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조의 탄생, 태조 왕건 & 태조 이성계
○ 역사상 두 명의 태조가 있었다.
- 2017년은 우리나라와 프랑스에서 새로운 지도자가 태어난 해로 918년 고려를 건국하고 936년 후삼국을 통일한 태조 왕건 & 1388년 위화도 회군으로 실권을 장악하고 1392년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 새로운 왕조를 탄생시킨 두 리더를 알아보는 시간
- 태조(太祖)는 묘호로 왕이 죽은 뒤 종묘에 위패를 모실 때 붙이는 호칭으로 살아생전의 업적을 평가해 붙이는데 태조(太祖)는 왕조를 개창한 임금께 붙이는 칭호
- 두 태조(太祖)의 성장 배경, 태조 이성계는 동북면 화주(금야군)의 토호 출신으로 특기는 활쏘기 & 태조 왕건은 송악(개성)의 해상무역으로 부를 축적한 호족으로 특기는 해상전투로 전쟁을 할 때 궁예가 배를 100척을 만들라는 명령을 하는데 왕건은 사재를 털어 100척의 배를 만든 재력가로 <고려사 세가 태조 총서>에는 “(왕건이 만든) 큰 배 10척은 각각 사방이 16보로서 위에 망루를 세우고 말도 달릴 수 있는 정도였다.”
- 이성계 집안 배경은?
이성계 고조부는 원나라에 귀부해 동북면 토호로 성장하고 이성계 아버지는 원·명교체기에 원(元)이 쇠퇴하자 다시 고려로 귀부하여 원나라와 고려 두 나라 모두 관직을 지낸 집안 <조선왕조실록 태조 총서>에는 “이때 태조(이성계)는 휘하의 친병 2천 명을 거느리고 적을 크게 부수니···”
- 요즈음 흔히들 ‘금수저’ 얘기를 하는데 이들은 엄밀히 말하면 금수저는 아니고 은수저 정도이고 소위 금수저는 통일신라 말 진골귀족과 고려 말 권문세족들
- 신들린 무공(武功)의 소유자 이성계 <조선왕조실록 태조 총서>에 기록된 일화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신들린 무공의 얘기는 후손들의 과장한 표현일 것이라는 <이익주 교수의 분석>
- 지방출신이었던 두 태조 어떻게 권력을 잡았나?
통일신라 수도는 금성(경주)이고 왕건의 활동무대는 송악(개성)으로 국경 인근, 따라서 통일신라의 변방이었기 때문에 중앙에서 볼 때 송악은 존재감이 없었던 곳 & 이성계 또한 화주로 개경과는 그리 멀지 않으나 화주는 원나라의 쌍성총관부가 있었던 지역으로 조정의 힘이 미치지 않던 곳
- 이들은 중앙정치에서 소외될 수 있다는 변방의 단점으로 기득권 세력과 멀었기에 개혁에 자유로울 수 있었던 두 사람, 시각을 달리하면 변방은 중앙에서는 멀지만 해외에서는 가장 가까운 곳으로 국제정세를 가장 빨리 파악할 수 있는 곳
○ 화려한 등장, 나주와 황산
- <드라마 태조 왕건> 910년 후삼국, 수천의 병사를 이끌고 나주로 향한 궁예의 부하 왕건은 나주를 지키기 위해 후백제군인 견훤을 공격하고 나주 전투의 승리로 전쟁 영웅으로 부상하게 된다.
- <드라마 태조 이성계> 1380년 전라도 황산으로 침입한 대규모 왜구, 고려군보다 10배나 많은 왜구의 병력, 하지만 이성계는 화살로 적장 아지발도의 투구 끈을 맞추고 사살하여 황산대첩을 역사적 승리로 이끌게 된다.
- 나주전투가 태조 왕건에게 갖는 의미?
당시 왕건은 해군대장군(참모총장) 자격으로 전투에 나가는데 후삼국시대 2년간의 최대 해전(海戰)이었던 것으로 나주는 후백제의 주요 항구가 모여 있던 장소로 903년 왕건이 나주를 점령하면서 후백제에게는 일본과 중국의 교역로가 차단돼 버리자 910년 나주를 되찾기 위해 공격해 온 견훤이었지만 왕건의 활약으로 이를 지켜낸 것
- 나주전투 이후 궁예를 이은 이인자로 부상한 왕건, <고려사 태조 총서>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나주전투, 왕건은 이 지방의 민심과 협조를 구하기 위해 나주의 대표 호족인 다련군 오씨의 딸과 결혼을 하고 그 후계를 고려 2대왕 혜종으로 만들고 그 이후 나주는 고려 왕실의 어향(御鄕)이라는 칭호를 받게 되면서 전라도의 한 글자를 차지하게 되고 조선 팔도에서 가장 오래된 지명이 된다.
- 고려 말 왜구의 기세는?
당시 왜구가 타고 온 배만 500척으로 삼남지역 노략질에 수도 개경까지 노렸던 왜구를 상대로 황산전투에서 고려의 영웅이 된 이성계 <고려사절요 우왕 6년>에는 “마침내 (왜구를) 대파하니 시냇물은 모두 붉어져서 6~7일이 지나도록 색이 변하지 않아···”
- 황산전투 승리 후 이성계를 만난 당대 최고의 무장 최영 <고려사절요 우왕 6년> “최영이 태조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공이 아니면 누가 능히 그렇게 하였겠소’ 라고 하였다” 변방의 장수 이성계가 중앙정치무대에 등장하게 되는 순간이다.
- 승리 축하연에서 당대 최고의 문신 이색 <조선왕조실록 태조 총서> “이색이 시를 지어 치사하기를 ‘적의 용장 죽이기를 썩은 나무 꺾듯이 하니 삼한의 좋은 기상이 공에게 맡겨졌네.” 이것이 무신뿐만 아니라 문신들에게도 인정받는 계기가 되고 당시 우왕이 금 50냥을 하사하지만 이성계는 이를 사양한다.
○ 왕건과 이성계가 부상한 시대적 배경
- 왕건과 이성계가 급부상했던 시대 상황은?
<삼국사기 신라본기 헌덕왕13년> “봄에 백성들이 굶주려 자손을 팔아 생활하는 경우도 있었다.” & <고려사 우왕 9년> “전쟁이 쉬지 않고 계속되며 홍수와 가뭄이 서로 잇달았으므로··· 들판에는 굶어죽은 시체들이 있습니다.” 두 기록은 통일신라와 고려 말의 기록으로 500년을 사이에 두고 반복된 비참한 상황
- 그런데 통일신라의 경우 백성들은 이렇게 살기가 힘든데 왕위를 둘러싼 치열한 쟁탈전으로 155년 동안 20명의 왕이 출현하게 되는데 순조로운 왕위계승이 아니라 무력에 의한 찬탈로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성왕 3년> “(나라 안) 창고가 텅텅 비어 나라 재정이 궁핍하였다. 왕이 사신을 보내 독촉하니 곳곳에서 도적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 “도적이 봉기하였다. 군대를 보내 이를 토벌하였다.” 굶주림에 도적 떼가 된 백성을 무력으로 토벌한 것
- 오랫동안 지속된 권문세족의 부패와 권력 독점으로 고려 말 심각했던 권문세족의 토지 수탈 <고려사 열전 임견미> “염흥방의 노비가 전 밀직부사 조반이 백주에 소유하고 있던 토지를 빼앗았다.” 그래서 당시에도 ‘국지불국(國之不國)’이라는 ‘나라인데 나라가 아니다 = 이게 나라냐?’ 말이 등장한다.
- <고려사 우왕 14년> “권세가들이 자기 마음대로 겸병(兼倂)하여 좋은 토지와 비옥한 땅을 모두 자기의 소유로 만들어 높은 산과 큰 강을 경계로 삼고 있습니다.” 결국 유랑민이 되거나 권문세족의 노비로 전락한 백성들
- 이런 상황에서는 백성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리더가 필요했을 것으로 통일신라 말 호족이 등장하고 왕건은 개성의 호족, 고려 말 역시 백성들의 어려움을 목격한 이성계는 조정에 대책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하고 부하들에게는 “백성의 오이 한 개라도 빼앗아 먹지 말라!”는 지시를 내린다.
○ 동시대의 실력자들을 물리치고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비결
- 왕건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결정적 한 수는?
29명의 부인을 둔 왕건, 그 중 6명은 왕후이고 나머지 23명은 xx부인으로 부르며 유력한 호족의 딸과 정략결혼을 하며 혼인동맹을 통해 전국의 호족들과 연합하는 정책을 펼친다.
- 과연 왕건이 왕이 될 수 있었던 진짜 비결?
결혼정책을 포함해서 왕건이 평소 극진히 대우하는 환자가 있으니 후백제 견훤의 아버지 아자개는 918년 왕건에게 귀부한 상태, 중폐비사(重幣卑辭)는 후한 예물과 자신을 낮추는 말로 다른 호족들을 후하게 대우한 왕건에게 시간이 지날수록 유력한 호족들의 귀부 행렬, 마침내 935년 5월 자신의 최대 적이었던 후백제의 견훤마저 귀부를 하게 되고 이 소식을 들은 경순왕마저 935년 11월에 왕건에게 귀부해 오면서 후삼국 통일을 눈앞에 둔다.
- 호족이 누구와 손을 잡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통일신라말의 정세, 스스로가 호족이었던 왕건은 호족들의 마음을 잘 읽었을 것이고 호족들의 지배권을 일정부분 인정해주며 이를 대가로 호족들의 충성심을 이끌어 낸 것이 결정적이라는 <이익주 교수의 분석>
- 견훤 · 궁예는 왜 실패했나?
강력한 전제왕권으로 일방적인 복종을 강요했던 견훤과 궁예, 오히려 호족들의 반발심을 불러 왔을 듯 하고 권력에 취해 폭군으로 된 궁예는 처자식을 죽이게 되고 <고려사 세가 태조 총서> “궁예는 산골짜기에 숨어 이틀 밤을 묵다가 굶주림이 심해지자 보리이삭을 몰래 잘라먹다가 부양백성에게 해를 입었다” & 견훤 같은 경우에는 왕건에게 귀부를 한다.
- 이러한 상황은 현실에도 있는 일로 <이익주 교수의 생각>은 권력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되고 권력은 무언가를 하기 위한 수단이어야 한다는 것, 그렇다면 정치인들에게 권력을 잡고 무엇을 할 것인지 국민들이 끊임없이 물어야 하는 것, 그렇게 된다면 정치인들도 변화할 것이고 우리사회도 조금씩 달라질 것
○ 이성계와 신흥사대부의 만남
- <드라마 정도전> 1383년, 이성계의 부대를 찾은 사람이 있었으니··· 떠오르는 실력자 이성계와 위대한 사상가 정도전의 만남 “훌륭합니다, 이 군대로 무슨 일인들 못하겠습니까?” VS "무슨 말이오?“ VS "동남방에서 왜구를 격퇴시킬 수 있다는 말이오” 서로에게 도움이 될 만한 인물인지의 탐색전을 펼친 두 사람
- 우리는 결과를 알기 때문에 정도전이 이성계에게 새 나라를 만들자는 말을 돌려서 한 것으로 생각하는데 이 시점에서 두 사람의 의기투합은 새로운 왕조 개창을 위한 것보다는 이성계의 힘을 이용해 정변을 일으켜 개혁에 나서고자 했을 듯하다는 <이익주 교수의 분석>
- 이성계를 찾아간 정도전의 목적은?
당시의 신흥사대부는 학자를 뜻하는 사(士)와 관료를 뜻하는 대부(大夫)를 합친 말로 즉 관료이면서 학자인 새로운 사람들로 이들은 능력과 개혁의지를 두루 갖춘 인물들, 신흥사대부들은 고려 말 권문세족에 밀려 잡을 수 없었던 개혁의 기회, <장지연 교수의 분석>은 신흥사대부에게 이성계는 자신들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꼭 필요한 존재였을 것이라는 것
- 이성계는 글을 읽지 못했다?
글을 못 읽을 정도는 아닌 것 같고 학문적인 조예는 깊지 않았던 이성계, 이성계를 위한 헌사 <조선왕조실록 태조 총서> 그 어디에도 이성계가 학문을 했다는 말은 등장하지 않고 학문에 관련된 서술은 딱 두 번 등장하는데 “유학자들을 만나 경사(經史)를 토론하였으며···” & “일찍이 가문에서 유학(儒學)을 업으로 삼는 사람이 없음을 불만히 여겨 전하(이방원)로 하여금 스승에게 나아가서 학문을 배우게 하니···”
- <장지연 교수의 분석>은 이성계는 신흥사대부들과 나이 차이가 많이 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생각을 받아들인 것을 보면 포용력이 남달랐을 것이라는 것과 <이익주 교수의 분석>은 이성계는 완벽하지 않은 사람이었지만 다른 사람을 통해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려 했던 리더였다는 것, 이성계와 마찬가지로 훌륭한 무장이었지만 신흥사대부들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던 최영을 보면 결국 신흥사대부와의 관계는 최영과 이성계의 운명을 결정짓는 큰 차이였을 듯
○ 이성계, 신흥사대부와 개혁에 돌입하다
- <고려 뉴스> 고려조정의 농민들을 위한 대대적인 이벤트, 1390년 개경의 시가지에는 토지대장을 모두 수거한 관리들이 백성들 앞에서 토지대장을 불태우는데 조정에서는 불법적인 사전(私田)을 폐지하고 새로운 토지제도를 시행하려는 것
- 기존 토지제도의 문제점은?
농민들이 부담하는 세금은 수확량의 1/10을 현직관리가 가져가는 수조권이 있는데 원칙적으로 수조권이 없는 전직관리에게도 1/10, 이게 끝이 아니고 전전직관리가 사망한 경우 그의 부인이 수조권을 주장하여 다시 1/10로 세습되어온 수조권, 게다가 조상대대로 세습된 토지라고 우기는 권문세족들이 1/10, 이처럼 사전(私田)은 불법적으로 수조권이 세습되는 토지를 현직관리에게만 1/10을 납부하도록 하려는 것
- 토지개혁에 따른 여론은?
<조선왕조실록 태조 총서> “사전을 혁파하여 겸병을 막고 백성을 후하게 하니 조정과 민간에서 크게 기뻐하고 민심이 더욱 따르게 되었다.” & “구가세족(舊家世族)들은 사전(私田)을 혁파한 것을 원망하고 있었으므로···”
- 공양왕의 반응은?
<고려사 공양왕 2년> “공양왕이 탄식하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사전(私田)의 법이 과인의 대에 이르러 갑자기 없어졌으니 애석하도다.”
- 거센 반발 속에서도 이성계가 토지제도 개혁을 시작한 이유는?
사실 토지문제는 고려시대 내내 지속되어온 구조적인 문제로 이성계가 추대한 공양왕마저 이성계의 개혁에 제동을 걸었던 것, 결국 이것이 고려를 멸망하게 되는 하나의 원인이 되기도 하지만 사전혁파 후 안정된 민생
- <이익주 교수의 분석>은 이 문제는 관행과 불법의 문제로 불법임이 분명한데 100년 넘게 관행으로 이뤄지고 있었다는 것으로 수조권을 주장하는 이들은 그것이 불법인줄 조차 몰랐다는 것으로 이는 개혁이 아니면 고칠 수 없는 문제로 사전혁파는 고려사회의 구조적 문제 해결을 위한 최선의 개혁이라는 역사적 평가를 하게 되는 것
- 고려도 조선도 가장 먼저 실시한 민생안정 정책, 왕건의 시대와 이성계의 시대는 놀랄 만큼 닮아있지만 본질은 다른데 고려 건국 세력 호족들이 한 일을 조선건국세력인 신흥사대부들이 하는데 신흥사대부들이 비약적으로 많은 숫자인 것을 보면 ‘역사는 점진적으로 발전한다.’는 틀 이해할 수 있어야 된다는 것
- 1392년 7월 17일 조선이 개국하는데 신하들의 추대로 왕이 된 이성계 <조선왕조실록 태조 즉위교서> “신하들이 말하기를 백성의 마음이 이와 같으니 하늘의 뜻도 알 수 있습니다. 여러 사람의 요청도 거절할 수가 없으며 하늘의 뜻도 거스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민심과 천심을 근거로 왕조 개창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으로 조선의 통치이념, 민본주의는 민심을 근본으로 하는 정치사상으로 국가는 왕의 것이 아니라 민심이 만드는 것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 이는 민심이 떠나면 왕도 교체될 수 있다는 것으로 조선시대 두 번의 반정인 중종반정과 인조반정, 그래서인지 조선시대에 무능한 왕은 있어도 정말 나쁜 왕은 없지 않았나?
- 여기에서 민(民)은 헌법 제1조의 국민과 좀 다른 면이 있는데 헌법의 ‘국민’은 국가의 주체자인 주인이지만 조선시대 ‘민’은 통치의 대상으로 아직은 민(民)이 국가의 주인, 역사의 주체 이전(以前) 상태에서 국왕과 지배층이 민(民)에 대해서 가질 수 있는 최고 수준의 통치철학이 조선시대의 민본(民本)과 위민(爲民) 사상이라고 할 수 있는 것
- 역사는 반복되는 자정과정으로 망해가는 나라를 바로잡으려는 의지가 왕건과 이성계에게 투영되어 새로운 나라를 탄생시킨 것 & 리더는 현재의 산적한 문제만을 푸는 사람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풀어가는 과정에서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 사람 & 왕조의 탄생은 단순한 권력의 이동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정신이 탄생하고 이를 실천할 주체가 성장하는 것
“군주는 국가에 의존하고 국가는 민에 의존한다, 그러므로 민은 국가의 근본이며 군주의 하늘이다” <조선경국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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