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요
- 1945. 9. 9.부터 38선 이남에서는 본격적인 미군정이 시작된다. 미군정 최고 사령관 하지 중장은 미국에 우호적인 한국정부 수립을 목표하고 한국 정치 지도자들과 다양하게 접촉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이끌었던 백범 김구, 미국에서 활동한 엘리트 독립운동가 이승만, 해방 직후 조선 인민공화국을 주도한 중도 좌파 여운형, 임시정부 부수석을 역임하고 좌우합작 운동에 힘쓴 김규식, 대한민국 정부 수립까지 이들 사이에서 벌어졌던 치열한 정치 드라마, 그 3년의 기록을 살펴본다.
○ 미군정과 이승만 지지
- 해방 직후 좌파 세력이 우세했던 남한의 환경, 이러한 환경을 바꾸고 미군정에 대해 지지를 받을 수 있도록 설득할 수 있는 인물이 누가 있을까? 했는데 이승만 박사가 가장 적임자다고 판단을 했던 것
- 미국이 이승만을 지지한 배경 ① 미 박사 학위 + 친미 성향 ② 맥아더와 반공주의 공감, (또한 당시 좌파 성향의 조선 인민공화국이 해방 직후 여운형 주도로 수립하는데 이승만에게 주석 직을 제의 하여) ③ 좌익에서도 신망이 있다고 판단 ④ 양녕대군의 후손이라는 점으로 혈연 + 학연 + 지연 + 반공 사상 = 미국이 본 최적의 지도자로 판단한 계기
- 이승만을 국내 귀국 때부터 국빈급 대우를 한 미군정, 이승만에게 특급호텔 숙식을 제공하고 1,000만원이라는 거액의 정치 자금을 제공하는 반면 다른 조직에는 1~20여만 원 정도를 지원하고 김구의 경우에는 장제스가 지원한 정치자금을 미군정의 협조 부족으로 가지고 들어오지 못한다.
○ 이승만 VS 미군정, 갈등의 배경
- 반전이 있는 것이 미군정이 이승만을 계속 지지하지는 않는다는 것, 기대와 달리 미군정에 완벽하게는 협조하지 않은 이승만, 모스크바 3상회의(1945.12)에서 한국에 통일 임시 정부 수립과 신탁통치를 의결했는데 여기에 찬성을 하고 협조를 했으면 좋겠는데 반탁운동을 지지한 이승만
- 당시 미국의 한반도 계획은 ① 미소공동위원회 설치 ② 소련과 협의를 통해 임시통일정부 구성, 하지만 이승만은 소련과는 절대 같이 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너무 강해서 오히려 미국의 한반도 정책에 방해물이 된 것, 결국은 자기를 반대하는 사람과는 도저히 같이 일을 하지 못하는 성격이 이승만과 미군정을 갈라놓은 결정적 이유인 셈
- 이승만의 반공행보가 미국으로선 고맙지 않았을까?
당시의 상황이 다른 것이 미‧소 냉전이 본격화되기 전,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국이었던 미국과 소련, 그래서 소련과 협의하여 통일임시정부 수립이 미국의 목표인 것
- 정치 9단, 눈치 9단 이승만은 제1차 미소공동위 중 남쪽지방을 순회하는데 이것이 신의 한 수, 미국에서의 경험으로 선거와 유권자의 중요성을 알고 지방을 순회는 것으로 일제강점기 미국정치를 경험한 이승만, 하지만 다른 정치지도자들은 근대정치 경험이 전무인 상태, 모두 독립운동 하느라고 바빴지 정치는 눈 돌릴 겨를이 없었던 것
- 좌파 조직이 많던 지방을 방문 → 우파 지지세력 확대하여 운동장의 기울기를 바꾸는 것으로 정치 공학의 달인, 당시에는 정치는 중앙에서만 하는 것으로 인식되던 시기로 지방순회는 유권자들에게는 큰 영향을 미쳤을 것. “공산주의자는 소련으로 보내야 한다. 공산주의자는 파괴주의자다. 그러므로 공산주의자는 전부 체포하라.” -1946..8 목포 발언 중-
- 소련과 조속히 합의하고 한반도에서의 철수를 원했던 미국, 하지만 이승만이 이를 방해하는 사람이 돼버린 것, 미국의 입장에서는 소련의 입장을 무시할 수 없어서 소련도 받아들이는 지도자가 필요한 것으로 미국을 불편하게 만든 이승만의 반공‧반소 행보.
- 또한 1946.5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무기한 휴회가 들어가는데 그로부터 한 달 후 “무기한 휴회된 공위가 재개될 기색도 보이지 않으며 (중략) 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야...” <1946.6.3.이승만의 정읍 발언>
- 하지 중장의 인터뷰
이승만의 단독정부 발언 후 미군정의 기조와 다른 이승만에 대한 하지 중장의 발언 “이박사가 과대망상으로 거의 제 정신이 아닌 것 같습니다. 나는 이박사가 정신과 의사와 은밀하게 면담을 가지도록 일을 진행시킨바가 있습니다. 나는 이박사가 군정에서 쓸모 있는 역할이 끝났다고 생각하며 이박사를 공개적으로 비난함으로써 그를 파멸로 이끌어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합니다.” <이승만 비록> -로버트. T. 올리버-
- 로버트 올리버는 이승만 박사의 정치고문으로 하지 중장이 생각하기를 이승만이 너무 극단적으로 반공‧극우를 외치고 다니자 이렇게 하면 우리가 이승만과 함께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것
- 이승만의 단정(單政) 발언, 그 속내는?
<박태균 교수의 분석>은 ① 미소공위 결과로 통일임시정부 수립 시 주도권 상실을 우려한 이승만 ② 미‧소 협력이 계속되지 않을 것이라고 예측한 이승만, 하지만 이승만의 반공‧단정 발언은 자신의 정치적 이득을 위한 목적이 더 컸다는 것, 그렇지만 국제정세에 대한 이승만의 판단력도 무시할 수는 없다는 점
- 정치공학의 달인 이승만은 제1차 미소공위가 결렬되자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단독정부라는 새로운 의제를 던져 찬‧반의 논의들이 모두 단독 정부라는 블랙홀로 빠져들게 하는 것이고 그 중심에는 이승만이 있다는 것, 이것으로 인해 가장 눈에 띄는 정치인이 되는 것으로 어찌 보면 의제 선점의 효과인 셈
- First Mover Advantages 는 한 분야를 먼저 선점하는 자에게 이점(利點)이 가장 많다는 뜻으로 이런 식으로 따졌을 때 단독정부는 아주 좋은 신의 한 수였다 라고 볼 수 있는 것, 물론 위험 부담도 있고 안티도 생길 수 있겠지만 그 만큼 지지자도 얻을 수 있는 것
- 의제 전환 능력이 뛰어난 정치 9단 이승만, 처음 귀국 직후 나온 발언이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였는데 당시의 중요한 의제는 일제 식민 잔재 청산과 친일파 척결로 이것에 모든 역량이 집결돼 있는데 갑자기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로 프레임을 바꿔버리는 것, 정읍발언에서도 그 당시 미소공위에 누가 새로운 주역이 될까? 하고 생각하는 사이 갑자기 “우리는 단독 정부를 세워야 한다. 분단정부를 세워야 한다.”로 프레임을 바꿔버리면서 본인이 부각되는 뛰어난 재주를 가진 것
- 이는 미국에서 공부한 영향이 큰데 서구 민주주의를 체험한 이승만, 민주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민중의 마음을 얻는 것으로 민심을 잡으려면 정치적 수사(修辭)가 중요하다는 것을 그때 배운 것, 고대 로마정부 공화정의 “주사위는 던져졌다.” -카이사르-, 미국의 “국민의 국민을 위한 국민에 의한 정치” -링컨-, “우리가 두려워 할 것은 두려움 그 자체뿐이다.” -루스벨트- 이 모두는 따지고 보면 아무 것도 없는데 그냥 단지 멋있다는 것 뿐...
○ “나”를 중심으로 뭉쳐라!
- 이승만 박사는 항상 자기중심적이라는 성향이 강했던 것이 1919.4.11. 상해 임시정부 국무총리직과 1919.4.23. 한성임시정부 집정관 총재로 추대된 적이 있는데 당시 외국으로 공문이나 서신을 보낼 때 대통령 직함을 쓴 것, 이 때문에 임시정부와 갈등을 겪기도 하고 미국에서 귀국할 때 도쿄를 거쳐 한국에 들어오면서 도쿄에서 맥아더 장군을 만나는데 여기서도 전(前)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으로 자신을 소개한다.
- 그래서 안창호 선생이 서신을 보내는데 “그 어느 정부에서도 당신은 대통령이 될 수 없습니다. 당신이 가진 것은 정부의 집정관 총재 직함뿐입니다. 헌법 개정 없이 계속 대통령 행세를 한다면 이는 분명히 헌법 위반이다.” 이에 대한 이승만의 답장 “집정관 총재란 대통령의 다른 명칭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고 그런 이유로 나는 지금 나의 대통령 명의를 바꿀 수 없습니다.” 그러면서 계속 쓰고 다니다 결국 1919년 9월 임시정부 헌법 개정으로 대통령이 된 이승만은 1925년 탄핵을 당하고 만다.
- 대통령이 되려면 대중의 지지만큼 미군정의 지지도 중요한데....
소련과의 협의를 중시한 미국은 이승만 카드를 포기하고 소련도 찬성할 수 있는 지도자를 찾은 것이 김규식과 여운형, 김구도 강력한 지도력을 가지고 있지만 반공‧반탁운동이 너무 강해서 배제되고 김규식과 여운형을 찾아 좌우합작위원회를 추진하려고 1946.6.20. 이승만과 백범을 불러 2선 후퇴를 제안하고 김규식 지원을 요청한 하지 중장, 이승만의 정치적 위기감을 느끼는 시점이다.
○ 이승만의 승부수, 미국행
- 정치 9단 이승만은 어떻게 이 위기를 넘겼나?
이승만의 2선 후퇴를 제안한 미군정, 문제해결의 핵심은 워싱턴 D.C에서... 이승만의 미국행 선택 배경 ① 미국 내 인맥 활용 ② 미 권력의 핵심 워싱턴 D.C 공략, 미국 내 인맥을 동원하여 미군정과 정면 승부를 결심한 것
- 미국을 방문한 이승만의 활동은?
하지를 공산주의에 친화적이라고 몰아세운 이승만, 하지만 이승만의 반(反) 하지 주장을 귀담아 듣지 않는 미국, 이승만에 대해 허세가 많다는 등의 이유로 부정 평가자가 많았던 것
- 또한 <박용만 모함사건, 1918년>은 제 1차 세계대전 당시 이승만과 박용만이 하와이 독립운동 단체 재정문제로 갈등 중이었는데 박용만이 연합국인 일(日) 군함을 폭파시키려 한다고 모함한 사건도 있었다.
- 이즈음에 국제정세가 변하는 계기가 되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그리스 내전(內戰)으로 미‧영이 지원하는 그리스 정부군 VS 소련 지원군의 반정부군, 공산주의 확산을 우려한 미국이 이를 막고자 발표한 것이 트루먼 독트린으로 이로부터 본격적인 미‧소 냉전체제가 시작이 되었다.
※ 트루먼 독트린 : 1947.3 공산주의 확대를 저지하기 위해 그리스‧터키를 지원한 트루먼 행정부의 정책
- 이승만 방미 중 발표된 트루먼 독트린은 이승만에게 운이 따른 듯,,, 하지만 꼭 운이라고만 볼 수 없는 것이 기회와 운은 준비된 자가 잡는 것으로 이승만은 미‧소 관계의 악화를 이미 예상하고 있지 않았을까?
일종의 도박을 건 게 아닌가 싶은 것이 이승만의 미 방문은 2선 후퇴를 제안한 미군정과 맞서는 마지막 승부수인 것
- 하지만 미국에서도 그렇게 성공적이지 않았고 결국 하지 축출에도 실패하며 미소공동위원회와 좌우합작위원회 저지마저 실패하고 때 마침 “미 남조선에 6억불 3개년 계획으로 원조 제공‘ -동아일보, 1947.3.21.- 보도가 나오는데 ① 이승만이 6억불 원조를 따낸 것 ② 이승만이 새 임시 정부의 대통령으로 취임. (사실은 그 정도의 원조도 되지 않았다.)이라는 가짜 뉴스가 등장한다.
○ 정치 9단 이승만 VS 독립 투쟁 김구
- 1947.4.21. 미국에서 귀국한 이승만은 열렬한 환영을 받는다. 정치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지지자들의 결집으로 이승만과 김구의 차이는 정치만 아는 사람과 투쟁만 아는 사람의 차이? 가짜 뉴스에 속아 대중들이 표를 줄 수도 아닐 수도 있지만 어찌 보면 민주주의의 장점이자 맹점인 언론 프레이를 하고 여론을 만들어 대중들이 나를 사랑하게 하고 상대편을 반대하게 만드는 것이고 이를 십분 발휘한 사람이 이승만 박사
- 사실은 김구도 가만있지는 않았다. 단지 언론에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했을 뿐, 이승만 박사가 지방행‧미국행으로 분주했을 때 그 빈자리를 채운 사람, 당시는 이승만과 김구는 반탁‧반공의 정신으로 정치적으로 협력하며 호형호제하던 사이, 하지만 이들은 단독선거 찬반 여부로 결별하게 된다.
○ 미군정의 고민과 좌우합작 추진
- 미군정은 어쩔 수 없이 이승만을 택하지 않았을까?
이승만이 더욱 안 된다고 생각한 것이 이승만이 단독으로 한국의 지도자가 될 경우 미국에 협조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
- 하지 사령관과의 관계는 틀어질 대로 틀어진 사이로 이미 돌아 올 수 없는 강이 돼버린 사이, 프레스턴 굿펠로(Preston M, Goodfellow)는 CIA의 전신인 OSS의 부국장 역임자로 하지의 고문이자 이승만의 사설고문인데 그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승만에 대해 크게 분노한 하지의 심정을 토로하고 있다.
- 미군정이 생각한 새로운 파트너는?
김규식과 여운형, 미군정의 첫 번째 선택은 이승만, 그리고 조력자로 김구를 생각했는데 미소공위 결과 소련의 동의를 얻어서 통일 임시정부를 만들어야 하는 상황, 그래서 소련이 반대하지 않을 지도자를 세워야 한다며 김규식과 여운형을 내세운 것
- 좌우합작을 적극적으로 주장한 여운형, 미군정에서는 좌파 중도에 있는 여운형을 썩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김규식을 대통령으로 내세우고 여운형이 이를 돕는 모양새를 갖추면 좌우 밸런스도 맞고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한 것
- 문제는 여운형의 붉은색으로 미국의 입장에서 보면 좌익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여운형을 제거 해야겠다 하고 여운형의 친일 경력 여부를 은밀하게 조사하기 위해 조선 총독부 일본인 전(前) 관료들에게 인터뷰까지 하면서 조사를 하는데 조사를 마친 결론은 여운형은 친일 행위자가 아니라 애국자라는 것
- 그래서 여운형을 제거하는 것보다는 포섭하여 박헌영이 중심이 된 조선공산당과의 단절을 유도하고 미군정이 합리적이라고 평가한 김규식을 지원하는 역할로 여운형을 선택하는 것으로 정책을 바꾼 것
○ 여운형 암살과 그 여파
-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1947.5~1947.10)가 한창이던 중, 뜻하지 않은 사건이 발생하는 데 1947.7.19. 여운형의 차가 서울 혜화동 로터리를 지나가고 있는데 이를 가로 막는 또 한 대의 차량, 그리고 괴한의 총탄에 심장과 복부를 피격당한 여운형
- 여운형의 죽음과 함께 흔들리는 좌우합작위원회, 좌우합작의 핵심인물이자 미군정의 유력 파트너 여운형의 죽음, 사실 여운형은 좌우합작 반대 인물로부터 열 두 번의 암살 위협을 받은 경험이 있으며 범인으로 지목된 인물은 극우파 청년 한지근으로 당시의 암살 사건 모두가 그랬듯이 암살 배후는 밝혀지지 않은 것
- 우리 역사에서 안타까운 것 중의 하나가 여운형의 암살로 당시 여운형은 통일 임시 정부의 지도자로서 적임자, 그 정도의 역할을 한 사람이라면 죽을 자유도 없는 것, 방심하고 있다가 암살을 당하는데 여운형이 죽고 나서는 더 이상 통일 조국의 지도자가 없어지는데 통일임시 정부의 구성에는 미‧소 모두가 찬성하는 지도자가 필수
- <박태균 교수의 분석>은 여운형 암살 이후 미국과 소련이 동의할 수 있는 지도자는 김규식, 하지만 김규식은 정치지도자 보다는 학자에 가까운 인물, 김구‧이승만은 반공‧반소주의로 안되고 마지막으로 생각한 또 한 사람 서재필 박사(1864~1951)이지만 84세의 고령이고 오랜 미국 생활로 국내 정세와 기반이 부족하여 결국 딜레마에 빠지게 되는 미군정
○ 미군정의 선택, 또 다른 파트너는?
- 새로운 인물로 부상된 장덕수(1894~1947) 한국 민주당 정치부장 역임으로 일제강점기에 좌‧우파 활동을 모두 경험했고 명석하기도 하지만 친일의 경력, 일본의 와세다 대학 졸업 후 미국의 컬럼비아 대학 박사 학위를 받아 인맥도 넓은 편
- 장덕수가 지도자로서 대중적 지지도와 인지도는?
별로 아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고 미군정이 구상한 헌법 초안을 보면 의회에서 대통령을 선출하고 의회에 힘을 몰아주는 것, 초기 미국의 정치의 중심도 의회로 미군정의 구상은 내각제 총리로 장덕수 선생을 세워놓고 의회에서 선출한 대통령 이승만으로 실권 없는 대통령을 만들겠다는 것
- 어쨌든 실권은 한국 민주당에게 주려했던 미군정, 특히 이런 결정을 하게 되는 데에는 제2차 미소공위 당시 반탁진영에서 이탈한 한국민주당, 제1차 미소공위 당시에는 김구‧이승만과 반탁진영에서 활동했었는데 이탈한 것으로 미군정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에게 협조하는 장덕수에게 실권을 주고 반면 대중들에게 인기가 있는 지도자를 물러나게 할 수는 없는 것으로 이승만에게는 명목상의 권력만 주고 실권이 없는 대통령으로 만들겠다는 것, 이것이 여운형이 암살되고 미소공위가 결렬되면서 미군정이 생각했던 시나리오
○ 장덕수의 암살과 그 여파
- 1947.12.2. 장덕수 집에 찾아온 두 사람에게 암살을 당한다. 때는 UN한국임시위원단이 입국하기 한 달 전의 사건이다.
- 미군정파트너로 유력할 때마다 발생하는 암살사건, 송진우‧여운형‧장덕수 모두 피살, <박태균 교수>의 생각은 미군정이 다른 정치 지도자를 지원할 때마다 그것을 막고자 하는 존재가 있었다는 것, 그런데 이 사건은 다른 사건과 다른 것이 현직 경찰관이 암살범, 그리고 사건 이후 암살 배후에 김구가 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고 당시 일부 언론에도 보도된 김구 암살 배후설
- 이는 정치적 모략의 냄새가 나는 것이 1948년 장덕수 암살범 재판에 증인으로 출두한 김구, 살인사건 재판에 증인으로 나선다는 것은 정치인으로서는 큰 타격, 흥미로운 것이 김구에게 법정 출석 요구서를 보낸 사람은 미국 대통령 트루먼, 말이 안 되는 것이 당시 김구는 아무런 공식 직위가 없는 사람인데 미국 대통령이 법정 출석 요구서를 보냈다는 것은 청치 공작으로 볼 수밖에 없는 것
- 무슨 사연이 있었느냐 하면 2차 미소공위 결렬 후 한반도 문제를 UN에 이관하고 UN에서 한국총선 계획이었는데 이를 북측에서 거부하는 것, 그래서 남쪽에서만 선거를 계획하자 김구는 이남만의 선거를 결사반대하자 부담을 느낀 미국이 김구를 음해하려는 정치공학
- 1948년 군사재판에 참석한 김구의 사진, 결국 무혐의로 풀려났으나 정치적 타격을 받은 김구, 당시 김덕수 사건의 미 수사관을 2003년도에 만난 <박태균 교수> 그는 CIC(미군 방첩대)요원으로 암살 배후를 거의 찾을 뻔 했는데 갑자기 미군정 상부에서 조사 중지 명령을 받고 수사를 중지했다는 사실을 알려 준 전(前) CIC요원
- 결국 김구 선생은 암살 배후 누명으로 정치적 타격을 입고 김규식과 단독선거 반대를 위해 북한을 방문한 김구를 보다가 미군정이 선택한 이승만
- 1948.2.22. 하지의 초청으로 모인 이승만, 김구, 김규식, 김구와 김규식은 남한 단독 선거를 반대하며 김규식은 “우리가 이를 진행하면 역사는 우리를 역적으로 규탄할 것이다.” 하자 이승만은 “내가 역사에 대한 책임을 질 테니 염려 말라.” 하면서 서로 갈라서게 된다.
○ 3.8선 이남의 5.10선거
- 3.8선 이남에서 열린 첫 번 째 국회의원 선거 , 높은 관심 속에서 치러진 선거로 오랜 역사의 왕정기를 지나 일제 강점기를 보내고 민주공화국을 향해 내딛는 도약, 그러나 남북 분단이 더욱 공고해지는 순간이었다.
- 정치 지도자를 직접 뽑는 역사적 순간으로 투표율 95.5%, 높은 투표율로 둘러싼 논란, 완벽한 자유선거??? UN에 보고되기는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이뤄졌다는 것이고 일부에서는 강제동원 논란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역사상 최초의 보통선거‧비밀선거가 이뤄졌다는 것은 엄청난 역사적 사건, 특히 여성에게도 투표권이 주어졌다는 것이 인상적으로 프랑스 1944년, 이탈리아 1945년, 스위스에서도 1971년에야 여성에게 참정권이 주어지는데 매우 혁신적이었다는 생각
- 지금이야 정치의 주인은 국민이다. 라고 하지만 당시에는 정치는 정치하는 사람이 별도로 있던 세상이고 우리는 단지 백성이다. 라는 생각만 하다가 이제 내손으로 지도자를 뽑는구나! 하는 역사적 사건
- 동대문 갑 당선자, 이승만
1948년‧1950년 두 번의 선거에서의 특징은 무소속 당선자가 높은 비율로 첫 번 째는 42.5% 두 번 째는 더 높아지는데 정당보다는 협회‧사회단체 위주로 선거에 참여하는 것으로 정당시스템에는 아직 이르지 못한 것이고 이승만은 무투표 당선이 되는데 이승만과 같은 지역구에 출마하려 한 최능진(1899~1951)은 누군가가 막아서 후보등록이 무산되고 이승만 단독 출마로 당선
○ 대한민국의 첫 설계도, 제헌헌법
- 한 나라의 설계도 헌법, 제헌 헌법의 내용은?
자유민주주의,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요즘 사람들이 생각하는 우리 헌법 , 그러나 제헌헌법은 조금 다른 점이 공공성을 강조하고 자본주의 기조 하에서 중요한 운수‧통신 등 공공성을 가진 기업은 국영 또는 공영으로 한다. <제헌 헌법 87조>, 또한 제헌헌법에 명시된 이익균점권은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사업에서는 근로자도 이익의 분배를 균점할 권리가 있다. <제헌 헌법 18조 2항> 지금보다 공공성의 원리가 훨씬 강조된 제헌 헌법
- 당시 우파를 대표하는 한국민주당의 정책을 보면, 교육 및 보건의 기회균등 ‧ 주요 산업의 국영 또는 통제관리 ‧ 토지제도의 합리적 재편성, 언뜻 보면 사회주의 정당의 정책 같지만 당시는 우파 정당도 공공성을 강조, 일반적으로 법학자들에게 물어보더라도 제헌헌법에는 사회주의 색채가 많았다고 평가한다고 한다.
- 좌우로 나뉘어져 있지만 일치 하는 점도 분명히 있는 것, 문제는 일치의 측면을 본 것이 아니고 어떻게 정권을 잡느냐? 를 중심에 놓고 보면 사실 합치는 불가능해지는 것, 냉전의 축소판이었던 한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인들이 협력했으면 통일 국가를 만들지 않았을까? 오스트리아도 미‧소‧영‧프 4분할이 되어있는 상태에서 정치인들이 협력하여 중립국가로 통일을 이룬다.
- 또 하나 안타까운 것은 역시 운(運)도 중요하다는 것, 한국전쟁의 선례(先例)를 목격한 오스트리아, 1955년도에 통일을 이루는데 1953년에 스탈린이 사망하자 기회를 잡은 오스트리아, 하지만 우리는 통일정부 수립의 기회를 놓친 점이 안타까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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