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his(한국사)

1945년 세계는 지금

mkpark2022 2020. 2. 7. 15:17


1945년 세계는 지금

○ 개요

 -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아돌프 히틀러, 나치독일이 대부분의 유럽을 점령하던 그 때, 태평양 일대에 등장한 또 다른 야심가 “동아시아 모든 민족은 일본인의 번영을 위해 희생해야 한다” 대동아 공영권을 내세워 태평양 일대를 정복해 나간 일본 제국

 -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41년 12월 8일 날아든 긴급 속보, 미국의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1941년 12월 7일 일본의 부당하고 비열한 공격이 있었습니다. 일본의 미 진주만 기습공격으로 미국과 일본의 전쟁이 시작되었음을 의회에서 선언해 줄 것을 요청합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 미32대 대통령 -


○ 아시아 태평양 전쟁 발발

 - 1945년 5월 8일 나치 독일의 항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은 종결하고, 연합국의 칼끝이 향한 곳은 일본본토, 제주도는 일본 본토 사수를 위한 최후의 요새로 당시 제주도에 집결한 일본군 병력은 3월 3천 명에서 8월에는 7만 5천명으로 만주에 주둔하던 최정예 육군부대 관동군은 제주도에서 최후를 준비한다

 - 제주도는 일본의 최후 격전지?

 하늘의 요새 최신 폭격기 B-29가 한반도 상공에 자주 등장하여 언제 한반도가 불바다가 될 줄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고 있던 8월 15일의 반전(反轉) 드라마, 1945년 가을 쯤 미국이 본토에 상륙할 것으로 예상한 일본은 일본 본토 진입을 막기 위한 결호작전(決號作戰), 제주도는 제7결호로 일본 본토 사수를 위한 방패막이로 일본이 제주도를 최후의 요새로 만든 이유는 전쟁에서 잘 지기 위한 것

 - 일본은 왜 잘 지려고 했을까?

 히로히토 천황의 전쟁책임회피가 주목적으로 시간을 끌면서 연합국과 종전(終戰)협상을 하기 위한 것으로 오키나와와 제주도를 버리고 일본 본토를 지키겠다는 것 


○ 제2차 세계대전사, 세계정복을 꿈꾸는 히틀러

 - 연합국(미.영.소.중) VS 추축국(독.일.이), 1941년 6월 까지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미.소연합, 왜냐하면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발발된 제2차 세계대전, 폴란드 침공 일주일 전 맺은 독일-소련 불가침 조약, 이는 단순한 불가침 조약이 아닌 동맹관계로 유럽을 둘이 나누자는 것, 하지만 2년 뒤 1941년 6월 상황은 완전히 뒤집히는데 독일이 동맹을 깨고 소련을 침공, 빠른 속도로 북서 유럽을 장악한 독일, 세계정복을 꿈꾼 히틀러의 마지막 목표는 소련이었던 것 

- 한편 아시아 태평양 전선에서는 1941년 12월 7일 미국 해군기지를 일본 해군이 기습공격을 하는 <진주만 공격>을 단행하고 동남아시아의 미.영 식민지를 일제히 점령하게 되고 이는 미국이 아시아 태평양 전쟁에 참여하는 계기가 된다.

- 일본의 진주만 공격 이유?

 전술적 판단의 결과로 당시 태평양 일대에서 가장 강력했던 미 해군, 바꿔 말하면 진주만은 일본의 동남아 침공에 방해요인으로 이를 제거하자는 지극히 단순한 논리, 그러나 자충수가 된 진주만 공격 ① 미국의 반응 오판 ② 미국의 힘을 과소평가한 것으로 일본의 2가지 실수 ① 당일 주요 항공모함 진주만에 없었음 ② 미 해군의 빠른 회복을 예측하지 못함


○ 미국과 소련, 한배를 탄 사연은?

 - 1945년 2월 독인의 점령지는 모두 사라지고 전선은 독일 국내로 좁혀지면서 독일의 패배가 거의 확실한 상황에서 3거두의 극비 회동, 루스벨트.처칠.스탈린이 우크라이나 소도시 얄타에서 독일의 항복과 전후 처리문제를 논의하게 되는데 명목상 3거두의 만남이지만 실제로는 소련과 미국이 주도

 - 얄타에 모이게 된 이유?

 평생 암살을 두려워한 스탈린은 비행기를 무서워해 재임기간 중 딱 한번 비행기에 탑승했을 정도였기 때문, 루스벨트의 미.소 구상은 ① 소련과 협력해 유럽 전선 종결 ② 태평양 전선에 소련 참전 유도하는 것으로 미군은 아래쪽에서 위로 올라오면서 섬 탈환 과정에서 큰 희생을 치르고 있던 차에 일본 본토를 점령하려면 얼마나 많은 미군의 희생이 필요할까? 그래서 미군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 위에서 내려오는 소련군이 필요했던 것으로 미.소 공동을 위해 힘쓴 루스벨트


○ 그런데 이들은 왜 갈라섰나?

 - 1945년 역사를 바꾼 3가지 사건 ① 소련의 변심, 독일의 항복 이후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한 소련, 전후(戰後) 동유럽 처리를 두고 미.소 갈등의 시작되는데 미국은 폴란드가 점령은 당했지만 망명정부를 유일한 합법정로 인정 VS 하지만 소련은 이를 인정하지 않는데 망명정부 이전부터 동유럽에 친소 정부를 세우려 했던 스탈린, 적이 앞에 있을 땐 서로가 아군이었는데 적이 없어지다 보니 둘의 관계에 달라진 것이고 이때부터 싹튼 냉전의 씨앗 ② 얄타회담 2달 후 갑작스런 루스벨트 대통령의 사망, 사인(死因)은 스트레스로 인한 뇌출혈로 미 국민들도 예상치 못한 비보(悲報), 대통령직을 승계한 부통령 해리 트루먼, 당시까지 존재감이 거의 없었던 트루먼이었지만 예상외로 대통령직을 잘 수행한다. ③ 원자폭탄 개발 성공, <맨해튼 프로젝트>는 부통령에게도 비밀에 부친 원자폭탄 개발계획으로 트루먼도 대통령 취임 직후 알게 된 핵폭탄급 비밀

 - 1945년 7월 16일 인류 최초의 핵실험 성공, 당시 포츠담 회담(1945.7.16.~8.2)은 일본의 항복권고와 전후 처리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미.영.소 정상회담 도중 원자폭탄 실험결과를 들은 트루먼은 소련의 도움 없이도 전쟁을 마무리 할 수 있겠다는 판단으로 우리에겐 신무기가 있다고 경고를 한다.

 - 스파이를 통해 미국의 원자폭탄 개발 내용을 실시간으로 듣고 있던 스탈린은 끝까지 포카 페이스를 유지하면서 그 무기가 미국을 위해 잘 쓰이기를 바란다고 응수를 한다. “소련은 8월 15일 이후에 참전 가능하다고 스탈린이 말했다” - 트루먼의 일기 중 -

 - 따라서 소련이 참전하기 전 미국의 주도하에 전쟁을 끝내려고 한 트루먼은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하고, 이에 다급해진 소련의 최악의 시나리오는 소련이 개입하기 전에 일본이 항복하면서 전쟁이 끝나게 되는 것, 그래서 1945년 8월 8일 소련-일본 중립조약 폐기 → 8월 9일 0시 대(對) 일전(日戰) 개시한다.


○ 한반도를 둘러싼 미.소 눈치작전

 - 불과 2주 만에 만주 전체와 한반도 절반을 점령한 소련, 6.25당시 서울점령까지 3일 걸렸지만 한반도의 5배에 달하는 지역을 2주 만에 점령하게 되는 것

 - 일제 관동군의 방어는?

 당시는 유명무실해진 관동군, 또한 화력과 기동력에서 압도적인 소련의 전차 T-34는 제2차 세계대전의 상징사로 무기.전차 등에서 수적으로도 밀린 관동군, 소련이 빠르게 한반도로 진격하고 당시 오키나와는 미군의 최북단 요새로 소련은 마음만 먹으면 부산.목포까지도 도달할 수 있었던 상황

- 소련의 진격 속도에 놀란 미국은 8월 10일 일본으로부터 항복의사를 전달받고 8월 11일 새벽 2시 긴급회의를 소집한 미국 전쟁부는 일본 항복 후 미군이 한반도를 어디까지 점령할지 논의 “긴박한 상황이라는 압력 하에서 찰스 본스틸과 나는 사무실의 지도를 보면서 38선을 생각해냈다” -딘 러스크의 회고록 중- 소련군이 38선 이남으로 남하하는 것을 견제하려는 목적이었다는 것은 2013년 새롭게 밝혀진 사실

 - “38선은 1945년 7월 포츠담에서 마련됐다” - 존 헐(미국 전쟁부작전국 3대 국장) - 38선 분할 아이디어가 나온 건 1944년 초로 38선은 미국이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만든 정치적 분할선으로 한반도 분단의 책임을 미국에게도 물을 수 있는 문제라는 <신주백 소장의 생각> 다시 말해 한반도의 주인인 한국인의 의지가 전혀 반영되지 않은 38선이라는 것


○ 8월 15일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 전운(戰雲)이 감도는 1945년의 한반도, 8월 16일 소련군 서울 입성 소식을 듣고 몰려온 서울역의 수천 명의 인파, 소련군의 진군을 반긴 사람들도 상당했던 것이 당시 조선 사람들은 소련을 해방군으로 여긴 것이었고 일본은 드디어 8월 14일 밤 11시 연합국에 항복을 통보한다.

 - 해방 당일의 사건은 고종의 손자로 조선의 마지막 황족인 이우(1912~1945), 8월 6일 히로시마 원폭희생자로 8월 15일 정오 경성운동장에 예정된 장례식이 오전에 갑자기 연기되고 경성 시내에 붙은 의문의 벽보 “금일 정오 중대 방송 1억 국민 필청”

 - “짐은 제국 정부로 하여금 연합국의 공동선언에 응하도록 하였다.” - 일본 재124대 천황 히로히토 항복 방송 -

 - 해방 소식을 들은 조선 사람들의 반응은?

 대부분의 국민들은 방송 멘트를 이해하지 못했던 것, 하물며 해방이란 단어의 뜻도 모르는 사람들도 많았다고 “그날 저녁 위험을 무릅쓰고 일본 구내 속에서 뛰어 나왔다(...) 거리는 어두웠고 희미한 전등불만 군데군데 비치고 있었다” <회상> 서태원 회고록 중(1984) 한반도의 일본군은 하나도 다친 게 없고 해방직후에도 한반도에 주둔했던 일본의 군대.경찰.관료 “해방은 도둑처럼 뜻밖에 왔다” <함석헌> & “아닌 밤중에 찰시루떡 받은 격으로 해방을 맞았다” <박헌영>


○ 독립운동가들은 8월 해방을 예견했나?

 - 친일파, 해방을 몰랐다 VS 독립운동가, 해방을 알았다, 국외 세력의 해방준비 ① 이승만과 구미 위원부 : 미국 라디오 방송을 통해 재미 한인을 독려하고 한국이 독립국가임을 알림 ② 김일성과 항일 유격대 : 새조선 준비를 위해 조선공작단위원회 조직 ③ 무정과 조선의용군 : 만주를 통해 조선 본토까지 진출하는 무장독립전쟁 준비, 8월 15일 만주로 진격하기 시작한 그날 들은 일본의 항복 소식 ④ 김구와 대한민국 임시정부 :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여 미국과 함께 국내 진공작전 준비, 대일본 전쟁에 기여해 독립의 명분을 확보하기 위함과 동시에 국가 건설을 위한 정신적 준비로 대표적인 것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건국강령> 긴밀하고 은밀하게 준비한 해방의 그날, 해외 독립운동가들은 머지않아 독립의 날이 올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해방이 도둑처럼 온 것이 아니라 날짜가 도둑처럼 왔던 것

 - 일본 군부에서도 첨예하게 대립한 항복 날짜 천황의 항복방송을 막으려 쿠데타까지 일어나기도 했고 해방소식을 들은 김구의 탄식 “이 소식은 내게 희소식이라기보다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일이었다. 수년 동안 애를 써서 참전을 준비한 것도 모두 허사로 돌아가고 말았다. 지금까지 들인 정성이 아깝고 다가올 일이 걱정되었다” -<백범 일지> 김구 – 참전국가의 지위와 식민지의 지위에서 전후(戰後) 한반도 문제에 대해 협상하는 것은 크게 차이가 나고 우리의 발언권을 잃을 것을 예견 했던 듯

- 일부에서는 한국의 해방은 연합국이 승리한 결과라는 평가가 있는데 해방을 예측하고 꾸준히 준비했던 독립 운동가들의 노력도 제대로 평가 받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

 - 당시는 서구열강에서 한국은 어디 있는지도 몰랐던 나라로 일본이 점령하기 전 한국은 독립국가였다. 라는 사실을 일제강점기 내내 세계에 널리 알린 독립운동가들, 1943년 카이로 회담에서 식민지 조선의 독립을 제안한 장제스도 임시정부의 활약이 없었다면 생각할 수도 없는 일

 - 1944년 조선건국동맹을 결성한 여운형, 해방 1년 전부터 건국을 염두에 두고 조직을 결성하여 이를 발판으로 설립한 조선건국준비위원회(1945.8.15.~9.7)는 8.15 직후 창설된 우리나라 최초의 건국준비단체,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손기정 ‘일장기 말소사건’은 당시 조선 중앙일보 사장이었던 여운형이 주도한 사건, 패망의 소식을 접한 조선총독부가 여운형에게 한 말 “조선의 치안을 부탁하오” -엔도(정무총감)- 해방 이틀 만에 건국 비전을 제시한 준비된 지도자로 해방 다음날 서대문.마포형무소를 찾아가 독립 운동가들을 석방한다.


○ 8월 16일, 마침내 터진 만세함성

 - 교과서에 실린 만세 장면은 8월 16일 오전 9시 마포형무소 앞 장면으로 석방된 독립운동가들이 시민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고 단 하루에 석방된 정치범은 약 1,100여 명으로 마침내 한반도 땅 끝까지 퍼진 해방 소식으로 온 나라가 태극기로 물들다

 - 8월 16일 그 많은 태극기는 갑자기 어디에서 나왔을까?

사진 속의 태극기 자세히 보면 태극 문양과 4괘 모양이 모두 제 각각인데 머릿속의 기억을 더듬어 그렸기 때문, 일제 강점기 태극기 소지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일장기에 태극기를 덧칠한 것으로 가운데 원만 일치하고 나머지는 제 각각

- 독립 운동가들만큼 치열하게 대한의 기억을 지켜온 사람들, 희미한 기억을 되살려 태극기를 그린 것은 일제가 지우지 못한 우리 민족의 혼이 아닐까? 조선인의 정신구조까지 바꾸려 했던 일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해방의 순간 등장한 태극기, 한국인의 아이덴티티는 태극기로 상징된 것이라고 이해해야 하는 것이고 70년 넘게 견고하게 서있는 분단의 벽, 독립 = 자주 = 분단극복의 지름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