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 쇼크, 한국을 충격에 빠뜨리다
○ 해방 원년의 한국, 대규모 시위로 저물다.
- 모스크바 3상회담 결정서에 대한 1945.12.27. 보도에서 촉발된 신탁통치 논란이 우리 역사에 남긴 파장과 의미는 무엇인가? 1945년 연말, 한국을 충격에 빠뜨린 뉴스로 영하 20도의 강추위에도 서울 거리에 나선 시위대는 30만여 명이나 모였는데 당시 서울 인구 1/4에 달하는 엄청난 인원, 해방 원년의 년 말 무엇이 한국인을 분노케 했나?
- 신탁통치 반대 운동으로 모인 시위대, 신탁통치 논란의 출발은 1945.12.27. 동아일보 1면 기사, 미‧소‧영 외무장관의 모스크바 회담결과,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 VS 소련 신탁통치 주장한다는 것
- 하지만 사실은 신탁통치 일본 제외 한국실시 VS 독일 제외 오스트리아 실시, 신탁통치 실시 지역은 미국의 전략적 가치 판단과 밀접한 연관을 보여주는 것으로 미국은 가장 중요한 지역에서는 신탁통치를 실시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우리 교과서에는 “대한민국은 지정학적 요충지”로 표현된 이유는?
- 2차 세계대전의 전범국가 독일과 일본, 분단이라는 벌칙을 받은 전범국 독일 그런데 전범국 일본이 아닌 한국이 왜 분단되었나? 그리고 전범국이 아닌 한국에 신탁통치를 고려했을까?
<애치슨라인, 1950>은 미국이 아시아 방위선을 한국과 타이완을 제외한 알류산 열도~일본~오키나와~필리핀으로 결정하며 미국의 방어선에서 한국이 제외 돼버리는데 북한의 남침 배경 중 하나로 거론되는 애치슨라인
- 미국의 아시아 지역 방어선에서 한국이 빠진 이유?
일본과 독일에 신탁통치를 하지 않은 미국, 신탁통치 공동실시 = 해당국가에 전권행사 포기, 그런데 일본 ‧ 독일은 세계대전을 일으킬 능력 국가로 확실히 통제를 해야 하지만 그 외에는 약소국으로 전력을 투자할 필요가 없는 국가로 이의 기준으로 통치방식이 바꾸는 것
○ 반탁운동과 해방정국 첫 암살사건
- 1945.12.27. 신탁통치 보도 이후 반탁운동 전개는? 우파 세력을 중심으로 대대적인 반탁운동이 전개되는데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를 결성하여 전국적인 반탁운동을 전개한다.
※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 : 1945.12.28. 임시정부 진영 주도로 결성된 신탁통치 반대운동 조직
- 결사적인 반탁 분위기 속에서 주목받은 당시 한국민주당 수석총무 송진우의 연설 “여기 누구라도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결정된 의정서의 원본을 제대로 읽어본 분이 있습니까? 저도 반탁의 입장이지만 이렇게 극단적인 방법으로까지 반대할 이유는 없지 않겠습니까?” 이 연설을 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송진우가 신탁통치를 찬성한다고 이해하는데 송진우의 진심과 오늘 날까지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은 그의 암살사건
- 송진우(1887~1945) 동아일보사 사장, 한국민주당 수석총무로 한민당은 미군정과 가장 가까운 국내 정당이고 미군정이 조직한 한국인 고문단의 핵심인사, 송진우의 암살이유 추측 ① 신탁통치 반대세력의 응징 ② 반탁운동핑계로 유력한 정적 제거, 범인들 중에는 송진우의 전 경호원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배후는 여전히 미스터리, 당시의 소문은 모두 반탁을 하는데 송진우가 찬탁을 해서 반탁세력이 제거했다는 것
- <박태균 교수의 분석>은 송진우는 반탁운동이 반미운동으로 확산되지 않도록 반탁운동을 진정시키려 노력했을 듯 하고 미군정에게도 “모스크바 결정은 독립으로 가는 사다리다. 이 사다리를 걷어차면 어떻게 독립에 이르겠는가?” 얘기 좀 해보자 했는데 열기는 가라앉지 않고 암살까지 당한 것
- 당시 테러가 난무하던 시기?
신중한 반탁운동을 주장한 인사들이 테러의 표적이 되는데 김규식(1881~1950)은 임시정부부수석을 역임한 독립운동가로 해방 이후 좌우합작운동을 주도하는데 테러위협을 피해 매일 밤 다섯 개의 방을 옮겨 다녔다고 하는데 주로 신탁에 신중론자들이 표적의 대상
- 신탁통치에 대한 중도 인사들의 의견은?
이들의 주장은 당시 미군과 소련군의 한반도 분할점령은 영구적인 분단을 우려하여 신탁통치 해법 ① 남북을 아우르는 임시정부 수립이 최우선 과제 ② 신탁통치 실시 여부를 임시정부가 미‧소에 협상한다. 를 주장한다.
- 독일 나치‧일본군국주의 광기에 빠진 사회, 대공황 시기를 지나며 광기에 무릎을 꿇은 독일과 일본, 해방 이후 불안정한 한반도에 등장한 신탁통치 이슈로 또 다른 광기가 불출되는데 그중 하나가 암살
○ 신탁통치 논란과 극단의 대립
- 1946년 벽두에도 뜨거운 반탁운동의 열기, 그때 좌익진영에서 모스크바 회담내용을 자세히 확인하는데 좌익진영의 해석은 모스크바회담의 핵심 내용은 신탁통치 여부가 아니라 한국에 임시정부 수립에 있다고 모스크바회담 결정 지지로 입장 변화하면서 새로운 논란이 촉발되고 신문사들을 상대로 테러가 빈발하는데 1.2 동아일보 ‧ 1.6 서울신문과 중앙신문 ‧ 1.7 대중일보 ‧ 1.8 자유신문사의 다이너마이트 투척 사건 등의 테러 사건이 발생, 일제강점기에는 일제가 공공의 적이었지만 일제가 물러가자 새 국가건설 방향을 놓고 좌우 대립 본격화되는 것
- 신탁통치 보도의 진실은?
모스크바 3상회담에서 결정된 3가지 팩트체크 ① 동아일보 1945.12.27. 기사 “미국 즉시 독립 주장, 소련 신탁통치 주장” 하지만 팩트는 신탁통치를 주장한 쪽은 미국이고 반대한 쪽은 소련
- 공식적 발표된 모스크바3상회의 내용 ① 통일된 임시정부 수립 ② 미소공동위원회 구성 ③ 미소공동위원회‧임시정부와 상의해 최장 5년 신탁통치 논의 ④ 2주 내 미소 군사령관 회담, 임시정부 수립과 5년간 신탁통치 내용이 잘 알려졌다면 격렬한 반대운동이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당시 회담 직후의 보도에는 이와 같은 내용이 없었다.
- 임시정부 수립과 신탁통치 기간도 제대로 소개하지 않은 당시의 보도, 또한 보도 시점도 의심스러운 것이 회담결과의 공식 발표는 모스크바 시간 12월 28일 정오(한국 당일 오후 6시), 주한미군 결과 입수는 12월 29일, 그런데 국내 보도일자는 공식발표 하루 전 날인 12월 27일
- 이후에도 쏟아져 나온 신탁통치 관련 기사 들, “미국 신탁통치 주장” 이런 기사는 없고 태평양 진출의 발판을 마련하려는 소련이 한국에서 부동항을 얻고자 한다는 등의 소문이 나도는데 사실은 소련이 얻고자 했던 부동항은 한반도가 아닌 만주의 다렌과 뤼순으로 사실과 다른 가짜뉴스들
○ 한국을 둘러싼 미국과 소련의 속내
- 모스크바회담보다 더 오래 전부터 한국의 신탁통치 안을 준비한 미국, 1943년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 적절한 시기에 독립” 이는 신탁통치를 염두에 둔 표현이고 모스크바3상회의에 갈 때도 신탁통치 5년+5년(in due course) 최장 10년의 신탁통치 안을 준비하지만 미국의 안은 폐기가 되고 실제로는 미국과 소련의 입장을 정 반대로 보도한 한국 언론
- 모스크바3상회담결과에 대한 좌‧우 진영의 입장은?
우익의 입장은 모스크바3상회담 결정서 3항에 신탁통치 내용이 존재한다는 이유로 반대했고 좌익의 입장은 신탁통치만이 아니라 한국임시정부수립이 더 중요한 내용으로 미소공동위원회는 임시정부의 원조이지 통치가 아니라고 되어있다는 점과 또한 신탁통치 안은 한국임시정부와 협의하도록 돼있다는 점, 결과적으로 보면 소련은 반탁 미국은 찬탁이었던 것이고 당시 소련의 입장에서는 한반도에 사회주의 분위기가 팽배해 있어 굳이 신탁통치의 필요성을 못 느꼈을 것
○ 신탁통치 오보, 이유와 배경
- “소련이 신탁통치 제안” 오보를 낸 과정과 이유는?
도대체 이 정보가 어디에서 왔을까? 오보의 정확한 출처와 과정은 아직도 연구 중으로 일부 연구자의 추측은 (도쿄)의 맥아더 사령부 측에서 정보를 흘린 것을 국내 신문사가 보도 했을 듯, 반미감정을 가라앉히고 반소감정을 일으키기 위한 의도였을 것이라는 것인데 이것도 단지 추측일 뿐
- 그렇다면 미스터리 사건의 진범은 누가 가장 이득을 봤느냐? 오보를 통해 가장 큰 이득을 본 세력은? 그리고 한국 언론의 오보에 대한 미국과 소련의 대응은?
소련은 <타스통신>을 통해 “미국이 신탁통치 제안”을 공개하지만 미군정은 정정보도 내용을 통제를 하는데 공개 시 반미 여론을 우려했던 것 같고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오히려 우익세력을 띄울 수 있는 기회로 삼고 미군정 통치를 위협하지 않는 한 반탁운동을 이용한 것
- 또 하나의 가짜 뉴스등장 당시 조선공화당 책임 비서 박헌영의 기자회견, 일부 언론에서 “박헌영 소련 일국 신탁통치와 소련연방 가입 희망”이라는 왜곡 보도를 낸 것으로 실제 인터뷰 내용과는 다른 보도로 소문은 소련이 신탁통치를 주장한 것 아니냐고 순식간에 퍼진다.
- 이는 친미 우파 세력으로 당시 정국을 재편해보자는 의도가 있지 않았을까?
미군정도 곤란했던 것이 워싱턴의 미국 정부에서는 모스크바3상회담 결정 이행을 지시하지만 미군정이 지지한 우익세력은 오히려 3상회담 결정을 반대, 그래서 딜레마에 빠지게 되는데 3상회담 결과는 조선임시정부 수립으로 미군정이 지지하는 보수‧우익 세력이 임시정부 논의에 참여해야 하는데 이들은 신탁통치 반대 이유로 참여를 거부하고 있는 것
- 당시 소련의 입장은?
3상회담 결정대로 가는 것이고 대신 반대하는 반탁운동 세력은 임시정부 수립 논의에 빠져야 결정대로 가는 것으로 이를 반대하는 것은 결국 실현되지 않을 것이지 않느냐? 였고 훗날 미소공동위원회 결렬의 배경이기도 한다.
- 미국에게 한국은 중요한 지역은 아니었다. 게다가 미국은 한반도에 많은 힘을 쏟고 싶지 않았고 공동 신탁통치는 최소한의 투자로 미국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으로 1946~7년 미국 내부의 주한미군 철수 여론은 “더 많은 중요지역이 있는데 왜 거기 있느냐?” 였던 것
- 한편 소련의 입장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소련 서부지역에 대한 피해가 막심하여 복구해야하는 판에 한반도에 군대가 와있는 상황, 결국 모스크바 3상회담 협의 안의 핵심은 최소한의 투자로 자국에 우호적인 국가를 수립하고 빨리 철수하고자 했을 것이라는 <박태균 교수의 분석>
- 미국의 판단은 한국이 특정국가의 영향력 하에 있을 때 동북아시아 전체의 정세가 불안하여 한반도를 관리는 해야 하겠는데 여러 국가의 공동 참여가 바람직했던 것이 <신탁통치 3항> “(중략)‧‧‧ 조선임시정부와 타협하여 미‧소‧영‧중 정부에 제출하고 최고 5년간 4개국이 조선을 신탁통치‧‧‧”
- 결국 미국과 소련은 최소 비용으로 최대 효과를 얻고자 했던 것으로 저들의 목적이 달성되고 있을 때 우리는 스스로 만든 프레임에 갇혀 분열해버린 것이고 찬탁=식민지의 연속=친소는 곧 매국, 반탁=독립=반소는 애국으로 복잡한 현실을 아주 단순하게 대응한 것
○ 미국의 외교정책과 한국
- 자주 등장하는 외교정책의 오판 사례, 현대사에서도 종종 등장하는데 대표적인 예가 1969년 닉슨 독트린, 리처드 닉슨(미국 37대 대통령 1969~1974)은 당선 후 괌에서 독트린을 발표하는데 핵심 내용은 베트남 전쟁으로 천문학적인 돈이 들어 이젠 빠지겠으니 아시아 지역의 방위는 아시아 스스로 해결 할 것을 주장했지만 당시 국내 언론의 판단은 ① 한국은 냉전의 제1전선 ② 베트남에 한국군대 파견 중 ③ 그러므로 미국은 한국에서 미군철수를 하지 않는다는 것, 하지만 1971년 주한 미군 1개 사단을 철수조치를 한다.
- 각 국의 외교정책이 발표되면 다양한 방향으로 분석을 하고 접근해야 하는데 그렇질 못하고 우리가 원하는 대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이는 국제 관계에서 실수를 저지를 수 있다는 <박태균 교수의 생각>
- 신탁통치 논란 당시 미국의 조치들은 요즈음의 트럼프 대통령의 정책과 비슷한데 아이젠하워‧닉슨‧부시‧트럼프 행정부까지 미국의 공화당이 집권 때마다 미국부담의 최소화를 시도하는 경향이 짙다.
○ 찬탁 VS 반탁
- 만약 미국의 진심을 알았다면 어떻게 대응?
신탁통치 논란으로 이득을 본 세력은 일본 제국주의 전쟁범죄 협력자, 즉 친일파로 해방 직후 우선과제는 식민지 잔재척결이었지만 신탁통치 논란 속에서 실종되어버린 친일파 청산과제, 그리고 좌우 진영 대립 속에서 이상한 논리가 등장하는데 즉 소련 지지자는 신탁통치 찬성 =매국=소련의 노예, 신탁통치 반대=애국=우익=소련에 반대라는 논리가 성립하며 친일행위자가 우익에 합류하면서 반탁운동의 애국자로 신분세탁
- “정치는 프레임이다” 했듯이 우리가 계획했던 새 국가 건설 ‧ 일재잔재 청산이라는 과제가 찬탁VS반탁 ‧ 우익VS좌익의 프레임에서 애국자로 변신한 친일파
- 해방 후 민족의 과제는 토지개혁과 친일청산 하지만 신탁통치의 찬반논란 속에 프레임이 전환하여 친일파VS민족이 아닌 반탁VS찬탁으로 바뀌어버리고 미군정에서는 안정적인 한반도 통치를 위해 일제강점기의 친일경찰과 총독부 협력자들을 미군정에서 활동하게 하면서 더욱 어려워진 친일청산
○ 좌우갈등 봉합의 움직임, 4당 커뮤니케이션
- 신탁통치를 둘러싼 민족분열을 통합하려는 움직임, 김규식(임정부수석)‧안재홍(한국국민당)‧여운형(조선인민당)‧조소앙과 김원봉(임정)은 1946년 1월 7일 4당 코뮤니케 공동성명서를 발표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에 따라 신탁통치는 우리 정부가 수립한 후에 자주독립 정신에 의해 해결하고 정쟁의 수단으로 암살과 테러 행동은 국가 독립을 방해하는 자멸행동이므로 절대 반대한다.”
- 가장 긴급하고 중요한 것은 남북단일임시정부 수립으로 인민당‧한국국민당‧조선공산당‧한국민주당이 공동 서명하였지만 1946년 1월 8일 한국민주당이 반탁정신이 선명하지 않아 4당 커뮤니케 인정을 거부하여 남북단일정부 수립을 위한 좌우연합체 형성이 무산된다.
○ 좌우 갈등의 심화, 남겨진 숙제
- 해방 후 첫 3.1절 기념행사는 좌우 진영이 분리되어 개최되는데 보신각 기념식에는 우익정치인과 미군정 하지 중장이 참석, 남산 기념식에는 좌익 진영이 별도로 행사를 실시, 해방 후 1년도 안되어 격화되는 좌우 진영의 대립과 반복으로 해방 전 완전한 국가로 돌아가려는 노력이 물거품
- 새로운 국가 수립을 위해 힘을 모아야 할 시기에 모스크바3상회담 → 찬‧반탁 대립분열로 정국의 구도가 좌우대립의 극심한 분열로 프레임이 변경되면서 정말 해야 할 일에 힘을 합칠 수 없는 상황, 교과서에는 분단의 원인이 “외세의 분할점령”으로 되어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우리 내부 문제가 분단의 기원이며 전쟁 역시 우리 내부의 문제에서 기원을 찾아야 한다는 <박태균 교수의 분석>
- 미국과 소련이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던 시기, 그 세력이 우리에게 적대적이지 않다면 외부세력과 지혜로운 협조를 통해 우리가 원하는 것을 더 얻을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러나 신탁통치를 받아들이는 것만이 차선이었다고 단정하기 어렵지만 단지 상대국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는지 정확히 읽을 수 있는 지도자가 필요했다는 <박태균 교수의 생각>
○ 오늘의 소회
- 시시비비(是是非非), 시비(是非)의 문제를 선악(善惡)의 문제로 다뤘을 때 문제가 되는 것, 모스크바3상회담 결정에 대한 냉철한 접근이 필요했고 정치인들이 대안을 마련하여 분노한 대중들을 설득했어야 하지만 그렇질 못하고 신탁통치를 선악(善惡)의 문제로 접근하면서 좌우 대립이 격화되고 남북분단으로 이어지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
- 동문서답(東問西答), 사실과 다른 내용의 엉뚱한 보도가 국민들에게 전달되면서 생긴 문제로 Wait and see(신중히 기다리며 두고 보자) 어려운 결정을 앞두고 쓰는 표현으로 미국 정부의 문서에 자주 등장하는 표현으로 신탁통치 찬반이라는 중요한 변곡점의 순간 지도자들에게 “Wait and see!)의 자세가 필요하지 않았을까?
- Calm down man! (진정해!) 빨리 자주 국가를 만들려는 생각이 친일청산 좌절 ‧ 프레임의 속박 ‧ 좌우대립으로 인한 전쟁으로 이어진 것은 아닌지 (빠른 시일 내 자주 국가 건설이라는) 일보 진전이 오히려 3보 후퇴를 불러온 것은 아닐까? 외세결정 수용으로 일보 후퇴 후 상황을 잘 활용했으면 하는 아쉬움
- 지록위마(指鹿爲馬), 권력자가 말이라 우기니 무서워서 따라간다는 뜻이지만 가짜뉴스는 역사를 바꿔놓을 위력으로 이후에도 끊이지 않고 등장하여 우리 사회가 가야 할 길을 너무도 많이 방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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