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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자 양녕의 폐위, 충녕은 형의 왕위를 넘봤나?

mkpark2022 2017. 8. 17. 11:53






세자 양녕의 폐위, 충녕은 형의 왕위를 넘봤나?



○ 개요

- 조선 최초의 폐세자로 기록된 형 양녕대군과 훗날 조선 왕조 사상 최고의 성군으로 기록된 동생 충녕대군, 한순간에 뒤바뀐 형제간에는 과연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 <드라마 세종대왕> 1416년 전직 관리 곽선의 첩 어리와 사랑에 빠진 양녕대군, 아버지 태종의 극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계속된 어리와의 비밀 연애, 결국 1418년 양녕대군의 아이를 임신한 어리, 이 사실을 알게 된 태종은 크게 분노하고 조정을 뒤흔든 어리의 사건으로 세자의 지위까지 위태로운 상황에서 양녕은 자신을 궁지에 몰아넣은 사람을 충녕으로 의심한다.

- 태종의 첫째 아들이 양녕이고 셋째 아들은 충녕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세종대왕, 지금까지는 태종이 양녕을 버리고 충녕을 선택했다? 그래서 태종과 양녕 그리고 태종과 충녕의 관계로 알고 있었는데 오늘은 양녕과 충녕 형제간의 이야기로 살펴보는 양녕의 폐세자 사건

- 여자 문제가 세자 폐위의 사유까지 될 수 있을까?

여자도 여자 나름으로 은퇴한 관료의 첩을 만난다는 것은 유교사회에서 비난받을 일, 조선시대의 첩은 엄연한 부인으로 불륜을 저지른 것으로 아무리 세자라 하더라도 문제가 되는 것, 태종이 노발대발하자 종묘에 반성문을 올리며 용서를 빈 양녕대군, 문제는 불과 1년 만에 어리가 임신한 사실이 발각된 것으로 세자 폐위의 도화선이 된 어리 사건


○ 양녕과 충녕, 형제의 갈등

- 그런데 왜 양녕대군은 동생 충녕대군을 의심했나?

당시의 기록은 “충녕대군이 대자암에서 불사하고 세자를 마산 역 앞 노상에서 만났는데 세자가 노하여 ‘어리의 일을 반드시 네가 아뢰었을 것이다’” <태종실록 태종 18년 5월> 태종에게 고자질한 것이 동생 충녕대군이라 의심한 양녕대군, 이때 충녕대군의 반응은 그저 대답이 없이 묵비권 행사를 한다.

- 떳떳했다면 적극적으로 부인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이익주 교수의 분석>은 대답하지 않은 것에 대하여 최근에 소설을 읽다가 아! 이 것이다.라고 생각을 했는데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잠> “약한 사람은 복수를 하고 강한 사람은 용서를 하지만 더 강한 사람은 무시를 한다.” 충녕 역시 무시한 것이고 또한 충녕대군이 어리의 사건을 태종에게 말했다는 기록은 없으나 “정순공주 정경공주 등이 와서 중궁(中宮)을 보는데 내가(어머니) 마침 이르니 정경공주가 말하기를 ‘세자전에서 유모를 구하여 부득이 이를 보내었습니다’ 고 하므로 중궁이 놀라서 말하기를 이게 어떤 유아(乳兒)이냐? 고 하니 공주가 말하기를 ‘어리의 소산입니다’ 고 하였다<태종실록, 태종 18년 3월> 이것을 태종이 알게 되어 일파만파 벌어진 사건인데 이 사건이 양녕의 입장에서는 정치적 위기로 목숨이 오 갈수 있는 상황


○ 양녕의 폐위, 형제간에 무슨 일이?

- 양녕과 충녕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을까?

친할머니인 신의왕후 한 씨의 기일에 형제간의 일어난 사건 “세자가 흥덕사에 가서 할머니 신의왕후 기일에 제사를 지내고 나서 바둑 두는 자 2~3인을 불러서 바둑을 두었다. 충녕대군이 (중략) ‘간사한 소인배와 놀이를 하는 것도 이미 불가한데 더군다나 할머니 기일에 있어서이겠습니까? 하니 세자가 너는 관음전에 가서 잠이나 자라 하였는데 세자가 꺼려한 까닭이었다.” <태종실록, 태종 16년 9월>

- 신의왕후 한 씨는 태종의 친어머니로 각별한 존재인데 세자 양녕이 친할머니 제사에서 바둑을 두는 건 철없는 행동, 하지만 <원동연 대표의 생각>은 충녕대군 입장에서 보면 이렇게 행동을 했다는 것은 형에게 오랫동안 쌓인 불만이 터져 나온 것으로 양녕대군 역시 ‘가서 잠이나 자라!’고 말한 것은 형제가 서로 오랫동안 갈등해 왔다는 것 아닌가?

- 사사건건 간섭하는 동생이 얄밉긴 하지만 반박할 수 없는 것이 늘 바른 소리만 하는 것, 하지만 충녕이 아니면 그냥 넘어 갈 수도 있는 일을 신하들 앞에서 사사건건 잔소리를 하다니··· 원래 혼내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미운 법


○ 동생 충녕대군은 형의 왕위를 넘봤나?

- <김영수 교수의 생각>은 왕위를 넘봤다고 생각하는데 충녕의 성격으로 봐서 ‘나도 왕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을까? 왜냐하면 모든 분야의 공부를 한 충녕대군, 공부한 것을 왕이 되자마자 정책으로 구현된 것을 보면 상당히 오랜 기간 준비했다는 얘기로 왕이 됐을 때를 염두에 두며 공부했을 것이라는 것

- <원동연 대표의 생각>은 넘보지 않았다는 것으로 충녕은 세상물정을 몰라서 순수하게 조언을 했던 것 아닐까? 왕위를 넘봤다면 자신의 세력을 규합한 다음 적절한 시기를 노렸을 것으로 품성이 원래 그랬을 것이라는 생각 & <임윤선 변호사의 생각>은 넘보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으로 충녕대군이 권력을 노린 사람이라면 형 양녕대군이 방정맞은 품행을 하도록 놔뒀을 것


○ 형만 한 아우 있다? 양녕 VS 충녕

- 양녕대군의 생활기록부는 본명 이제, 출생 1394년생, 특기 활쏘기, 학업성취도 대학연의를 6년 만에 마침, 특이사항 서연에 잦은 결석, 성격 호방한 무인기질 & 충녕대군 생활기록부는 이도, 1937년 생, 독서 왕, 사서삼경에 정통, 악기 그림 등 다방면에 능통, 어질고 깊은 효심

※ 서연(書筵) : 조선시대 왕세자를 위한 교육제도 & 대학연의(大學衍義) : 주자학의 기본경전인 대학(大學)을 송나라의 학자 진덕수가 알기 쉽게 풀이한 책

- 양녕대군은 공부에 흥미도 재능도 없었다?

<이익주 교수의 분석>은 공부를 기준으로 비교한 것은 세자에게는 제왕학(帝王學) 공부가 필요하기 때문인데 양녕대군의 경우 보통사람들 보다 더 공부를 게을리 했던 것으로 스승인 세자빈객들과 항상 사이가 나빴던 것 “이내가 말하였다 ‘저하의 뱃속에 가득 찬 것은 모두 사욕(私慾)뿐입니다. 전하의 아들이 저하(邸下) 뿐인 줄 압니까?” <태종실록, 태종 15년 1월> 양녕대군을 바로잡기 위해 충격요법을 쓴 세자의 스승인 이내

- 아버지 태종의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이 양녕과 충녕을 비교하게 됐을 것 “임금은 일찍이 몸이 불편할 때에도 글 읽기를 그만두지 않았으니··· 태종은 내시를 시켜 책을 모두 거두어 가지고 오게 했다. 다만 구소수간 한 권이 병풍 사이에 남아 있었는데 임금은 천백 번을 읽었다” <연려실기술, 세종조 고사본말>

- 충녕은 무슨 책을 주로 읽었나?

옛날에 책을 읽을 때는 주경익사(主經翼史)라고 해서 경전을 중심으로 읽고 사서로 날개를 삼는데 충녕은 그 반대로 사학을 중시하여 실무에 적용할 수 있는 제왕학과 관련된 책을 주로 읽다보니 양녕의 입장에서는 의심하는 마음이 들었을 것이라는 <김영수 교수의 생각>

- 도서목록에서 느껴지는 충녕의 본심?

아니면 어렸을 적 우리도 다양한 책을 읽듯이 그냥 지적 호기심이 왕성한 것? 우리가 독립운동 하겠다고 유관순 위인전을 읽는 건 아니 듯··· <최태성 교사의 생각>은 왕조국가에서 왕이 되기 위한 책을 읽는다는 것은 역모의 혐의로 볼 수 있다는 것

- 왕좌를 넘보지 않았다는 <원동연 대표의 생각>은 충녕의 일거수일투족이 태종과 양녕에게 알려질 것인데 불순한 의도가 있었다면 대놓고 책을 읽지 않았을 것, 성군(聖君)의 이미지 때문에 쉽지 않은 선택이지만 왕위를 넘봤다는 <최태성 교사의 생각>은 권력의지가 있다는 것이 나쁜 게 아니고 충녕은 준비된 왕이기 때문에 성군이 된 것

- <이익주 교수의 분석>은 충녕의 타고난 자질 + 노력 = 성군이 되는 것, 스무 살 때 연회를 하는 자리에서 “충녕대군이 서경에 이르기를 기수준(耆壽俊)이 궐복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 학문이 방향을 통한 것을 감탄하고 세자를 돌아보며 너는 학문이 어째서 이만 못하냐? 하였다.” <태종실록, 태종 16년 7월> 태종의 동생과의 비교에 양녕의 입장에서 동생 충녕이 미웠을 듯하고 늘 비교를 당했던 양녕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학업 동기가 더욱 저하됐을 것

- 그래서 결국 충녕에게 반격을 시작한 양녕 “세자가 일찍이 임금 앞에서 사람들의 문무를 논하다가 충녕은 용맹하지 못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비록 용맹하지 못한 듯하나 큰일에 임하여 대의(大義)를 결단하는 데에는 당세에 더불어 견줄 사람이 없다.” <태종실록, 태종 16년 2월> 아버지 태종이 왕이 될 재목은 충녕이라고 말한 꼴로 중요한 현안에 정확한 대안을 제시한 충녕


○ 충녕이 아닌 양녕이 세자로 책봉된 이유

- 처음부터 충녕을 세자로 책봉하지 않은 이유?

태종은 12남 17녀로 정실부인에게서 난 아들은 대군(大君) 후궁에서 난 아들은 군(君)으로 원경왕후 민씨에게는 양녕 · 효령 · 충녕 · 성녕의 네 아들이 있었는데 적장자 원칙에 의해서 양녕이 세자가 되는 것, 그런데 적장자 원칙을 무너뜨린 태조 이성계, 그래서 제1·2차의 왕자의 난이 발생하고 혈육까지 죽이며 비인륜적인 왕자의 난을 적장자 승계원칙이라는 정치적 명분으로 합리화 시킨 태종

- <이익주 교수의 분석>은 적장자에게 왕위를 물려준다는 것이 태종에게는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카드, 그래서 태종은 즉위 직후인 태종 2년에 양녕을 원자로 책봉하는데 당시 양녕의 나이가 9살로 충녕의 뛰어난 자질이 나타나기 전(前)에 적장자 양녕을 세자로 책봉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충녕의 자질이 아까워 지는 것

- 갈수록 깊어지는 양녕과 충녕 사이 갈등의 골로 태종은 결단을 내린다, “임금이 이를 염려하여 대군의 시종하는 인수(人數)를 줄였다.” <태종실록, 태종 16년 3월> 세자인 형에게 도전하지 말라는 의미로 형제간에 긴장이 고조되면서 불상사가 일어날 것을 염려한 태종이 시종 인원을 줄였을 것이라는 <김영수 교수의 분석>


○ 양녕이 폐위된 이유?

- 태종에게 꼭 필요했던 존재인 양녕대군은 왜 폐위되었나?

<태종실록에 실린 기록> “태종 10년 세자가 몰래 기생 봉지련을 궁중으로 불러들이다. 태종 11년 세자우빈객 이내가 세자에게 여색과 매(새)를 멀리할 것을 진언하다. 태종 12년 세자가 병을 핑계로 서연에 참석하려 하지 않아 내시 김문후가 눈물을 흘리며 강권하다. 태종 13년 세자가 평양기생 소앵을 동궁에 불러들여 놀아난 문제로 판내섬시사 김매경 판예빈시사 박수기 등을 파직시키다. 태종 14년 세자가 밤에 창기를 불러들이다. 태종 15년 상왕이 가까이 했던 기생 초궁장이 세자와 사통했으므로 내쫓았다.” 매년 사고를 친 문제아 양녕대군, 게다가 기생 초궁장은 상왕 정종의 첩으로 기록에는 모르고 그랬다고는 하지만 초궁장과의 만남은 도덕적 지탄을 받을 만한 일

- <김영수 교수의 생각>은 태종이 많은 사람을 희생시켜 세운 나라를 제대로 된 나라로 세워야 자신의 행동이 정당화 되는 것인데 양녕 같은 사람이 왕이 된다면 흘린 수많은 피에 대하여 어떻게 속죄를 하겠는가? 하여 양녕대군을 훌륭한 군왕으로 만들기 위해 더욱 혹독하게 교육시켰던 것이 아닐까?

- <태종실록, 태종 10년 11월> “임금이 듣고 소친시에게 곤장을 때리고 봉지련을 가두니 세자가 마침내 근심 걱정하여 음식을 들지 않았다.” 단식투쟁에 들어간 것 “임금이 세자가 미치고 혹하여 병이 될까 염려해서 봉지련에게 비단을 주었다.” 양녕대군에게 만큼은 관대했던 태종

- 하지만 양녕은 태도를 고치지 않고 계속 문제를 일으킨다. “강민 · 한용봉 등이 일찍이 동궁을 모시고 매받이 하여 몰래 사냥하는 일로써 세자에게 아첨하였으므로··· 임금이 듣고 중관을 보내어 잡아왔다. 세자가 굳이 말렸으나 어쩔 수 없게 되자 노하여 중관에 이르기를 내가 네 이름을 안다” <태종실록, 태종 13년 8월> 너를 알고 있으니 두고 보겠다는 것

- 이 사건으로 크게 분노한 태종은 처음으로 ‘폐위’를 의미하는 말을 한다. “세자의 마음은 반드시 그 자리를 족히 믿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 과연 뉘우치지 않는다면 종실에 어찌 적당한 사람이 없겠는가.” <태종실록, 태종 13년 8월>


○ 충녕대군의 정치적 부상

- 1415년 당시 우의정 남재를 위해 잔치를 베푼 충녕, 남재는 술이 거나해지자 ‘임금의 아들이라면 누군들 임금이 되지 못하겠습니까?’ 하자 이 말을 들은 충녕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김영수 교수의 분석>은 남재의 말을 충녕대군이 꾸짖었다면 정치적 사건으로 비화될 수 있는 일로 남재를 살리면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던 충녕대군의 현명한 결정이 아니었을까?

- 남재의 말에 태종의 반응은?

<원동연 대표의 생각>은 적장자 원칙을 무너뜨리는 남재의 말을 태종이 들었으면 죽였을 것이지만 예상 밖의 태종의 반응 “뒤에 임금이 듣고 크게 웃으며 말하기를 ‘과감하구나! 그 늙은이가’ 하였다” <태종실록, 태종 15년 12월> 태종의 반응을 보며 많은 신하는 대세가 변하고 있다는 흐름을 읽었을 것이고 정치 고단수인 남재가 이런 이야기를 한 것은 이미 태종의 마음을 읽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으로 기록에는 없으나 정치적 정황상 태종은 이미 충녕대군에게로 마음이 기울었고 남재를 통해 민심을 살펴본 것이 아닐까? 하는 <김영수 교수의 분석>


○ 양녕대군 폐위의 결정적 사건

- 양녕대군 폐위의 결정적 사건은?

1418년 어리의 임신으로 크게 혼이 난 양녕대군이 아버지 태종에게 직접 써 올린 편지 “태종 18년 5월 30일, 전하의 시녀는 다 궁중에 들이셨으니 어찌 다 중하게 생각하여 받아들인 것이겠습니까? 지금까지 신의 여러 첩을 내보내시어 곡성이 사방에 이르고 원망이 나라 안에 가득한데 어찌 반성하여 스스로를 책망하지 않으십니까? 전하는 어찌 신이 크게 효도하리라는 것을 알지 못하십니까? 이 첩 하나를 금하다가는 잃는 것이 많을 것이요 얻는 것은 적을 것입니다.” 아버지도 후궁이 많으면서 왜 나한테만 뭐라고 그러느냐는 요지

- 아버지를 책망하는 내용의 편지는 양녕대군이 직접 쓴 것으로 반항을 한 것, 그런데 이를 본 태종의 반응이 어찌나 컸던지 “태조께서 널고 인자한 도량으로 나라를 세운지 얼마 안 되어 손자에 이르러 벌써 이런 자가 있으니 장차 어찌하겠는가?” <태종실록, 태종 18년 3월> 왕조국가에서 부자이자 군신관계인 태종과 양녕대군, 신하인 양녕대군이 임금인 태종에게 이런 편지를 보낸 것은 대역죄에 해당한다는 <김영수 교수의 분석>

- 양녕이 자포자기 심정으로 보낸 편지?

이 때 양녕의 나이는 25세로 이젠 10대의 반항이 아니고 아버지가 세자를 폐위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오판했던 것이 아닐까? 라는 <이익주 교수의 분석>


○ 충녕대군이 세자에 책봉되기 까지

- <드라마 세종대왕> 1418년 조선 왕조를 뒤흔든 태종의 발표 “과인은 왕세자 이제를 폐하고···” 14년간의 세자생활을 마친 양녕대군은 담담하게 폐위 조서를 받은 후 한양을 떠나가며 비로소 눈물을 보인다, 반면 새로운 세자로 책봉된 충녕대군은 세자가 된 지 두 달 만에 왕위에 오르게 되는데 14년간의 세자에서 폐위된 양녕대군과 세자 책봉 후 두 달 만에 왕위에 등극된 충녕대군

- 폐위되는 상황에서 어떻게 담담할 수 있었나?

“양녕은 눈물을 흘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조금도 비탄하는 모습이 없었습니다··· 임금이 그와 같기 때문에 그와 같이 되었다 어찌 허물을 뉘우치겠는가?” <태종실록, 태종 18년 6월> 양녕대군이 담담할 수 있었던 이유는 폐 세자가 되는 과정을 이미 받아들였을 것이라는 <김영수 교수의 분석> & 양녕대군이 폐위교서를 받았을 때 마지막 자존심만큼은 지키고 싶었던 게 아닐까? 결국 한양을 떠날 때 눌렀던 자존심이 폭발하여 비로소 흘린 눈물이라는 <최태성 교사의 생각>

- 적장자 원리에 따른다면 누가 세자가 되어야 하는가?

양녕에게는 5살과 3살의 두 아들이 있었는데 적장자 상속 원칙이라면 양녕의 아들이 세자에 책봉되어야 하는 것으로 충녕대군은 왕위를 넘보지 않았을 것이라는 <이익주 교수의 분석>은 충녕대군에게 왕위가 오기까지는 수많은 변수가 있는 상황

- 적장자 원칙을 깨고 어떻게 충녕대군을 세자로 책봉했나?

“유정현을 말하기를··· ‘어진 사람을 고르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원은 말하기를 ’청컨대 점을 쳐서 이를 정하소서‘ 하니’ <태종실록, 태종 18년 6월>

- 택현(擇賢)은 어진 이를 고르는 것 & 택점(擇占)은 점을 쳐서 대의를 정하는 것 & 택장(擇長)은 적장자 원칙을 지키는 것으로 신하들의 말을 따르는 형식을 통해 정치적인 논리를 완성한 태종, 택현하자고 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충녕대군은 천성이 총명하고 민첩하고 자못 학문을 좋아하여··· 충녕은 비록 술을 잘 마시지 못하나 적당히 마시고 그친다.” <태종실록, 태종 18년 6월> 충녕대군의 작은 행동도 칭찬하는 태종의 마음을 신하들은 쉽게 간파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이익주 교수의 분석> 그래서 택현의 논리로 충녕대군이 세자로 책봉이 된다.

- 시대가 요구하는 인물이 왕이 된 것 아닌가?

<김영수 교수의 분석>은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됐다고 보는 것이 태종은 힘으로 질서를 만들었지만 이러한 정치는 오래 갈 수 없고 가치를 창조해야 하는 시대에 양녕보다 뛰어난 자질을 갖췄던 충녕이 등장하여 역사를 위해 현명한 선택을 한 태종은 피바람을 일으켜 세운 조선 건국에 정당성을 부여했다는 <김영수 교수의 분석>

- 왕위를 넘봤다는 <원동연 대표의 생각>은 충녕대군이 가졌던 권력욕은 건강한 권력욕이었다고 생각된다는 것, 왜냐하면 충녕대군은 개인의 이익이 아닌 백성과 나라의 기틀을 잡기위해 권력욕을 사용한 것이기 때문으로 만약 충녕대군이 권력을 넘보지 않았더라면 왕조의 미래는 어떻게 됐을까 염려된다는 것

- 왕위를 넘보지 않았다는 <임윤선 변호사의 생각>은 고의(故意)는 의사(議事)로 알았느냐? + 의도(意圖)했느냐? 두 가지가 모두 갖춰져야 고의가 있다고 보지만 형의 왕위를 일부러 넘봤느냐고 묻는다면 충녕대군에게는 고의가 없었다고 할 것이다. 즉 욕망은 있었을 수 있으나 착한 욕망이었고 권력욕이 있었을 수 있으나 일부러 의도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는 것

- <이익주 교수의 생각>은 양녕대군의 폐위와 세종의 집권으로 중흥기를 맞이하게 된 조선의 역사, 그러나 정도전이 구상한 재상중심제라는 정치 실험이 태종의 권력욕으로 인해 실패로 돌아가고 또 세종이 등장함으로써 태종의 행위에 면죄부가 된 것이 양녕대군 세자 폐위의 빛과 그림자가 아닐까? 생각된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