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요
- 1961.5.16. 박정희 소장을 중심으로 한 젊은 군인들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5월 16일 새벽 탱크와 총을 앞세운 군인들이 서울 도심으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한강 인도교를 건너야 하는데 쿠데타군이 다리를 건너려 할 때는 이미 진압군에 의해 봉쇄된 상태였다.
- 쿠데타를 포기할 것인가 고민에 빠진 박정희 소장, 그 사이 쿠데타군과 진압군 간의 교전이 벌어지는데 박정희 소장이 이끄는 쿠데타군은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했는지 확인해 본다.
- 5.16쿠데타의 그날은 대한민국 현대사의 흐름을 바꾼 날로 박정희 소장과 육사 5기‧8기 젊은 장교들이 제2공화국을 무너뜨리고 정권을 장악한 사건이다.
○ 추적 그날, 5.16쿠데타
- “5.16은 국군의 0.5%가 참여한 쿠데타” 동원된 병력은 3,400~3,600여 명 “5.16은 사전에 누설되었다.” & “5.16쿠데타의 지휘관은 박정희가 아니다.” 의외로 잘 모르고 있는 5.16의 실상이다.
- 그날의 동선 5.15(23:30) 신당동 자택을 나선 박정희 소장 → 5.16(00:15) 6관구 사령부(영등포) → 5.16(02:00) 제1공수단 본부(김포) → 해병 제1여단(김포)
- 5.16쿠데타의 핵심세력은 육사 출신의 장교들, 육군과는 별도로 쿠데타를 모의한 몇몇 해병대 장교들도 있었는데 박정희 소장은 이들까지 포섭하고 5.16(03:20) 한강 인도교를 건너는 공수단 500여 명과 해병대 1,000여 명
- 도심 진입을 위해서는 반드시 건너야 하는 한강 인도교, 그런데 진압군이 한강 인도교를 점령하고 3중 바리케이드로 봉쇄되고 무장한 헌병대와 군용트럭으로 막고 있는데 이는 육군참모총장 장도영 중장의 지시.
- 그리고 교전이 시작되고 진압군과 대치국면에서 고심한 박정희 소장, 드디어 5.16(04:15) 서울 도심 진입에 성공하고 포천에서 출동한 6군단 포병단이 쿠데타군에 가세하며 육군본부를 점령한다.
- 해병은 시청‧치안국‧중앙전신국을 장악했고 공수단은 박정희 소장을 앞세워 04:30 남산의 KBS로 향한다. 그리고 새벽 05:00 혁명 방송을 지시한다. 당시 박종세 KBS아나운서 “친애하는 애국 동포 여러분! 은인자중하던 군부는 드디어 오늘 아침 여명을 기해서 일제히 행동을 개시해 국가의 행정‧입법‧사법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이어 군사혁명위원회를 조직했습니다.” 방송으로 전 국민에게 알린 5.16쿠데타
- 미리 혁명공약을 준비하는데 제1조 반공 태세 재정비, 제2조 자유우방과의 유대, 제6조 정치인에게 정권 이양 등
- 전날 밤 쿠데타 계획을 눈치챈 육군참모총장 장도영 중장, 육군본부 소속 장교 20여 명이 6관구에 모여 있다는 보고를 받은 것이다. “장도영은 육군본부 헌병대에 한강 다리 사수 명령을 내렸다. 중화기 무장에 반대하면서 카빈총만 가지고 가라고 명령했다.” <격동 30년 제1부 쿠데타의 새벽, 이영신>
- 이게 무슨 말인가? 방어를 할 때는 항상 상대방은 최대의 것을 가지고 온다고 생각하고 막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소의 것을 가지고 나갔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막을 의지가 없었다는 것 아닌가? 아니 더 나아가면 쿠데타가 성공하기를 원했을 가능성도 있다는 것 아닌가? 쿠데타를 막지 않으면 육군참모총장의 의무 방기로 막기는 막는데 막는 척만 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한 상황
- 5.16쿠데타 소식을 보도한 신문기사 “오늘 미명 군부에서 반공 혁명, 장도영 중장이 총지휘!” 진압군을 보냈던 육군참모총장이 쿠데타 총지휘(?) 또한 5.16쿠데타 사진 속의 놀라운 비밀로 연설하는 장도영 중장은 없고 박정희 소장만 클로즈업되어 가장 유명한 쿠데타 사진의 주인공은 박정희 소장
○ 5.16쿠데타, 총지휘관은 박정희가 아니다(?)
- 육군참모총장 장도영의 본심은?
쿠데타 당시 총지휘관은 박정희 소장, 그런데 쿠데타 직후 내세운 공식 총지휘관은 육군참모총장 장도영, 정확히는 5.16 오후 4:30 군사혁명위원회 의장 겸 계엄사령관 직을 수락한 상태, 그러니까 정부군의 육군참모총장이 쿠데타군의 군사혁명위원회 의장이 되는 희대의 사건이 되는 상황으로 속칭 양다리를 걸친 것인데 장도영의 속내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
- 박정희 소장이 장도영 중장을 전면에 내세운 이유는 ① 친미파, 미국과의 관계를 푸는데 수월함 ② 반공주의자, 1949년 남로당 전력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던 박정희 소장의 문제를 풀 수 있을 것 ③ 육군 수장이라는 상징성, 일부 소장파 장교 집단의 봉기에 지나지 않았을 것을 전군(全軍)이 지지하는 모양새가 된 것으로 쿠데타 세력에게 장도영은 매우 쓸모있는 카드였을 것
- 쿠데타 발생 일주일 전 장면 총리에게 들어온 보고는 박정희를 중심으로 쿠데타 음모를 하고 있다는 것, 그런데 이는 네 번째 보고로 한 달 전인 4월 21일 “박정희 제2군 부사령관이 한국 정부를 전복하려는 쿠데타 음모를 이끌고 있다.” <1961년 CIA 한국지부의 보고>
- 장면 총리는 이 사건에 대해 육군참모총장 장도영에게 조사를 지시하지만, 장도영은 별 것 아니라는 것으로 보고하고 사건은 마무리되는데 장도영 중장 생전인 1993년 KBS와의 인터뷰 “벌써 그때는요 상황이 얼마나 복잡해졌는지 몰라요. 내통은 아니냐? 혹은 방조한 것은 아니냐?고 하는데 그건 전혀 무관한 사실이 올시다.”
- 쿠데타 소문, 왜 확인하지 않았나?
사실 지금 같으면 있을 수도 없는 일로 쿠데타 소문이 워낙 많았기 때문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을 가능성으로 보여진다는 것
○ 5.16쿠데타, 왜 일어났나?
- 제2공화국 장면 정권은 4.19혁명의 결과물로 역사상 최초로 국민의 손으로 정권 교체가 이뤄졌지만 장면 정권은 필연적으로 맞닥드려야 할 현실적인 문제가 있었는데 혁명 이후 찾아온 사회 혼란, 12년 전 이승만 정권부터 쌓여온 사회모순‧불만의 폭발이 이 시기에 터져 나온 것으로 사회의 모든 혼란을 장면 정권의 무능으로 연결시키고 이것을 바로 잡아야 한다는 것이 바로 쿠데타의 명분이었던 것
- 1960년 3월 <사상계> 콜론보고서 “하층 경제 계급 출신의 유망한 청년 장교가 한국에 다수 생겼고 이들은 특권적 관리나 정치가에게 분노를 품게 된다. 이것이 폭발할 우려도 있다. 하지만 현재 한국에 커다란 정치적 신망이나 조직력을 가진 군인은 없다.”
- 마치 예언서 같은 콜론보고서, 당시 상당한 파장을 일으킨 것은 사실, 5.16주도자들의 증언을 모아보면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는 4.19혁명 이후에는 군인들 둘 셋만 모이면 나라 걱정을 했다고 “장군님! 사상계 보셨습니까?” “시국이 이렇게 어수선한데 가만히 있어도 되겠습니까?” & “구국을 위해 궐기해야 합니다.” 쿠데타를 언급하는데 그다지 이상하지 않은 사회적 분위기였다는 것
- 미국 유학까지 다녀온 육군사관학교 출신의 청년 장교들, 선진 문물을 학습하고 당시 새롭게 등장한 엘리트 계급 군인, 이들이 야망까지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면 되고 5.16쿠데타 주도세력의 평균 연령은 약 35세로 박정희 소장이 44세로 제일 위이고 차지철 대위가 27세로 제일 연소자, 특히 육사 8기를 주목해야 하는데 정규 8기와 특별 8기로 구분되는데 특별 8기의 유명 인사는 김종필로 5.16쿠데타의 실제 설계자이며 당시의 나이는 35세로 사병으로 입대했으나 능력을 인정받아 육사에 입학한 것
- 자신감 넘치는 우수한 청년 장교들이 다수로 이들 눈에 비친 군의 현실, 특히 선배들은 일본군이나 만주군 출신들로 군인들이 정권과 결탁하면서 선거부정‧부정부패에 연루된 군 상층부를 보면서 정군운동이라는 슬로건 아래 드러난 청년 장교들의 야망
※ 정군운동 : 1960년 국군 내 하급장교들이 부정부패 청산을 위해 상급장교들의 퇴진 요구
- 청년 장교들의 대의에 더해진 개인적인 불만은 승진자리, 정군운동으로 군 상부층이 퇴진하며 그 자리를 누가 앉을 것인가? 바로 자신들의 것, 그러니까 육사 8기는 심각한 승진 적체상태에 빠져있었던 것
- 선배 기수들은 한국전쟁 이전(以前) 이미 장군으로 진급하는데 한국전쟁 당시 참모총장급 대부분은 30대, 육군참모총장 장도영 중장과 김종필 중령의 나이 차는 3세이고 박정희 소장은 장도영 중장보다 6세가 더 많았던 것, 즉 군번이 꼬인 것으로 육사 8기의 쿠데타 이유 ① 사회 혼란 ② 군 상부층의 부정부패 ③ 승진 적체 등으로 세상을 바꿔야겠다는 생각과 더불어 자신의 인생도 바꿔야겠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라는 허진모 작가의 생각
- 이때가 바로 박정희 소장이 부각되기 시작한 때로 국군의 비주류에 속했던 박정희 소장, 원래는 비주류는 아니었던 것이 만주군관학교와 일본육군사관학교를 나왔기 때문에 당시 한국군의 주류에 편입될 수 있는 충분한 여건을 갖췄는데도 불구하고 남로당 전력이라는 치명적인 문제 때문
○ 박정희 소장은 어떻게 쿠데타를 일으켰나?
- 4.19혁명 당시 또 다른 한직(閑職)인 부산 군수기지 사령관으로 가게 되는데 이때 송요찬 육군 참모총장에게 부정선거에 개입했다는 비판과 함께 퇴임 건의 서한을 보낸 박정희 소장 “군의 최고 명령권자인 각하께서 부정선거에 대한 전적인 책임을 지시어 정화의 태풍이 파급되기 전에 용퇴하신다면 얼마나 떳떳한 것이겠습니까?”
- 이는 육사 8기 정군운동 세력에게는 리더로서의 자질을 어필한 셈이고 또한 육사8기의 핵심인물인 김종필과는 조카사위 관계, 박정희 소장은 청년 장교들에게 인기가 있었는데 일단 술을 즐겨 마시며 육사 8기생들과 잦은 술 모임으로 ‘대한음주당’ 이라는 모임을 갖게 되고 이 모임이 훗날 쿠데타의 핵심세력이 되는 것
- 박태균 교수의 분석은 박정희 소장의 야망은 만주군관학교 입학에서부터 시작하는데 교사라는 안정된 직업을 버리고 나이가 넘어 혈서까지 쓰면서 입학하게 된다. “한목숨 다 바쳐 충성함 박정희라는 혈서를 넣은 서류가 송부되어 담당자를 감격하게 했다.“ 그것이 군인이라는 직업이 자기에게 맞았을 수도 있고 또 다른 하나는 군이라는 직업을 통해서 또 다른 뭔가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가졌을 가능성이 충분해 보인다는 것, 특히 1930년대 일본에서 일어난 2.26쿠데타도 부분적으로 영향이 컸을 것
※ 2.26쿠데타 : 진급 지연‧경제난 등에 불만을 가진 일본 청년 장교들이 국가 개조를 목표로 일으킨 군사 반란
- 박정희 소장의 만주군관학교 재학 당시 일본 군인들은 2.26쿠데타 당시 주도세력의 부근에 있었던 인물들로 만주로 쫓겨와 있던 사람들, 1930.40년대 일본의 군국주의 파시즘의 영향이 당시 만주에는 많이 있었고 그런 것들을 보면서 내가 대한민국을 어떻게 만들어 보겠다는 생각을 하는데 많은 영향을 받았을 것
○ 5.16쿠데타 성공의 시나리오
- 1950년대부터 쿠데타를 모의한 박정희 소장, 첫 번째 쿠데타 D-Day는 1961.4.19.로 4.19 1주년 기념일에 시위가 크게 일어나면 사회 안정화를 내세워 쿠데타를 일으킬 계획이었으나 사전에 학생들에게 누설되어 빌미를 주지 않으려고 조용히 넘기게 된 4.19혁명 1주년 기념행사, 그래서 첫 번째 쿠데타 실행에 실패하게 되는 상황이 전개된다.
- 두 번째 쿠데타의 D-Day는 1961.5.12. 한 군인이 통근 버스에서 옆 동료에게 쿠데타를 같이 하자는 권유로 발각되어 실패하는 헤프닝을 벌이기도 하는데 학생들에게 털리고 통근 버스에서 털리고 이렇게 허술했던 5.16쿠데타가 어떻게 성공을 하게 됐나?
- 5.16 새벽 KBS방송국을 장악하고 방송을 할 때까지도 성공을 확신할 수 없었던 쿠데타, 국군의 0.5%에 불과한 쿠데타군과 국군전력의 70%가 집중되어있는 1군, 진압에 나선다면 충분한 진압 가능성이 있었고 실제로 1군 소속부대 장병은 진압 준비를 하고 있었다.
- 5.16 오전 9시 1군 사령부는 쿠데타군 진압 출동 준비를 시작하여 밤 9시 출동 준비를 완료한 군인들, 하지만 하룻밤이 지나도록 진압 명령은 내려오지 않는데 쿠데타군 진압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세 사람 ① 내각책임제에서 군 통수권을 가진 장면 부총리 ② 유엔군 사령관을 통해 진압군을 동원할 수 있는 케네디 대통령 ③ 국무총리 부재 시 진압 지시를 할 수 있는 윤보선 대통령
- 내각책임제에서 핵심인물인 장면 국무총리의 선택은?
당시 장면 총리는 잠적을 하게 되는데 김종필의 자서전에 따르면 “5.16 오전 4:15 쿠데타 소식을 보고받은 장면 총리는 숙소인 반도호텔을 나와 혜화동 카르멜 수녀원으로 피신한다.”
- 5.16 11:30, UN군 사령관은 사라진 장면 총리 대신 윤보선 대통령을 찾아가 “대한민국의 재산 민주주의를 수호해야 한다.” 며 매그루더 유엔군 사령관은 윤보선 대통령을 압박한다. 윤보선 대통령의 선택은? “쿠데타군 진압으로 유혈 충돌이 생긴다면 나는 반대한다.” 는 대답을 듣고 당황한 매그루더 유엔군 사령관과 마셜 그린 미국 대리 대사, 대통령이 쿠데타군 진압을 반대할 줄이야 꿈에도 몰랐을 것
- 유엔군 사령관이 나서서 막아준다는데 왜 반대했을까?
4.19 혁명 이후 집권 여당이 된 민주당은 극심한 내부 분열과 갈등으로 신‧구파의 대립이 심했는데 윤보선 대통령은 구파, 장면 총리는 신파로 윤보선 대통령은 쿠데타가 장면 총리를 겨냥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
- 김종필이 작성한 혁명공약 1~5조, 쿠데타 전날 박정희 소장을 만났는데 매우 흡족해 하면서 민정 이양이라는 6조의 추가를 제안하는데 이는 박정희 소장의 순수한 의도였는지 정치인들을 염두에 둔 정치적 계산인지는 알 수 없지만 결과적으로는 묘수가 된 혁명공약 제6조, 여러 정치인들의 수싸움이 박정희 소장에게는 유리하게 작용한 것
- 쿠데타군 진압을 거부한 윤보선 대통령, 그리고 사라진 장면 총리, 그러면 케네디 미국 대통령의 선택은?
쿠데타 초기 진압을 구상하고 있던 매그루더 유엔군 사령관의 진압 결정에는 케네디 대통령의 승낙이 필요한 상황, 당시의 문서를 보면 “Wait and see!” 상황이 어떻게 되는지 지켜보자는 것, 당시 국제적으로 위기에 몰려있던 미국 정부, 케네디가 대통령이 된 이후 피그스만 침공 사건(1961.4.17.)이 실패로 돌아가고 미국 정부의 위신은 말이 아닌 상태였고 피그스만 침공 사건 한 달 후 일어난 5.16쿠데타
※ 피그스만 침공 사건 : 쿠바의 카스트로 정부를 전복하기 위해 미국이 반정부 세력을 쿠바에 침투시켰다가 실패한 사건
-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공개된 미국 문서에서 새롭게 밝혀진 사실로 장면 총리는 수녀원 피신 중 미국의 도움을 요청했다는 것, 사실은 수녀원을 가기 전에 먼저 미 대사관의 문을 두드렸으나 열어주지 않았다는 것
- 해방 이후 한국의 정치 세력을 지켜보던 미국, 박정희 소장도 그중의 하나로 남로당 전력 때문에 박정희 소장에 대한 확신이 없었는데 장면 총리에 대한 평가는 더욱 나빴던 것이 무능‧허약한 지도력으로 이미 낙인찍혀있었다는 것, “한국의 군사혁명위원회 지도자들은 매우 반공적이고 친미적이다. 현 군부가 실력있고 청렴한 참모진을 꾸리는 것이 미국의 현재 목표 중의 하나다. ” <1961.5.19. 미국 신문기사>
- 민주주의의 수호국인 미국의 입장에서는 사실 불법적인 정권의 찬탈인데 이것을 마냥 편 들 수도 없고 보아하니 분위기는 나쁘지 않고 방관이 최고의 전략이라고 판단한 것으로 한국도 미국도 막지 않았기에 성공할 수 있었던 5.16쿠데타
○ 5.16쿠데타, 그 후
- 1961.5.18. 쿠데타군 진압 명령을 기다리고 있던 1군 사령관 이한림 장군이 압송되고 그 시각 육사 생도 800여 명은 쿠데타 지지 시위를 벌이는데 이는 국민들의 민심을 바꾸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 이 시위를 주도한 인물은 육사 11기 전두환 대위, 당시 육사 교장은 육사 생도들이 정치적으로 이용당하는 것에 반대하여 동원을 강력히 반대하지만, 쿠데타 세력은 육사 교장을 체포하고 육사생들은 혁명지지 시가행진을 하게 되고 전두환 대위는 이런 아이디어로 박정희 소장과의 인연이 시작된다.
- 쿠데타 발생 50일 만에 나타난 장면 총리는 사퇴성명을 발표하고 취임 9개월을 채우지 못하고 사퇴한다.
- 쿠데타 이후, 실질적인 군사 최고 권력 기관인 군사혁명위원회는 나흘 뒤인 5.20. 국가재건 최고회의로 이름을 바꾸고 내각을 발표하는데 의장은 육군참모총장 장도영 중장, 부의장은 쿠데타의 실세 박정희 소장, 그리고 내각과 주요 직에 군인으로 대체된다.
- 그리고 1961.7.3. 장도영 의장은 쿠데타 세력에 의해 체포되는데 죄목은 정부전복 음모와 정부 주체세력 암살 음모로 한 마디로 이용가치가 다했다는 것, 육사 생도 시위 주도는 전두환 대위, 장도영 의장 체포는 노태우 대위
- 혁명공약 제6조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도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언제든지 정권을 이양하고 우리들 본연의 임무에 복귀할 준비를 갖춘다.“ 이는 참신하고 양심적인 정치인이 없으면 이양하지 않겠다는 것이고 또한 과업이 성취되면은 성취되지 않으면 이양하지 않겠다는 것으로 과업의 성취는 관점에 따라 시기가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
- 1962.12.27. 박정희 소장의 발표는 ”1963년 8월경 민정 이양 예정“ 또한 1963.2.8. 발표는 ”본인은 민정에 참여하지 아니한다.“ 그리고 1963.3.16. 발표는 ”국민투표 결과에 따라 군정을 4년 연장할 것.“
- 이에 군정 연장을 반대한 시민들, 그리고 1963.3.26. 미국 정부는 순조로운 민정 이양을 촉구한다. 그러자 1963.4.8. 군정 연장 철회를 발표하고 1963.8.30. 박정희 의장은 전역과 동시에 공화당에 입당하면서 대통령 선거에 도전한다. 전역사(轉役辭)에서 박정희는 ”본인과 같은 불운한 군인이 없도록 합시다.“
○ 박정희, 대통령이 되다.
- 1963.12. 제5대 대한민국 대통령에 취임한 박정희, 민간인 신분으로 대통령이 됐으니 민정 이양은 민정 이양(?) 민정 이양 번복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으로 한국이 한미관계에서 미국과 갈등을 빚은 사건 중 하나인데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국가재건비상조치법
※ 국가재건비상조치법 : 국회가 해산되고 헌법 기능이 중지됨에 따라 5.16군사정부가 국가통치를 위해 제정한 법
모든 권력을 장악한 국가재건 최고회의의 의장이 된 박정희, 또 하나는 중앙정보부의 창설로 정보를 독점하여 장기집권 독재의 기반을 마련하게 되는 것
○ 오늘의 소회(溯洄)
- 5.16쿠데타는 에덴동산의 선악과를 따먹은 날이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라는 강한 리더가 등장함으로써 경제발전도 있었지만 민주주의의 후퇴라는 저주를 받았다.
- 5.16쿠데타는 한국 현대사에서 아픈 손가락이다, 누구에게는 엄지손가락이 되기도 하고 누구에게는 중지손가락이 되기도 하지만 어느 손가락을 들던 다른 한쪽은 아픈, 그래서 아직도 평가가 엇갈리는 우리 현대사의 아픈 손가락이다.
- 결과도 중요하지만 수단과 과정은 더 중요한 것, 쿠데타는 불법적인 수단과 과정을 통해서 정권을 잡은 것이고 쿠데타가 한번 발생하면 또다시 발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긴다는 것, 대표적인 예가 1980년대 신군부 쿠데타로 결과에 의해 과정이 합리화될 수는 없는 것
'K-his(한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친일파 청산, 이루지 못한 꿈 반민특위 (0) | 2020.07.29 |
---|---|
피의 일주일, 4.19부터 5.16하야 까지 (0) | 2020.07.13 |
막전막후 이승만 정부의 탄생 (0) | 2020.07.06 |
청산되지 못한 역사, 제3편 친일파의 명작 스캔들 (0) | 2020.06.26 |
청산되지 못한 역사, 제2편 친일의 변명 (0) | 2020.06.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