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묻다 제1부 고려의 건국
○ 개요
- 500년 왕조의 역사는 세계사적으로도 유례없는 일, 끊임없이 이뤄졌던 크고 작은 개혁을 하면서 500년 세월의 왕조를 지켜낸 고려의 힘은 과연 무엇인가? 대통령 취임사에서도 단골로 등장하는 “개혁” 국가 멸망의 원인은?
- “나라는 가난 때문에 망하는 것이 아니라 부패 때문에 망한다” & “새로운 방향성(Vision) 제시의 실패” & “흉작.자연재해.침략의 외부적 요인” 이러한 내.외적 현상을 통틀어 망하는 국가에 나타나는 공통적 현상
- 하지만 무엇보다도 국가 시스템의 붕괴 – 지도자 부재, 외적침입.민심혼란, 이러한 때 새로운 시스템에 대한 염원 – 새 나라를 세우는 원동력 – 옛 국가 시스템의 파괴, 망국의 순서로 이어지는 것으로 국가 멸망의 가장 중요한 요인은 국가 시스템의 붕괴
○ 신라 멸망을 부른 잘못된 시스템은?
- 신라 시회를 지배한 골품제도, 골품제는 신라 초기 사로국을 만든 모두를 포함한 신분제도로 건국 초기에는 1두품에서 6두품과 진골.성골로 출발하여 지배층의 성골이 사라지고 1~3두품은 평민으로 전락하면서 4.5.6두품과 진골만이 남는데 두품별 관직 상한선을 두어 6등급까지만 승진이 가능했던 6두품
- 5등급 이상의 관직에는 진골만이 오를 수 있고 당시 차관(아찬)까지만 승진 가능했던 6두품은 혼인제도 제약, 집의 크기 제약, 우마차의 크기 및 장식의 제약 심지어 그릇도 규제하여 5.6두품은 금 그릇 상용을 금지했던 것
- 골품제 피라미드의 최상위층의 왕후보자 성골은 혈통유지를 위한 근친혼으로 결국 대가 끊기고 결혼 상대자가 없으면 결혼도 못하는 현실로 대표적인 경우가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으로 결혼 할 수 있는 남성이 없었기 때문에 결국 대가 끊긴 성골
- 대신 태종 무열왕(김춘추)부터 진골이 왕위 계승한 후 100여 년 동안 진골이 국가의 모든 권력 특권을 독점하고 삼국을 통일하여 전제왕권을 수립하고 신라 황금기를 이룬 진골, 시간이 흐르면서 진골의 숫자는 늘어만 가고 모든 진골은 왕위계승권자가 되면서 왕위를 둘러싼 진골 내부의 갈등
- 신라 5대 진성여왕 때 극에 달한 사회적 혼란 “임금 총애를 받는 이들이 제멋대로 방자히 굴고 뇌물이 공공연하게 나돌며 상과 벌이 공정하지 못하니 기강이 무너지고 해이해졌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11 진성여왕 2년> 진골 귀족의 권력 이용법 ① 토지 확장 ② 탈세로 경쟁하듯 사치와 향락에 빠진 진골 귀족
- 드디어 반란이 시작되는데 ① 상주.원종의 애노의 난 ② 원주.양길의 궁예 ③ 죽산의 기훤 ④ 전주의 견훤 등 농민 반란이 시작
○ 부패한 신라, 누가 죄인인가?
- 관리들은 왜 과중한 세금을 부과 했을까? 중앙의 진골귀족들이 지방에 농장을 만들면서 토지를 수탈했고 “여러 주와 군들이 공물과 부세를 보내오지 않아 창고가 비고 나라 재정이 궁핍하였다” & “왕이 사신을 보내 독촉했더니.... 도처에서 도적들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11 진성왕 3년>
- 왕실은 무장한 진압군을 투입하여 진압하지만 결국 진압군도 피해자 “왕이나마 영기에게 명해 (반란군을) 사로잡게 했는데.... 두려워 나아가지 못했다... 영기의 목을 베고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11 진성왕 3년> 농민들을 괴롭힌 관리, 진압군의 배후에는 사치와 향락에 빠진 왕실, 진골귀족이 있었다
- 왕실과 진골귀족을 제외한 국민 모두는 피해자로 진골 바로 아랫단계인 6두품조차도 피해자로 새로운 꿈을 꾸며 당나라 유학까지 다녀왔던 6두품도 영향력을 갖기가 어려웠던 신라정치, 대표적으로 최치원은 12세에 당나라에 유학 18세에 빈공과에 장원급제한 인물
○ 골품제에 좌절하다, 최치원
- 신분적 한계를 느끼고 유학을 갔던 최치원은 선진사회 당나라에서 공부하며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을 꾼다 “최치원이 시국과 정무에 관한 의견 10여 조목을 올리자 왕이 좋게 여겨 받아들이고 그를 아찬으로 임명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11 진성왕 8년> 하지만 안타깝게도 기록으로 남지 않은 시무 10여 조 내용, 당나라에서 견문을 넓힌 최치원의 눈에 보였을 신라의 낙후된 상황, 최치원이 가장 심각하게 여긴 문제는 신라 특유의 엄격한 신분제도인 골품제가 아니었을까?
- 개혁안 시무 10여 조의 실현은 실패하고 중앙관직에서 지방으로 좌천된 최치원, 골품제 문제 거론으로 진골귀족의 미움에서 비롯됐을 가능성↑ , 유명한 인도의 간디도 개혁하지 못한 카스트 제도, 기득권자들의 저항 또한 만만치 않았을 것
- 현재 대한민국에도 골품제가?
학벌, 사는 지역에 따라 서열이 존재하는데 이는 신분제의 잔재로 개인의 노력으로 성취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던 대한민국이 21세기에 다시 과거로 돌아간 듯한 모습이 왠지 씁쓸하기까지 하다
- 역사는 문제와 답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신라 말 어려운 상황에 일어난 희망적 변화는 골품제 체제하에서 나타난 개룡인(개천에서 용난 사람)인 지방인의 대두, 골품제=지배층의 신분제=경주인
- 경주에 모든 지배층이 거주하고 사로국(경주출신지배층)이 천 년간 기득권을 독점하면서 지방인은 골품제 안에 들지 못하고 품 외에 있으면서 중앙의 혼란을 틈타 역사 전선에 등장한 지방 세력
○ 신라판 개룡인, 호족의 등장
- 신라 중기까지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지방민, 역사서에 최초로 등장하는 지방민은 해상왕 장보고, 신라 말 각지의 농민 봉기가 일고 도적이 성하자 도적에 대항하여 촌주 중심으로 힘을 키운 농민들, 도적과 호족의 공통점은 반(反)신라 그리고 지방사람, 장보고도 스스로 세력 확장 후 진골을 꿈꾸고 왕위 계승전 가담 → 승리 → 딸을 왕비로 들이려다 사망하게 된다
- 이때부터 등장하게 되는 견훤, 궁예, 왕건으로 호족 간 경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력(武力)으로 누가 이 시대를 책임질 수 있는가라는 것이 관건, 골품제 폐지 후 새로운 사회를 향한 방향성을 제시하는 자가 새 시대를 열 최후의 승자
○ 최후의 승자, 왕건
- 왕건은 송악(개성) 지역의 호족 출신으로 개성 – 예성강 – 황해 – 중국으로 무역에 종사하던 상인 집안, 하지만 궁예는 버림받은 신라의 왕자로 도적 – 승려 – 도적의 우두머리를 거치고, 견훤은 도적 잡는 군인 출신으로 오히려 도적을 규합 – 독립 세력화하는데 왕건, 궁예, 견훤은 모두 골품제에 속하지 못한 지방민 출신으로 왕건만이 지역 기반을 구축한 상태
- 후삼국 초기의 강자는 궁예였기 때문에 왕건의 아버지 용건은 궁예에 귀부하는데 당시 왕건의 나이 20세로 후고구려 최고의 관직 시중까지 빠른 승진으로 궁예를 축출하고 고려를 건국 → 후백제 견훤과의 전쟁에서 승리 → 신라 경순왕 귀부 → 후삼국 통일
※ 귀부 : 자기 세력 유지가 가능하여 항복과는 다름
- 왕건, 역사상 가장 많은 부인을 둔 왕, 29번의 혼인은 전국적인 세력이 없던 왕건이 왕권강화와 호족 통합의 전략으로 혼인을 통해 호족들의 군사력, 경제력을 획득하는 것으로 왕건에게 혼인은 정치적 전략
- 29명의 부인이 한자리에?
여러 지방 출신 29명이 한자리에 모일 수는 없었고 건국 초기 국가 안정을 위한 정치적 전략 “혼인” 중요한 것은 부인이 아닌 부인의 아버지로 29명의 장인 모두는 지방의 강력한 호족으로 군사력 경제력 영향력이 모두 왕건에게 집중하되 지방 호족으로서의 힘은 그대로 인정해 주는 것으로 신라 경순왕과 혼인한 왕건의 첫째 딸 낙랑, 왕건은 경순왕을 경주 자문관으로 임명하고 왕건과 결혼한 경순왕의 조카 딸, 이들은 겹사돈, 그러면서 왕건은 신라 왕실의 일원이 되고 신라인들은 왕건에 대한 거부감도↓ 29번의 혼인 중 가장 중요했던 신라 왕실과의 혼인
- 후삼국 시대 걸출한 호족들이 각지에서 등장하는데 왕건 VS 견훤, 호족세력의 지지여부가 관건으로 왕건 보다 18년 앞선 견훤의 후백제는 경제력, 인구 등에서 우수하여 고려 초 전투마다 후백제의 승리
- 하지만 열세를 극복한 왕건의 승리 요인은 호족의 지지로 견훤은 먼저 출발했지만 호족 통합에 실패하고 궁예도 폭정을 일삼고 호족을 탄압하다 결국 호족에 의해 왕위 찬탈 당함
- 왕건 승하 후 혼란에 빠진 고려, 아들들이 치열한 왕권다툼을 하다가 안정적으로 왕위에 오른 4대왕 광종, 고려를 건국한 건 왕건이지만 나라의 기틀을 마련한 건 광종으로 광(光)과 광(狂)의 두 가지 평가를 동시에 받고 있다
○ 개혁의 상징, 고려 광종
- 왕자의 난으로 형제들이 연이어 왕위를 계승하는데 혜종 정종 광종은 모두 형제로 왕이 교체될 때마다 벌어진 다툼 “혜.정.광 세 임금께서 왕위를 계승한 초기를 보니 서경의 문무 관리 절반이 이미 살상되었습니다” <고려사 권93 열전 권제6 제신 최승로>
- 왕자의 난을 거쳐 광종이 즉위하면서 25년 재위기간 고려 안정의 기틀 마련하는데 즉위 초에는 개혁의 움직임이 없었고 호족 서열정리 후 호족과의 우호적 관계 형성 후 재위 7년 째 개혁의 칼을 뽑아 든 광종
- 핵심개혁안, 하나 노비안검법
양인에서 억울하게 노비가 된 사람을 조사 해 양인 지위를 회복시켜준 제도 “이 나라 수십 만 백성들이 지난 삼한 통일 때 억울하게 희생되어 크고 작은 호족들이 노비가 된 것으로 알고 있소이다. 그들을 노비의 사슬에서 풀어주고자 함이올시다. 이른바 노비안검법이란 것이올시다” 노비는 신분 회복하고 호족은 경제적 기반이 약화되는 국가적인 개혁안으로 노비 하면 미국의 링컨 대통령을 떠올리지만 1,000여 년 전에 이미 노예해방이란 실로 놀라운 일
- 고려 개국 공신들이 지닌 국왕 급 권력, 그 힘의 원천은 노비(노동력+군사력)로 호족들이 엄청나게 반발하는데 원래는 양인들이었으나 신라 말 수탈에 시달린 농민들이 노비로 전락한 것으로 노비신분해방 → 경제적 기반까지 회복시켜 줌으로 호족의 기반은 약화되고 세금을 부담하는 양인은 증가하여 진정한 왕권국가 시대에 도래
- 핵심개혁안, 둘 과거제 실시
골품제에 따라 관직이 정해졌던 신라, 골품제가 아닌 고려만의 새로운 관리 선발 기준이 필요하여 중국에서 시행하던 과거제를 도입하는데 새로운 제도의 도입은 새로운 사회를 향하는 첫걸음으로 새로운 시스템을 구축하여 신분이나 출신보다는 개인의 능력을 중시하여 정치적 변동에 영향을 받지 않게 하는 것으로 조선시대까지 천 년 동안 유지된 과거제도, 서양에도 근대 이전까지는 시험을 통한 관리 선발이 없었고 실제로 과거제를 통해 신진 세력이 대거 등장하는데 신분제약으로 관직에 오를 수 없었던 이들이 자신의 능력으로 관리에 등용되는 것
○ 광종의 별명, 피의 군주
- 호족 숙청, 964년 숙청의 칼을 빼든 광종, 칼끝이 향한 곳은 참소에 휘말린 박수경의 세 아들로 박수경은 고려의 개국공신이자 광종지지 세력의 대 호족, 하지만 광종은 개혁의 걸림돌이 되는 사람은 모두 속청하고 고려의 실세 박수경 일가의 몰락, 왕족 또한 피할 수 없었던 광종의 숙청, 형제 혜종과 정종의 아들인 조카들도 처형하고 자신의지지 세력까지 제거한 광종은 호족, 공신 가리지 않고 무참히 살해 “(참소로)감옥이 늘 넘쳐나 별도로 임시 감옥을 두었고 죄없이 죽임을 당하는 자가 계속 생겼다” <고려사 권2 세가 권제2 광종 11년>
※ 참소 : 남을 헐뜯고 모략해 윗사람에게 고하여 바침
- 아버지 왕건과 뜻을 함께한 개국공신의 숙청, 호족은 왕권 경쟁 때는 지원군이었지만 또한 왕권 강화에는 걸림돌이 될 수도 있는 존재, 또한 권력을 잡은 뒤에는 지지 세력을 내려칠 수밖에 없는 권력의 속성, 그래서 창업(創業)은 쉽고 수성(守成)은 어렵다는 것
- 고려 건국, 후삼국 통일은 호족의 도움으로 성공했지만 그것이 단지 왕실의 교체로 그친다면 개혁의 의미는 없는 것, 그래서 적폐청산으로는 부족하고 적폐청산을 바탕으로 새 질서 확립까지가 개혁의 완성으로 고려의 경우 광종이 그 역할을 한 셈
- 949년 광종 즉위년은 고려 태생 관리가 등장하여 신라인들의 정치가 고려인들이 정치로 탈바꿈하는 시점으로 광종 재위 막바지의 시점은 고려 건국 후 약 60년으로 두 세대가 지나면서 고려 사람들에 의한 고려가 만들어 지는 시점이고 광종은 500년의 기틀을 닦은 왕
○ 고려 개혁의 의미, 2020년 대한민국
- 고려 건국이 품고 있는 개혁정신은?
신라 말~고려 초까지 정치 지도자들의 행위를 보면서 천 년 전 정치 행위를 평가한 기준은 “백성들의 삶에 도움이 되었는가?”로 정치 행위의 배경 영향 효과에 대해서는 현재의 정치인들도 충분히 인지하고 행동해야 하는 것
- “고이면 썩고 썩으면 망한다” 계층간 이동이 불가능한 사회는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경각심, 현재보다 나은 미래를 꿈꾸는 우리는 부당한 일은 바로잡으려는 마음으로 희망 노력 정의가 모여 발전하는 역사가 있을 것이고, 권력자들은 역사의 발전에 맞춰 국가를 개혁해야 할 책무를 가진다. 그런데 개인의 이익을 앞세워 개혁을 반대한다면 권력자의 의무를 다하지 않은 것으로 그럴 경우는 국민의 저항은 피할 수 없는 것
- 권력자들의 부패로 농민들의 반란과 멸망을 맞이한 신라, 민중의 저항은 하늘의 뜻인 것이 민심은 천심이라고 하니까, 그런데 다른 면에서 생각해 보면 이는 발전하고자 하는 역사가 시키는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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