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Justice) / 김형철 교수(연세대 철학과)
Q. 요즘 우리 사회에서 가장 화두인 단어는?
정의, 정의가 살아있는 사회 그런 사회를 만들고 싶은 것, 그런데 일반적으로 정의는 차가운 것으로 사람 사이에서의 따뜻한 정과는 달리 정의는 차가운 것
정의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먼저 부정의가 무엇인지 생각해보면 많은 힌트를 얻을 수 있는 것으로 한국인의 고유 정서 한(恨), 한이 맺혔다 = 억울한 일을 당했다는 뜻으로 부정의를 당하고도 당했다고 말할 수 없고 어디 가서 풀어달라고 얘기할 수 없을 때 한(恨)이 맺히는 것이고 화병이 나는 것이다.
“사회의 제1덕목이 정의인 것은 학문의 제1덕목이 진리인 것과 같다” -존 롤즈-
왜 정의가 중요하느냐는 정의가 무너지면 사회가 무너지기 때문으로 누가 피땀 흘려 열심히 일하려 할까? 남이 가꿔놓은 것을 빼앗으면 되지···
그래서 정의는 약자에 대한 보호를 넘어 모든 사람이 꿈과 희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도록 안정된 체계를 만들어 주는 것이다.
플라톤이 생각하는 정의는 “각자 제몫을 가져가는 것이 정의다” 그러면 오케스트라 단원 모두는 같은 대우를 받을까? 하는 문제에 봉착하게 되어 “자격이 같은 사람은 같게 대우하고 자격이 다른 사람은 다르게 대우하라” -아리스토텔레스-
오케스트라 단원 모두 같은 대우를 받는 것이 정의로운 것인지 다른 대우를 받는 것이 정의로운 것인지?
그래서 정의는 원칙의 문제가 아니라 원칙을 어떻게 적용하느냐의 문제로 그 판단을 해주는 지혜로운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이 플라톤의 정치이론이고 지혜로운 철학자에 의한 통치를 주장한다.
플라톤이 생각하는 국가는 지도자(철인) · 전사 · 노동자의 세 계급으로 나누고 각 계층이 가져야 할 덕목으로 지혜 · 용기 · 절제로 각 계층이 이러한 덕목을 가질 때 국가는 정의를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정의는 각 개인이 양심과 이성에 따라 내리는 판단, 이것이 무엇이냐가 핵심으로 우리 사회 곳곳에 존재하는 내부 고발자 · 의사자 등의 영웅들이 많지만 사회에서 그들이 받는 대접은 결코 순탄치 않은 현실이다.
정의 탐구 사례1) 1999년 미국의 월마트에서 일어난 사건
고객의 사진 현상을 맡은 마트 직원, 인화 후 발견한 충격적인 모습의 사진은 어린 아이가 쓰러져 있고 아편과 술병이 즐비, 직원은 아동 학대를 직감하고 경찰에 신고하여 아이는 극적으로 구조되고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일약 영웅으로 떠오른 마트 직원, 하지만 직원은 직장에서 해고를 당하는데 사유는 범죄 의심되는 사진을 발견했을 경우 사내 사진 판독 전문가와 상의 후 처리하라는 사내 규정을 어겼기 때문으로 직원은 부당해고 무효소송을 제출했는데 법원은 누구의 손을 들어줬을까? 법원은 해고는 정당하다고 회사의 손을 들어주는데 이러한 법원의 판단은 정의로운가? 판사는 법규에 따라 판결을 내려야 하고 주관적인 판단으로 판결을 내린다면 판사가 아니라 입법자가 되는 것
Q. 마트의 영웅 사례를 통해 우리가 느끼는 것은?
실질적인 정의로 어린 아이의 생명을 구했다 VS 절차적인 사내 규정을 지키지 않았다. 이 양자의 충돌 속에서 무엇이 과연 정의로운 것인가?
초점은 절차상의 문제가 중요하냐? 결과가 더 중요하냐? 로 이것이 계속되는 정의의 핵심은 어디에 있는가? 이다
정의 탐구 사례2) 위독한 네 살 아이를 태우고 가던 구급차
어린 아이의 생명이 촌각에 달린 위급한 상태, 전 속력을 다해 병원으로 향하던 구급차 운전자는 급정거한 자동차를 추돌하고 차에서 내려 피해차량 운전자에게 위급 사실을 알리고 양해를 구했지만 길을 비켜주지 않는 피해차량 운전자, 결국 피해 차량을 직접 옮기고 병원으로 달려가고 조금만 늦었어도 아이의 목숨이 위험했을 상황에서 어린아이의 생명을 구했는데 구급차 운전자는 어떻게 됐을까? 구급차 운전자의 결말은 운전면허정지처분으로 자진 퇴사를 한다.
이 사례에서 누가 가장 정의롭지 못한 사람인가? 구급차 운전자 · 피해차량 운전자 · 면허 정지시킨 경찰관?
정의의 문제는 항상 양편이 존재하는 것으로 가해자 VS 피해자 또는 수익자 VS 수해자가 있는 것으로 중세시대 카톨릭의 성인이 되기 위해서는 악마의 시험을 통과해야 하는데 신학자에게 성인 후보자를 검증할 수 있는 악마의 역할을 부여한다. 이것을 데블스 에드버킷(악마의 변호인)이라 하는데 의도적으로 반대 입장을 취하여 선의의 비판자 역할을 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정의 탐구 사례3) 달리는 기관차의 딜레마
철로 앞에서 움직이지 못하는 열 명의 인부, 달리는 열차의 핸들을 꺾으려 하니 그 쪽에도 한 명의 인부가 일을 하고 있다. 이 경우 가던 방향대로 열 명이 죽도록 내버려 둘 것인가 VS 방향을 틀어 한 명을 죽일 것인가?
문제의 핵심은 내가 누군가를 죽이고 살릴 권한이 있는가? 이다. 직진한다. = 생사를 결정할 권한이 없다, 이고 방향을 튼다 = 생사를 결정할 권한이 있다.
여기에서 문제는 기관차 사례에서 문제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면 비현실적이지 않는 것이 내가 선택하여 죽이는 것과 죽도록 내버려 두는 것, 이 두 가지 선택과정에 차이가 있다고 주장하면 의무론자이고 대표적인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가 그런 입장을 취한다.
반면 1명이냐? VS 10명이냐의 결과가 중요하다는 것이 결과주의자로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 모든 도덕과 입법의 원리가 되어야 한다.” -제레미 벤담-
최대 다수에게 최대 행복을 주장하는 영국의 공리주의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 · 제레미 벤담 등으로 핸들을 틀겠다는 사람들은 공리주의 입장이고 그냥 가겠다는 사람들은 칸트주의 입장으로 어느 쪽이 정의인지는 각자 개인이 판단해야 할 일이다.
그런데 판단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왜 그런 결정을 했는지 판단의 이유가 중요한 것으로 다수의 행복을 주장하는 공리주의자 VS 소수의 권리를 주장하는 의무론자, 이 둘은 끊임없이 충돌하고 있는 문제이다.
정의 탐구 사례4) 수퍼바이러스의 출현
수퍼바이러스의 출현으로 2천만 명이 사망한 상황에서 긴급하게 백신이 도착하는데 그 백신으로는 한 사람만 구할 수 있는 상황에서 누구를 살릴 것인가? 대통령 · 과학자 · 재벌2세 · 의사 · 월드스타 등, 그런데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상태로 선택한 것이 가장 객관적인 판단이라는 것으로 평생 정의를 연구한 미국의 철학자 존 롤즈는 정의로운 합의를 위해서는 우선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몰라야 한다고 주장한다. “무지의 장막 뒤에 들어가야 한다.” 는 자기의 출신지역 · 성별 · 인종 · 국적을 몰라야 한다는 것으로 결정권자가 자신을 잊은 때 정의로운 사고가 가능하다는 것
※ 존 롤즈의 ‘무지의 장막’ : 사람들이 자신의 능력 · 재산 · 신분 등을 알 수 없는 상태에서 내리는 결정이 가장 공정할 것이라는 이론
문제의 핵심은 사람의 목숨에 값을 매길 수 있느냐? 누구의 삶이 중요하느냐의 가치 판단을 할 수 있느냐? 현실에서 보험회사는 생명의 가치를 보험료로 산정하고 나이와 직업에 따라 사망보험금을 다르게 산정하기는 하지만 문제는 그 보상금이 그 사람의 삶의 가치를 정확하게 측정했느냐? 더 나아가서 사람의 몸값을 측정할 수 있느냐? 지금까지의 사례들은 측정하기 어려운 가치를 이성으로 판단하라고 요구했기에 그 토록 고민할 수밖에 없었던 것
어떤 방식으로 어떤 사람에게 한정된 자원을 분배하는 것이 정의인가는 결코 쉽지 않겠지만 우리는 합의를 해야만 한다. 그리고 합의를 이루는 과정이 공정했다면 그 합의에 따라야만 한다.
Q. 미래의 한국 사회, 정의를 세울 수 있는 방법?
결과에 승복하는 것, 진 사람이 승복하지 않으면 그 게임은 끝난 게 아니다 “절차가 공정했다면 결과에 승복하라” 이것이 정의의 철칙이다.
정의, 그 자체는 차가운 것이기에 따뜻한 마음으로 접근해야 하고 정답이 없다고 해서 좋은 답과 나쁜 답도 없다는 것은 아니다.
좋은 답은 그 목표와 가치를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할 때이고 나쁜 답은 말과 행동이 다를 때이다, 따라서 자신만의 좋은 답을 찾은 뒤 답을 다른 사람들과 이성적으로 대화하고 설득해야 하며 더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들의 합리적인 제안에 설득될 수 있어야 한다. “설득되는 것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 입장을 바꾸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에 나는 항상 옳은가? 이 질문은 정의를 지키려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꼭 물어야 할 질문이다.
김교수의 생각은 개인에게 영웅이 되라고 요구하는 사회는 정의롭지 못한 사회로 정의사회를 만드는 방법에 대한 두 가지 관점은 개인의 희생 · 용기 · 배려를 통해 정의사회를 구현한다는 시각의 축과 사회제도가 우선 돼야 한다는 축으로 개인의 영웅적 행동만으로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개인 VS 제도, 무엇이 정의의 핵심인지 판단으로 많은 사람들이 “정의는 현실에서 실현될 수 없고 유토피아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정의에 대한 관심을 접어둬야 할까?
북극성은 직접 가볼 수는 없지만 정북방향을 알려주는 별로 그 역할을 다하고 있는 것처럼 정의도 북극성과 같다, 정의가 100% 실현되지 않는 세상,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정의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정의가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너무 멀리 보이는 정의로운 사회, 정의를 찾는 수많은 질문들이 우리가 나아갈 길을 밝혀줄 것이지만 모든 문제의 결론은 없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답이 뭘까? 이것을 찾아가야 하는 것이고 정의는 분명히 살아있어야 한다.
Q. 정의는 살아있나?
“인생이란 결코 공평하지 않다, 이 사실에 익숙해져라” -빌 게이츠-
어떤 사람들은 정의는 현실에서 절대 실현될 수 없다고 말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정의는 현실에서 실현 가능하다고 얘기를 하는데 오늘날 대한민국의 정의는 살아있나?
정의가 살아있는지를 판단하려면 부정의를 느낀 경험이 있는지 돌아봐야 한다. 우리가 ‘부정의 하다’를 생각할 때는 보통 공분을 느낄 때이다.
불문율로써 정해진 규칙을 버젓이 위반할 때,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말 한마디 못했을 때 등으로 억울한 일을 당하고 어딘가에 호소할 수 있고 해결방안을 찾을 수 있으면 다행이지만 호소하지도 못하고 해결방안도 없을 때 불공정하다고 생각해 한이 맺히는 것
불공정하다 = 분배가 정의롭지 못하다, 정의롭지 못한 분배란?
기회의 불공정 · 이익의 불공정 · 절차의 불공정 등으로 우리사회에서 쉽게 실현되지 않는 분배의 정의는 일반인은 물론 수많은 철학자들도 고민해왔다. “어떻게 해야 사회자원을 공정하게 배분할 수 있을까?”의 문제를 고민해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격이 같은 사람은 같이 대우해주고 다른 사람은 다르게 대우하라“ 이것이 정의로운 것이라고 얘기한다.
그렇다면 부잣집 아이와 가난한 집 아이를 자격별로 대우한다면 이는 차별을 조장하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분배의 정의는 어떤 관점에서 그 자격을 다룰지가 중요하다.
사례를 들어보면 대학응시 시험장에 주어진 10분의 휴식 시간에 일어난 일로 텅 빈 남자화장실인 반면 줄을 길게 늘어선 여자화장실, 이는 남녀 화장실 이용에서 생기는 불평등의 문제이다.
무엇이 정의로운가는 화장실 칸 숫자의 평등 VS 화장실 접근시간의 평등이 정의로운가? 만약 ‘변기 접근 시간의 평등’이 중요하다면 여자 화장실 숫자를 늘리는 것이 정의로 관점을 잘못짚으면 엄청난 부정의가 발생한다.
어떤 관점으로 분배문제를 볼 것인가? 이것이 아리스토텔레스가 강조한 관점의 문제이다.
여기에 자르지 않은 한 판의 피자가 있다. 열 명이 모두 배가 고픈 상태에서 열 명이 가장 공정하게 나눠먹는 방법은?
완전 절차적 정의는 공정한 분배에 대한 독립적인 기준이 있고 바람직한 결과를 낳을 수 있는 절차가 있는 것이다.
공정한 피자 나누기는 자른 사람이 가장 마지막에 선택하기라는 절차를 두면 된다, 이유는 공정하게 나눠야 자기가 가지는 마지막 한 조각까지 평등하게 자를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은 분배를 하기 위해 피자 선택의 규칙을 정하는데 ① 눈을 가리고 ② 무작위로 나누기이다.
이 과정은 하버드대 철학교수 존 롤즈가 주장한 완전 절차적 정의에 따라서 ‘무지의 장막’ 뒤에서 결정하는 것이 가장 정의로운 결정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무지의 장막은 자신이 먹게 될 조각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나누는 것으로 나누는 사람에게 무지의 장막을 만들고 분배결정권자가 본인은 물론 누가 무엇을 가져야할 지 알 수 없는 상태여야 한다.
무지의 장막을 주장한 존 롤즈는 정의의 두 원칙을 발표한다. 정의의 제1원칙은 정치적 자유와 평등으로 정치적 자유란?
언론 · 출판 · 집회 · 결사의 자유로 모든 사람의 언론과 사상 · 종교 · 신체의 자유 등 기본적인 자유와 평등에 대한 권리가 구성원 모두가 평등하게 가지도록 보장되어야 한다.
정의의 제2원칙은 차등의 원칙으로 “불평등한 모든 사람, 특히 사회적 약자에게 더 이익이 주어지는 경우에만 해당한다.” 사회적 약자가 평등할 때보다 더 나아지는 불평등은 정의롭다.
예컨대 어떤 사회에서 분배가 3 · 3 · 3 과 6 · 5 · 4로 분배되는데 후자는 불평등이지만 후자에서 최고의 수혜자는 4로 평등한 분배 3보다는 낫고 더 정의롭다는 것으로 이것이 롤즈의 차등의 원칙이다.
여기에서 또 하나의 조건은 최대 이익 6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모두에게 똑같이 주어져야 한다는 것으로 롤즈의 정의로운 사회를 위한 두 가지 조건이다.
“모든 시민에게 동등한 기본적 대우를···” & “사회적 약자에게 더 이익이 되게 하며 기회가 평등하게 주어져야 한다.”
정의 탐구 세례2) 성적 장학금 폐지, 정의로운가?
한 대학에서는 장학금 전액을 성적이 우수한 학생에게 주는 게 아니라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에게 지급하기로 결정하였다, 과연 정의로운가?
존 롤즈가 주장하는 정의의 두 원칙 중 ‘기회의 평등’의 대표적인 것이 바로 교육기회의 평등이다.
그래서 공교육이 중요하고 국가가 국민의 교육을 책임져야 한다. 그런데 이 사례가 가지고 있는 특이점 하나가 대학교육도 과연 의무교육이어야 되느냐? 아니라는 것으로 그런 특이한 상황이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성적장학금에 대한 토론이 시작되고 설득하며 설득당하기도 하는데···)
정의로운 사회가 되려면 토론을 통해 설득당할 줄 알아야 한다.
“누구든지 설득시킬 수 있어야 한다” VS "언제든 설득달할 수 있어야 한다“ 누가 더 소통능력자인가?
이 사례에서 우리가 분명히 생각해야 할 것은 장학금의 목적이 교육효과 극대화를 위한 보상이냐? VS 어려운 학생을 도와주는 것이냐? 어떤 목적을 선택할 것인지가 중요하고 둘 중 하나를 선택하기에는 어려운 문제이다.
그래서 분배의 정의 편을 정리해 보면 우리는 같이 모여서 살 수밖에 없다. 더구나 아주 옛날 똑같이 못살던 시절에는 괜찮았는데 70년대부터 고속성장 해 온 한국사회는 급격히 발생한 빈부격차로 우리 사회의 갈등이 더욱 심화된다.
그래서 남과 나를 비교하는 것은 개인건강에는 해롭겠지만 사회제도 차원에서 갈등을 무시하면 함께 살아가는 데 문제가 될 수 있으므로 문제 삼아야 한다. 그리고 문제의 해결책을 찾기 위해 사회적 합의를 이뤄내야 하는 것이 공동체 사회를 이루기 위해 꼭 필요한 정의이다.
김 교수의 생각은 정의로운 사회는 지도자를 잘 만나야 한다는 것으로 지도자를 잘 만나느냐에 따라 사회 정의에 큰 영향을 미치는지를 우리는 직접 목격했다.
그런데 정의로운 지도자를 선출하는 사람은 국민이기 때문에 이제는 우리 국민들도 정의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정의로운 지도자가 나올 수 있도록 다 같이 노력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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