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his(한국사)

피의 일주일, 4.19부터 5.16하야 까지

mkpark2022 2020. 7. 13. 17:41

 

 

개요

- 1960. 4. 19. 이승만 독재 정권에 저항하며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부정선거 다시 하라!” “이승만 대통령 하야 하라!”를 외치는 사람들을 향해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했고 경찰의 무차별 발포가 이뤄졌다. 186명이 사망하고 무려 6천여 명이 다치는데... 무자비한 진압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의 항거는 들불처럼 번진다.

- 1960. 4. 11. 마산 앞바다에 떠오른 한 소년의 주검, 시신은 발견되자마자 병원으로 옮겨지고 그의 시신을 보기 위해 구름처럼 몰려온 마산 시민들, 저지하는 경찰들을 제치고 시신을 보러 나온 사람들은 차마 발길을 돌리지 못하는데 얼굴에 체루탄이 박힌 참혹한 모습, 그는 마산상고 입학을 앞둔 예비 신입생 17세 김주열이었다.

 

17세 김주열의 사망 미스터리

- 주검에는 얼굴에 체루탄이 박혀 있는데 이 체루탄은 일반 경찰들이 사용하는 체루탄이 아니고 군대용 전투 체루탄으로 프로펠러가 달려있어 벽을 뚫을 수 있는 위력의 체루탄으로 시위를 진압했던 것 김 군의 눈에 포탄이 박혀 있던 이유가 해명되지 않아 수사의 초점이 여기에 집중될 것이다. 부검한 의사들도 발사에 의해 박힌 것인지 인위적으로 사람이 박은 것인지 아는 바가 없다.” -동아일보 1960.4.16.-

- 전투용 체루탄 투하로 무차별 공격하여 시위를 진압하는데 3.15 마산 시위로 8명이 사망하고 시위 현장 수습 중 발견한 김주열의 시신, 사체가 너무 험악하자 6개의 돌을 매달아 바다에 수장하여 은폐하려 했던 것

- 김주열이 사망한 이유?

1960. 3. 15. 4대 대통령 및 제5대 부통령 선거에서 부정선거가 치러졌고 이에 항의한 마산 시미들, 여기에 김주열도 같이 동조하여 시위현장에 나온 것, 그런데 김주열은 마산 시민이 아니라 전북 남원 출신의 학생으로 마산상고 진학을 위해 외가가 있는 마산으로 왔었고 합격자 발표는 3.16.로 하루를 앞두고 시위에 참여한 것

- 3.15. 실종하여 4.11. 발견까지 27, 실종이 되자 어머니가 마산으로 내려와서 애타게 아들을 찾아 헤매는데 시신을 연못에 버렸다는 소문에 마산 시민들은 연못의 물도 퍼가며 아들을 찾았고 영안실까지 뒤지며 찾았지만 지쳐 포기하고 4.11. 오전 남원으로 어머니가 돌아간 후 세 시간이 지나 마산 앞바다에 아들의 시신이 떠오른 것

- 역사에서 보면 우연과 필연이 만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김주열이 왜 그 밤에 체루탄의 희생자가 되었을까? 우연적인 점이 있는데 김주열이 시위에 나가려는 것을 외할머니가 저지를 하자 외할머니를 속이고 몰래 나가기 위해 교복을 벗고 흰옷 차림으로 나가는데 어둡다 보니 흰색이 눈에 띄어 경찰의 표적이 됐을 가능성이 있고 시신이 떠오른 시점도 우연이라고 할 수 있지만 밑바탕에는 독재와 폭력 진압에 대한 저항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요소가 있었던 것

- 신문의 보도도 부산일보 마산 주재 고() 허종 기자의 특종으로 시민의 우연한 제보를 받고 경찰보다 한 발 앞서 현장에 도착했기 때문에 사진을 찍을 수 있었던 것

 

그 날의 비화, 1960. 3. 15 부정선거

- 민주당의 조병옥 후보가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대통령은 자유당 이승만 후보가 단독 후보로 부통령은 자유당의 이기붕과 민주당의 장면이 경합을 하면서 단군 이래 최대의 부정선거가 있었던 1960315

- 왜 부정선거라 일컫는지?

<4할 사전투표>가 이뤄진 것, 동네에 살지 않거나 이사 간 사람 그리고 이미 죽은 사람 등의 허위인물들을 모두 기재해서 그들 명의로 사전에 투표를 하여 넣은 것, 여기에다 <3.5.9인조 공개투표>로 그룹끼리 투표하고 서로 투표용지를 보여주고 확인하며 심지어 선거 참관인까지 확인하고 정치깡패를 동원하여 유권자를 회유협박하고 표를 안 찍으면 큰일 난다고 협박하는 등 정부와 여당인사가 투표소를 장악, 공개적으로 부정선거를 자행한 것

- 이승만 정권 하에서는 투개표 부정이 여러 선거에서 반복적으로 이뤄졌는데 개표 부정의 Top 3 개표 도중 손가락에 인주를 묻힌 뒤 문질러 무효표 만들기(피아노 표) 반대표에 기표를 하나 더해 무효표 만들기(쌍가락지 표) 야당 표 뭉치 위아래에 여당 표를 한 장씩 끼워 모두 여당 표 만들기(샌드위치 표)

 

3.15 부정선거의 노림수

- 3.15 부정선거의 결과는?

중앙 선거관리위원회의 공식 발표는 대통령 이승만 86%, 부통령 이기붕 74% 당선으로 발표하는데 개표를 하다 보니 이승만이기붕 표가 너무 많이 나오고 심지어 어느 지역에서는 유권자의 수보다 이승만이기붕 표가 더 많이 나오자 부랴부랴 결과를 조작해서 발표한 것이 86%74%.

- 4.19 이후 부정선거 관련자 처벌 공판 현장

이강학 치안국장(경찰총장)의 진술 표를 늘이라는 말은 들어봤지만 줄이라는 이야기는 처음이다.”면서 자신이 그 지시를 따랐다고 진술하는데 자기들도 부끄럽다고 생각했다는 것

- 선거 한 달 전 민주당 조병옥 후보가 급사, 당시의 선거법에는 대통령 또는 부통령 후보자가 1인인 경우 득표율이 총선거인의 1/3이상이 달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사실상 누워서 떡먹기인 셈

- 이런 선거에서 굳이 부정선거를 자행한 이유는?

당시 이승만의 나이는 86, 그 당시(1960년대) 한국 남성 평균 수명은 51(출처 : 통계청)인 점을 감안하면 86세의 대통령은 임기 중 언제든지 사망가능성이 있는 상태, 당시 헌법에는 대통령이 궐위된 때에는 부통령이 잔여기간을 재임하도록 되어 있어 자유당에 부통령직을 빼앗기면 대통령 궐위 시 정권을 빼앗기게 되는 것, 결국 부통령 선거에 사활을 건 3.15부정선거인 셈

- 이승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이렇게 부정선거가 이뤄졌던 것, 이기붕은 인기도 없고 건강악화로 선거운동도 쉽지 않았던 상황, 그런 악조건에서 결과를 뒤집으려 하다 보니 상상을 초월한 부정선거를 저지르게 된 것

- 그럼 왜 이기붕이었을까?

이승만은 2인자를 키우지 않는다. 천성천하 유아독존으로 자기를 넘보는 것을 용납 치 않았는데 그런 점에서 이기붕과 끝까지 같이 간 것은 이기붕이 야심이 없고 온순했던 탓

 

학생들이 4.19혁명에 앞장 선 이유?

- 당시 고등학생은 요즘의 위상과는 많이 달랐고 사회적 영향력도 적지 않았으며 스스로 느끼는 자부심이나 책임감도 지금과는 많이 달랐다고 볼 수 있다. 고등학교 다니다가 결혼을 한 사람도 많이 있었다고 한다.

- 고등학생이 정치에 참여한 이유?

정치 동원이 일상이었던 당시 고등학생, 학도호국단은 1949년 국가가 학생들을 직접 통제하기 위해서 창설한 조직, 이승만 정권은 학도호국단을 통해 군대식 집단훈련과 반공교육을 주입하는데 학생들은 정치적으로 민감한 성장과정을 거쳤기 때문.

- 역사적으로 보면 소년병들의 충성도가 훨씬 더 높고 어렸을 때부터 키운 병사들이 최상군대가 되는 사례가 많이 있다, 실제로 히틀러 유겐트를 모방한 학도호국단, 결국은 정부를 위해서 동원한 시스템에 그 정부가 역으로 당한 것

 

학생을 정치 도구로 이용하지 말라

- 투표권 없는 학생들이 나선 이유?

학생시위의 출발은 2.28 대구 학생 시위로 3.15대선을 앞두고 이승만 정권의 독재에 항거하면서 이미 부정선거의 기미를 보이자 당시가 일요일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등교를 명하자 분노를 하며 벌어진 사건으로 당일은 야당(민주당) 후보 장면의 대구 선거유세가 있던 날, 이 유세장에 학생들이 가는 것을 막으려 했던 것

- 선거는 기본적으로 유세대결, 얼마나 많은 청중이 유세장에 모이느냐가 관건, 그런데 자유당에서는 야당 유세장 참여를 막기 위해 일요일 등교조치를 한 것, 더욱 분노하는 것은 그 전 날은 자유당 유세였는데 단축 수업 후 유세에 동원됐던 것, 뛰쳐나온 학생들의 구호 학생을 정치도구로 이용하지 말라!” “학원의 자유를 달라!” “민주주의를 비키자!”

 

민주주의 교육과 독재의 모순

- 당시의 학생들은 학도호국단과 같은 조직을 통해 훈련도 받지만 일상적인 학교수업에서도 민주주의 교육의 1세대, 당시는 6.25전쟁 직후로 북과의 관계가 대한민국의 정부로서는 매우 중요했고 민주주의의 우월성을 강조하며 교육했던 것, 그런데 3.15 부정선거의 전형적인 수법이 공개투표로 학생들이 분노할 수밖에 없었을 것

- 교과서에서 배운 민주주의와 독재의 괴리감

이승만 대통령의 탄신일에는 시가행진 의장대 경축 편대비행 학생동원 매스게임 경축 마라톤 경축 무술대회 글짓기 대회 합창대회 임시 공휴일 지정 등 이러한 실정이다 보니 사회 각계각층에서는 아부가 넘쳐나는데 이승만의 호가 우남으로 우남공원 우남회관 우남로, 백미는 서울시가 우남시가 될 뻔한 사건

- 1955.3.26. 이승만 대통령의 80회 탄신일, 이승만 우상화가 활발히 벌어지고 있는 사이 파고다 공원과 남산에 초대형 동상이 설치되고 우남회관을 광화문에 짓게 되는데 4.19 이후에 완공되면서 시민회관으로 바뀌고 오늘 날의 세종문화회관이 된 것

- 압권은 서울시를 우남시로 바꾸자는 여론이 여기저기에서 나오고 <수도명칭변경 여론조사>에서 우남시가 1위로 뽑힌다, 명분은 워싱턴 대통령의 이름을 딴 미국의 수도 워싱턴, 하지만 바꾸지 않은 이유는 야당의원의 주장, 지방 사람들이 서울 놈! 이라고 부르는데 우남시로 바뀌면 우남 놈! 들이 되어 오히려 대통령에게 해가 된다고 반대하는 여론도 있었다는 것, 흔히들 쌍 팔 년도라고 하는데 이는 단기 4288년도(1955)로 비이성적이고 불합리한 세대를 대유 하는 말

- 미국에서 민주주의를 접한 이승만,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체득한 유교적 마인드, 특히 본인은 양녕대군의 후손이라는 자부심으로 해외에서 자신을 소개할 때에도 조선의 왕자처럼 소개를 하기도 한다. 이러한 이승만의 퍼스넬리티가 이런 상황에서 작동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는 <오제연 교수>

- 4.19혁명의 도화선이 된 김주열의 시신, 3.15부정선거에 대한 분노가 어느 정도 사그라지려던 차에 다시 분노가 폭발하는 계기가 된다. 그러면서 서울에서 시위가 폭발하는데 시작점이 된 4.18고대생 시위

 

4.18 고대생과 정치깡패

- 고대생들은 4.18 형사들이 깔려 있어 이를 피하기 위해 신입생 환영회로 위장하여 모였다가 뛰쳐나가 국회의사당으로 향하는데 현재의 서울시 의회에 거의 전교생인 1천여 명이 집결하여 부정선거 다시 하라!” “김주열 죽인 책임자를 처벌하라!” 구호를 외치고 문제는 해산할 때 벌어진 사건

- 을지로를 따라서 해산을 하다가 일부 학생들이 종로로 향하면서 천일백화점 앞에 이르러 정치깡패의 습격을 받고 무차별 폭력으로 고대생 200여 명이 부상을 당하게 되는데 이승만 정권에서 정치깡패는 경찰의 보조경찰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경찰이 할 수 없는 행동들을 정치깡패를 이용한다.

- 이때 깡패들은 <대한반공청년단>이라고 3.15부정선거를 위해 조직한 선거 전위대, 당시 동아일보에 실린 특보 고대생 1명 피살???” 팩트 체크가 안 된 상태여서 이런 보도를 했는지? 나중에 확인 결과 피살자는 없었고 깡패들에게 습격당하는 사진이 신문에 실린다.

- 이를 본 전 국민이 분노를 하게 되고 여러 대학의 학생들을 결집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된다. 대광고등학교 학생들이 제일 먼저 시위를 시작했고 서울대학교 앞을 지나면서 서울대학교 학생들과 합류를 하자 서울 곳곳의 대학에서 거리로 쏟아져 나온 학생들

 

4.19 피의 화요일

- 오전 10시 국회의사당 앞에 시위대가 집결하여 12:10 경무대 앞으로 진격한다. 오후 140분 경찰의 최초 발포가 시작됐고 정치깡패들이 항상 내세우는 구호는 반공”, 그래서 지금의 KT사옥인 반공회관(정치깡패의 온상)으로 들어가 불을 지른다. 정부는 더 이상 경찰력으로는 시위를 막을 수 없자 오후 3:00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을 개입시킨다.

- 경찰 발포에 의한 사망자 수는?

통계마다 다르긴 하지만 확실한 건 120여 명은 넘는다는 것, 그래서 4.19를 피의 화요일이라고 하고 잠시 소강상태로 지내다 4.25 일어난 사건, 교수들이 거리로 나선 것인데 <4.25교수단 시위>는 대학 교수 257명이 이승만 하야를 요구하며 가두시위에 나선 것

- 계엄령 선포 이후 시위는 일단 소강상태를 보인다. 하지만 계엄령의 와중에 시위를 감행한 교수들, 당시의 교수들은 한국 사회의 지도층, 이에 군대도 교수들의 시위를 막을 수 없었다. 교수단 행렬을 뒤따른 만여 명의 시민들, 다음 날은 10만여 명이 동참한다. 중요한 것은 그간의 시위대 구호는 부정선거 다시 하라!” “폭력진압의 책임자를 처벌하라!” 였지만 4.25 교수단 시위 이후로 바뀐 구호는 이승만 하야!”를 중요한 목표로 제시한다.

- 계엄군 탱크를 점령한 시민들, 하지만 시민에게 총을 쏘지 않은 계엄군, 군과 시민이 함께한 사건으로 이때는 이미 군이 부위기를 감지하고 시민들에게 위협을 하지 않은 것, 사실상 시위대를 방조한 군대, 이승만 정부를 적극적으로 지킬 의지가 없다는 것이 분명해 보이는데 문제는 누구의 의지로 이러한 선택이 이뤄졌는가?

한쪽에서는 군의 판단은 정치적 중립을 지킨다든지 변화된 시민들의 요구를 감지하면서 행동을 자제했다는 주장을 하는 반면, 당시 군은 미국의 작전 통제 하에 있었기 때문에 미국이 이 상황을 더 이상 악화시키지 않고 사실상 이승만 정부 지지를 철회하는 과정으로 군을 동원하고도 막지 않았다는 주장도 있다.

- 시위에는 수송초등학교 학생들도 참여를 하는데 당시 초등학생이 쓴 시, <잊을 수 없는 4.19> “학교에서 파하는 길에 총탄은 날아오고 피는 길을 덮는데 외로이 남은 책가방 무겁기도 하더군요. 나는 알아요. 우리는 알아요. 엄마아빠가 아무 말 안 해도 오빠와 언니들이 왜 피를 흘렸는지...” 자연을 노래해야 하는 어린아이가 피와 살육에 대하여 시를 쓴다는 것 자체가 당시의 상황이 얼마나 처참했는가를 말해 주는 것, 당시 13세로 총에 맞아 사망한 고 전한승 어린이는 4.19혁명의 최연소 희생자로 기록하는데 당시 어린이들의 주장 내 친구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아라!”

 

이승만 하야를 권고한 시민 대표를 만나다.

- 이승만 하야를 이끈 주인공은 역사 강사 설민석의 부친 설송웅 씨, 4.19 혁명 시민대표로 당시 중동고등학교 학생회장

- 이승만 대통령을 만난 이유?

역사를 바꾼 한사람, 당시 계엄사령관 송요찬 장군은 시민대표와 대통령을 직접 만나게 해주자고 결론을 내린 듯 하고 5명의 시민대표가 대통령을 면담하기 위해 나선다.

- 시민 대표로 선정된 이유?

계엄사에서 결정을 했는데 육군본부 작전참모 이석봉 장군이 직접 거리로 나와 한 사람씩 지명을 한 것, 당시 설 옹은 지명을 당하자 체포를 당하는 줄 알았고 삼청공원의 중앙청으로 끌고 가자 이제 죽었구나!” 생각 했다는 것

- 이승만 대통령과 만나서 한 첫 마디는?

우리를 보지 않고 돌아앉아 북한산만 바라보고 계시다가 비서실장이 학생대표를 데리고 왔다고 하니까 돌아서면서 하는 첫 마디가 정말 국민이 날 하야하기를 원하는가?” 묻기에 물러서길 원합니다!” 했죠. “지금 이 순간에도 총성이 나고 생명이 죽는데 빨리 하야 하십시오!” 한참 생각 후 다시 반문을 하자 그렇다고 했더니 국민이 원한다면 내가 하야 하겠다!” 그래서 하야 성명을 발표하십시오. 그럼 제가 대표로 데모 군중을 막겠습니다.” 그랬더니 하야 하겠다!” 그래서 지프차를 타고 확성기로 대통령께서 하야 하셨다! 민주주의가 되돌아왔으니 전부 귀가하라! 집으로 돌아가라!”

 

12년의 독재정권 막을 내리다.

- 1960.4.26. 시민대표와 면담 후 이승만 대통령 하야 성명 발표 국민이 원하면 대통령직을 사임할 것이며...” 12년 만에 막을 내린 독재정권, 그리고 이승만의 하와이 망명길에 모인 수많은 인파들, 유명한 독립 운동가이자 독재자인 이승만에 대한 애증을 느끼는 순간, 86세에 4번 째 대권에 도전하여 하야 한 이승만.

- 이승만 전 대통령이 생각한 4.19?

4.19 혁명 이후 하와이에 망명하여 196591세의 나이로 사망하는데 그 사이 이승만이 공식적인 기록을 남겼다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겠지만 공식 기록은 전무(全無), 하와이 망명 이후 거의 병상에 있었던 이승만, 건강에 대한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4.19이래 상황파악이 어려웠다는 설도 있고 건강하고 상황파악을 하고 있었다는 설도 있지만 확실한 공식적인 기록은 없다.

- 이승만이 상황파악이 어려웠다는 설로 4.19 시위 부상자 병문안 장소에서 한 말 부정을 보고 일어서지 않는 백성은 죽은 백성이다.” 마치 남 이야기 하듯 하는데 알츠 하이머설 이대통령은 1959.5 하순부터 정무에 관심을 쏟는 능력이 떨어지고 새로운 발상에 대한 가장 기초적인 개념조차 파악할 수 없어 보인다.” <미국 CIA문서, 1959.8.1.>

- 어린 아이부터 사회지도층까지 함께한 4.19 혁명의 결과 민주주의, 이 상황은 대통령이 직접 연루된 상황이었고 공권력의 최고 책임자도 본인이었기 때문에 이 모든 것에 대해 이승만은 책임질 수밖에 없는 것, 결코 그의 건강상태나 공식적인 문제가 면죄부가 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