 세종(世宗)의 반전? 사대의 역습!
- <드라마 세종대왕> 1432년 12월, 만주 휘하 여진족 기병 400여 명이 평안도 여연군을 공격하여 조선인 53명을 살해하고 77명을 납치하며 말과 소를 약탈해 가자 결국 여진족 토벌을 명령하는 세종
- 1433년 4월, 여진족의 주거지인 파저강 일대를 공격한 조선군은 최첨단 무기인 화포까지 총동원한 전투로 여진족 포로 248명 · 사살 183명이고 아군 사상자는 단 4명으로 조선의 압승으로 세종, 북방 개척의 신호탄을 쏘다
- <계승범 교수의 분석>은 세종(世宗)은 사대를 하면서도 국왕으로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 특히 여연군은 사군의 시초가 되는 곳인데 정복하기보다는 방어가 어려운 곳으로 당시 신하들은 백두산과 마천령 정도로 끊어서 국경으로 삼고 여연군 쪽은 공지로 놔두자는 의견이 중론이었지만 세종은 이를 단호하게 막고 북진정책을 추진한다.
- <이익주 교수의 분석>은 장기에서 마(馬)를 잡는 건 포(包)로 기병을 잡을 수 있는 것은 대포로 여진 기병을 잡기위해 우리나라 최초의 로켓형 무기 주화(走火)가 개발되고 후에 신기전(神機箭)이라는 귀신같은 신기한 화살로 진화하는데 가장 큰 신기전은 길이가 약 5m 60cm 정도로 사정거리가 무려 1Km
- <원동연 대표의 생각>은 지금도 인접 국가들과의 관계 때문에 미사일 사거리조차 조정하기 쉽지 않은 우리나라, 명(明)에 사대하면서도 영토 확장을 고민하고 무기개발에 힘쓴 세종의 행보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
- 세종(世宗)의 북방 개척하면 떠오르는 단어?
4군(여연·우예·자성·무창) 6진(온성·종성·회령부령·경원·경흥)으로 중요한 것은 현재 우리나라의 국경과 거의 일치한다는 역사적 의의를 갖는 것으로 4군 개척에는 무장 최윤덕이 있었지만 6진을 개척할 때에는 문신 김종서가 가는데 여기에는 세종의 깊은 뜻이 있는 것으로 두만강 쪽 국경을 어디로 잡을 것이냐는 연구가 필요했는데 이는 우리 역사 속에서 가장 북쪽으로 영토를 넓힌 적이 언제였는가? 하니 고려시대 때 윤관의 동북 9성 “함길도 도절제사 김종서에게 전지하기를··· 고려사에 이르기를 ‘윤관이 공험진에 비를 세워 경계를 삼았다’ 고 하였다··· 그 비문을 사람을 시켜 찾아볼 수 있겠는가? 그 비가 지금은 어떠한지··· 하였다.” <세종실록 21년 8월 6일> 6진 지역이 조선의 영토라는 역사적 근거를 찾으려는 것
※ 동북 9성 : 고려시대 윤관이 별무반을 이끌고 여진족을 정벌하며 세운 9개의 성
- 김종서에게는 여진족이 두려움에 떨던 맹장 이징옥을 동행시키는데 학식과 전략에 능한 김종서와 싸움에 능한 이징옥과 환상의 드림 팀을 탄생시켜 4군 6진 개척의 어벤저스
- 명(明)을 앞에 두고 조선의 영토 확장이 가능했던 이유?
<계승범 교수의 분석>은 6진의 경우 명과 떨어져 있어 영토 확장이 쉬웠을 것, 하지만 4군의 경우는 요동에 명나라 사령부까지 설치돼 조선이 군사작전을 펼치기 어려웠을 듯, 하지만 그동안 세종이 지성사대로 쌓은 명과의 신뢰 덕분에 명에서도 조선의 군사작전을 허락했을 것으로 추정
- 세종(世宗)의 지성사대는 고려 때 역사적 경험에서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이는데 원간섭기 공물요구에 내정간섭까지 받았던 고려, 아마 세종은 사대로 명과 조선의 관계를 안정시키되 명의 내정간섭은 받지 않겠다는 선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던 것 같이 보이며 지성사대로 명의 내정간섭을 차단하면서 세종 자신의 정치를 하려고 하지 않았을까? 하는 <이익주 교수의 분석> 특히 4군 개척은 아주 민감한 문제로 조선의 칼끝이 명으로 향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아슬아슬한 명과의 줄타기를 한 세종의 북방개척
- 만장일치로 결코 세종(世宗)은 사대주의자가 아니었다는 의견으로 반전을 거듭하는 두 얼굴의 세종, 사대(事大)의 대척점에는 자주(自主)가 있는데 세종(世宗)의 자주적 문화하면 생각나는 것? 훈민정음으로 세종(世宗)이 사대주의자였다면 자주적인 문자를 만들려는 생각도 안했을 것
- 세종(世宗)의 자주정책에 대한 신하들의 반응은?
반대가 극심한데 “우리 조선은 조종 대부터 내려오면서 지성스럽게 대국을 섬기어 한결같이 중화(中華)의 제도를 준행하였는데··· 언문을 창작하신 것은 보고 듣기에 놀라움이 있습니다.” <세종실록 26년 2월 20일> 이것은 세종(世宗)이 아니었다면 중국에 사대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 로 번졌을 것인데 그동안 지성으로 사대한 세종이었기 때문에 신하들의 반대를 잠재울 수 있었을 것이라는 <이익주 교수의 분석>
- 자주하면 떠오르는 4가지는 훈민정음과 1442년 한양을 중심으로 만든 우리나라 최초의 역법서(달력)인 칠정산(七政算)으로 이를 통해 시간의 주권을 찾은 조선, 그리고 농민들의 경험을 담은 농사직설과 우리 주변에 나는 약재에 관한 처방전인 향약집성방
- 그 외에도 “우리나라의 음악이 비록 다 잘 되었다고 할 수는 없으나 반드시 중국에 부끄러워할 것은 없다. 중국의 음악인들 어찌 바르게 되었다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세종실록 12년 12월 7일> 이는 사대의 역습(逆襲)
○ 사대정책 VS 사대주의
- <계승범 교수의 분석>은 세종뿐만 아니라 우리 역사 속에서 국내정치를 잘 한 지도자는 외교도 잘했다는 것으로 개인의 삶에서도 그렇듯이 외우내환에 시달리는 나라가 안정을 추구할 수는 없는 것, <이익주 교수의 분석>은 15세기 국제질서의 관점에서 사대와 사대주의를 구별할 필요가 있는 것이 강대국을 중심으로 작은 나라들이 모여 있는 국제질서 속에서 조선이라는 작은 나라가 어떻게 평화를 유지할 것인가를 고민한 것
-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왜곡된 사대의 의미, 본래 사대는 외교의 방편이자 정책, 세종(世宗)의 사대를 통해 조선의 영토를 넓히고 자주적인 문화를 발전시킬 수 있었다는 것으로 자주를 위한 사대의 역설로 15세기 동아시아 정세 속에서 세종의 사대외교 정책은 일리가 있는 선택으로 평가할 수 있다는 <이익주 교수의 분석>
- <최태성 강사의 생각>은 사대정책을 잘 활용한 세종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외세를 활용하되 외세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해본다는 것으로 평화의 이면에는 숨겨진 많은 조선인의 희생이 있음을 잊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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