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양대군 VS 김종서, 누가 역적인가?
○ 개요
- 어린 단종(端宗)을 두고 맞섰던 수양대군과 김종서, 하룻밤 사이 김종서는 사라지고 수양대군은 왕이 되었는데 두 사람의 운명을 가른 계유정난의 숨겨진 이야기
- 1453년 10월 10일, 좌의정 김종서의 집을 찾은 수양대군, 긴밀한 부탁을 편지에 적어 가져왔다는 것, 그런데 이때 수양대군 측근의 철퇴를 맞고 쓰러진 김종서, 이후 단종(端宗)이 머무는 곳으로 향한 수양대군 “(수양대군이 말하기를) 김종서 등이 안평대군의 중한 뇌물을 받고 전하께서 어린 것을 깔보고 업신여겨 종사를 위태롭게 하거늘 부득이 하여 김종서 부자를 잡아 죽였으나···” <단종실록 1년 10월 10일> 하룻밤의 참극, 계유정난의 시작이었다.
○ 충신 김종서, 역모를 꾸미다?
- 김종서가 단종(端宗)의 역적이었다?
올곧은 장수의 이미지 김종서는 태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세종 대에 전폭적인 지지를 기반으로 문종 · 단종까지 4대에 걸쳐 승승장구했던 문신
- 충신 김종서가 역모를 꾀하다?
<이규철,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박사>의 분석은 실록에 따르면 “김 정승(김종서) 등 여러 재상과 더불어 모여서 장차 주상을 폐하고 안평을 임금으로 세울 것을 의논하였는데··· (단종에게)아뢸 겨를이 없어서 이미 적괴 김종서 부자를 베어 없애고 그 나머지 지당을 지금 아뢰어 토벌하고자 한다.” <단종실록 1년 9월 25일> 수양대군 측의 주장이긴 하지만 역모를 꾀하는 김종서를 선참(先斬)하고 후에 보고하는 논리로 기록이 되어있다.
- 저 사건을 우리는 계유정난으로 알고 있는데 왕자의 난 · 임진왜란과는 다른 의미의 계유정난(靖難)은 평정할 정 + 어려울 난 = 계유년에 난리를 평정했다는 의미
- 김종서에게 역모의 빌미가 될 문제가 있었나?
단종실록에 실린 김종서에 관한 기록 “김종서가 권력을 마음대로 하였으니 자기 집의 별실을 지으면서 목재와 기와, 철재와 석재를 모두 조정의 공사를 관장하는 관리에게서 취하였다” <단종실록 즉위년 12월 11일> & “김종서가 충청도 공주에 가서 성묘하고자 하니 그를 전별하는 사람들로 도성이 가득 찼고 군현에서도 뇌물이 잇달아서 끊이지가 않았다.” <단종실록 즉위년 12월 15일> & “김종서가 김윤부에게서 말을 뇌물로 받았다” <단종실록 1년 7월 15일>
- 말을 뇌물로 받았다는 것은 김종서도 억울했던지 “김종서가 듣고 말하기를 ‘내가 김윤부의 말을 받은 것을 본 자가 누구냐?’ 이 사람들은 대신을 모해하였으니 목을 베어야겠다.” <단종실록 1년 7월 15일>
- 김종서 비리의 핵심은 고향에 내려가자 김종서를 찾아 구름처럼 몰려든 사람들, 그 이유를 어떻게 설명하느냐 하면은 김종서가 은수(恩讎), 은혜 + 원수가 확실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김종서의 눈치를 본 것이고 이는 정치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것
- 김종서는 정말로 역모를 꾀하였을까?
투표 결과 5:1로 역모를 꾀하지 않다가 우세 <임윤선 변호사의 생각>은 뇌물을 받았다고 해서 역모를 꾀했다고 볼 수 없는 것, <이규철 박사의 생각>은 단종실록은 원래 단종이 왕에서 강등되며 노산군일기로 기록된 사서가 숙종 때 복위 후 단종실록으로 변경되는데 단종실록의 문제점은 실록이 기록된 시기가 불명확하고 기록에 이미 수양대군의 묘호 ‘세조’가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세조 사후(死後)에 노산군일기가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 다만 그 기록들은 세조의 살아생전의 기록을 토대로 작성했을 것
- 단종실록에 수양대군 측의 입장이 반영됐을 가능성?
<이규철 박사의 분석>은 사초를 직접 확인할 수는 없어도 수양대군의 시각이 반영됐을 가능성은 충분히 존재한다는 것, 권력자 김종서 등의 숙청으로 자기 검열을 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의 상황에서는···
- 유일하게 역모를 꾀했다고 생각하는 <이익주 교수의 분석>은 김종서는 반역을 꾀할 인물이 아니라는 고정관념을 깨보고 싶어서였다고 하는데 단종실록이 세조 측에 의해 쓰여 진 기록이라고 해서 모두 거꾸로 해석해야 하는 것은 아닌 것으로 아직은 김종서가 반역을 꾀했다는 확증은 없지만 그럴 가능성도 없진 않겠다는 생각에서 였다고···
○ 고명대신 김종서의 두 얼굴
- <드라마 한명회> 1452년 5월 14일, 재위 2년 만에 생사의 기로에 선 문종(文宗)은 김종서 등에게 단종(端宗)을 부탁하고 12살 어린 나이에 홀로 남겨지게 된 단종, 조선은 문종(文宗)의 승하와 함께 격변을 예고하고 있었다.
- 고명대신은 왕의 임종(臨終) 시 왕의 유언으로 나라의 뒷일을 부탁받는 신하로 문종의 고명대신은 김종서, 당시 단종의 가계도를 보면 세종과 소현왕후 심씨 그리고 문종과 현덕왕후 권씨가 모두 사망하여 단종을 도와 국정을 운영할 왕실의 어른이 하나도 없는 상황
- <이규철 박사의 분석>은 세종 때부터 신임을 받고 활약을 했던 김종서였기에 문종도 그를 믿고 자신의 뜻과 아들을 부탁한 것, 그런데 단종 즉위 후 김종서의 권한이 막강해지기 시작하는데 <단종의 즉위 교서의 핵심>은 ① 국정의 모든 조처를 의정부 · 육조와 함께 의논하여 시행 ② 왕에게 직접 했던 육조의 보고를 의정부를 거쳐 보고하게 하는데 그간 왕 중심의 정치 → 대신 주도의 정치로 탈바꿈하게 되는데 의정부를 장악하는 사람이 실권자이고 그가 바로 고명대신인 김종서
- 즉위 교서는 누가 쓰나?
일반적으로 왕이 중심이 되어 쓰는데 <이익주 교수의 분석>은 단종(端宗)의 즉위교서는 고명대신 김종서를 중심으로 쓰였을 것이어서 단종의 의지보다는 김종서의 생각이 더 강하게 반영됐을 것
- 조선시대의 인사절차는 관리들이 세 명의 후보자를 추천하면 그 중에 한 명을 왕이 결정하는 것을 낙점이라 하고 황표정사(黃票政事)는 세 명의 후보자 중 한 명의 이름 위에 대신들이 황표를 붙여 올리면 임금이 황표가 붙어있는 해당자를 그대로 낙점했던 인사 관행으로 당시 김종서의 뜻이 인사에 많이 반영
- <이익주 교수의 분석>은 황표정사는 비정상적인 인사 관행으로 국왕 고유의 인사권을 침해하는 행위라는 것 “노산군(단종)도 그 잘못을 알고 (황표정사를) 못하게 한 것이 오래였는데 이에 이르러 황보인과 김종서가 다시 황표를 썼다” <단종실록 1년 9월 13일> 단종의 뜻을 거스르고 황표정사를 강행한 김종서
- 김종서가 실권을 장악하고 있을 당시의 인사기록에 의하면 단종 즉위년부터 계유정난이 일어났던 그 일여 년 동안 친인척들의 인사에 개입을 하는데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장남 김승규로 일 년 만에 세 번의 승진을 하게 되는 것, 장남 김승규가 처음 얻는 직책은 사복시로 이는 말과 수레, 목장을 관장하던 관청으로 황실의 말도 관리하면서 왕 가까이에 있을 수 있었던 사복시 소윤, 다음 승진 시에는 인사를 담당하던 관리가 김종서에게 누가 이 직을 맡으면 좋겠느냐고 묻자 “김종서가 말하기를 ‘내 아들 김승규가 적당하나 다만 품계가 낮을 뿐이오.’하고 급히 나가서 집으로 돌아갔다” <단종실록 1년 7월 1일> 최순실 게이트를 연상케 하는 김종서의 인사전횡
- 이러한 행위는 소문에 소문을 낳고 김종서의 귀에 까지 들리는데 이에 대한 김종서의 반응은? “김종서가 말하기를 ‘우리가 죽을 때가 가까웠으니 앞날이 얼마나 남았겠는가? 만약에 자손을 위하여 도모하지 않으면 누가 다시 그들을 쓰겠는가?” <단종실록 1년 7월 15일>
- 선왕의 뜻을 잇는 고명대신의 자리를 악용하여 인사전횡을 통해 권력을 과시했던 김종서는 권력을 지향하는 사람들이 그의 곁으로 모이는 상황이 발생하고 이는 역모의 예비음모라고 판단할 수 있다는 <원동연 대표의 생각>
- 여기서 다시 김종서가 역모를 꾸몄을까? 하는 투표를 해보면 3:3으로 동률로 <임윤선 변호사의 생각>은 더 많은 권력을 갖고자 욕심낸 것도 넓은 의미의 역모, 하지만 역모를 꾸미지 않았다는 <최태성 강사의 생각>은 전형적인 인사전횡일 뿐 역모를 꾀했다고는 볼 수 없고 김종서의 역모혐의는 수양대군이 의도한 것
- 기존체제를 바꾸고자 했던 태조(太祖) 때의 개혁세력과는 달리 <이규철 박사의 분석>은 단종 때에는 기존체제를 바꾸길 원한 사람이 김종서와 그의 세력이 아니었고 오히려 김종서는 현 체제가 유지되어야 권력의 핵심에 계속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으로 인사전횡과 역모는 별개의 문제라는 것
○ 야욕의 화신, 수양대군
- 2016년 공개된 세조(世祖) 어진 초본, 1969년에 언론에 공개되었던 초본을 지난 해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입수하여 보관 중으로 대중에 공개된 지 1년밖에 되지 않은 세조 어진 초본, <영화 관상>에서는 이리의 상이다! 역적의 상이다! 라고 하는데 둥근 얼굴에 쳐진 눈과 복스러운 코와 부처님 귀로 예상과는 다르게 귀티 나는 인상의 수양대군
- 하지만 만만치 않은 인물의 수양대군, <문종이 승하했을 당시 수양대군이 울면서 한 이야기> “(문종 형님은) 나더러 정대하고 충성스러우며 지식이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 하여 항상 더불어 일을 논하였다. 일찍이 진법을 만들었는데 말씀하시기를 ‘이정 · 제갈량인들 어찌 수양보다 나을까? 하였다. 또 일찍이 내궁에서 칭찬하기를 ’수양은 비상한 사람이야‘” <단종실록 즉위년 5월 18일>
- 수양대군의 야심을 알 수 있는 또 하나의 단서는 병서(兵書)인 역대병요를 편찬·수정·보완하는 일을 맡았던 수양대군은 이를 단종에게 올리면서 ① 자신과 함께 작업을 했던 사람들의 승진을 청하고 ② 중국에 사신으로 갔을 때 자신을 수행한 관리들의 승진을 청하는데 이것이 반복되다 보면 수양대군과 함께 하면 인사상의 이익이 생긴다는 분위기를 조성한 것
- 그래서 사헌부에서 수양대군의 이러한 행동에 비판 “사헌부에 상소하기를 ‘이것은 국가의 공기(公器)를 가지고 도리어 사문(私門)의 은혜를 파는 도구로 만들 것이니···” <단종실록 1년 4월 22일> 심지어 포상대상에 오른 신하 한 명은 내가 왜 포상을 받아야 하느냐? 당연한 업무를 했을 뿐이니 나의 이름을 빼달라는 요청을 하기도 한다.
- 김종서에게도 잠재적 위협으로 다가왔던 수양대군, 후사가 없는 어린 왕 단종 게다가 종친의 중심으로 많은 정무경험과 왕위 서열 1위인 수양대군이 만약 역심을 품는다면 김종서의 신변도 보장받을 수 없는 상황
- 수양대군의 정치적 행보에 대한 김종서의 반응은?
이 상황에서 김종서는 수양을 대신할 수 있는 대안으로 수양대군의 동생 안평대군을 선택하는데 수양대군 못지않게 정무 경험과 능력을 인정받은 안평대군, 게다가 안평대군은 수양대군과 다른 면이 있었는데 예술을 좋아하고 호방한 성격으로 문신들과 잘 어울릴 수 있는 자질을 갖고 있었던 것이어서 김종서는 안평대군을 선택하게 된다.
- 15세기의 몽유도원도는 안평대군이 꿈에서 본 도원의 풍경을 화가 안견이 수묵담채로 재현해 낸 산수화로 중요한 것은 꿈을 상세히 설명한 안평대군의 능력
- 김종서의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에 대한 평가, 어느 날 김종서가 수양대군의 측근을 집으로 불러서 “수양은 너무 엄하고 어질지 못하여 다른 사람을 전혀 구제하지 못하니 남의 윗사람이 되기에 족하지 못한대도 너는 그를 섬기고 있다. 안평은 거칠고 무지한 무리도 포용하여 도량이 크고 남에게 벼슬을 주는데 뜻을 두고 있는데도 너는 그를 섬기지 않고 있다. 이현로는 안평대군을 일컬어 ‘끝까지 대군의 지위에서 늙을 분이 아니다’ 고 하였다” <단종실록 1년 3월 22일>
- 수양대군이 주장하는 김종서가 역모를 꾀했다는 또 다른 증거 “하늘은 본래 고요하니 아득하고 묘한 조화를 누구에게 물으랴? 사람의 일이 진실로 어그러지지 않으면 비 오고 볕 나는 것도 이로 말미암아 순조롭게 되나니 바람을 따라 복사꽃 오얏 꽃 피어나서 화사하게 꽃소식을 재촉하고 보리밭에까지 촉촉하게 적셔서 온 나라가 고르게 윤택하리라” 김종서가 안평대군에게 바친 시 “이것은 김종서가 비밀히 이용(안평대군)더러 인심을 거두어 반역을 꾀하라고 재촉한 것이다” <단종실록 즉위년 6월 30일>
- 역모의 증거는 어디에?
조선시대의 문인들은 자연의 이치 · 백성들의 삶을 주제로 시를 썼는데 이 작품도 평범한 시로 보이지만 역모로 볼 수 있는 증거는 마지막 연의 솔토(率土)로 솔토는 온 나라라는 뜻이지만 이 단어는 시경(詩經)에서는 ‘왕이 통치하는 영토’로 쓰이는 속성을 가진 용어 <김영봉 박사의 생각>은 수양대군 측에서 솔토를 ‘단종이 거느리는 영토’가 아니라 ‘안평대군이 거느려야 할 영토’로 해석해 역모의 증거로 세웠을 수 있다는 것, 하지만 솔토의 진정한 의미는 김종서만이 알 수 있는 것
- 기습질문으로 역사적 맥락 속에서 이 시를 읽는다면?
<김영봉 박사의 생각>은 지금까지 계유정난은 수양대군의 역모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만약 이 시를 받은 사람이 수양대군이라면 감히 이 시가 역모의 증거라고 주장할 것이라는 것
○ 수양대군 VS 김종서, 누가 역적인가?
- 김종서의 시(詩)는 역모의 의미를 담고 있을까?
<원동영 대표의 생각>은 최고 권력자인 김종서가 종친 안평대군에게 오해의 소지가 있는 시를 보낸 건 충분히 저의가 있는 행동이라는 것, <이규철 박사의 생각>은 김종서가 역모를 꾸민다고 설정한다면 모든 걸 수상하다고 주장할 수 있다는 것
- 김종서와 안평대군의 관계를 지켜본 수양대군의 생각은?
<이규철 박사의 생각>은 김종서와 안평대군이 가까워지는 걸 보면서 수양대군은 소외감과 신변의 위기를 느꼈을 것, 그래서 수양대군도 자구책을 마련하는데 수양의 책사 한명회가 등장하고 그의 건의에 따라서 정보를 입수하고 자기세력을 은밀히 키워나간 수양대군은 안평대군과 김종서가 역모를 꾸민다는 제보를 받고 시작된 계유정난
- 계유정난 이후 김종서와 안평대군은 어떻게 되었나?
수양대군 측근의 철퇴를 맞았지만 죽지 않은 김종서는 단종을 만나러 가지만 도성 문이 모두 닫혀 만나지 못하고 결국 살해되고 안평대군은 유배지에서 사사되면서 계유정난 당시 백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척살 · 유배된다.
○ 계유정난, 그 후
- 계유정난 이후의 정국?
계유정난 이후 수양대군이 받은 관직은 영의정부사(영의정 대표) · 영경연(경연 주관) · 판병조사(문관 인사 담당) · 서운관사(천문관측 담당) 여기에다 군권을 장악하는 병마도통사까지 겸직하면서 조선 역사상 전무후무한 수양대군의 관직
- 수양이 갖은 관직의 가장 큰 의미는 종친이 관직을 가졌다는 것으로 조선시대에 관직을 가질 수 없던 종친임에도 불구하고 높은 관직을 모두 겸한 상황으로 단종보다 더 막강한 권력을 가지게 된 수양대군, 반면 수양대군의 독주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몸을 낮춘 단종, 그러나 어린 나이에 숙부의 독주를 버티기에는 어려웠던 상황
- <드라마 한명회> 1455년 윤 6월 11일, 단종은 재위 3년 만에 중대발표를 하는데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선위한다는 것, 계유정난 후 2년 만에 조선의 7대 임금 세조가 등극한다.
○ 수양대군은 어떻게 왕이 되었나?
- 계유정난 이후 2년 간 왕이 될 명분을 쌓았던 수양대군, 선위를 받을 당시 수양대군의 반응은?
거절함이 없이 거의 덥석 받는 수준이라는 <이규철 박사의 설명> 단종이 양위를 선언한 날 바로 즉위한 수양대군, 아무리 양위라지만 거절도 하고 좀 기다리는 경향이 있고 국왕의 즉위식은 국가 최고의 의례로 이것을 불과 몇 시간 만에 준비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고 수양대군이 왕이 된다고 예견된 상황에서 즉위식은 미리 준비가 되어있었을 것이라는 <이규철 박사의 설명>
- 단종은 왜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넘겼나?
지난 2년 동안 단종으로 하여금 왕의 자리를 스스로 포기하도록 만드는데 계유정난 이후 수양대군의 전략 ① 단종이 믿고 따랐던 다섯 째 숙부 금성대군을 탄핵 ② 하나뿐인 누이의 남편 정종도를 탄핵 ③ 단종을 키웠던 세종의 후궁 혜빈 양씨마저 탄핵을 하여 단종의 주변에 있는 인물들을 하나씩 공격하자 끝내 옥새를 수양대군에게 내어주게 되는 것
○ 최종 선택, 김종서는 역모를 꾸몄나?
- 4 : 2로 역모를 꾸미지 않았다가 우세, 역모를 꾸미지 않았다는 <임윤선 변호사의 생각>은 김종서와 수양대군의 갈등은 욕망과 욕망의 부딪힘이었고 김종서의 역모 혐의엔 확실한 물적 증거가 없어 수양대군이 일으킨 계유정난도 정당화하기 어렵고 그저 수양대군은 김종서를 이겼을 뿐이라는 것
- 역모를 꾸미지 않았다는 <최원정 아나운서의 생각>은 승자의 역사로 기록된 계유정난, 김종서가 역모를 꾸몄다는 주장으로 정변의 명분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
- 역모를 꾸몄다는 <이익주 교수의 생각>은 김종서에게 모반의 혐의가 있다고 볼 수 없지만 수양대군의 입장에서 보면 다른 해석도 가능한데 조선이라는 나라는 고려 말 무능한 왕 + 권신의 전횡으로 민생이 도탄에 빠져 있는 것을 바로 잡기 위해 세워진 나라, 그런데 세종이 죽은 다음에 왕은 다시 무능해지고 권신이 출현하게 되는 것, 그렇다면 능력 있는 자가 왕이 되어 세종의 정치를 이어야 한다는 수양대군의 생각이 전혀 부당하지 않다고 생각하다는 것, 물론 어린 조카를 죽인 것이 정당화될 순 없지만 세조 정치의 역사적 의미까지 폄하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서 수양을 지지한다는 것
- 역모를 꾸미지 않았다는 <이규철 박사의 생각>은 계유정난은 무력을 동원해 왕위를 찬탈한 사건으로 김종서의 입장에서 역모를 일으킬 이유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 국왕 중심의 정치에서 신하와 국왕이 함께 협의하는 정치체제로 변화하던 조선은 수양대군이 등장하면서 그 변화를 더디게 만든 사건이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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