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his(한국사)

청산되지 못한 역사, 제3편 친일파의 명작 스캔들

mkpark2022 2020. 6. 26. 13:58

 

개요

- 조선의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내모는 데 앞장섰던 문화예술교육계의 친일파들, 뛰어난 필력 언변을 가졌던 이들은 당시 시대의 스승으로 대접받으며 큰 권위를 가졌던 사람들이었다. 젊은이들을 전장(戰場)의 총알받이로 내모는 데 기꺼이 자신이 가진 재능과 영향력을 사용했던 이들의 친일 행적을 집중 조명해본다.

- 19397월 중일전쟁 중 첫 조선인 전사자(戰死者) 발생, 당시의 언론에서는 지원병 최초의 꽃이라고 미화했다. 다음 날은 그의 가족까지 찾아가 전사(戰死)는 남자의 당연사(當然事)”라는 인터뷰까지 받아낸다. 무고한 전쟁의 희생자가 전쟁영웅이 되는 데에는 조선 문인들의 역할이 크다.

 

침략전쟁의 희생자가 전쟁 영웅?

- 문단의 큰 별에서 친일로 변절한 주요한(1900~1979)은 병석에서 나는 간다. 만세를 부르고 천황폐하 만세를 목 껏 부르고 대륙의 풀밭에 씨를 뿌리고 너보다 앞서서 나는 간다. 역사가 생긴 이래 처음으로 뿌려지는 피다. 반도의 무리가 님께 바친 처음의 피다침략전쟁의 희생자를 영웅으로 만든 일등공신

- 우리나라 최초의 자유시 불놀이를 쓴 주요한, 불놀이를 발표 후 20년이 지나지 않아 반도의 무리가 님(일본)께 바친 처음의 피다.” 친일로의 변신은 참으로 황당하고 마음 아픈 일

- 당시의 희생자 이인석은 교직이 꿈이었고 아내는 남편의 무사귀환을 기도하고 있었는데 전사(戰死)는 남자의 당연사(當然事)”라는 가짜 인터뷰 뉴스를 나중에 보고 그의 아내는 남편의 죽음 앞에서 당연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울분을 토했다는 것

- 중일전쟁 시기 조선의 지식인들이 대거 친일로 전향하는데 19406월 나치가 프랑스 파리를 점령하자 독일프랑스 등의 수많은 지식인들이 나치로 전향한다. 이처럼 전쟁의 상황을 읽고 입장을 바꿨던 지식인층의 한계가 잘 드러나 있는 현상

- 그런데 주요한은 1960년대 부흥부 상공부 장관을 역임한 인물, 지금으로서는 판단 미스가 분명하지만 당시는 일제가 영원할 것이라는 잘못된 판단을 하고 노골적으로 조선 병사의 죽음을 찬양했던 것

 

문학계의 친일 논란, 이광수

- 빠른 정세 판단이 가능했던 지식인들, 친일에 가장 앞장섰던 인물은?

필력을 친일에 이용했던 문인들, 대표적인 인물로 1937년 일제의 중국 침략 직후 조선 청년을 전쟁터로 이끈 문인은 춘원 이광수(1892~1950), 일제강점기 조선의 대표적인 지식인으로 동경삼재 중 1인으로 조선인의 심성을 문학적으로 가장 잘 표현한 사람이며 조선의 젊은이들의 미래를 누구보다도 걱정했던 사람

동경삼재 : 동경 유학생 가운데 주목할 만한 3인으로 임꺽정의 저자 홍명희, 독립선언서 초안을 작성했던 육당 최남선, 춘원 이광수

- 한때는 독립 운동가였던 이광수 2.8독립선언서 작성 관여 1919년 임시의정원 결성 참여 도산 안창호의 비서 독립신문 발간 참여, 안창호 급 독립운동가로 천재 문인 애국자로 역사에 남을 수 있었는데 어쩌다 친일의 늪에?

- 이광수는 독립신문 발행인으로 있다 보니 국내외 정세를 빠르게 파악할 수 있었던 위치, 두려움인지 의구심인지 생각이 바뀌어 가는 것 조선의 독립은 가능한가? 일제가 쉽게 무너질까?’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고 결론은 영원할 것 같은 일제의 곁을 선택한 것

- 1921년 상하이에서 귀국한 이광수는 이듬해인 1922년 개벽지에 <민족 개조론>이라는 논문을 발표한다. “조선 민족은 거짓말을 잘하고 용기와 결단력이 부족하다.” 조선이 식민지배를 받게 된 동기를 민족성 탓으로 돌리는 입장을 취한다. 충격과 분노에 쌓인 민족 운동가들은 이때부터 이광수에게 변절자라는 꼬리표를 붙인다.

- 이광수의 <민족 개조론>

순수하게 고쳐야 할 민족성을 이야기 했을 뿐이라는 그의 표현, 이광수의 주관적 의지는 나는 순수했어!” 라는 것으로 일본인의 관점에서 기술한 조선인의 민족성, 발표 이후 1년이 지나서 동아일보에 <민족의 경륜>이라는 논문을 쓰는데 우리는 조선 내에서 허()하는 범위 내에서 일대 정치적 결사를 조직하여야 한다.” <민족적 경륜 1924.1.3. 동아일보> 타협적 자치운동의 신호탄

 

친일 문인들의 충성 경쟁

- 문인들 사이에서 일어난 친일 충성 경쟁, 주요한(마쓰무라 고이치) “지금 시국이 요구하는 것은 행동이요. 희생이요. 무조건의 헌신이며 동아의 성전(聖戰)이 조선에 구하는 것은 땀과 피와 살과 생명이요.” <1941.03. 신시대>

- 김동인(히가시 후미히토) “내 몸은 이제부터 내 것이 아니요. 가족의 것도 아니요. 황송하옵게도 폐하의 것이며 자율 지원의 학병제로 일본적인 애국심의 강도를 다루는 저울이다.” <1944.01. 매일신보> 1955년부터 현재까지 이어오는 동인문학상, 폐지하자는 여론도 있지만....

- 최남선 오늘 날 대동아인으로서 이 성전(聖戰)에 참가함은 대 운동에 대() 운임이 다시 의심 없다. 어떻게든지 참가하고야 마는 최고 명령을 받고 있다.” <1943.11. 매일신보>

- 일본 관료와 장군들이 전쟁을 표현했던 단어 대운(大運) 성전(聖戰), 전쟁이 성전이라니? 전쟁을 절호의 기회로 봤던 일제

- 나치 독일에서도 1590<생의 한 가운데> 작가 루이제 린저 “...우리는 죽음으로 충성을 다해 몸을 바치는 성스러운 이 땅의 감시자, 위대한 지도자(히틀러)의 비밀을 지키는 파견인들, 우리는 감시한다. 우리는 승리가 아니면 죽음을 택할 뿐이다. 왜냐면 우리는 충성스럽기 때문이다.” <젊은 세대, 1935>

- 친일 충성 경쟁이 다다른 곳, 가미카제의 미당 서정주 마쓰이 히데오! 그대는 우리의 자랑, 그대는 조선 경기도 개성 사람. 그대는 우리의 가미카제 특별 공격 대원” <매일신보, 1944> 2차 세계대전 말 일제가 감행한 자살 공격 가미카제, 이는 전 세계가 경악한 일제의 반인륜적 행위로 일본 작가들마저 언급을 자제하고 있는데 하필이면 조선의 시인 서정주가 이를 쓰고 있는 것

 

일제의 선전 도구가 되다, 조선의 지식인

- 왜 일제는 지식인문인들을 앞장세웠을까?

조선의 엘리트들을 전쟁에 끌어 들이고 싶었던 일제, 그들을 선동하기 위해 우상의 지식인을 이용한 것으로 이광수는 당대 최고의 문인지식인엘리트화려한 경력, 그들의 언행에 선동되었던 조선의 젊은이 들, 일제는 조선의 유명 지식인을 전략적으로 이용했던 것

- 일부에서는 이를 거부하던 젊은이도 있었다. “밖에서 역적의 무리 이광수 나오라! 외치며 누군가 단도를 휘두르며 이층으로 오르락내리락 대소동을 벌였다.” <동경 창평관에서의 최남선과 이광수의 토론, 윤중현,1987> 하지만 지식인들의 선동 효과로 조선의 참전병협력자 수는 확대된다.

- 식민지배를 인정하고 일본인임을 증명하자! VS 독립으로 식민지배를 벗어나자! 독립된 국가에서 살아본 적이 없는 식민지 청년들, 심지어 태극기 자체를 구경해 본적이 없는 세대, 1919년 무렵의 어린이 1930~40년대 특별지원병 징병 대상자, 19193.1운동의 민족적 결기를 느껴보지 못한 세대, 식민지배는 당연한 현실에서 불안한 시대를 살았던 그들에게 힘을 발휘한 친일파들의 선동에 얼마나 저항심을 가질 수 있었을까?

- 서정주는 당시 일제의 세력으로 봐 백년 이상은 버틸 것으로 생각했다.” <시와 시학, 1992> 태어났더니 일제 강점기 30년 넘게 식민지배 일제의 파죽지세, 이것이 일제에 굴복이라는 사슬로 이어지는 것

- 하지만 조선 청년들에게 참전(參戰)을 독려한 이광수도 1945년 까지 일제의 감시를 당했던 것으로 일제는 끝까지 조선인을 믿지 않았다.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 고위 관료들의 해방 이후 집담회 기록물 조선총독부에 접근 하려는 이른바 친일을 팔려는 자, 전혀 의지할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다나카 다케오 서기관장 구술 기록, 1958>

 

교육계의 친일 논란, 김활란

- 친일파 문인을 앞세워 조선의 청년들을 현혹한 일제는 체계적으로 황국신민 육성을 위한 방법으로 교육을 이용하는데 문인들 못지않게 교육계에서 활동했던 친일파

-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박사학위 소지자로 1941년 이화여전 교장 김활란, 야마기 가쓰라로 창씨개명하고 친일단체 임원으로서 부인여학생을 상대로 징병학병 동원 연설을 활발히 이제야 기다리고 기다리던 징병제라는 커더란 감격이 왔다. 우리는 아름다운 웃음으로 내 아들이나 남편을 전장으로 보낼 각오를 가져야 한다. 만일의 경우에는 남편이나 아들의 유골을 조용히 눈물 안내고 맞아들일 마음의 준비를 가져야 한다.”<신시대 1942.11>

-1930년대 초 농촌 계몽운동에도 힘썼던 김활란, 전시체제가 되니 친일로..... 여성의 사회적경제적 지위 향상에도 주력한 인물로 여성 지식인의 리더로 심지어는 여성계의 스승이라고도 칭한 인물

- 히틀러 유겐트(NS Hitler-Jugend)는 독일 청소년에게 나치즘 교육을 위해 설립된 단체로 히틀러 우상화 교육이 주목적이며 나치사상독일민족의 우월감을 강조하는 교육으로 미래의 나치군 양성을 위한 교육

- 독일은 나치교육, 일제는 황국신민화 교육을 실시하는데 교육자로서 권위를 가진 김활란은 학생들에게 큰 영향력을 발휘했을 것, 그런 권력과 지위를 이용해 일제침략전쟁에 인적물적 자원을 동원, 대표적으로 <애국금차회>란 조직체는 1937820일 조직된 친일 단체로 금비녀금가락지 등 장신구의 국방헌금 헌납을 강요한다.

- 1944년 큰 눈병을 앓은 김활란, 의사가 실명할 수도 있겠다는 말에 남의 귀한 아들을 사지(死地)로 나가라고 했으니 장님이 돼도 억울할 것 없지...” <김활란 박사 소묘, 김옥길 1959> 부지불식간에 내뱉은 말이지만 의미는 심장한 것

- 과연 그녀는 죄의식이 있었을까?

김활란 옹호자들은 친일행위 사과를 주장을 하지만 이는 ()적인 자기반성고백일 뿐 공()적인 반성은 아니었다.

 

음악으로 선동하라

- 교육계의 강제 학생 동원은 전쟁 수행을 위한 행위로 긴장감이 조성되고 뭔가 딱딱할 수 있어 조선인의 저항의식촉발 가능성이 있으나 그것을 자연스럽게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은 음악, 자발적 동원과 저항감을 무마시키는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일제의 영향력이 미치는 모든 곳에는 기미가요나 일제 찬양 노래를 반복 재생하여 세뇌(洗腦)

- 당대 최고의 스타 남인수도 피해갈 수 없었던 친일의 길 <혈서지원,1943>이라는 출병 선동 노래를 부르게 했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혈서를 써서 군대에 지원하고 있다!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고...

- 음악을 철저히 통제했던 히틀러 정권, 친 나치음악가만 지원했으나 2차 세계대전 이후 나치음악은 법적으로 금지조치를 했고 지금도 독일에서는 위반 시 반나치법에 의거 최대 징역 3년을 구형하고 나치기를 소유하거나 나치 경례를 하는 것도 비슷한 처벌

- 또한 독일 국가는 1.2절은 제창이 금지되어 있고 현재 독일 국가는 3절만 독일인의 노래>로 불리고 있는데 1.2절은 독일 민족의 우월성을 강조했기 때문이라고 하며 2차 대전 이후 독일은 합창 문화가 드물어졌다고 한다.

 

음악 속의 친일 잔재

- 우리나라의 경우 친일음악을 모두 금지시키면 부를 수 있는 노래는 거의 없을 정도라고 하는데 현재 트로트의 상당수가 친일 작사작곡가의 노래이고 지금까지 즐겨 부르는 1900년대 초 동요가곡 <고향의 봄, 1926 홍난파> <섬집 아기, 1950 이흥렬> 친일 작곡가의 곡

- 보다 더 친일 음악계에서 확실한 족적을 남긴 사람은 징병제 실시를 축하하고 군국가요를 가르치는 일에 앞장섰던 음악가 현제명(1903~1960) <희망의 나라로>1931년에 발표되는데 이때는 만주사변의 발발해로 언덕은 대륙, 일제 입장에서 만주는 대륙으로 일본의 대륙진출 희망을 부른 노래? 일제 희망 상징곡으로 의심받고 있는 <희망의 나라로>

- 1930년 대 신문에 등장 한 만주 봄’ ‘만주 드림’ “만주 이주 이만 백여 명 돌파” <동아일보 1934.11.25.> 당시 희망의 땅으로 불렸던 만주, 이렇듯 언뜻 기억나는 노래가 없다는 것은 우리의 비극

- 애국가 작곡가 안익태친일 논란, 애국가도 친일파가 만들었다는 소리는?

1941~1944년 독일 베를린에서 활동한 안익태, 당시는 나치의 엄격한 통제가 존재하던 시기로 나치 정권 하에서 음악 활동을 했다는 것이 의심스러운 부분

- 안익태(1906~1965)는 만주국 건국 10주년 음악회에서 지휘하는 등 친일행위 논란, 2009년 친일인명 사전에 등재, 1941~1944년의 독일활동은 군국주의 동맹 독일과 일본이 안익태 합동 후원이 없이는 불가능했던 것, 왜냐하면 당시는 제2차 세계대전 중으로 일본의 동의가 없었다면 에키타이 안의 독일 활동은 불가능한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안익태의 활동이 그 시점에 왜 두드러졌나 하면 전쟁의 상황과 맞물려 있는 것

- 1937년 이전까지 조선의 국운을 걱정했던 안익태, 중일전쟁의 발발로 자기 진로를 결정하면서 조선인의 정체성을 포기하고 이를 음악으로 드러냈다는 것

- 최근 일본 외교 사료관에서 <신주백 소장>이 찾은 자료,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정보력, 당시는 독일과 일본은 적대국가 <적국 독일 내 조선인 활동 상황> 정보보고서로 이때부터 이미 샅샅이 파악하고 있었던 것, 하물며 1944년 일본의 보호 없이는 안익태 활동은 불가능한 것

- 애국가 교체 공청회, 100분 저널 <애국가> 이대로 좋은가?

애국가와 함께한 추억이 너무 많은데 가슴 뜨거운 현장을 함께했던 애국가, 한순간에 애국가를 교체한다면 감정적 상처는 있지 않을까?

- 갑자기 자르자는 것이 아니라 충분한 공론화를 거쳐 다음 세대에게는 새로운 추억을 심어주면 되지 않을까? 친일 작곡가가 작곡한 것을 알면서 어찌 그냥 넘어갈 수 있겠는가?

- 그렇다면 애국가 유지를 하되 친일 작곡가 존재 인식이라도 하자면... 기존의 곡에서 논란 부분만 삭제한 독일 국가의 경우는 특이한 사례, 올바른 판단을 위해 섬세한 분별과 공론화 과정이 필요하지만 한국 사회는 친일청산 공론화 한계가 존재, 분단국가에서 한국전쟁 경험으로 친일문제가 이념갈등으로 전환되기 때문

 

친일 논란(論難) 대신 친일 논의(論義)

- 흔한 말로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하고 친일을 하면 3대가 흥한다고 하는데 3대를 혼란스럽게 하는 친일 문화예술, 우리의 삶에 깊게 관여돼있는 친일문화예술이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는 이유는 친일 청산이 제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

- 독일도 68혁명 이전까지 공론화 되지 않았던 나치 청산 문제, 유대인 학살은 사과했지만 강제노동배상문제는 2000년대 들어와서 뒤늦게 논의 시작

- 과거사 청산을 독일과 일본을 비교하면서 독일은 이런데 일본은 왜 이래? 하면서 독일의 과거 청산을 완벽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은 측면도 있다.

- 우리도 친일 문제 논의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자세 친일문제 진상규명 우리 사회에 미친 영향도 검토하면서 과거사 청산 해결의 주체는 국민으로 친일청산의 공론화를 거쳐 작은 것부터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 내는 과정이 필요하다

- 좋은 예로 친일인명사전 비치를 둘러싼 찬반토론, 이런 것을 갈등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며 일제 향나무라 해서 모조리 뽑아낸다? 이런 식이 아닌 사회 구성원들의 작은 움직임으로 변화를 만들어내야 만이 건전하게 풀어낼 수 있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