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his(한국사)

청산되지 못한 역사, 제1편 친일파의 탄생

mkpark2022 2020. 6. 3. 22:55

개요

- 근대사에서 끊임없이 등장하는 친일파, 최악의 친일파는? KBS시청자에게 SNS를 통해 설문조사를 한 결과 1위 이완용, 2위 노덕술, 3위 민영휘로 대답했다

- 이완용은 을사5정미7경술국적에 모두 포함하여 팔아서는 안될 것을 팔아 누려서는 안 될 것을 누린 자로 지식인으로서 개인의 영달을 위해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로 기록되고 해방 후 민족반역자들을 척결하지 못해서 지식인 중에도 이완용의 후예가 계속 나오는 현실이다

- 한철호(동국대 역사학과 교수)가 꼽은 최악의 친일파는 부정부패로 나라를 망하게 하고 친일행위로 부와 권력을 챙긴 매국친일파들로 가장 대표적인 사람은 민영휘이고 최근 친일파의 논쟁이 많았는데 시청자들이 꼽은 현역정치인도 다수 등장

친일인명사전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명단은 4,389명으로 사전에 등재 기준은 적극적인 친일 자발적인 친일 친일 고위직으로 한정을 했는데도 이 정도이고, 을사늑약(1905) ~ 광복(1945) 기간에 일제의 침략에 협력해 국권을 상실케 하고 동포들에게 위해를 가하거나 독립운동을 탄압방해한 인물

 

이완용의 애국행보(?)

- 1890년 후반까지도 이완용은 애국자 대한제국과 황제를 위하여 이 한 몸 바치리하는 열정적인 사람이었고 학부대신 이완용씨는 평일에 애국애민하는 마음만 가지고 (중략) 백성을 구완하며 나라 권리를 외국에 빼앗기지 않도록 하려고 애를 쓰다가 미워하는 사람들을 많이 장만하였다”<독립신문 1897.9.4.> & “외국공사가 이완용을 좋아하지 않아서 매우 불편한 일이 많이 있었으나 죽는 것을 무서워하지 않고 자기 생각에 나라를 위하여 옳은 일을 기어이 할양이다”<독립신문 1897.11.11.>

- 이완용은 독립협회 창립위원장이며 1898.3.5. 독립협회 2대 회장에 선출된 자로 최고의 애국자가 최악의 매국노로 변천하는 원인과 과정을 살펴본다.

- 본래 이완용은 친일파가 아닌 친미파로 일본어는 미숙했으며 영어에 능숙했던 인물,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후 미국에서 군사교관과 교사를 초빙하여 <육영공원>을 창설하는데 과거시험 합격자 중에서 육영공원에 유일하게 입학한 사람이 이완용

육영공원 : 미국과 외교관계를 맺은 후 1886년 설립한 최초의 근대식 교육기관

- <일당기사>1927년 이완용의 조카이자 비서였던 김명수가 펴낸 이완용의 추모집으로 외국과의 교통이 확장됨에 따라 서양과의 교제가 절실하다고 생각했다. 예전의 학문을 고수하기 곤란해서 서양학문으로 전환하려고 한다. 당시에는 미국과의 교제가 요긴했기 때문에 육영공원에 입학했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과거시험에 합격한 자이지만 신학문을 배우고자 한 이완용은 국제정세에도 밝아 훌륭한 지도자로 남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올바른 지도자로 성장하지 못하고 잘못된 길을 선택한 것

1887년 청나라 간섭이 심해지자 우리는 자주독립국가임을 과시하기 위해 최초로 미국에 공사관을 파견하는데 주미대한제국공사관 참찬관으로 발탁되어 워싱턴에 부임하여 약 25개월을 근무하면서 신문물과 세계질서의 흐름 그리고 부국강병의 길을 터득한다.

일제 위협을 피해 1896년 고종의 아관파천(俄館播遷)을 주도한 이완용 또한 독립협회를 통해 러시아의 간섭에 맞서 고종의 위상을 세워주기도 하면서 이완용은 주미공사관 근무 이후에는 친미를 기본으로 삼고 청나라가 강했을 때는 친미반청, 갑오개혁 이후 일본의 권력이 강해지자 친미반일, 아관파천 이후 러시아의 권력이 강해지자 친미반러의 자세를 취하고 당시 대한제국의 자주를 침해한 중국 일본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다른 강대국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판단을 할 줄 아는 지조가 있고 탁월한 외교관이었다.

 

친일파 이완용의 등장

- 이완용이 친일파로 변신한 이유?

이완용의 친미행보가 무너진 계기 1897년 대한제국 선포와 함께 고종황제가 즉위하고 처음에는 독립협회와 좋은 관계를 맺었던 고종, 독립협회(당시 회장 이완용) 주도로 러시아 군사고문관과 한러은행을 폐지하면서 외세의 세력균형이 이뤄진 상황

- 이때부터 국내문제로 인한 고종과 독립협회의 대립이 시작되는데 독립협회의 입장에서는 황권과 민권이 힘을 합하면 강해질 수 있다는 주장, 반면 고종의 입장에서는 권력은 하나인데 민권을 주다보면 황권이 약해짐은 기정 사실, 이래서 고종과 독립협회의 대립 이완용 등 친미파 세력 약화하고 고종은 황권강화에 찬성하는 세력을 중용하자 결국 세력다툼에 밀려 친일을 선택(?)한 것

- 1904.2.8. 러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극동의 패권을 둘러싼 이 전쟁에서 우위를 차지하고 결국 미국의 중재로 1905.9.5. 포츠머스 회담에서 러시아는 일본에 한국의 지도보호조치를 인정하고, 또한 러시아를 견제해오던 영국도 두 차례에 걸친 영일동맹으로 일본에 힘을 실어주면서 이후 가쓰라 테프트 밀약으로 더욱 공고해진 일본의 극동아시아 패권

 

이완용, 을사늑약 체결에 앞장서다

- 을사늑약 체결을 주도하는데 모든 대신들이 체결을 주저하고 있을 때 결정적으로 판을 바꾼 이완용 이것은 우리가 자초한 것이다. 국력이 약한 우리가 일본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을 진데 더 이상 감정이 충돌하기 전에 원만히 타협하여 일본의 제의를 수용하고 우리 요구도 제기하여 체결하는 것이 좋다고 본다.” 이것이 바로 친일매국의 논리

- 이완용이 한일강제합병 전 이토 히로부미에게 바친 헌정 시 양지일가천하춘(兩地一家天下春) 일본과 조선이 한 집을 이루니 천하가 봄이로다.” 이것은 이미 합병을 다짐하고 쓴 시란 말인가?

- <한철호 교수>의 생각은 이완용은 현실 순응적으로 판단을 정확히 하고 부조리한 현실에 순응해 본인의 영달을 우선 시 했을 듯한데 이는 패배주의로 가득 찬 이완용의 왜곡된 역사 인식

 

이완용의 친일 궤변

- <조선공로자 명감, 1935>은 일제 식민통치에 협력한 인물들을 선정하여 일본에서 발간한 책으로 여기에서 이완용을 평가하기를 동양의 인걸” & “불세출의 인()인으로 기록하고 이완용의 사후(死後) 일제의 궤변 한국 근대화에 기여 일본의 한국지배는 동양평화에 필요했다는 것

- 이토 히로부미의 억지 국력이 약한 대한제국을 주변 강대국의 침략으로부터 일본이 보호하고 있는 것이고 러시아 같은 백인종에 맞서 같은 황인종으로서 대한제국을 지켜주고 있는 것이러한 이토 히로부미의 논리에 추종한 이완용

- 반면 이러한 주장의 허점을 꿰뚫은 안중근 한민족을 억압하면서 무슨 동양평화냐? 일제의 본질은 침략이고 동양평화를 헤치는 이토 히로부미를 응징해야 한다.” 는 주장으로 같은 상황에서 정반대의 길을 선택한 두 사람

- <한철호 교수>의 생각은 고난과 희생의 길을 선택한 독립운동가의 삶에 정반대되는 친일파의 행보는 어떤 변명으로도 용서받지 못 할 선택이고 지식인인 고위관료로서 결코 해서는 안 될 뻔뻔한 친일행위

- 당시에는 두 가지의 동양 평화론이 제기 되는데 이토 히로부미의 동양평화론 VS 안중근의 동양평화론, 이토는 일본이 주도로 한국과 중국이 협력하여 러시아의 남하(南下)를 저지하자는 일본이 패권의 중심이 된 동양평화를 주장 VS 안중근은 한일 삼국이 대등하게 협력하여 동양평화를 달성하고 이웃 나라 침략과 영토 확대를 반대한다는 것

- 20세기 초 활발하게 전개된 계몽운동으로 사회진화론을 받아들이면서 실력양성과 계몽운동을 통해 조국 근대화에 기여하자는 주장이 제기되는데 이완용도 이에 편승하고 일부 계몽운동 세력은 약자를 지배하는 일본의 침략논리에 동조하면서 친일파로 변절

사회진화론 : 자연도태 적자생존의 법칙을 사회발전이론에 적용, 제국주의 주장의 이론적 바탕이 됨

- 당대 최고의 엘리트 이완용은 국내외 정세판단이 가능한 지위였고 을사늑약 후 일본의 검은 속내를 알고 있었을 것이고 헌정 시로 드러난 이완용의 강제병합 찬성의지 또한 이토의 동양평화론을 끝까지 추종한 것은 본인의 권력과 부를 합리화하기 위해 궤변을 펼친 것

 

나머지 을사5적은?

- 을사늑약에 찬성했던 이완용 외의 인물은?

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권중현, 처음엔 반대했다가 나중에 찬성한 이하영 등이 있는데 박제순은 을사늑약 당시 외무대신으로 동학군 토벌로 악명 높았던 인물, 1910.8.22. 한일강제병합 조약에서도 서명한 인물이며 을사5적인 동시에 경술국적이다.

- 당시 내부대신이었던 이지용은 흥선대원군의 형인 흥인군의 손자로 나라를 지켜야 할 황족이 오히려 일제에 협조(?)

- 당시 군부대신이었던 이근택은 미천한 신분으로 1882년 임오군란 당시 충주로 피난 간 명성황후가 생선을 좋아한다는 소문을 듣고 매일 신선한 생선을 바치자 명성황후가 환궁 후 1883년 남행선전관으로 임명, <와이로>는 일본어로 뇌물을 뜻하는데 고려 문신 이규보가 썼다는 표현으로 <()()()> 꾀꼬리와 노래 대결을 벌이기로 한 까마귀는 노래 연습은 안하고 매일 심판관인 백로가 좋아하는 개구리를 잡아다 바치자 백로는 결국 까마귀의 손을 들어줬다는 설화로 이규보는 대문에 쓰길 내 평생 개구리가 없어서 출세를 못한다.”

- 이근택은 명성황후 피살 후 어떻게 자리를 지켰나?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이후 남겨진 피 묻은 허리띠를 일본인에게 거금 6만 냥을 주고 구입해 고종에게 헌상하고 고종의 신임을 얻는다.

- 이근택은 고종 퇴위 후 어떻게 자리를 지켰나?

이토 히로부미의 의붓아들이 된 이근택, 전형적인 간신모리배로 비린내란 비린내, 즉 생선비린내 피비린내까지 잘 맡는 인물로 이근택을 경멸한 노비들까지 가출했다는 소문도...

 

3.1운동 비난 경고문을 쓴 이완용

- 이완용의 선택 , 3.1운동 경고문 발표

1919년 전국적으로 일어난 3.1운동 당시 경고문을 세 차례에 걸쳐서 발표를 하는데 한 번이라면 압력에 못 이겨서 썼다 할 수도 있겠지만 1차 경고 조선 독립이라는 선동이 허설이며 망동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중략)남을 따라 망동하면 다치거나 죽음이 앞에 있을 것이니 (중략) 동포여 내 말을 듣고 후회하지 말라.” 2차 경고 본인이 동포 제군에게 경고한 목적은 단순히 인민의 사상을 없게 하고자 함이다. 매국적의 경고라 하여 자신의 안위에 까지 유관한 일을 듣지 않음은 생각이 없는 것 아닌가?” 3차 경고 강토와 모든 정도가 부족한 천 여백만의 인구로 독립을 고창함이 어찌 허만타 아니 하리요(중략) 병합 이래 근 10년 동안 (중략) 인민이 누린 복지가 막대함은 내외국이 공인하는 바이다. 가장 급한 것은 실력양상이다.“ 다시 말하면 포기해!“ ”안 돼!“ ”절망할거야!“로 과거 독립협회장의 모습은 사라진지 오래이고 지식인으로서 알면서 저지른 잘 못이 더 나쁜 것

 

이완용과 송병준의 친일 매국 경쟁

- 이완용과 쌍벽을 이룬 친일파 송병준, 일제는 이완용 VS 송병준의 친일 매국에 경쟁을 시켜 충성심을 자아내게 만들기도 하며 일진회는 1904년 계몽운동 단체로 시작하여 송병준을 수장으로 설립초기에는 실력양성과 일부에서는 입헌군주제를 주장하기도 하지만 을사늑약 전후(前後) 친일단체로 변질된다.

- 1904년 러일전쟁으로 일본군 통역관으로 활약한 송병준은 한국은 더 이상 희망이 없다면서 과격하게 고종 퇴위를 주도 한일강제병합을 주장하고 을사늑약 체결 전 일본으로 외교권 이양을 주장하는 <보호청원선언서>를 발표하고 자위단을 조직해 항일의병을 탄압한 송병준이 이완용보다 한 수 위인 것은 이완용은 3.1운동 비난 경고문을 세 차례 발표하지만 송병준은 도쿄에서 정무총감직 로비를 벌인다.

 

강제병합 기념사진

- 외세의존의 끝판 왕 친일파 민영준, 이완용을 방패삼아 잘 거론되지 않는 망국의 책임자들, 일한합방 기념사진<일본단체 동경문우회 발행 0910.8.29.> 일본에서 만든 합성사진으로 대외적으로 침략이 아닌 자발적이고 동등한 입장에서 합방했음을 선전하는 사진으로 맨 뒷 줄 중앙에 천왕이 있고 이토 옆에 순종고종 그리고 그 옆에 민영준이 있는데 이완용보다 상석(上席)으로 악명 높은 민영준은 나중에 개명하여 민영휘로 둔갑한다.

- 민영준은 어떤 인물?

1887~1889년 평안감사 시절 부정부패를 일삼고 동학농민운동 진압을 위해 앞장서서 청나라를 끌어들이고 동학농민 운동 탄압의 주동자, 당시 무소불위의 내정간섭자 위안 스카이도 민영준은 무능하고 탐욕스러운 자라고 평가하고 있다

- 처음에는 청의 내정간섭에 반발했으나 왕권유지를 위해 청국군 파병요청에 동의한 고종, 정권유지를 위해 친청(親淸) 민족반역자에서 친일(親日) 민족반역자로 변신한 민영준은 일제강점기 우리나라 최고의 갑부, 1925년 이완용 재산이 약 300만원일 때 민영준의 재산은 6,000만원으로 이완용의 20, 나라 망하기 전부터 일삼은 부정부패로 여기에서 민 마다리가 탄생

- 민영준의 별명이 민마다리가 된 사연, “꽉꽉 눌러 채운 자루는 마다할 리 없지요고종과 명성황후의 총애를 받고 평안감사 시절 매관매직을 통해 부를 축적한 반면 민씨 척족 중 또 한 명의 기억해야 할 사람, 민영환 그는 을사늑약 체결에 반대해 자결까지 하는 정반대의 삶을 산 인물

 

망국의 책임

- 사회지도층의 자세에서 순간 잘못은 할 수 있다 치더라도 반드시 뒤따라야 할 철저한 반성, 그러나 반성은 찾아볼 수 없고 오히려 책임을 전가한 당시의 지도자들, 이완용의 친일매국행위와 더불어 망국의 상황을 만든 당시 지도층의 책임이 크고 망국의 역사에 대한 반성과 성찰이 부족했던 것은 아닌지, 100년이 지난 지금 일본에 대한 철저한 비판과 더불어 우리 스스로 돌아봐야 할 것

- 친일파가 된 이유는 제각기 다른 것 같은데 친일파의 오류 민족사에 대한 확신부족과 패배주의 일본제국주의 본질 오판 등으로 결국 친일의 배경은 개인의 탐욕에서 출발

- 이완용이 고종에게 내세운 한일강제병합의 논리는 다른 외세에 의해 황실존속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일본은 황실을 지켜 줄 것이라는 논리로 망국의 책임에는 고종과 순종도 자유로울 수 없는 것

- 고종을 강하게 비판한 최익현은 망국의 위기에 자결로 불복한 명나라 황제와 비교하며 고종이 끝까지 저항했다면 일본도 쉽게 외교권을 빼앗지 못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 1890년대 광무개혁과 독립협회와 협력한 고종, 서로의 충돌이 생기는데 전제권력을 지키려 했던 고종, 반면 민권보장운동을 전개한 독립협회, 고종과 독립협회의 심화되는 갈등 속에 고종은 황제권 축소를 염려해 독립협회를 해산하는데 망국의 군주에 대한 동정심으로 고종의 잘못을 간과한 것은 아닌가?

- 바둑의 경언에 아생연후살타(我生然後殺他)”자신의 말이 산 다음에 상대의 돌을 잡으러 가야한다는 뜻으로 당시의 대신들을 보면 아생연후망국(我生然後亡國)”으로 나라의 존망보다 내가 먼저로 고종과 지도층이 백성들과 뜻을 같이 했다면 다른 기회도 만들 수 있었을 것

- 1884년 갑신정변 때는 급진적으로 나라를 바꿔보겠다는 사람들이 고종을 믿고 있다가 모두 버림을 받았고, 1894년 갑오개혁 때는 온건하게 나라를 바꿔보겠다는 사람들이, 그리고 동학농민운동 때에는 나라를 바꿔보겠다는 농민들이 고종에게 버림을 받은 것, 일제의 책임과 더불어 망국에 이르기까지 고종의 대응에 대한 냉정한 평가가 필요한 점

- 당시 세계사의 흐름은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 되는 것인데 흐름의 변화를 따라잡지 못한 고종, 국가 운영의 효율성을 강조하면서 외세에 대한 대응방법으로 전제군주제를 고집하고 역사의 흐름을 거스른 고종의 선택이 한스러운 뿐

- 아직도 친일파를 옹호하는 지식인들이 존재하고 정치논쟁으로 변질된 친일파 문제, 우리가 이 시대에 친일파를 이야기 하는 이유는 잘 못한 사람은 대가를 치르는 것이 사회 정의라는 것을 바로잡고 회복하는 것인데 친일파 청산이라는 사회정의를 이루지 못한 채 책임회피로 이어온 해방 이후의 우리 현실, “사회 정의의 관점에서 친일파의 문제를 바라봐야 할 것

- 또한 권력욕이 역사나 백성에 대한 두려움을 앞설 때 애국은 매국으로 변질할 수 있음을 알았고 사회지도층이라면 변화의 지향점이 변절인지 변혁인지 항상 숙고하고 반성해야 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