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요
- 해방 후 대한민국 정부는 국민의 숙원을 담아 친일파를 법의 심판대로 소환한다. 법의 심판을 앞두고 친일파들은 각양각색의 최후 변론을 늘어놓는다. 그러나 단죄는 없었다. 친일파의 변명에 그친 미완의 심판, 끝나지 않는 그날의 질문을 다시 이어간다.
-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민족의 숙원을 담은 세 번째 법률공표 “반민족 행위자를 처벌하라!” 조사 682건, 체포 305건, 자수 61건
- 1949년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 공판, 친일파들의 최후 변론은?
① “잘못했습니다. 이곳에 와서 반민족행위를 재판받는다는 게 부끄러운 일입니다. 나를 모든 사람이 지켜보는 광화문 네거리에서 사지를 찢어 죽여주십시오.” 뒤늦은 석고대죄 형(우는 놈)
② “난 그저 꼬스까이(심부름 꾼)에 불과했어요. 일제가 하란대로 했을 뿐입니다. 3.1운동 때 우리 집에서도 만세를 불렀다니까요. 먹고 살려면 어쩔 수 없었습니다.” 목구멍이 포도청 형(발 빼는 놈)
③ “나 친일파 맞소. 조선보다 문명국인 일본의 조선통치가 훨씬 좋은 것이오. 한일강제병합을 주도한 이완용은 매국노라 비난하는데 그는 국난을 당한 나라를 부지하고 백성을 구한 사람입니다. 친일이 곧 애국이란 말이오.” 내가 애국자다! 호통형(뻔뻔한 놈)
○ 일제의 은밀한 배려, 그 진짜 속셈은?
- 1919.3.1. 일제에 맞선 대규모 만세 시위로 독립선언서의 주역 민족대표 33인이 일제 경찰에 의해 체포되고 1년 후 최종 판결로 최고 3년의 형선고를 받고 복역 중 1921.12.22. 최린, 한용운 등 6명이 가석방 되는데 그것은 일제의 “배려”였다.
- 민족대표 석방을 도운 일본인 아베 미쓰이에로 경성일보 사장이며 2대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의 개인 정치 자문이고 1920년대 조선민족운동 분열을 기획한 인물이며 정치브로커
- 아베 미쓰이에가 민족 대표의 가석방을 도운 이유?
아베 마쓰이에와 조선총독 사이토가 주고받던 편지 “1919.8.13. 사이토 총독께! 각하가 부임하실 때 조선인에 대한 일제의 선물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이번 국가 범죄인에 대한 은사입니다. 이것은 민심완화를 위한 첫 걸음으로 오히려 조선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즉 특별사면을 통해 민심을 달래라는 것.
- 또한 민족 대표 6명 가석방 일주일 후의 편지 “오늘 날의 형세로 보아 민원식, 선우순 따위의 운동으로는 도저히 일제세력을 이룩하기 어렵고 일을 꾸미자면 이번에 가출옥한 위인 중 최린이 안성맞춤의 친구입니다”
- 최린은 민족대표 33인 중 천도교를 대표한 주역, 1910년대 일제의 지배전략은 무단통치로 무장헌병을 동원 행정‧치안까지 지배한 폭압체제, 즉 계엄령 통치로 더 이상의 폭력으로는 조선인들의 분노를 잡기 어렵다!
- 3.1운동 다음 해에 부임한 사이토 총독이 조선을 다스릴 새로운 방법을 고민하다 “조선의 지도자급 인물을 회유하라! 사이토 마코토 <조선통치에 대하여, 1921년, 조선민족운동에 대한 대책> 중에서 ”생각컨데 장래의 운동은 작년 봄 행해진 만세소요 같은 어린 애 장난은 아닐 것“ 사이토 총독의 새로운 조선통치의 핵심은 ”친일“로 친일파를 육성하기 위한 구체적인 실행단계까지 제시하는데 곳곳에 친일파를 두어 민족분열을 꾀하자는 것
- 민족분열은 제국주의 국가의 전형적인 특허 방식으로 매로 다스릴 수 없다면 조선인들의 정신을 다스려야겠다는 것, 즉 아베의 친일파 활용계획은 발굴→침투→단체→임명→문제해결의 방식으로 일제의 치밀한 계획 하에 키워진 친일파
○인생은 짧고 친일은 길다! 민족대표의 변절 ‘최린’
- 가석방된 인물은 불교 대표 한용운, 천도교 대표 원동진‧오세창‧이동일‧최린, 기독교 대표 김창준 이들 중 당당한 민족의 지도자가 아닌 비굴한 친일파로 역사에 남겨진 이름 최린, 나혜석과 파리에서 불륜에 빠졌다 배신하고 궁지에 몰았던 자, 남녀 간의 의리도 져버리고 나라마저...
- 최린의 변절 후 행보는?
1937년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사장에 임명되는데 1937년은 중일전쟁 발발로 조선의 청년들을 전쟁에 동원 선전전을 강화하기 위함으로 ‘조선과 일본은 하나’라 하면서 전쟁동원 기사를 쏟아낸 <매일신보> “있는 힘을 다 바치자 우리들 반도 민중은 창씨도 하였고 기쁜 낯으로 제국의 군인이 되어 무엇으로 보나 황국시민이 된 것이다. 이제부터는 있는 힘을 다해 연성을 쌓아서 군국의 방패로서 부끄럽지 않은 심신을 만들어 두지 않으면 안 되겠다. 내선일체의 구체적 사실이 한 걸음 한 걸음 착착 실현되어감도 틀림없다 망망한 대륙에서 또는 남방의 하늘과 바다에서 성스러운 피를 흘린 반도출신의 황군 장병들의 충용무쌍한 자태가 그것이다.” <매일신보 1942.5.10.> & “무릇 국가의 역사는 국민 스스로가 창조하는 것이다. 우리 반도 민중들도 과거의 모든 잘못됨을 깨끗이 씻어버리고 충성을 다하여 훌륭한 국민으로서 황국의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기에 다시 말하면 새로운 대동아를 건설하는 그 결전의 마당에 달려가서 책무를 다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 전국을 다니며 학병권유 유세에 앞장선 최린, 그를 정신적 지주로 믿고 따랐던 민중들이 느꼈을 혼란, 그리고 민족 대표의 변절을 눈앞에서 본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 함께 가석방됐지만 끝까지 변절하지 않았던 한용운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만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 하였습니다.” 그는 1944년 6월 29일 해방을 1년 여 앞두고 세상을 마감한다.
- 최린은 왜 변절을 택했을까?
배경은 최린은 아베 마쓰이에가 브로커라는 사실을 알고 “내가 아베를 이용할 수 있을까?” 하는 전략적 판단을 했을 것, 워싱턴 군축회의가 예정되자 조선의 식민지에 대한 해결을 크게 기대했던 조선인들, 하지만 전혀 거론이 되지 않자 일순간에 무너져 버린 독립의 희망, 실의에 빠진 조선 지식인들의 허점을 노린 아베, 그럼 독립이 불가능하다면 조선의 자치권으로 눈을 돌린 것이 최린의 생각 “오늘 날 조선의 독립이 불가능하다는데 확신을 하고 있으며 조선의회 설치가 조선 민심의 안정을 꾀하는데 가장 긴요하다.” <1926.10. 아베에게>
- 자치라는 것은 나라가 있어야 의미가 있는 것 아닌가? 일본의 식민통치를 받아들이며 이를 주장한다는 것은?
일본의 식민통치는 직접통치로 일본은 한 번도 조선의 자치를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런 얘기가 왜 나왔느냐 하면은 그런 뉘앙스를 일부러 흘린 것, “실력을 기르면 허락할 수도 있고...” 사탕발림을 하였지만 개인의 힘으로 제국주의 일본과 협상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 최린, 초등학생이 대학생과 거래를 한다고(?) 이용당하는 것이지만 이를 인지하지 못한 것
○ 친일파의 상징 허수아비 감투 중추원 참의
- 한 번 발을 들이자 본격적인 친일의 길로 들어선 최린은 1934년 중추원 참의에 오른다. “나는 월급 때문이 아니라 반일에서 친일로 돌아섰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중추원 참의에 취임했다. 친일적 입장에서 일본이 조선에 벌이는 일들을 비판할 것이다. 우리 민족을 위해 최대 이익을 낼 것이다.”
- 1934년 기준 중추원 참의 수당은 한 해 1800만원(현재 가치 약 4천만 원) 으로 동족을 궁지에 내 몰기 위해 혈안이 된 중추원 참의들
- 중추원은 1910~1945년 까지 친일 유력인사를 조성하기 위해 설립한 조선총독부 자문기관으로 1년에 한 번씩 모여 형식적인 문답만을 주고받았던 기관으로 정치적인 힘이나 실권은 전혀 없는 실체
- 반민족행위처벌법(1948.9.22.제정) 제4조 제2장 중추원 부의장 ‧ 고문 또는 참의 되었던 자,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2009년)의 조사, 1005명의 친일파 중 313명이 중추원 참의
○ 조선인을 때려잡아라!(발빼는 놈) 고문왕 김태석
- 1919.9.2. 남대문 역, 새로 부임하는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를 노린 한 노인, 65세의 강우규 의사, 총독 암살에는 실패했으나 대범한 암살시도에 큰 충격에 빠진 일제 당국, 하지만 의거 15일 만에 체포되고 마는데 강우규 의사를 체포한 사람은 조선인 경찰 김태석이었다.
- 그 후 1920.11.29. 사형을 선고받고 순국하는데 3.1운동 이후 독립을 향한 열망에 다시 한 번 불을 지핀 의거로 서울역 의거 현장에는 강우규 의사 동상이 우뚝 서있다.
- 친일 경찰 김태석, 별명은 고문 왕, 혹독한 취조와 고문으로 공을 쌓은 대표 친일 경찰, 반민특위 법정에 선 의열단원 홍종린의 증언 “(밀양폭탄사건 당시)학생이던 나의 동지 윤필한 이하 15명을 체포하여 고문과 극형을 하였고 나중에는 죽게까지 한 자가 바로 김태석이다.” 일본인보다 더 혹독했던 조선 경찰의 고문
- 고문과 조작의 계보 1세대 김태석,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사용했던 고문 기술을 그대로 학습하고 2세대에는 친일 경찰의 대명사 노덕술로 이어지고 1980년대에는 고문기술자 이근안으로 이어지는 계보
- 근‧현대사 고문의 역사를 다룬 책 <야만시대의 기록, 박원순 작> 일제부터 해방 후 친일경찰들이 물려준 기술을 민주화 인사 탄압에 그대로 사용한 것으로 공권력이 국민에게 당연한 공포로 작용하는 것은 일제의 잔재(殘在)
○ 친일은 애국자다!(뻔뻔한 놈) 확신범 박중양
- 강제한일합병 전 박중양이 쓴 편지 “존경하는 가쓰라 수상에게! 하루라도 빨리 일본은 한국을 합병하여 이를 행할지라도 한인은 이제 반항할 실력이 없으니 염려마시기 바랍니다. 국민이 독립생활의 능력이 없으면 국가가 부강할 도리가 없다. 독립 만세를 천번만번 외친다고 해도 만세만 가지고 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친일은 하였으나 민족 반역자는 아니다.”
- 박중양은 이토 히로부미의 양자로 3.1운동 당시 자제단을 조직해 만세운동을 저지하고 데라우찌 총독에게 만세운동자를 색출하겠다는 충성편지 까지, <조선공로자 명감>의 기록 “비상한 때에 진실로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지사 급 중에서는 박중양이다.”
- 박중양은 한일강제병합 이전에 이미 친일파로 들어서는데 러일전쟁 때는 통역관 역할과 1907년 일제의 의병 탄압에 적극협조하며 일본인을 꿈꾼 사람 조선인 박중양, 1941년 태평양 전쟁 협력 친일단체인 조선 임전보국단을 조직하여 전쟁을 위한 헌신적인 지원을 한 인물로 민족의 고혈을 짜내면서 전쟁을 선동한 친일파
※ 임전보국단 : 1941~1942까지 군수자재 헌납활동으로 민중 수탈 ‧ 부녀 층을 동원해 군복수리 노동 강요
- 이후 박중양은 1945년 일본 제국의회 귀족원으로 등극, 조선인으로 일본 국회에 진출한 격으로 일제 말기 조선 귀족원에 등극한 사람은 7인으로 그중 1인
- 박중양이 아이러니한 것은 뇌물을 일체 받지 않았다는 것, 독실한 친일파이며 신념형으로 개인의 이익이 아닌 조선을 위해 친일을 한다는 주장으로 일명 확신범, 해방 이후에도 비뚤어진 믿음을 이어간 박중양 1954년 작성한 <술회> 중 “두뇌가 공허해도 아는 체 하는 것이 조선인의 병이다. 하등 자신감과 능력이 없는 자가 타인을 비판하고 악평하는 것이 조선인의 버릇이다.” 조선인의 열등감은 일본이 문명으로 다스린다는 것 “조선인의 고혈을 흡취 하였다고 일정시대를 비난하는 사람이 있지만 이는 정치의 연혁을 모르고 일본인을 적대시한 데서 헛소리한 편견이다.”
- 박중양의 논리은 열등한 조선→ 우월한 일본→ 식민지만이 정답, 1946~1954년 까지 8년간 집필한 <술회> 이는 해방 후에도 흔들리지 않았던 친일사상으로 박중양을 조사한 반민특위 조사관 정철용의 증언 “몸은 조선인인데 생각과 행동은 일본인이다”
○ 친일파는 살아있다
- 일제의 침탈을 미화하는 식민지 근대화 논리와 동일, 지난여름 논란이 되었던 <한일종족주의, 거짓말의 나라> -이영훈- “한국의 거짓말 문화는 국제적으로 널리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2014년에만 위증죄로 기소된 사람이 1400명입니다. 일본에 비해 172배라고 합니다. 나라가 무슨 사기로 팔아먹을 수 있는 부동산입니까? 오랫동안 닫힌 가운데 전체정치의 폭압을 받아 대다수 백성이 노예근성에 물들고 정신무화가 타락하여 거짓말하는 악습이 횡행하고 관리는 오로지 임금에 순종하는 것만이 충성인 줄 아는데 임금이 비겁하고 어리석어서 나라가 망하였습니다.” 일본의 식민지배에 대한 비판을 비판한 책
- 야만상태의 조선이 근대화된 것은 일본덕분이라는 잘못된 생각, 약육강식의 법칙에 의해 조선이 주권을 빼앗기는 것은 당연하다는 주장으로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은 21세기에 다시 등장한 19세기 제국주의의 논리
- 식민지 근대화론의 주장 “근대화에 기여했다.” 이보다는 오히려 이미 일제에 의해서 우리 스스로 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한 것이다. 동학농민운동이 꿈꾼 평등과 자유 그리고 독립협회가 주장한 민주주의 발전 등 오히려 조선의 많은 것을 앗아간 일제
- 또한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의 맹점은 식민지에 대한 이해가 없고 근대화만 얘기한다는 것, 그것도 단순한 통계만 가지고 주장하는데 1910년대 이미 서당교육을 통제한 일제, 자발적으로 학교설립운동을 벌인 민중들, 하지만 끊임없이 항의 하는데 총독부는 이를 허가해 주지 않았다.
- 그리고 통계이면에 존재했던 조선인의 삶과 이야기, 사라진 식민지 근대화론 시대를 살아낸 민중들의 삶과 이야기는 통계로 담을 수 없는 것들
○ 친일파의 처리
- 1년도 못되어 반민특위가 사실상 해체되는데 조사대상 682건→ 기소221건 → 처벌자0명
대표적인 최린은 3차례 공판→ 병보석으로 석방→ 한국전쟁 당시 납북, 김태석은 사형선고→ 무기징역으로 감형 재산 몰수형→석방→ 한국전쟁이 이후 행방묘연, 박중양은 수감 중 폐렴으로 병원 치료→ 석방(86세 까지 삶)
- 친일단체 일진회 회장 이용구가 죽음을 앞 둔 한 마디 “우리는 바보였나 봅니다. 혹시 속은 게 아닐까요?” 일제강점기 수많은 지식인들의 착각과 오만, 우리 안에 존재했던 친일파의 세 가지 유형 확신범‧기회주의자‧출세만능주의자, 그들의 원죄가 단죄되지 않았기에 오늘날 우리 공동체의 모순이 남아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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