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요
- 친일파 청산은 해방 직후 온 국민의 염원, 그 염원에 답하고자 1948년 10월 제헌헌법에 의거 국가기구인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출범한다.
- 반민특위는 출범 초반부터 강력한 추진력을 보이지않고 현재까지도 친일파는 청산되지 않았다, 과연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 친일파의 변명
- 대한민국 역사의 핫 이슈 친일파 청산문제, 반민특위 재판의 모습을 담은 영화 <암살> 이정재의 변명에 몰입하다 보면 말도 안 되는 소린데도 불구하고 이게 진짠가? 할 정도이고 또 한편으로 보면 독립투사가 억울하게 끌려 나온 것으로 착각할 수 있을 정도로 인간이 저렇게 뻔뻔할 수 있을까?하는 의구심이 든다.
- 독일의 아돌프 아이히만(1906~1962)은 유태인 학살을 자행한 독일 나치 친위대 중령으로 1960년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에 의해 체포되고 61년에 재판, 그리고 62년도에 사형을 당한다. 또한 2015년에도 94세의 전 나치 친위대에 징역 4년을 선고하기도 하지만 우리의 상황은 안타까운 현실
- 독일뿐만 아니라 프랑스에서도 1990년대 까지 이어진 나치 부역자 전범 처벌, <박태균 교수의 분석>은 처리되어야 할 문제가 제 때에 처리되지 않으니 계속 논란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고 한편에서는 또 그 문제냐? 할 수도 있지만 시기를 놓쳐 처리하지 못한 친일파 청산 문제는 이를 해결하지 못하면 논란은 계속 이어질 수밖에 없을 것
○ 국민들의 염원이 담긴 반민특위
- 반민특위의 역할은?
1948.7.17. 제헌헌법 제101조에 의거 반민족 행위 처벌법 제정 “단기 4278년(1945) 8.15 이전의 악질적인 반민족행위자를 처벌하는 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다.” 그리고 1948.9.7. 반민족행위 처벌법이 통과되고 9.22. 공포되며 10.12. 반민특위가 출범하는데 새로운 나라의 출범과 함께 정식으로 국가기관에서 친일파를 청산하겠다고 선언을 한 것
- 이 법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전의 죄를 처벌하기 위해 만든 예외적이고 상징적인 법, 그래서 친일파 검거를 좀 더 집중하기 위해서 특별재판부 ‧ 특별검찰부 ‧ 특별경찰대를 별도로 조직하면서 강력한 권력을 가진 반민특위
- 반민족 행위자 색출방법은?
조직은 중앙조직과 지방조직으로 나눠져 전국적으로 알려진 친일파는 중앙사무국에서 각 지역의 친일파는 9개 도 조사부에서 처리하도록 되어있는데 반민특위 출범 전부터 존재한 악질 친일파 명단 <친일파 군상, 1948>은 전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 김승학에 의해 만들어진 친일파 인사 263명에 대한 명단으로 반민특위가 출범하면서 이들이 우선 검거 대상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좀 더 눈에 띄는 것은 전국 단위로 친일파 고발함을 이용하여 명단을 접수한 것
- 35년간 쌓인 국민들의 한, 나라가 독립이 됐는데도 청산하지 못한 친일파, 더욱이 그런 자들이 계속 같은 자리를 유지하다보니 국민들의 공분이 더욱 컸을 것
- 검거된 친일파 중 유명 인사는?
국민들에게 큰 지지를 받은 반민특위의 강력한 행보로 검거 1호는 박흥식, 조선 제1의 실업가로 박흥식이 운영한 기업은 종로 2가에 위치한 화신백화점(1931년 설립)으로 유통업과 무역업을 하면서 전국의 유통망을 장악하고 있었던 것, 당시 조선인이 경영한 유일한 백화점이고 일본인이 주로 이용하는 미쓰코시 백화점이 지금의 종로 타워에 위치하고 있었다.
- 전형적인 식민지 기업가 박흥식은 부와 권력을 위해 조선총독부와 결탁하면서 일제에 전쟁 물자를 기부하는 등 전형적인 반민족행위자로 1937년 중일전쟁 당시 국방헌금을 납부하는 등 일본제국주의의 돈 줄인 셈, 1941년에는 동양척식회사 감사역임으로 이 회사는 일제가 대한제국의 토지와 자원을 수탈할 목적으로 설치한 식민지 착취기관으로 한일강제병합 이전인 1908년에 설립한 회사, 1944년에는 조선비행기 공업(주) 사장 역임
- 박흥식도 작위가 있었나?
작위는 분야별로 다른데 정치나 사회분야는 작위로 기업을 하는 사람들은 사업 확장을 노리는데 만주 진출을 목표로 일제와 유착관계를 맺은 반민족 기업가들
- 반민특위에 검거된 또 다른 인물은?
친일경찰 노덕술, 한국의 아이히만 같은 인물로 그의 친일 행적을 보면 ① 1928.10 신간회 간부 박일형 체포 및 고문 ② 1928.8 반일 강연을 한 일본 유학생 체포 및 심문 & 1928.12 보통학교 교원 체포 및 심문 ③ 1934~1938 조선인 전쟁 협력 독려위한 전시 업무 수행 ④ 1941.3 훈등 서보정 받음 ⑤ 1944.6 화물자동차 징발 군수품 수송에 제공 & 1944.12 사단법인 조선흥행 협회 이사 역임 <출처 : 친일인명사전>
- 노덕술은 1920년 6월 22세에 경상남도 순사로 활동 시작 충성스럽게 업무를 수행하여 승승장구하면서 1943.9 평안남도 경찰부 보안과장, 1944년 수송보안과장을 역임하는데 그가 순사를 시작한 1920년이면 3.1운동 직후로 독립의 열망이 뜨겁던 시기에 일본 경찰을 시작한 노덕술
○ 최고 지성인들의 반민족행위
- 당시 가장 대중적 영향력이 컸던 문인들, 대표적 인물로 이광수 ‧ 최남선 등, 이들은 영향력이 큰 엘리트 중 엘리트로 이들이 한 일은 “성전(聖戰)의 용사로 부름 받은 그대 조선의 학도여 지원하였는가? .....무엇으로 주저하는가? 부모 때문인가? 충 없는 효가 어디 있으리” <조선의 학도여 매일신보(1943) 이광수> 조선의 청년들을 전쟁터로 보내기 위해 문학적 재능을 악용
- 노덕술이 한국의 아이히만이면 이광수‧최남선은 한국의 괴벨스(나치의 선전장관), 이광수는 3.1운동의 기폭제 역할을 한 2.8독립선언서를 작성한 인물이고 최남선은 3.1 독립선언문의 초안을 작성한 인물로 이들이 선동을 했다면 충격적이었을 것으로 악질 경찰보다 대중에게 더 큰 영향을 미친 문인들의 반민족행위
- 친일 청산에 강력한 의지를 발휘한 시기에 강력한 추진력으로 반민특위가 출범을 하는데 여전히 청산되지 않은 친일파, 청산되지 못한 이유는?
○ 반민특위를 둘러싼 음모
- 출발부터 엄청난 반대세력과 맞서 싸운 반민특위, 그 가시밭길의 역사를 돌아보면 1948.8.23. 국회의원 숙소 와 서울 시내 곳곳에 살포된 전단 “대통령은 민족의 신성이다. 절대로 순응하라 민족을 분열하는 반민법을 철회하라! 민족 처단을 주장하는 놈은 공산당의 주구이다.”
- 친일파 청산이 왠 공산주의?
반민특위 출범 20여일 전인 1948.9.23. 서울 운동장에서 열린 대규모 집회, 내무부 장관이 허가하고 국무총리와 대통령이 축사에 나선 이 집회의 이름은 <반공구국 총궐기 정권이양 대 축하 국민대회>로 시위대가 주장한 내용은 일전의 전단지와 같은 “친일파 척결은 공산주의자의 주장!”이라는 것
- 1949.1.25. 반민특위요인의 암살 모의 발각 사건, 백민태라는 테러리스트가 자수를 하는데 집행자금은 박흥식이 제공했고 노덕술을 포함한 수도경찰청 간부들에게 지시를 받았다는 것으로 반민특위 간부 15명을 3.8선까지 유인해 살해하라는 <반민특위요인암살공모>는 반민특위 간부들이 월북을 시도해 사살했다고 위장하려는 음모
- 점점 더 심각해지는 음모는 1949.6.3. 파고다 공원에서 열린 반공시위, 이들은 반민족행위자 석방을 요구하는데 반공시위의 주동자는 수도경찰청 사찰과장 최운하로 구속이 되자 사찰과 간부급 경찰 440여 명이 집단사표를 제출하고 반민특위와 일전불사(一戰不辭)를 선언한 친일 경찰들, 곧이어 발생하는 결정적 사건
○ 반민특위를 습격한 친일 경찰
1949.6.6. 새벽 거리에 나타난 수십 명의 무장경찰, 반민특위 본부를 습격하고 반민족행위자 조사 서류가 압수되면서 요원 35명이 잡혀간 사건이 발생하는데 소위 <6.6사건>으로 불리는 반민특위 습격사건
- 반민특위 습격사건의 주동자는 서울 중부경찰서장 윤기범과 종로경찰서장 윤명운으로 검거된 반민족행위자688명 중 1/3이상이 경찰로 척결대상이 제일 큰 무력을 갖고 있다는 것 자체가 큰 비극인데 자신의 죄를 덮기 위해 무력을 행사한 친일 경찰들
- 날짜는 그리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경찰이 습격했다는 것 자체가 매우 충격적인 사건으로 반민특위가 와해되기 시작한 사건으로 서울뿐만 아니라 전국에서 벌어진 반민특위 습격사건, 특히 지방 반민특위에서는 전화선 절단 ‧ 사무실 봉쇄 등 반민특위 와해를 위한 본격적인 방해의 움직임이 공개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다.
- 반민특위 습격사건 전부터 혼란에 빠져있던 국회, 지금까지도 미스터리로 남아있는 1949. 5월의 <국회 프락치 사건> 어느 날 갑자기 10여 명의 국회의원이 국가보안법으로 체포되는데 이유는 UN한국위원단에 외국군 철퇴와 군사고문단 설치 반대 진언서를 제출했는데 이것이 남조선 남로당 지시로 제출됐다는 혐의, 즉 국회의원들이 남로당 프락치라는 주장으로 국회의원이 국가보안법에 의해 검거된 최초의 사례, 그런데 이들이 수감된 장소는 경찰서가 아닌 헌병사령부에 수감되고 변호인 접견이 금지되면서 가혹한 고문과 취조를 받게 되고 재판부는 검증되지 않은 암호 문건을 증거로 채택하는데 가장 미심쩍은 점은 검거된 국회의원 모두 반민특위를 적극 지지한 소장파 세력이라는 점으로 결국 국회프락치 사건 이후 힘을 잃게 되는 반민특위
○ 반민특위 방해공작, 배후는 누구?
- 전단 ‧ 관제시위 ‧ 암살모의 ‧ 납치 ‧ 국회프락치 사건 등 방해공작 종합세트로 불법을 자행하며 죄를 덮으려는 반민족행위자, 반민특위 방해공작의 배후에는 이승만이 있었던 것, 이승만 대통령이 고백한 반민특위 방해공작, 1949.6.8.(경향신문) “내가 특별경찰대를 해산시키라고 경찰에 명령한 것이다. 헌법은 다만 행정부만이 경찰권을 가지는 것을 허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민특위가 삼권분립에 어긋난다고 주장한 이승만, 헌법과 법률이 부여한 반민특위 권한을 전면 부인하는 것
- 반민특위 와해를 위해 자행한 사건들, 반민특위 습격 직전의 사건으로 이승만은 반민특위 위원장 김상덕을 찾아가 노덕술을 포함한 반민특위의 조사 중단을 지시한다. “이박사가 아버님한테 반민특위 위원장 대신 다른 자리를 제안하면서 이와 관련한 협상이 오갔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김상덕의 아들 김정육 씨의 증언 1998.5.4.>
- 이승만이 친일경찰 노덕술을 비호한 이유는?
당시 경찰은 가장 큰 무력 집단, 그리고 왜 노덕술을 선택했느냐? 는 해석적 사실밖에 알 수가 없는데 아마도 노덕술은 친일경찰대에서 조선인이 올라갈 수 있는 최고의 자리에 오른 인물로 해방 이후 노덕술이 경찰 전체에서 가장 큰 헤게모니를 갖고 있지 않았을까? 그리고 이승만이 봤을 때 경찰을 장악하는 데 가장 큰 힘이 되지 않을까? 로 추정할 수 있는 것
- 역사 속에는 긍정 평가를 하기 어려운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 주위에 사람이 많이 모이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노덕술이 경찰 조직 내에서 가장 강력한 리더십을 가진 인물이었기 때문에 이승만의 비호를 받았을 것이라는 <박태균 교수>의 분석
- 이승만 대통령의 노덕술에 대한 공식적인 평가는?
“대통령 각하는 불법조사관 2명과 그 지휘자는 체포하여 의법처리 하여 계속 감시하라고 지령하시다.” <1949.2.12. 국무회의> 라는 기록이 있고 노덕술이 체포되자 “이승만 대통령이 노덕술 등이 공산당을 잡는 기술자이며 그들을 처단하는 것은 공산당의 짓입니다.” 언급하시며 석방을 요구하셨다. <당시 법무부 검찰과장 선우종원의 회고>
○ 친일파 청산보다 중요한 반공(反共)
- 당시의 결정적인 한 방 반공(反共), 이승만의 반민특위에 대한 공식 입장은?
이승만은 반공을 위해서는 친일을 문제시 할 수 없다는 자세를 시종일관 유지하는데 친일파 청산보다 반공이 더 중요했던 이승만은 반민법 제정 시부터 반대를 했었고 <이승만 대통령 반민특위 관련 담화> ① 1948.9.24. 반민자 처단은 민의, 법 운영은 보복보다 개과천선토록 하라. ② 1949.2.4. 사무분담을 명백히 하라.(반민법 실시에 대하여) ③ 1949.2.16 특경대는 폐지하라. ④ 특위 체포 못한다. ⑤ 1949.2.22 정당한 공론이 필요. ⑥ 1949. 4.16 반민특경대 해산. 등등으로 친일파 척결의 장벽은 당시 대한민국의 대통령
- 이승만이 반민특위 와해로 얻을 수 있는 것은?
기본적으로는 정권안보로 1948.10 여순사건 발발, 정권 수립한지도 얼마 되지 않았는데 이승만 정권의 권력적 기반인 경찰이 흔들리고 있고 때마침 1949.6 주한미군까지 철수하자 이승만 정권의 위기 ① 여순사건으로 흔들리는 군대 ② 주한미군 철수 ③ 친일경찰 검거
- 1948.7.20. 간접선거로 실시된 제1대 대통령 선거 결과 이승만 180표, 그리고 참석하지도 않은 김구가 13표를 얻는다. 당시 반민특위를 지지하는 소장파 국회의원들은 남북협상에 찬성하고 김구를 지지하자 평생의 정적(政敵) 김구의 세력을 제거함과 동시에 친일세력을 공고히 하려 한 것
- 김구는 사실 1948년 남북협상 이후 적극적인 정치활동을 하지 않고 지내다가 1949년 김구가 정치조직을 만든다는 소문이 돌자 불안한 이승만 정권에서 김구는 큰 위협으로 <1949.2.18. 김구의 기자회견> “친일 반역 분자들에게 악행을 당하고 생명까지 빼앗긴 수많은 선열들의 영령과 아직도 고통스럽게 살아있는 독립운동자들은 반민자들을 단호히 처단하려는 특위의 활동을 지지할 것이며 인민들도 이것을 찬양할 것이니 무릇 일은 방해하려는 행위를 청산하여야 할 것이다.”
- 이 시기는 이승만 전 대통령의 반민특위 무력화가 이뤄지던 시기로 김구의 반민특위 지지 발언과 함께 더욱 첨예해진 대립구도, 국회프락치 사건이 5월부터 진행 중이었고 반민특위 습격사건이 6월, 그래서 이승만 정권의 6월 총공세라고 부르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총공세의 마침표가 찍히게 되는 사건은 1949년 6월 26일 김구의 암살
- 우리의 현대사를 흔드는 사건이 연이어 발생한 1949년 6월, 현대사 연구가들은 이 시기를 중요한 전환점으로 해석하고 있는데 그 전인 1949년 3월 김일성이 모스크바를 방문하고 스탈린에게 남한과 전쟁을 하겠다고 제언한 시기로 이 사실을 대한민국 정부에서 알고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김일성이 모스크바를 방문했다는 자체만으로도 위기로 느낄 수 있는 사건
○ 골든타임을 놓친 친일파 청산
- 영화 <암살> “피고 염석진(이정재 역)에 대한 공소는 증거 불충분으로 취하한다.” 그리고 이정재는 경찰의 호위를 사양하고 걸어서 옛 아지트를 찾는다. 안옥윤(전지현 역)이 총을 겨누며 묻는다. “왜 동지를 팔았느냐?” 고 묻자 이정재는 “몰랐으니까 해방될 줄을 몰랐으니까” 라고 대답하자 전지현은 “16년 전 임무 염석진이 밀정이면 죽여라! 지금 수행합니다.” 세 발의 총성과 함께 이정재가 죽게 되는 개인의 복수로 끝난 영화 <암살> 왠지 찝찝하고 통쾌하지 못한 결말이다.
- 영화 속의 염석진은 아직도 사회 곳곳에 남아있지만 친일파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역사, 그리고 미군정 시기에 이미 세력을 구축한 반민족행위자들, 그 3년이 친일파들에게는 골든타임이었던 셈
- 문학계의 거성 이광수의 친일의 변 “우리 모두가 친일파” 라는 것으로 자전적 성격이 드러난 글 <나의 고백> “40년 일정 밑에서 일본에 협력한 자, 아니한 자를 가리고 협력한 자 중에서도 참으로 협력한 자, 할 수 없어서 한 자를 가린다고 하면 그 결과가 어찌 될 것인가? 더 엄격하게 말하면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것도 협력이다.” <나의 고백 중 친일파의 변> 죽지 않았으면 모두 친일(?)이라는 변명
- 또 다른 장면이 있는데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끌려가 정조를 잃고 살다가 귀국한 여인들이 홍제원에서 마련된 목욕장에서 몸을 씻으면 정조의 유무를 묻지 않았다.” 그야말로 인간이 해서는 안 될 말로 가해자가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는 격
- 당시의 <친일공범론>은 모두가 친일을 했기에 누가 누구를 단죄할 수 없다는 주장으로 친일파들이 입에 달고 다니던 논리, 이를 이광수가 대중적으로 확산시키는 역할을 한 인물
- 이들의 논리 중 또 다른 하나는 “친일 관리가 일반 조선인보다 더 설움을 당했다.” 괴변 같은 주장을 하면서 <인재중용론>을 주장하는데 친일파의 국정운영경험을 활용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새로운 대한민국에서도 한자리를 해보고 싶다는 꼼수가 아니고 뭐란 말인가?
- 1948년 해방 이후 발표된 이광수의 시 “쇼와와 절(絶)한 더러운 몸이 언마는 (중략) 조국은 나를 용납하여 불렀다.” <출처 : 나는 독립국 자유민이다> 그의 조국은 어디이고 누가 누구를 불렀다는 말인가?
○ 친일파 청산의 실패
- 반민족행위자, 이광수의 결말은?
체포된 지 20여일만인 1949.3 출소하고 1949.8 불기소 처분이 되는데 반민특위 와해로 모두 풀려난 반민족행위자들, 결국 이렇게 돼버리자 친일파 청산의 힘을 잃은 반민특위, 물리적으로는 반민특위가 습격을 당하고 이 사건을 대통령이 내가 지시했다고 하고 영화 <암살>에서처럼 경찰들은 반민특위 행동을 계속 방해를 하고 재판은 진행이 되지 않는 등 반민특위를 방해하는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작동하는 상황이 된다.
- 이렇게 되자 1949.7 반민족행위처벌법이 개정이 되는데 1950.6 →1949.8까지 공소시효를 10개월 정도 단축하자 이에 반발하여 1949.7.7. 반민특위 요원 전원이 사의서를 제출한다. 그리고 1949.9 한 번 더 개정이 되는 반민족행위처벌법, 이제는 반민특위 ‧ 특별검찰부 ‧ 특별재판부가 해체가 되면서 반민특위 활동이 종료가 된다, 그리고 1951년 한국 전쟁 중 반민족행위처벌법이 폐지되면서 친일파 처벌의 법적 근거는 소멸하고 친일이라는 말을 입 밖에 꺼내기가 어려운 사회 분위기가 된 것
- <친일문학론>은 1966년 문학평론가 이종국이 친일문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한 최초의 저작으로 그 이전(以前)까지는 금기가 된 “친일” 다시 권력을 잡은 친일파들로 그들의 죄를 언급할 수 없는 사회적 분위기가 된 것
- 친일파 하면 척결 ‧ 숙청의 단어들이 자연스러웠는데 점점 시간이 흐를수록 처벌 ‧ 청산 ‧ 규명 등의 식으로 약해지는데 우리의 후손들은 친일파라는 단어 자체도 쓰지 않을 것 같은 조바심, 또한 청산되지 못한 악행이 또 다시 반복될 것에 대한 우려가 되는 것, 그래서 친일파 문제에 대하여는 감정을 배제하고 이성적으로 바라 봐야 할 문제, 그야말로 상식적으로 판단했을 때, 반인륜적 범죄에 해당하는 반민족행위란 ① 매국 ② 사람들을 괴롭힌 행위 ③ 전쟁에 협력하는 일
- 우리도 반민족 행위나 친일파의 척결 문제는 인류 보편적인 문제로 접근해야 할 것으로 과연 우리 역사에서 전범(戰犯)을 제대로 처리한 적이 있는가? 우리의 젊은이들을 전쟁에 내몰고 국방비를 헌납한 사람들은 전쟁에 협조한 사람이지만 이들을 전범으로 처리하지 못한 과거
- 단지 친일 이상(以上)으로 인류 보편적 범죄를 저지른 반민족행위자에 대한 처벌을 단행하여 앞으로는 우리 사회에서 다시는 그런 정도의 범죄에 대하여는 절대 용납하지 않는다. 라는 것을 각인시켜줘야 할 부분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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